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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여성으로 살아남기 위해 - 노스컨츄리

착각하기 쉬운것 중에 하나로, 노동문제, 여성, 인권 등의 부분에 있어서 다른나라 - 예를 들면 서구유럽 - 의 사회들은 굉장히 진 일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버리는 점이 있다. 확실히 대한민국의 경우를 비추어 생각해보면 제도적으로건 사회 전반적인 인식의 수준으로건 그쪽 사회가 보다 선진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습들은 구성원들의 '문화' 적인 차이에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받는 사람들의 강력하고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에 비로소 현실로 다가올수 있었던 부분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직장내 성희롱 문제가 최초로 법원에 제기된것은 1993 년, 서울대 우 모 조교가 그 담당인 신 모 교수를 상대로 제기한 것으로, 무려 6 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진바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직장내 성희롱 예방지침이 만들어지고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화 시키는등의 성과가 만들어 졌다. 여성문제에 있어서 보다 선진화 된 사회로 알려져 있는 미국이지만, 1984 년에야 비로소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최초로' 법정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 '노스컨츄리' 는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으로 알려진 바로 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조시 에임스는 여성 노동자로 직장에서 당할수 있는 성폭력의 유형들을 거의 대부분 고스란히 겪게 된다. 남자 동료들은 그녀와 다른 여성 노동자들을 동등한 노동자로, 동료로 대우해 주지 않고 노골적으로 성적비하 발언을 일삼거나 성적코드로 당황하게 만드는가 하면, 욕설이나 신체의 일부를 만지는 행위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한다. 그녀가 일하는 광산에서 여성들은 동료가 아니라 '남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못된 여자' 일 따름이며, 동일하게 노동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성적인 대상일 따름으로 취급받는다.

 


조시는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처음에는 직장을 유지하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견디려고 하지만, '참는것' 은 상황을 전혀 나아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어만 간다. 견디다못한 그녀는 언젠가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서 '힘든일이 있으면 찾아오라' 고 말했던 광산의 사장을 찾아가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장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고 이후 여성노동자들을 향한 모욕적인 공격은 더욱 그 수위를 높여간다. 그녀의 옛 남자친구였던 작업반장은 폭력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이고 남성노동자들은 마침내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뒤흔들어 테러를 가하기 까지 한다.


노동운동의 힘이 미약했던 초기에 남성 노동자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제에 맞서 여성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 내부에서조차도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 심지어 노조 총회에서 발언권이 남성 노동자에게만 인정되는 - 처지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져 그 모든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들을 참고 견디는 것 뿐이다. 조시가 함께 문제제기 하자고 그녀들을 설득하지만 당장 해고와 더 큰 폭력에 노출될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그녀들은 쉽게 응할수 없다.


지금도 온라인,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문제를 이야기하고 바꾸려고 하는 사람, 특히 여성을 향해서 되려 '당신의 오버질이 문제' 라는 식의 뒤집어 씌우기와 이간질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노스컨츄리 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시' 가 특별히 시끄럽고 비협조적이라며 다른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를 이간질 하고 있는 상황은 여성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만들어 간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속적으로 싸움을 이어나가면서 그녀들의 생각과 행동은 '참는' 것에서 '싸우는' 것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노스컨츄리' 에서 조시의 모습은 단순히 직장내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성이 사회적으로 겪게되는 모든 차별과 억압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폭력적인 남편, 그로부터 독립적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가정 내부에서의 편견 등 이 다루어지면서 '노스컨츄리' 는 노동계급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끔찍할만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실화를 전제로 했음을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또 한가지 측면으로, '노스컨츄리' 는 1980 년대 당시 레이건의 집권시기에 노동운동이 처한 처지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조시' 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여자들이 일자리를 잠식해 간다는 것으로, 이는 지금 남한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지배계급이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강도가 강한데 비해 이에 맞서는 노동운동의 역량이 약할경우, 노동자들의 불안은 이러한 방식으로 보다 약자에게 표현될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좌우지당간, 정말이지 매우 오랫만에 주위에 기분좋게 권할만한 영화라고 말할수 있다. 비록 극장에서는 이런 진지한 영화들이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한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유사 헐리웃' 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 하고있는 이런 영화들은 소장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남성이 보기엔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글쎄, 구제불능의 마초씨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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