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직후 음모론이 성행하는 것을 보며 끄적였던 글.

여전히 너무 많은 의혹이 있고, 드러난 증거들이 '음모'를 연상시키지만

그래도 우리는 명철한 지성을 믿어야 한다.

음모는, 오히려 권력자들이 더 좋아하는 방식이다.

진실이 희미한 가운데 덩달아 다른 많은 것들을 가릴 수 있으니까.

유병언 사체 관련해서, 난 그게 유병언 사체가 맞든 아니든,

그런 괴상한 방식으로 사건을 공개되면서,

누군가는 이를 둘러싼 답없는 논쟁을 기대했을 거라고 본다.

 


음모론으로 권력을 무너뜨리면, 남는 건 불신으로 가득찬 사회, 누구도 믿지 못하니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 그러니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야만의 세상입니다.

이 나라에 이토록 매뉴얼 하나 갖춰지지 않았었다는 데 너무 놀라며 분노하고 있지만, 그 반대급부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가설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우려스럽습니다.
이런 가설들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논의가 불가능한 종교적 영역으로 쉽게 넘어가버립니다.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약자에게 투사하는 마녀사냥의 배경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어디로 튈 것인지는 통제 가능한 영역이 아닙니다. 오늘은 박근혜지만, 내일은?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중들의 공포가 야만으로 치달았던 사례를 역사에서 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국면에서,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수습불능의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체계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저들은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그 서곡을 보는 것 같아서 공포감이 듭니다.

좌파의 정체성은 좌파의 대안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있지, 세상을 붕괴시키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쏟아지는 어떤 가설들을 지지하고 확산시키기보다는 점검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배의 구조변경이 어떤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는지,
화물 적재에 어떠한 가이드라인이 있었는지,
승무원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이 있었는지,
비정규직 노동자로 배를 운행하는 것에 문제는 없는지,
조난이 발생했을 때 지원체계는 갖춰져 있었는지, 등

시스템의 문제를 점검하는 데 방점을 찍는 게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위정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눈에 보이는 표적을 비난하면 되니 쉽게 동참할 수 있고 성과도 쉽게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의 문제는 당장 손에 잡히는 해결방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실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