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음란 서생』과 대중적 출판문화의 탄생

  • 등록일
    2007/06/25 01:04
  • 수정일
    2007/06/25 01:04

영화 『음란 서생』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장안의 최고 문제작이라고 보면 된다니까!”

 

이 대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장안이라고 한정된 지점과, 이 말을 행하는 주체가 저작가 아니라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뭐 상인라는 점이다. 

이 영화를 음란한 코미디쯤으로 보아도 상관은 없지만, 미디어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메스미디어가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 활자미디어 유통과정에 대한 재밌고 그럴듯한 해석에 찬사를 보내마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미디어의 전파과정은 배껴쓰기에 상당부분 의존했다. 주류 사회에서도 주요 경전들의 전파 경로는 손에 의한 필사본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슨무슨체등 명필이 주목받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런 필사본에 의한 미디어의 전파과정은 주류사회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저속한 내용물이 대부분이었을테지만,  여기에서 재밌는 사실은 저속한 그렇고 그런 내용이 필사본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구조 때문에 특수한 유통시스템이 만들어지는데, 다량으로 복사하기 위해 오늘날처럼 메스미디어 시스템보다 수가공업적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길드식 출판/유통 시스템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컨텐츠가 은근히 많았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하면, 돈을 내고 구매해야 하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보다 확실한 컨텐츠를 구매하고자 하기때문에 어떤 길드에서 유통하는 것이냐가 독자가 필사본을 선택할 때 주요 판단근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필사본의 유통이라는 특성상 최초의 작가의 역량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보다는 최초 어떤 길드에서 선택되어 1차 가공되는 과정이 있을 것이고, 또 여러 지방에 유통되면서 제3의 길드,제 4의 길드를 통해 재 가공되므로써 일종의 집단 창작으로 전화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최종 소비자인 독자가 해당 미디어를 구매할 때는 저자보다는 그 출판물을 유통하는 길드(오늘날의 출판사)의 평판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출판사의 초기 형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 당시 조선사회가 그랬을지 아니었을지는 모른다. 그거야 학자들이 밝혀내야할 몫이고

단지 이것이 그럴듯하다는 나의 주장은 서구 미디어학자들이 출판물의 역사를 이야기할때 오늘날 출판 문화의 초창기 모델인 근대 길드식 출판/유통 시스템에 대한 해석을 이 영화에 빗댄것 뿐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의 상당 부분이 이런 서구미디어학자의 주장들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서구 미디어학자들에 따르면 초기 출판시장은 저자의 개념은 거의 없었고, 쓰레기들 중에 독자들이 컨텐츠를 선택하는 기준이 책을 유통하는 길드의 평판을 주요한 기준을 삼았다는 점이고, 이는 오늘날 인터넷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온라인 컨텐츠 중에서 어떤 컨텐츠를 신뢰할 것인가는 개개인들이 웹서핑을 할때 중요한 판단기준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최초 저자가 누구인지는 그때와 다르게 중요하지만,

온라인 상의 글이 실제 그 저자의 글인지의 판독 여부도 만만치 않다.

이 때 등장하는것이 신뢰이고, 그 신뢰는 해당 사이트는 신뢰도 즉 평판에 크게 좌우된다.

 

가까이는 연예인의 가쉽에 대한 정보부터, 미국 이라크전에 대한 음모론까지. 이는 모든 컨텐츠에 있어 유통하는 미디어 즉 플랫폼의 신뢰도나 평판에 크게 좌우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유투부에서 팬타곤기지 여객기 추락사건에 대한 음모에 대한 동영상을 봤다고 가정해보자.

설사 그것이 그럴듯 하다 하더라도, 이건 상호 믿거나 말거나 소문에 그칠 가능성이 많지만,

그것이 공중파 특히 KBS 스패셜이나 MBC PD수첩등에서 다루어지거나 인용되는 순간 그 동영상의 신뢰도는 무한 상승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이  미디어의 중요한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의 유수한 언론사와 공중파 방송국들이 등장하고 성장함에 있어 이런 신뢰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지만 따로 인용하지는 않겠다.

단지 예를 든다면, 왜 조선일보 등등의 유수한 언론매체에서 일반 평기자보다 편집진이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는지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독자는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아니라, 그 기사가 조선일보(예를 들어)라는 편집시스템(앞에서 말한 플랫폼)이라는 필터를 거쳤기 때문에 신뢰하거나 또는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미디어에 새로운 시각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출판에서 출판사의 무한권력에서 작가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방송사나 언론사에서 기자가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른바 주체라는 근대적 개념이 매스미디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언론을 평가함에 있어 이런 취재기자의 전문성이나 언론사의 취재역량을 주요 잣대로 삼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론 즉 포괄적으로 미디어란 이런 전문적인 취재영역 못지않게 미디어의 평판 시스템에 근거한 유통에 있어서의 영향력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장황하게 이런저런 말을 주절거렸는데.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우리는 두가지 문제에 대해 단서를 제공받는데.

첫째는 대안 미디어라는 것. 그런 운동이 단순히 활동가나 기자들이 저들과는 다른 컨텐츠 또는 다른 시각의 컨텐츠를 만들 것인가라는 일차적인 문제의식 외에도, 대중들로부터 어떤 평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가 주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

둘째는 네이버의 뉴스섹션이나 미디어다음처럼 실제 컨텐츠는 생산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 언론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주장이나 문제제기가 가능한데.

첫번째 주제, 그렇다면 대안 미디어는 어떤 편집시스템이 필요하며, 편집권력과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들과 권력관계는 어떠한 모델이어야 하는가라는 골치아픈 물음을 던지게 되는데,

기자의 독립이 과연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가에 대해 진부한 질문을 다시 던질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는 예를 들면 참세상에 기고하는 행위와 조선일보에 동시에 기고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란 질문도 가능하다. 즉 그것은 단순히 나의 주장을 여러 매체를 매개한다는 생각 이전에, 자신의 주장이 어떤 평판에 기대어 있는가에 대한 추가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번째 주제. 즉 포털에 대한 입장이다, 포털의 뉴스섹션은 당연히 언론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들이 행사하는 편집 행위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기존 언론과 다른 권력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단지 전기통신사업자로서의 자율성만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네이버등의 주요 독과점 포탈들은 단순한 전기통신사업자로서가 아니라 주요언론사로서 사회적/법적 지위가 부여되어야 하며,

이에 따른 모든 사회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과연 그런가? 그게 요새 내 중요한 관심분야다. 궁금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