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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민족주의

지금이야 '월드컵 그런거 응원해봐야 무슨 소용이냐. 한국대표팀이 조기탈락 해버려서 정규뉴스 시간 안 잡아먹는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며 잘난체 하지만, 사실은 지독한 민족주의자 였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때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든 '다물' 이라는 소설이 원흉이었는데, 제목에서 짐작하실분 계시겠지만 '다물' 이란 '되찾는다' 라는 뜻의 고대어(?) 로, '고조선 시대에 빼앗긴 우리 땅을 다시 되찾자' 가 이 소설의 주제 되시겠다.


당시에는 그랬다. 대한민국이 그 넓은 중국땅을 차지하고, 일본놈들 혼내주고 미국 눈치 안보는게 그렇게 낭만적으로 느껴질수 없었다. 뚜렷한 비젼은 없었지만 아무튼 대한민국이 이른바 강대국, 선진국이 되면 사람들도 다 잘살것만 같이 느껴졌었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에 경악하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와 그 투쟁에 동감, 지지하면서도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면 '다 괜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한단고기' 니 '대쥬신제국사' 니 하는 책들을 구해보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북한은 당연히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을 전제로 함께 잘 살아야 할 대상이었고, 일본이나 만주와 요동반도는 물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까지 ( 엄연히 '쥬신' 의 옛땅 이니까 ) 장차 우리땅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이르렀다.


고백하는 김에 다 떠들어보자. 나는 그때 노트뒷장에 (통일)한국군이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저기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4개 부대로 나뉘어 만주땅을 차근차근 점령하는 시나리오를 낙서해가며 혼자만의 망상으로 빠져든적도 있고, 존경하는 사람중에는 '미국에 맞선 위대한 민족주의자' 라는 이유로 그 유명한 아돌프히틀러 도 있었다. 그때의 영향으로 '밀리터리 매니아' 종류의 취미에 빠져들었고 프라모델을 손댄것도 나치 독일의 기갑사단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던것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른바 PD 계열 운동권에 속하기는 커녕 단순한 농땡이일 뿐이었고,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읽어본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느 순간부터 프라모델이, 밀리터리가 재미없어 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무 의미없는 것으로 변해갔다. 한단고기나 대쥬신제국사 같은 책들이 허황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허황함을 넘어 '만에하나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안의 민족주의에 대한 환상은 그런식으로 깨져나갔던거 같다. 깨져나가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실로 농땡이 다운 변화라고나 할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들이 실은 일부 지배계급의 밥그릇을 늘리는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국익을 앞세운 논리가 짐승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인내만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군대에서 몰래 읽었던 책들에서 처음 깨달았었고, 제대이후 IMF 의 영향을 체감하면서 '대한민국 국민' 이라고 하더라도 다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TV 에서 보았던, 부천 대우자동차 노동자의 피로 범벅된 얼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당시 공장에서 내쫓긴 1700 여명의 노동자, 그의 가족들도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했었을 것이다.


지난 민주노동당 당직선거를 계기로, 민족주의 운동계열인 이른바 '자민통' 등 NL 계열 운동권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짐승 역시 그러한 비판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으며 전적으로 지지하는 편이다. 그러나 비판의 방향이 주로 그들 조직의 경직성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보다 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가 일정부분 해소될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꼴통' 이라고만 말하는것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애초에 의도했던 취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짐승은 이제 진정한 문제인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지향점에 대해서 비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혹은 민족 이라는 단위로 변혁운동을 고민하고 그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해당 단위안의 모든 계급은 '같은 편' 으로 생각할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협조하고 단결할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그 단위 안에서 지배권력을 가진 일부계급이 현상적으로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이는 계몽을 거쳐 '친 민중적인 의식을 갖도록 끌어올려야' 할 계급이지 결코 해소시킬 계급은 아닌것이다.


그러나 계급의 차이는 그 존재의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으로 끌어올려 지는 어떤것이 아니다. 자본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것이 필수 불가결하고, 국가지배자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피지배민중의 존재 역시 필수적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에 따른 '계급협조주의'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계열은 보다 '양심적' 으로 보이는 지배계급의 특정분파에 대해 지지하는 양상을 보이며 해당 분파가 생산하는 사회 경제적인 착취와 모순들은 '부차적인것', 혹은 '현실단계에서 어쩔수 없는 것' 으로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지지하는 지배계급의 분파가 정치권력을 잡고 권력화 되었을때 일부 동조하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김대중 정권,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대북정책에 대해 이들 세력이 대체로 동조하는 포지션을 취한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북한정권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 역시 민족을 그 단위와 지향으로 하는 근본적인 이념에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
'자민통 계열' 이 진보진영에 마이너스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이러한 계급협조주의 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가지 주의할것은 '계급협조주의' 와 같은 것이 민족주의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들 '자민통' 을 비판하면서도 의회 활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열린우리당 과의 공조를 염두에 둔다든지, '운동권 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노동계급에 치중하는것 보다 대중정당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말하는 이른바 'PD' 계열내의 일부 분파들 역시 국가권력과의 타협과 협상을 중심에 두고 '보다 친민중적인' 지배계급내의 정치파트너를 찾는 이상 결과적으로 '계급협조주의' 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민족주의 운동 세력이 운동권내의 우파라고 한다면, '좌파' 경향 이라고 해도 위에서 말한것과 같이 지배계급과의 타협을 전제로 하는 세력들 역시 우파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 스스로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좌파에 묻어가려고 한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큰 틀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여 반제국주의, 반전 운동의 의제에 대해서 부차적인 무엇으로 취급하거나 '민족주의적 의제' 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며 회피한다면 그 역시 좌파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것인데, 유감스럽게도 독도문제가 불거졌을때 민주노동당 내의 일부 '좌파' 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 비록 군대주둔과 같은 주장은 문제가 많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망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다.


 원래는 짐승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려다가 스케일이 넘 커져버린것 같은데, 아무튼 온라인상의 이런 저런 글들을 보다 보니 떠오르는것이 있어 대충 갈겨써봤다.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쓸데없이 길어지는것이 어쩌면 '천성' 인가 하는 불안한 생각도 불현듯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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