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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메모리즈 - 비극적인 기억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남긴 몇가지 화제거리중에 하나는, '제페니메이션' ( 이하 - 아니메 ) 이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어둠의경로' 라고 하면 자막이 존재하는 동영상 파일이 아니라 자막없는 원어 그대로의 해적판 비디오물을 가르키는 시기로, 그러면서도 일본문화, 특히 일본만화에 대한 소개가 상당부분 진척되어 많은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대다수의 매니아들이 뜻도 모르는 일본어 대사를 들으며 그 해적판 비디오들을 애지중지 소장하던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짐승도 예외는 아니었구요 ^^;


그러던 시기였기 때문에, 국제영화제에서 아니메가 정식으로 상영된다는것은 충분히 센세이션 한것이 될 수 밖에 없었죠. 게다가 상영작들은 상당히 높은 퀄리티를 갖춘 따끈따끈한 화제작들, 바로 공각기동대와 이 메모리즈 였었으니, 국제영화제 참가자들 사이에 아니메가 예매 1 순위가 되었던것도 당연하다고 할까요.


그랬던것에 비하면 공각기동대가 꾸준히 재평가되며 지금까지 화제거리로 이어온것에 비해 메모리즈는 다소 그늘에 가린 느낌입니다.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공각기동대는 스토리 자체가 난해하고,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보다 더 심오해서 많은 화두거리를 남기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메모리즈 역시, 스토리는 단순 명쾌할지 몰라도 메시지 측면에서는 결코 공각기동대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메모리즈는 '노인 Z' 로 유명한 오토모 카즈히로 감독의 원작 스토리들을 바탕으로 오토모 자신을 포함한 세명의 감독이 각각의 스토리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연결해둔 작품입니다. 보통 이럴경우 하나의 공통적인 대주제가 이들 작품들을 엮어내는데 메모리즈는 딱히 엮어낼만한 대주제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SF 호러에, 블랙코미디에, 환타지까지 쟝르도 다 제각각이죠. 최근에 메모리즈를 다시 보면서 이들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대주제를 굳이 선정한다면, '비극'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첫번째 에피소드, Magnetic Rose (그녀의 추억) 은 오토모의 원작에 모리모토 코지가 감독을 맡은 작품입니다. 우주의 폐기물들을 청소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들은 낡은 구형 우주선에서 나오는 sos 신호를 따라 들어가게 되지만 그들이 발견하는것은 한 오페라 가수의 원혼, 아니 강력한 집착이지요. 애인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배신으로 인한 분노가 전자장치를 통해 살아남아 우주선 자체를 통제합니다. 호러영화의 소재중 하나가 '유령의 집' 이라면, 그녀의 추억은 그 우주판 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음산하고 기괴한 작품이죠.


보통 이런 경우는 주인공들이 기지로 유령을 퇴치하고 탈출하는것이 정석입니다만, 여기에서는 우주선의 폭발과 함께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한 오페라 가수의 편집증적인 관념이 살아있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어 버리는 암울한 스토리죠 ^^; 작품 중반부터 끝까지 어떤 오페라곡이 계속 나오는데,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 짐승으로서는 무슨 곡인지 알수가 없다는... -,-


'그녀의 추억' 이 너무 암울해서 기분이 쳐질까봐 그랬는지 모르지만, 두번째 에피소드인 채취병기 는 꽤 경쾌한 이야깁니다. 역시 오토모 원작에 오카무라 텐사이 감독이구요. 여기에서는 한 제약회사의 평범한 연구원이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정부가 개발한 비밀병기 - 악취를 이용한 화학무기 ^^ - 를 복용하게 되고 그로인해 일본 열도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는 스토립니다. 정치가, 군인 등의 권력집단들에 대한 통쾌한 풍자극이면서 동시에 '장사가 되는것' 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대는 언론의 속성을 폭로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직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라면, 주인공인 타나까 노부오가 악취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오토바이를 몰고 터널을 지나자마자 그를 죽이기위해 상공에 새까맣게 떠있는 공격 헬기들의 군집이죠. 아니메에서 이만큼 군대와 자본에 의지하는 권력의 속성을 통렬하게 묘사한 장면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작품도 마지막엔 잡았다고 생각한 노부오가, 권력의 중심부에서 악취를 터트림으로서 비극 (아니, 희극인가요? ^^) 로 끝나죠. 일본열도는 살인적인 악취의 구름속에...


'채취병기' 를 보고 실컷 웃으셨겠지만 마지막을 장식하는것은 또 암울한 스토리로, 대포의 거리 는 오토모 자신이 직접 감독한 작품입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일상이 보이지도 않는 적과의 싸움에 맞춰져 있습니다. 거리의 집집마다 지붕에는 크고 작은 대포들이 배치되어 있고, 아이들은 대포를 쏘는 포병이 되기 위해 학교를 다니며, 아빠는 포를 쏘러 나가야하며 엄마들은 대포와 포탄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포병들은 대포 발사를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그 외의 다른 일은 생각할수조차 없습니다.


아마 이만큼 우울한 스토리도 없을겁니다. 이곳에서는 사회운동 단체들 조차도 사람들이 대포의 부속품이 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좀더 몸에 좋은' 화약을 쓸 권리가 있다며 리플렛을 돌리고 있으니까요. 저녁에 TV 를 키면 언론들은 실제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적' 에 대한 전과를 떠들어대며 다음날도 또 포를 쏘러 나가라고 부추깁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지배계급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을것임은 쉽게 추론할수 있는 것이지요. 


각각의 에피소드에 맞는 이미지를 구하려고 했는데, 오래전 작품이라 그런지 쉽지가 않군요. DVD 도 발매가 되어 있고, '어둠의경로' 를 통해서도 보실수 있겠지만 아무튼 가능한 한번쯤들 보시면 좋은 작품입니다. '공각기동대' 가 주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메모리즈' 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의문이라고 할수 있겠죠. 비록 비관주의가 바탕에 짙게 깔려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사회적인 의식을 다루고 있는 모든 아니메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니 뭐 굳이 이녀석만을 탓할일도 아닌거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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