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2/07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7/21
    혁명가의 품성
    혁사무당파
  2. 2012/07/20
    '삼청교육대식 인권침해 교육' 발레오만도, 인권위에 진정
    혁사무당파
  3. 2012/07/18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 토론회에 바란다
    혁사무당파
  4. 2012/07/09
    [성노동운동 보고서] 한겨레21 "나는 성노동자다" 계기로 본(2)
    혁사무당파

혁명가의 품성

[정신의 모험] 혁명가의 품성

이성과 정신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전체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자기의식 개념부터 시작하죠. 자기의식이야 데카르트의 발견이죠. 의식이 곧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 데카르트는 이런 의식의 자기의식성을 의식의 본질적 규정으로 고양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비난도 많이 받았죠. 의식되지 않는 의식은 전혀 없는 건가? 무의식적 지각이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런 비난을 받아도, 데카르트의 자기의식 개념은 꿋꿋하게 대륙의 합리론 철학에서 계승되어 그 근간이 되었습니다. 칸트, 그리고 헤겔 모두 자기의식 개념을 출발점으로 해서 자기 철학을 시작했었죠. 나중에 브렌타노, 후설로 가면서 의식의 본질적 규정이 지향성으로 바뀌는데, 그때까지 자기의식 개념은 철학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식을 철학의 왕좌에 올린 사람은 바로 헤겔입니다. 헤겔은 자기의식 개념을 통해 다양한 의식의 형태들을 포괄했습니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의 각 단계는 자기의식의 종류에 의해 즉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죠. 즉 그래서 정신현상학은 감각, 자기의식, 이성, 정신, 절대정신이라는 5개의 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 정신이라는 항목과 감각, 이성이라는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을 살펴보면 어떤 차이가 보입니다. 감각, 이성의 경우 인식론적 개념이 다루어집니다. 여기서는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주관과 대상이 일치하고, 이때 대상의식은 자기의식이 되죠. 진리의 상태가 곧 자기의식이죠. 

반면 자기의식, 정신의 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잘 보면 실천적 의지의 개념들입니다. 자기의식 장에서는 욕망이, 정신의 장에서는 자유의지가 다루어지죠. 이런 실천적 의지의 경우는 의도가 실제로 실현되는 경우 자기의식이 됩니다. 이 경우는 자유로운 상태가 자기의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헤겔은 진리와 자유, 인식론적 규정과 의지의 규정을 모두 자기의식의 단계로 포함했습니다. 본래 데카르트가 진리의 상태에만 적용했던 자기의식 개념이 이렇게 확대된 거죠. 어떻게 보면 자기의식 개념의 이런 확대에 의해 정신현상학은 무척 혼란스럽게 여겨집니다. 앞 장에서 이미 자기의식에 도달했는데, 또 뒷장에서 자기의식을 향해 또 나아가니까 뭐 이런 게 다있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헤겔이 자기의식 개념을 이렇게 확대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자기의식의 개념이 각 장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정신현상학의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감각-자기의식-이성-정신-절대정신 , 이렇게 나가니까, 앞의 자기의식의 두 종류를 고려해 보면, 이론-실천-이론-실천, 이렇게 나아가죠. 지그재그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감각과 이성은 어떻게 다를까요? 감각이 대상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이성이 대상의 보편성 즉 법칙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이니까 더 설명할 필요 없겠죠. 

그런데 감각 다음의 자기의식 장이 다루는 실제 내용은 욕망이죠. 정신 장의 내용은 자유의지입니다. 실천적 의지의 종류이지만 두 가지는 단계적으로 구분되죠. 헤겔은 욕망이 사회와 대립되는 개별적 자아라고 본다면, 자유의지는 이미 사회와 자아의 통일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니죠. 즉 개별적 실천의지와 보편적 실천의지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다시 정신현상학의 구성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되죠. 개별적 인식-개별적 의지-보편적 인식-보편적 의지... 이런 식으로 정신현상학의 구성을 정리해보면, 이제 정신현상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다룰 정신의 장이 어떤 운동을 다루는지 이해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이런 얘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성의 단계에 올랐습니다. 세계의 보편적 법칙을 인식한 거죠. 그런데 이제 실천적 의지가 이 보편적 법칙을 실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의지는 개별적 욕망 단계에 있어서, 보편적 법칙을 알면서도 스스로 실현하지 못하죠. 

여기서 실현한다는 의미를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실 보편적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은 그가 의지로서 이 법칙을 수행하든 말든 실제로 객관적으로는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렇게 실제로 실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자기의 주관적 욕망을 고집해서 그것을 실현하려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자기도 모른 채 수행하고 만다는 겁니다. 

헤겔은 이런 상태를 역사철학에서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으로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역사적 영웅과 관련해서 설명한 것인데, 엄격하게 말하면 모든 정신의 출발점에 선 인간이면 모두 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게 이성 장이 끝나고 정신 장이 시작될 때 인간이 부딪힌 상황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신 장의 운동이 지향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얼마간 감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거죠. 보편적 이성의 원리를 스스로 자각해서 자기의 의지가 이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걸 자유의지라 하죠. 자의가 아니라 자유의지입니다. 즉 의지가 자유의지에 도달하려는 것이 정신 장의 목표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사실 칸트가 이미 제기했죠. 아마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기억할 것입니다. 칸트가 루소를 좋아해서 그의 소설 에밀을 읽다가, 달걀이 아닌 자기의 시계를 삶았다는 에피소드 말이죠. 

그런데 칸트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가지는 위험을 깨닫고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이성 비판을 작성했다고 하죠. 그 실천이성 비판의 핵심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도덕법칙을 법칙으로서 또는 의무로서 의지하는 것, 그게 바로 자유의지이죠. 헤겔이 도달하려는 것도 사실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은 프랑스 혁명의 원리인 일반의지를 다루기 위해 쓰여 진 장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일반의지의 한계를 극복할 길을 찾는 거죠. 

헤겔은 물론 칸트를 넘어서려 합니다. 그는 칸트의 의무로서 자의의지의 한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한계를 미리 본 낭만주의자들의 양심 개념의 한계도 들여다 보죠 .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절대정신을 제시합니다.

세계의 법칙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문제이다. 실현의 방법은 자연상태에 내버려 둘 수도 있지만, 이 법칙을 자각적으로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비단 칸트 헤겔에게서만 문제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러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은 그대로 두어도 실현되죠. 많은 우여곡절을 통과해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전위라는 개념이 나오죠. 이 역사의 전위는 역사법칙을 자각하고 이것을 실현하려는 자입니다. 레닌이 제시한 이 역사적 전위라는 개념, 그것이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혁명가의 의식을 볼 때, 그들이 역사의 전위로서 역사법칙을 자각적으로 수행하려 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과연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의 차원에서 수행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많은 혁명가들은 루소의 일반의지에 머물렀고, 기껏해야 칸트의 의무감이나 낭만적 양심 개념에 기초하지 않았을까요? 그 결과 사회주의 혁명은 많은 혼란과 고통을 동반했던 것이 아닐까요?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지금, 많은 자기비판이 필요하지만 혁명가의 의식 문제 역시 주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품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제가 품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영웅적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발견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혁명가의 품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것이 목적이죠. 그리고 그런 혁명가의 품성을 파악하는 데서,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을 참고사항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주석을 쓰는 저의 목표입니다. 


글: 이병창 (한국철학연구회) / 출처: 한국철학연구소 
--------------------------------------------

* 이성의 간지 [Trick of reason , 理性의 奸智]

헤겔의 저작에 종종 나타나며, 그의 철학을 특징지우는 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역사철학』에 있는 것으로, 세계정신 스스로는 배후에 있어 공격도 당하지 않고, 상처도 입지 않으면서, 개인을 조종하여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것을 희생시키는 것에 의해 자기의 목적을 실현한다. 이 세계사의 과정은 마치 이성이 교활하게도 가지각색의 정열을 서로 손상시킴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이성의 간지(교지)라고 불려진다. 
『논리학』 중의 목적론에는 주관적 목적이 자기와 대상의 사이에 다른 대상을 도구로 끼워 넣고, 이 대상들을 서로 마모시켜, 스스로는 이 과정의 밖에 있는 채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개체의 움직임을 그것이 모르는 사이에 전체의 필요에 따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주관적인 이성을 초월하여 객관적 관념론을 취하는 철학에서는 자연스러운 사상인데, 헤겔이 역사적 정신의 측면에서 사고했던 것을, 괴테도 자연의 측면으로부터 자연의 간지(List der natur)로서 인정했던 것이다.


참조어 : 이성(理性)의 교지(狡智)  
출처: 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2009, 중원문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삼청교육대식 인권침해 교육' 발레오만도, 인권위에 진정

'삼청교육대식 인권침해 교육' 발레오만도, 인권위에 진정

한국인권뉴스(대표 최덕효)는 한 활동가(임경일)가 본지에 제보한 7월 19일자 기사 “삼청교육대식 강제훈련으로 노조탄압, 발레오 자본 규탄한다!! 에서 심각한 인권침해 사실을 발견,  당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서를 접수시켰습니다.

이번 인권위 진정에는 굴욕적인 인권침해를 당한 노조원들이 속한   금속노조 경주지부 발레오만도 지회의 지회장 (정영재)과 사전 전화로 동의를 거쳐 내용을 보강했으며, 관련증거(기사 전문, 사진 3매)가 함께 제출됐습니다.  

본지는 진정서에서  
1. 발레오만도 사측이 노동자들의 금속노조 가입 여부를 이유로(현재 탈퇴하였다고 해도 과거 금속노조 노조원이었거나, 현재 금속노조 노조원이라는 이유로)
2. 노조원들에게 업무를 못하게 하고 풀뽑기와 이른바 한강철교 등의 벌을 주고
3. 업무와 상관없이 안동에 (강제성) 봉사활동을 보내고
4. 이러한 일명 혁신교육(삼청교육대식) 배경에는 이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에 따라 성과급이 (최고)2,400만원까지 차이가 나며
5. 따라서 이는 사측이 금속노조 노조가입을 이유로 업무 배치 및  임금 등에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고 차별행위를 하고 있는 것

이라고 밝히고, 이에 대한 인권위의 철저한 조사와 조치를 강력 촉구했습니다.



▒ 관련기사 바로가기
 

[한국인권뉴스 2012.7.2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 토론회에 바란다

[운동평론]‘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회’에 바란다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 정치가 가시화 되고 있다.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회'가 지난 6월 9일 첫 번째 모임에 이어 7월 14일 두 번째 모임이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에서 열렸다. 

처음에는 금속노조 현장 활동가들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전국 각지의 현장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공공운수노조, 전교조, 공무원노조, 좌파노동자회,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사회주의 정치세력, 진보신당 등이 대거 참여하는 등 세(勢)가 확산되고 있다.  

기획단은 제안서를 통해, 노동자 계급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현장 활동가들의 고민과 결의가 시작되어야 하며, 노동해방과 사회변혁을 열망하는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이 만나, 노동자 자신이 노동자 계급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제안은 비록 통진당 사태가 발단이 되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기존 정당들 중에는 노동자 계급정치와 유관한 정당이 실제 전무하다는 참담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계급적 정당을 만들어 보겠다는 참신한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해 토론회를 지켜본 필자는 다음 두 가지를 제언하고 싶다.   

첫째, 민중운동 진영에도 제안서를 보내자.
이날 토론회에 참관한 한 인사는 필자에게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활동가와 조직노동자는 자신들이 힘없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인 어떤 발언권도 없는 미조직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을 잊기 쉬우며, 상대적으로 극빈자들의 상위계급이라는 사실을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노동자 정치운동이 제대로 된 변혁운동이 되려면 이 같은 사실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에 빈민과 같은 민중들이 결코 소외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겨우 초동단계인 토론회 기획단에 이러한 주문은 시기상조인 듯 하지만 그 만큼 기대감이 크다는 반증이다. 주지하다시피 노동자와 민중은 상호 교차하므로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혀 이른바 민중운동 진영에 제안서를 보내는 구체적인 행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온갖 수사(修辭)로 민중진영 포섭에 혈안인 기존 정당에 향후 훌륭한 파열구로 발전하게 된다. 

둘째, 토론회를 ‘回자형’의 열린 공간으로 배치하자.
토론회에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한 한 여성노동자는 당시 토론회 분위기를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서 필자는 내용과는 별개로 공간 배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노동자 계급정당을 제대로 건설하려면 ‘평의회’처럼 무엇보다 그 정체성에 부합하게 논의 구조가 활짝 열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우리는 공간의  유형과 마이크의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왜곡된 권력 현상을 주의해야 한다.      

이번 토론에서 택한 이른바 ‘교실형’ 공간 배치(단상 위에 한 사람의 선생님이 있고 다수의 학생들이 그 아래에서 배우는 식의)는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이므로 평등한 토론을 치명적으로 방해한다. 더욱이 지금은 기획단 수준으로 ‘주체’를 형성하는 예민한 시기이므로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상호 대면하며 논의할 수 있는 구조인 ‘回자형’의 열린 공간 배치가 바람직하다. 

열린 공간의 토론회에서 기획단의 역할은 준비된 압축적인 제안 이외에는 논의의 물꼬를 트는 짧은 사회로 참가자들의 견해가 최대한 제출될 수 있게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도와주고 정리하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이번 토론회 진행에서 드러난 다소 미흡했던 점이 개선돼, 향후 각급 단위의 논의의 틀과 오는 9월 1일 열리는 ‘변혁적 현장실천 노동자 계급정당 전국활동가대회’ 부터는 그간 기존 정당들과 사이비 진보좌파세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단위들이 서로 마주보며 제출하는 대안적인 함성이 메아리로 번져 명실상부한 노동자민중들의 계급정당으로 도약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노동운동 보고서] 한겨레21 "나는 성노동자다" 계기로 본

http://www.k-hnews.com/home/bbs/view.php?id=column&no=160

 

 

[성노동운동 보고서] 한겨레21 "나는 성노동자다" 계기로 본 2012·07·09 11:53
 

최덕효(대표겸기자)

1.
2012년 7월 2일. 이날은 국내 성노동/성노동자운동(이하 성노동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날이다. 가장 신뢰도가 높은 언론(좌파진영에서 보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으로 일컬어지는 한겨레신문에서 발생하는 주간지 『한겨레21』이 본격적으로 ‘성노동’ ‘성노동자’란 용어를 사용한 심층기사를 내놓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간 금지주의 쪽에 편향되었던 한겨레가 이번 기사에서는 비범죄화를 기조로, 이 분야에 대한 보수언론의 선정적인 혹은 시혜적인 접근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상당한 수준의 운동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겨레21』은 2일자(917호)에서 특집으로 성노동 관련 남은주 기자의 표지 기사 《“‘나는 성매매를 선택했다’ 성노동자 4명 자신의 노동을 말하다… ‘창녀’라는 낙인에서 구해준 것은 탈성매매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자각이었다”》와 《“쉬쉬하다가 성노동자만 범죄자 ‘성매매특별법’ 둘러싼 멈춰선 7년 논쟁… 한국 성산업 시스템 도외시하며 성매매 여성만 처벌해, 적어도 비범죄화해야”》 두 꼭지를 실었다.  

국내 성노동운동의 출발은 노무현 정권 당시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에 참여해 진보진영에 만민공동회를 제안했던 기독민중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체는 2004년 9월 23일 성매매특별법(‘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이하 성특법) 시행 직후 조직한 ‘성특법반대시민모임’을 거쳐 지금의 한국인권뉴스(이하 인권뉴스)로 개편되었다. 

필자가 포함된 당시 ‘성특법반대시민모임’은 전국 17개 지역 집창촌 여성들이 모인 청량리역 광장 집회 발언(인터넷 한겨레 2004년 10월 20일자)을 통해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전국조직을 추진(경향신문 2004년 11월 6일자)하다 평택에 소재한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를 중심으로 운동의 연대 주체로 나서게 된다. 이를 계승한 인권뉴스는 초기에는 연대단위 모임인 성노동운동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내부 이견으로 독자적인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번『한겨레21』기사에서는 매우 알찬 내용들을 접할 수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미흡함이 군데군데 보이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인권뉴스는 크게는 진보적인 성담론 이론 및 실천을 지향하는 주체의 하나로서 운동의 재편성을 돕고, 작게는 성노동운동 주체의 하나로서 이 운동의 발전을 위해 『한겨레21』기사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성노동’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를 그동안의 현장 경험을 토대로 언급하고자 한다. 


2. 
‘성노동/성노동자’란 용어는 2004년 10월 파주에 있는 집창촌인 속칭 용주골에서 그곳의 일하는 여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채택되었다. 당시 인권뉴스는 집창촌 몇 곳에 좌파진영의 활동가들과 함께 실태조사 등 현장 활동을 진행했는데, 경기도 파주에 소재한 용주골 방문에는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두 명이 동행했다. 

우리는 현장 여성들과의 만남에서 그녀들이 자신을 뭐라고 호칭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접하게 되었고 그녀들은 자연스레 논의를 진행했다. ‘여성종사자’란 말도 있었지만, 그녀들은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거니까 ‘노동’이고요, 그 중에서 성적 분야니까 ‘성노동자’가 맞겠네요.” 라면서 만장일치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렇게 정리·결정했다. 이 일과 관련, 필자는 해외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인 ‘sex-worker’를 그 자리에 소개했다는 이유로 한 활동가(여성)로부터 ‘폭력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필자는 지금도 그 비난의 근저에는 물질노동을 중심으로 노동/노동자에 대한 신성성(노동주의/노동자주의)이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기반한 전통좌파의 생각이 ‘성노동’을 반대편에 차별적으로 자리하게 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은 비단 여성계만이 아니라 진보좌파진영에서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따라서 이번『한겨레21』기사는 ‘성노동’에 대한 운동진영의 분명한 입장을 강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계기가 된다.

‘매춘 - 매매춘 - 성매매’로 이어지는 용어 변천사는 여성계의 성주류화 전략과 깊이 맞닿아 있다. ‘봄을 판다’는 단순한 뜻의 매춘에서, ‘행위 당사자를 지목하고 죄를 추궁’한 것이 매매춘이란 용어였다. 그리고 “성매매는 사람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관계”(2009고단 3339호 판결문)라는 사법적 개념 규정이라고 쓴 『한겨레21』기사에서 보듯, 인신매매를 함의한 개념에 이른다. 따라서 성매매는 장기매매나 살인적 폭력과 같은 극악한 범죄로까지 동일시하고 비약된다.

이러한 '성매매'란 용어는 예전 한국여성연구원에 재임 중이었던 원미혜(여성학자)의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 제하의 논문에서 제안되었다. 여기서 원미혜는 "'성매매'라는 용어는 아동 매매, 인신매매 등과 같이 '거래'되는 측면을 강조하여 담을 수 있는 용어"이므로 "적극 권하고 싶다"고 주장했고 후일 성특법에서 그대로 관철되었다. 

성노동운동이 한창일 때 한 성노동자는 원미혜로부터 보내온 소소한 문자를 필자에게 보여주곤 했다. ‘성매매=인신매매’라는 식의 개념을 제출한 그가 성특법 시행 후 분노한 성노동자들의 시위에 놀라 성노동자들에게 다가간 게 아닌가 한다. 그는 활동가들과 함께 펴낸 <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성매매 공간의 다면성과 삶의 권리>란 책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합법·불법 논쟁을 떠나, 논쟁에 가리기 쉬운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삶의 다면성을 보자"며 애매한 변신을 시도했지만, 후배들은 지금도 성매매 금지주의자 원미혜를 배운다. 


3.
『한겨레21』은 기사에서 성노동에 대해 “어찌됐든 급진주의적 페미니즘과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여성계의 두 시각에서도 일치점은 있다. ‘성매매 여성의 비범죄화’다.“라면서 “적어도 비범죄화해야”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성노동과 페미니즘의 관련성에 대한 『한겨레21』의 설명이 불충분한 까닭에, 조국의 논문(성매매에 대한 시각과 법적 대책)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성특법을 탄생케 한 성노동에 대한 현행 ‘금지주의’는 도덕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단순 성매매 행위를 포함하여 성매매 조장․알선행위 등 일체의 성매매 관련행위를 처벌”하는 까닭에 “단순 성매매의 경우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처벌대상이 되는 ‘범죄인’”으로 간주된다.  

성특법을 주도한 주류여성계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성격을 지녔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본디 《급진적 여성주의》에서는 ‘선택적 비범죄화’를 주장하므로 성노동자는 피해자로 보호하고 “성구매자만을 처벌”하는 것을 기조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류여성계는 성노동자들을 보호하지도 않았고, 그들과의 대화도 외면한 채 《도덕적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금지주의’와 공생하고 있으므로 매우 모순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와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에서는 ‘비범죄주의’나 ‘합법적 규제주의’를 정책으로 주장한다. 여기서 비범죄주의는 “단순 성매매행위 쌍방을 처벌하지도 않고 합법화하여 관리․통제하지도 않으며, 다만 이를 조장․착취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입장”을 말한다. ‘합법적 규제주의’는 “단순 성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며, 등록증과 의료감시체계를 의무화하거나 특정지역 지정을 통해 성매매를 규제하는 입장”이다. 

성특법을 추진한 주류여성계의 여성주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듯, 성특법을 반대하며 성노동운동에 연대하는 진보좌파 진영의 여성주의 또한 급진적·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 여성주의가 혼재된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성노동운동을 계급적 관점을 중심으로 접근한 인권뉴스는 여성주의 경향의 네트워크와 따로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대한 상징적인 일이 있다. 2007년 6월 28일 서강대에서 열린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 '영 코뮤날레' 세션에서, ‘비범죄화’를 전제한 이황현아(노동자의힘 여성활동가모임)의 주장(발제문: 성노동자의 성별화된 권리를 위하여)에 대해 민성노련은 ‘특정지역 자율관리제’를 주장하며 정면충돌한다. 
▒ 이황현아 발제문에 대한 민성노련의 입장

이황현아는 “'특정구역 비범죄화',는 민주성산업인연대와 민주성노동자연대가 2006년부터 구사하고 있는 비범죄화의 구체적인 주장”이라며 “모든 성노동자를 주체적 대상으로 하는 비범죄화가 아니라, 특정구역-평택만 비범죄화하자는 건 성노동자운동의 의의를 훼손하는 논리적 모순이자 실리에 기댄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민성노련은 “‘특정지역 자율관리제’는 ‘평택만’ 이 제도를 택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전국의 집창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경찰력 등의 관리를 전제하는 이른바 공창제 형태의 '합법주의'와 차이가 있으며 조직적으로 자율적 관리가 어려운 '비범죄주의'와도 구별”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성특법의 가장 큰 목적은 집창촌 폐쇄에 있으므로 현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집창촌을 사수할 수 있는 방어논리”이며 “따라서 집창촌 성노동자들이 일차적으로 투쟁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점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성노동자를 주체적 대상으로 설정한 비범죄화와는 시점과 관점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황현아는 “민성노련과 같은 성노동자 자신의 주체적 운동은 한편에서 경제적 빈곤을 주축으로 한  노동운동/빈민운동임을 역설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운동 내용에서 급진적 여성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애써 페미니즘적 요소를 걷어내려고 한다.”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성적억압에 대한 접근, 성적자기결정권에 준거한 자유주의적 태도, 성매매의 궁극적인 폐절 경계 등에 대해 민성노련은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민성노련은 “대다수 전업형 성노동자들은 ‘빈민’이며 ‘여성’”이지만 ““성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다른 ‘노동자’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 “이 세 가지 성격을 동시에 포괄하며 이 중 어느 것도 결코 후순위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민성노련이 투쟁전술로 ‘주류여성계’에 집중하는 것은 그들이 성특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실제 주역들이기 때문”이며 “고로 우리가 걷어내려는 것은 ‘페미니즘적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기층민들을 억압하는 '반페미니즘적 요소'”라면서 주류여성계는 “몸만 ‘여성’인 비현실적 도덕주의자들인 동시에 기득권자들의 한 분파”라고 반박했다.  

또 “민성노련이 고객과의 관계를 여성에 대한 ‘성적억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우리가 성인들 사이의 필요에 따른 성거래를 '억압'으로 간주한다면 난데없는 인신매매 논리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셈”이 된다고 말하고, “성거래에서 이뤄지는 상호간의 선택은 물질적인 제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가족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민성노련이 경계하는 것은 ‘자발적인 성노동(성거래)’을 인신매매와 동일시하여 쉽게 ‘폐절’을 논하는 것”으로 “이는 성노동의 폐절을 지구상의 모든 임노동의 폐절과 같은 맥락에서 논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라고 밝혔다. 


4.
이상은 당시 네트워크의 일부 활동가들이 성노동운동 연대 초기 민성노련에게 이들이 채택한 강령 12개항 중 “한국사회의 급진적 여성주의를 개혁한다”는 부분에 대해 제외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념적으로 많은 차이점을 시사한다. 민성노련은 급진적 여성주의가 지닌 성(性)분리주의 사고가 성노동운동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 민성노련 12대 강령

반면, 네트워크는 합법화 및 비범죄화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민성노련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트워크는 자의적으로 ‘비범죄화’를 운동 기조로 천명함으로써 현장 주체인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리고 운동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사유화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어쨌든 이들 양자는 ‘성특법 반대’라는 기조 하나로 연대를 힘겹게 꾸려 나갈 수 있었다.  

『한겨레21』은 이번 심층기사에서, 성인들 사이의 단순한 성적 거래에서 일(성노동)하는 주체를 ‘성노동자’라고 부르는데 동의할 수 있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책 전환으로 ‘비범죄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비범죄화’라는 말은, 위에 적었듯이 성노동운동에 연대했던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여성주의 경향의 네트워크 입장만을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운동도 진보적 언론도 ‘금지주의’라는 도덕주의적 강박이나 ‘성매매 폐절’이라는 공허한 명분론을 넘어야 한다. 좌파적 관점에서 여성주의 전반을 검증하면서 국가주의 페미니즘을 전면 비판하고 마르크스 페미니즘까지 발전적으로 논해야 성노동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그려진다. 그리고 비범죄화건 합법화건 특정지역 자율관리제건 활동가들은 모든 이야기를 현장 주체들과 노동자민중들 앞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소통해야 한다. 

『한겨레21』은 “‘창녀’라는 낙인에서 구해준 것은 탈성매매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자각“이었다고 유의미한 제목을 뽑았다. 우리는 성노동운동 8년 만에 ‘87년 체제’에 갇힌 ‘갑갑한’ 한겨레를 이 정도까지 변화시키는 성과를 일구고 있다. 운동진영이 성노동자들에 대한 낙인 제거와 그들의 노동권·생존권·건강권 쟁취를 위해 연대하고 대안 마련에 나서는 것은 공황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아마도 민성노련 성노동자들이 없었다면 국내 성노동운동은 출발이 어려웠을 것이다. 갈 길은 멀지만 성노동운동의 밀알이 된 민성노련 성노동자들에게 깊이 감사 드린다. 그리고 연대 동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면서 성특법 폐지를 향해 논의의 장을 활짝 펼칠 수 있도록 투쟁력을 더욱 강화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인권뉴스는 그 길에 항상 함께 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한겨레21 바로가기] "나는 성매매를 선택했다"
[한겨레21 바로가기] 쉬쉬하다가 성노동자만 범죄자

[한국인권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