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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

  •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100년 전, 1919년 1월 15일 -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그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부인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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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비극의 종말>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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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로자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인용한 문헌>

    1. Takahashi, Shoichi <로자 룩셈부르크>

    2. ICC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팸플릿]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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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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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이슈페이퍼인 「과제」는 평화‧번영‧통일 시대에 민주노총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평화와 통일은 국가와 민족으로 등치되고 공공연히 자본과의 협력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민족 모순만 극복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도, 노동자의 권리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포장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마저도 희석시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 입장에 불과하다. 이 글은 「과제」에 대한 간략한 비판이다.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 요약

     

    「과제」는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평화‧번영‧통일의 한반도 시대’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이라고 평가한다. 선언의 조건으로 북의 핵 무력 완성과 전략의 전환, 미국의 쇠퇴와 미국 우선주의의 등장, 남쪽 민중의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의 등장을 꼽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 노동운동만이 대중적 민간교류를 돌파할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고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는 4.27 판문점선언 발표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간교류 사업을 성사시키면서, 각계 전반에 평화통일 여론을 크게 조성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이 평화‧번영‧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주도하려면, 노동자 자주통일 역량 강화에 최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이 땅 노동계급의 가장 주되는 착취자가 미 제국에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내부적으로 인식 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과제」에 대한 비판

     

    1. 「과제」는 그 어떤 명확한 근거도 없이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만으로 현시기를 평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사는 내적 모순에 의한 공황의 역사이고 전쟁은 이런 모순의 또 다른 현상이었다. 즉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우연이 아닌 자본주의 모순에서 발생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은 항구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평화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노동자 투쟁의 동력을 빼앗고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평화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원칙에 따라 부르주아지를 타파하고 노동자 권력을 확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노동자계급에게 제1차 제국주의 전쟁과 제2 인터내셔널의 사례는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과제」는 평화 시대의 등장 조건으로 일관되게 북한의 핵무장을 꼽고 있다. 하지만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이다.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들과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그렇다 진정한 평화와 제국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에 의한 핵무장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및 세계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뿐이다.

    또한 「과제」는 평화‧번영‧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주도하려면, 노동자 자주통일 역량 강화에 최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적폐 청산과 사회 대개혁의 대상으로서 자본가계급과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은 평화번영, 통일의 길에서 손을 잡아야 하는 복잡한 형국이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과 손을 잡는다면 진정한 평화의 시대는 결코 오지 않고 참혹한 실패밖에 없음을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평화의 시대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열 수 있고 노동자 권력만이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시대 등장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은 단지 특정 시대에서 특정 역할을 하도록 강조되고 있다. 즉, 노동자의 혁명적 열기, 동력보다는 수동적이고 피동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북한 정권이 만든 국면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의 부르주아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3. 「과제」는 민주노총이 이 땅 노동자계급의 가장 주된 착취자가 미 제국에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내부적으로 인식 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노동기본권도, 경제 주권과 경제민주화도, 항구적 평화체제와 자주통일도 결국 이 땅에서는 미 제국의 문제에 달려있다는 점만 분명하게 하면 나머지 문제에서의 차이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말 민족 간의 모순 이외에는 크게 중요한 차이가 없단 말인가? 생계형 자살을 비롯한 자살률 1위 국가, 산업재해 1위 국가, 노동시간 1위, 초중고 수업 최장 국가… 그야말로 노동자계급은 벼랑 끝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중요한 차이가 없단 말인가? 이러한 주장은 결국 노동자계급의 생존을 건 일상과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석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문재인 정권의 지지율이 떨어지다가도 남북회담 등으로 다시 상승하는 현상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남북경협의 열매를 이야기하지만, 그 열매는 자본에게 돌아가지 노동자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다. 결국 국가와 민족이라는 깃발 아래 단결하자는 말은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할 뿐이다. 지난 3차 남북정상회담 때 삼성 자본에 대한 북한 측의 부통령급 대우를 보더라도 명백하다.

     

    이러한 「과제」의 기회주의적 주장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참혹한 재앙이자 교훈이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총구를 같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자국의 부르주아에게 향하자는 ‘전쟁을 혁명으로’라는 레닌의 외침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 세력에 의해 짓밟히며 혁명은 실패했고 노동자계급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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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맑스 탄생 200주년 특집 : 혁명 투사 칼 맑스

  • 혁명 투사 칼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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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억압계급은 위대한 혁명가들을 끊임없이 평생 추적했으며, 가장 야만적인 악의, 가장 격렬한 증오, 거짓과 중상의 가장 파렴치한 캠페인으로 그들의 이론을 대했다. 혁명가들이 죽은 후에는 혁명가들을 무해한 아이콘으로 만들며, 억압받는 계급에 ‘위안’을 주기 위하여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까지는 거룩하게 만들고 그들을 성인으로 떠받드는 동시에 그들 이론의 혁명적 본질을 강탈하고 혁명적 칼날을 무디게 하여 평범하게 만든다.” 

     

    부르주아 계급은 맑스를 일생에 걸쳐서 경찰기구를 통해 박해하고 악마와 동일화시켜 그의 활동을 막기 위한 모든 것을 했다[1]. 그의 죽음 후,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코뮤니즘(공산주의)의 미래를 열기 위해 그의 전투를 왜곡하기 위한 모든 것을 했다.

     

    악명 높은 선전

     

     

    맑스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제작된 모든 출판물, 라디오,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은 이러한 규칙을 따른다. 많은 학자는 경제학, 철학, 사회학에 대한 맑스의 업적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한편, 정치영역에서는 ‘현실과는 멀어져’ 전적으로 실패했거나 완전히 실수한 사람으로 그를 소개한다. 이것은 맑스의 예리하고 전투적인 혁명이론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 이상은 아니다! 오늘날 제기되는 논쟁 중 하나는 맑스가 20세기와 21세기의 미래 혁명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19세기의 사상가"[2]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혁명적인 관점은 오늘날 타당성이 없다.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고, 게다가 맑스의 정치적 프로젝트는 스탈린주의의 공포로 귀결될 뿐이다. 맑스의 모든 정치적 업적은 마침내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의 좀 더 교활한 견해는 맑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와 소외에 대한 비판이라는 요소를 확인하여 ‘진정한’ 맑스의 요소를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맑스를 혁명가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통제 없이 불평등과 경제위기를 만드는 ‘규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개선하고 이해하게 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의 하나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르주아 가운데는 맑스를 자본주의의 위기, 세계화의 예측, 불평등의 성장 등을 예견한 ‘경제학의 천재’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세기보다 더 오랜 기간 맑스에게 아첨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른바 맑스 상속자를 자처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스탈린주의자로부터 트로츠키주의자를 포함한 좌파도 있었다. 이들은 레닌이 앞에서 비판한 것처럼 혁명적인 맑스를 망가뜨리고 손상하고 왜곡하여 반(半)종교적인 우상으로 그를 추앙하고 받들어 모셨다. 이 모든 것은 소련(USSR),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중국에 세워진 국가자본주의(쇠퇴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의 위장된 형태이자 반혁명의 산물)의 지배를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맑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맑스는 엥겔스와 함께 무엇보다도 우선 혁명가였으며 투사였다. 그의 이론적 연구는 이러한 출발점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는 맑스를 책에 둘러싸여서 세계와는 단절된 순수한 학자로 만들기를 원하지만, 오직 혁명적 투사만이 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가 1842년 베를린의 청년헤겔학파(Hegelians)에 참여한 이후부터 맑스의 삶은 프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항한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그가 사회 대다수의 비참함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파리 노동자들과의 토론에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보았을 때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으로 변화되었다. 이 투쟁은 그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추방당해서 떠도는 유배자로 만들었으며 그를 극도의 빈곤으로 몰아넣어서 아들마저도 죽어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프랑스 TV ‘문화’ 프로그램에서 아르테(Arte)가 맑스의 가난에 대한 원인을 맑스나 그의 부인이 유복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가정경제를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암시한 것은 정말로 역겹다. 

     

    실제로 맑스는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연대에 철저했으며, 정기적으로 그의 적은 수입을 혁명운동에 사용했다! 게다가 조나손 스펜서(Jonathon Spencer)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맑스는 ‘언론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프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부르주아에 대항한 투쟁에서 선전의 필요성을 이해한 전사였기 때문에 ‘라인신문’, ‘독일-브뤼셀 신문’, ‘프랑스-독일 연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인신문’에 기사를 썼다. 맑스는 투사로서 ‘코뮤니스트동맹’의 전투에 전적으로 함께 했고, ‘코뮤니스트동맹’이 노동운동의 주요 문서인 ‘코뮤니스트 선언’ 작성을 위임한 것에 대하여 수락했다. (보리스(Boris Nicolaievsky)와 오토(Otto Maenchen)가 쓴 ‘Marx, Man and Fighter’라는 맑스 전기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투사로서 혁명가들의 재편성과 조직화가 그의 활동의 핵심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그의 이론적 작업 전체의 원동력은 노동계급에서 진행되는 계급적 명확성을 위한 투쟁이었다.

     

    맑스의 이론 연구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지킬 것은 어떤 것도 없으며, 착취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엄청난 이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의 이론작업은 이 전투가 사회계급의 출현 이후 나타난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종결 가능성을 포함하며, 노동계급의 해방이 코뮤니즘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자명한 원리로부터 진행되었다. 자크 아탈리(Jaques Attali)의 맑스가 ‘현대 민주주의의 창시자’라는 말은 부르주아의 거짓말일 뿐이다. 이 거짓말은 현 사회가 존재하는 최고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전의 목적은 사멸하는 자본주의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은 코뮤니즘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가 확립한 과학적 방법과 역사유물론은 계급전투를 지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필요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방법론은 헤겔의 철학을 비판하며, 실재의 변형은 항상 변증법적 과정이었다는 헤겔의 발견을 ‘거꾸로 뒤집어’서 넘어선 것이었다. 맑스는 이 방법론을 1848년 파리코뮌과 같은 위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었다. 코뮤니스트 좌파와 같은 후속 세대의 혁명가들은 맑스가 남겨준 똑같은 방법론을 이용하여 1917년 혁명적 물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다. 맑스의 접근법은 효과적이다. 그의 방법을 이용하여 실재를 조사하고 그 분석 결과를 실제 결과와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 혁명가들은 이론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노동계급이 무엇에 대항해야 하는지와 사슬에서 벗어나 그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파괴해야 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기초를 연구했다. 이 연구는 자본주의의 기초가 상품교환이며, 이 상품교환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형태인 임금노동의 기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연구결과를 「리베라시옹(Liberation)」1)이 맑스의 탄생 기념일에 말한 다음의 말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칼 맑스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 구매가 임금노동자가 투여한 노력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말은 만약 누군가가 노동자가 견딜 수 있는 노동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맑스가 사용되는 방법의 보기이다. 이와는 반대로 맑스에게 있어서 ‘노동력 구매’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의미하므로 착취를 의미한다!

     

    맑스는 또한 그의 전투적 관점을 통한 이론작업에서 자본주의 이전의 다른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영원한 체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한계에 부딪혀 역사적으로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이를 법률적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지금까지 운영된 체계에서의 소유 관계이다)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생산력 발전으로부터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족쇄로 변하며,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정치경제학 비판)." 또한, 맑스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프롤레타리아트, 즉 역사의 마지막 피착취 계급이자 모든 것을 빼앗긴 계급이며 그 자신이 가진 노동력의 성격 때문에 혁명적 가능성이 유일한 사회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든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국경을 넘어 연대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위대한 분석들"은 맑스가 반박되었거나, 과거의 일이거나, 또는 맑스가 ‘경제학’ 덕분에 또는 자본주의의 ‘너무 심함’을 바로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反)세계주의자의 이론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된 덕분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든 이데올로기의 혼란은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을 모호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주 1) 리베라시옹(Liberation)은 1973년 사르트르가 창간한 좌파 일간지로, 최근에는 그 선명성을 점차 상실해서 ‘부르주아 보헤미안 성향의 파리지앵’을 위한 일간지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았다(이하 각주 옮긴이).

     

    혁명가조직과 노동계급에 대한 맑스의 관심

     

    칼 맑스에게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코뮤니즘의 도래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행위자로서의 노동계급에 관한 확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과 관련 있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맑스의 공헌은 아주 중요했다. 그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소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통신위원회(Correspondence Committee)’를 조직했다. 그는 “행동의 시점에, 모든 사람이 국내 상황만 아니라 해외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라고 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 안의 국제혁명조직을 만들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의 필요성을 구체화했다. 맑스의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과 이 투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의 가장 깊은 이해는 1847년에 ‘의인동맹(League of the Just)’2)이 ‘코뮤니스트동맹’에 합류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싸움에 그를 밀어붙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예리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코뮤니스트동맹’이 강령을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이는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의 작성으로 나타났다.

     

    ‘코뮤니스트동맹’은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탄압의 타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투쟁은 1860년대 초에 다시 시작되었고 다른 조직화의 노력이 나타났다. 맑스는 1864년에 결성된 ‘국제노동자협회(IWA)’의 창립 초기부터 참여했다. 그는 규약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창립선언을 쓰기도 했다. 조직의 중요성과 그의 이론적 명확성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를 조직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코뮤니스트동맹’의 조직원으로 그는 IWA안에서 ‘코뮤니스트동맹’ 조직이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을 했다. 그의 이론적 관심은 투쟁의 필요와 절대 분리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맑스가 ‘코뮤니스트동맹’에서 바이틀링(Weitling)3)과 만났을 때, 바이틀링의 코뮤니즘에 대한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시각 때문에 “지금까지의 무지는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맑스가 국익의 옹호에 IWA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싶어 했던 마찌니(Mazzini)4)에 맞서서 IWA에서 싸웠던 근본적 이유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 대신에 음모적인 모험을 내세우며 IWA를 통제하려고 계획했던 바쿠닌(Bakunin)5)에 반대한 근본 이유이다.

     

    맑스의 이론적 업적은 19세기 부르주아사회에 대하여 경이적인 빛을 비춘다. 그러나 이 업적을 단순히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마치 부르주아계급의 사이비 전문가가 맑스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처럼, 그의 업적은 보이지 않은 안개에 둘러싸인다. 부르주아는 ‘미래는 없다’라는 생각을 퍼트리지만, 노동계급은 사슬에서 자신을 스스로 해방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맑스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활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투쟁적인 삶, 그의 전사로서의 생활로부터 영감을 얻어야 한다. 즉 그의 이론적 작업은 "세상을 변혁시키자!"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목표와 일치해서 발전할 수 있었다.

     

    Vitaz, June 1, 2018

     

     주 2) 의인동맹(Just of League)의 회원은 주로 독일의 재봉과 목공에 종사하는 장인으로, 1847년 6월,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한 ‘통신위원회’와 합쳐 코뮤니스트동맹을 구성했다. 

     

     주 3) 유럽 도시에서 독일 수공업 직인의 결사 운동을 지도하고, 1850~60년대의 뉴욕에서 이민노동자의 사회건설을 주창한 독일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주 4) 이탈리아의 애국자·혁명가로 가리발디(Garibaldi)를 도와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꾀했다.

     

     주 5)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을 주장했으며, 1868년 제1 인터내셔널에 참가했으나 맑스와 대립하다 제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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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라서 엥겔스는 맑스의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맑스는 그의 시대에서 가장 많이 미움을 받고 가장 거짓말로 평가된 사람이었다. 절대주의자와 공화정부가 그를 추방했다. 민주적 부르주아와 보수적 부르주아가 그에 반대해 연합했다".

     

    [2] 최근 미디어의 대규모 프로모션으로 혜택을 받은 미국학자 Jonathon Spencer는 “칼 맑스 전기”에서 맑스를 ‘19세기의 사람’으로 불렀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옮긴이 ┃ 한동이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807/16482/karl-marx-revolutionary-mili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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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해산 사태와 민주노조 원칙

  •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해산 사태와 민주노조 원칙

    -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구재보 동지 인터뷰 -

     

     

    Q 동지가 활동 중인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에서 올해 가장 큰 조직적 성과는 무엇이었나요? 반대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은 무엇입니까?

     

    A 글쎄요. 조직적 성과라고 하는 것이 투쟁사업장이 승리했다던가, 혹은 조합원 수가 대폭 늘었다거나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한 마디로 답변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 지난 8년간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오고 있는 유성기업지회 동지들이 이번에는 끝을 내자는 각오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본부 역시 유성 투쟁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죠.

    문제가 되었던 사건은 아시다시피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Q 충남지역에서는 올 초 노조 내부 테러 사건에서부터 사상 초유의 지부 해산 사태까지 민주노총 내부는 물론 노동운동 진영 상당수가 경악할 만큼 널리 알려진 사건이 있습니다. 이른바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 해산 사태”가 그것인데요. 이 사태에 대해 충남지부 해산과 세종충남본부 직가입 과정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A 충남지부 현재의 집행부는 작년 초 선거를 통해서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핵심적인 선거공약의 하나가 충남지부에 대해 외부 회계감사를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선 이후 세종충남본부에 외부회계감사를 요청했고, 본부 운영위원회는 회의를 통해 금속노조 법률원 회계사 출신의 변호사를 포함한 회계에 정통한 지역의 동지들로 TF팀을 구성해 감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24일 충남지부 정기모임 자리에서 그동안 진행됐던 회계감사 중간보고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임을 진행하는 도중 50여 명의 조합원들이 들이닥쳐 당시 충남지부 정책국장과 간부 그리고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습니다. 그 결과 유승철 정책국장은 코뼈와 안구 뼈가 함몰되는 등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폭행을 자행했던 자들은 발언권을 주지 않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졌던 일이라며 오히려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3월 10일 충남지부 3월 정기모임에서 결국 회계감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그 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전 집행부가 장악했던 6년여 기간 동안 횡령 유용으로 의심되는 금액이 무려 3억여 원에 이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조합원들은 분노했고, 그 자리에서 폭력을 저지른 자, 회계 비리를 저지른 자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음을 90%가 넘는 찬성으로 결정했습니다.

     

    충남지부가 임금교섭을 진행하던 중 갑자기 전플 본조가 충남지부의 교섭권을 회수했습니다. 당연히 교섭에 나오던 업체는 교섭권 박탈을 이유로 교섭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월 2일 전플은 운영위를 통해 충남지부 해산을 결정합니다. 1만 명이 넘는 충남지부 조합원 중 단 한 명의 동의나 의견을 듣는 절차도 없었습니다.

     

    교섭권을 박탈하고 지부를 해산시킨 전플 본조는 업체에는 교섭에 임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한편 지부에는 조합비 등 지부의 모든 재산을 모두 본조로 회수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폭행범, 회계비리범과 함께 다시 현장에서 얼굴 맞대고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지부 조합원 동지들은 세종충남본부 운영위에 지부 해산이 철회될 때까지 직가입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사측은 전플 본조의 결정을 근거로 교섭을 해태하고 충남지부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부터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현장 투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도부의 지침이 없이도 현장 사안들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Q 민주노총 충남본부(운영위)에서는 충남지부의 직가입을 승인했고, 민주노총 중집 결정과는 달리 일관되게 충남지부 해산 철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종충남본부 입장의 판단 근거는 무엇입니까?

     

    A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라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사실이 판단 근거입니다. 뭔가 대단한 논리나 명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전 노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악질 자본과 검경을 상대로 노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했던 조합원들입니다. 당연히 그 동지들이 노동조합의 주인이죠. 게다가 전플 본조는 충남지부의 교섭권마저 회수했습니다. 1만이 넘는 조합원의 생존이 걸린 교섭권을 어떻게 위원장 혼자 쥐락펴락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민주노조라고 할 수가 없지요. 교섭권을 빼앗기고 지부가 해산된 상황, 그러나 민주노총 중집은 이 어이없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입장도 내지 못하고 있었죠. 세종충남본부와 운영위 동지들은 ‘충남지부 조합원 동지들은 민주노총 조합원이고 노동조합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지난 10여 년간 동지라고 부르며 함께 투쟁했던 전플 본조로부터 버림받은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하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민주노조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세우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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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운영위의 충남지부 해산 결정과 새로운 지부 설립을 다수의 현장 조합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A 세종충남본부 운영위 결과만 봐도 일련의 사태에 대한 현장의 의견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지난 9월 13일 플랜트 충남지부 해산 사태에 대해 지역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지들 대다수는 어떻게 민주노조에서 지부 해산이라는 사태가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요 시군위원회(서태안위원회, 당진시위원회, 아산시위원회)과 충남지역 열사회(이현중,이해남,박정식,박종길,최종범,한광호,김종중열사)가 지부 해산을 철회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입장문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Q 현재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뜻과 이해관계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고, 왜곡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A 뜻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조합비를 횡령 유용한 자들과 2월 24일 조합원을 폭행한 자들에 대해서 징계하고, 지부 해산 결정을 철회하라는 것입니다. 반영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플 본조와 여러 SNS를 통해 충남지부 동지들의 투쟁이 왜곡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횡령유용과 관련해서 고소를 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그 누구도 구속되지 않았고 아무런 결과가 없기 때문에 회계감사 결과가 잘못됐다는 것, 2.24 폭행은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오히려 충남지부 김준수 집행부가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막고 생존권을 빼앗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지금의 사태의 본질이 노조 집행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파 간의 갈등이라고 왜곡 하는 것입니다.

     

    Q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인 전체 조합원의 이해관계 방어 차원에서 이번 사태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경우 민주노총의 책임은 무엇이며, 세종충남본부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계신가요?

     

    A 민주노총은 민주노조의 원칙과 기본, 상식을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파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번 사태는 정파 간의 갈등으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민주노총 백석근 사무총장과 세종충남본부 운영위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사무총장은 플랜트 충남지부 해산은 ‘노동운동의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민주노총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아직까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노동운동의 상식을 뛰어넘은 만행을 저지른 전플 본조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입니다.

    세종충남본부와 운영위는 토론을 통해 지부 해산이 철회될 때까지 함께 투쟁할 것을 결정했고, 그때까지 한시적으로 충남지부의 직가입을 승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충남지부 조합원 동지들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민주노총 조합원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충남지역 노동열사추모사업회와 세종충남본부 지역위원회 대표자들이 충남지부 해산 철회를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는데, 공통의 문제의식은 무엇입니까?

     

    A 앞서도 말했듯이 노동조합 설립과 가입, 탈퇴와 해산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바로 조합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민주노조의 기본적인 원칙이니까요.

     

    Q 이 문제가 계속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체 노동운동 진영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함은 물론이고 충남지부 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확산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려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A 어렵네요.

     

    Q 이 문제가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운동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A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노조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진 그 누군가에 의해서 조합원들의 생존이 좌지우지되는 노동조합을 어떻게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와 자본이 국민과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짓거리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민주노총의 역할입니다. 사무총장도 밝혔듯이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밝히고 바로 잡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Q 민주노총 내 조직 갈등에 대한 민주노총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동지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플랜트 충남지부 해산의 문제는 조직(정파) 갈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적 원칙과 기본을 바로 세우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조직 내 갈등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습니다.

     

    Q 이러한 문제에 있어 중립을 요구받는 노조활동가는 사실상 한계가 분명합니다. 이에 대한 동지의 원칙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A 가끔씩 저에게도 중립을 요구하는 동지들이 있기도 합니다. 반대로 중립을 지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노조 활동가에 대한 중립 요구는 마치 정권의 공무원, 교사들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말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밝히는 것이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Q 이 문제의 올바른 (운동적) 해결을 위해 충남지부 조합원 동지들, 충남지역 동지들, 민주노총, 그리고 노동운동 진영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제한 없이 해 주십시오.

     

    A 플랜트 충남지부 사태는 매우 복잡합니다. 우선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사태의 진실과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기 위한 노력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충남지부 해산 철회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민주노총 역시 눈치 보지 말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줌으로써 민주노조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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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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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혁명 100주년, 지워진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에 세계혁명의 길고 험난한 과정을 깨우치게 했다. 반면에 지배계급에는 혁명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했고, 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했다. 1917~1921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패배한 이후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학살하며 직접 공격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파시즘과 반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계급투쟁의 암흑기1)이다.

     

    이후 1945~1989년 미-소 제국주의 블록의 냉전 시대에는 서로 간의 대립과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왜곡하고 음해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주의 국가를 10월 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왜곡했고, 서구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제국주의 간 대립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소련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심지어는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로 혁명운동은 강력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지배계급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노동계급 내부의 억제력으로 혁명의 불씨는 물론 일상적인 계급투쟁까지 잠재우고 있다.

     

    ‘공산주의(코뮤니즘)의 붕괴’에서 포퓰리즘의 등장까지 지난 수십 년간,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좋게 봐도 세상과 관계없는 괴짜, 멸종 위기에 처한 희소 동물로 비치고 있다. 현재 노동계급의 다수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대해 대부분 잊었고, 혁명 전통의 일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망각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보다 생산 수단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더욱 ‘새로운 것’에 의존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경험인가에 대한 왜곡은 노동계급에 기억상실을 일으킨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의존은 소비뿐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의 기억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교훈까지 잊게 하는 데 유용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은 미래의 투쟁에 적용할 진정한 교훈까지 버리면서 자신의 혁명적 전통을 망각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전히 인류의 미래와 함께하는 계급이며,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끌어내 공산주의(코뮤니즘)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 따라서 역사적 과거에 대한 교훈을 찾고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지워진 혁명의 기억을 되살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현재 위기를 돌파해 낼 첫걸음이다.

     

    2. 혁명적 소수란 무엇인가?

     

    작년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자 세계혁명의 미래’를 꿈꾸게 했던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날의 계급투쟁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혁명적 상황과 무관한 지금의 노동자투쟁은 러시아혁명의 엄청난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욱이 지금은 러시아혁명과 같이 혁명적 투쟁이 분출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그런 대중행동을 예측할 수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정세에서 일관된 목표를 갖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혁명적 소수’의 문제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1905년 자발적으로 출현한 소비에트를 촉진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었고, 1917년 소비에트를 다시 등장하게 만든 것도,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소수였기 때문이다.

     

    혁명적 소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최종목표와 혁명의 전망을 갖게 된 인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나오고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때문에 ‘계급의 일부’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에서 계급적 소수파도 운동의 최종목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계급투쟁에 원칙적이며 가장 활성화된 부분을 차지한다. 계급투쟁의 확산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바로 이들이 얼마나 계급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승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이들이 대중행동을 대신할 수 없고, 정세와 무관하게 대중의식을 고양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소수가 계급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투쟁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투쟁을 자극하고 전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오랜만에 분출된 투쟁은 우리 희망과는 다르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좌절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수파 운동의 존재 이유이며, 단순히 소수라서 항상 다수를 추종하고 계급투쟁의 최종 승리보다 다수파가 되기 위한 운동은 혁명적 소수의 운동이 아니다.2)

     

    지금의 암울한 현실에서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면서 혁명적 소수의 복원에 중점을 두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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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과 교훈

     

    첫째, 혁명적 소수는 1905년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에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자발적으로 출현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당시 자본주의는 발전의 정점에 있었고, 전 세계를 하나의 경제 및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에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분출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96년부터 1896년,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직물 노동자들의 총파업, 남부 러시아 일대를 뒤흔들었던 1903년, 1904년의 주요한 파업 등 줄곧 수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 배경이다. 이때 혁명적 소수였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끊임없는 정치 선동과 조직 활동이 소비에트의 출현에 크게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본질에서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다양한 계획, 토론,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는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여기서 대중의식의 주목할 만한 성장(자신의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집단적 흐름)이 있었는데, 여기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 중요했다.

     

    둘째, 혁명적 소수는 10년간 사라졌던 소비에트를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05년 12월 혁명의 패배 이후 소비에트를 되살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서서히 쇠약해졌고 1907년 봄 결정적으로 사라진다. 소비에트의 자발적 참여와 집중을 경험한 정권이 파업 투쟁과 새로운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위해 끔찍한 탄압을 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1917년 부활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러시아에서 사라진다.

     

    소비에트가 사라진 1905년에서 1917년 사이 소비에트는 단지 소수 투사의 정치 투쟁 지향점이었다. 혁명적 소수파들, 특히 1905년 이후 볼셰비키는 투쟁을 단호하게 밀고 나아가기 위해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발상을 방어하고 전파했다. 이 소수파들은 노동계급의 집단 기억에서 소비에트의 불씨를 살려냈다. 순식간에 퍼진 2월 파업과 함께 소비에트를 세우기 위한 수많은 계획과 호소가 있었다. 볼셰비키는 오랜 기간 소수파들에 국한되어 왔던 소비에트라는 발상을 투쟁하는 대중 안에서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이끌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출현에 기여한 것은 소비에트 형성을 위한 중개 조직의 역할이 아니라 정치 투쟁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정치적으로 투쟁했다. 1915년 레닌은 제국주의적 반동적 전쟁으로 나가는 군수사업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면서, 파업위원회의 선거, 전 러시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혁명적 소수는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6~7월 소비에트의 위기와 대중들의 이반이 나타났을 때,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사건은 가장 선진화된 노동자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져 완전히 사기가 꺾이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뒤에 숨지 않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면서 왜 지금 시기가 권력을 쟁취하는데 무르익지 않았는지 설명했다. 이것은 당시에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독일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중상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풀뿌리 소비에트 조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비에트의 부활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고,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열정적이고 친밀하고 인내심 있는 볼셰비키당의 토론3)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타깝게도 1919년 독일 베를린 노동자들과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함정을 피하지 못했고,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한다.

     

    넷째, 볼셰비키당의 오류 : ‘소비에트와 국가 문제’에서 볼셰비키당은 국가를 끊임없이 강화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를 배제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만의 국가가 아니라서 소농계급, 쁘띠부르주아지 및 여러 중간계층을 포괄했다. 이 계급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방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 혁명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쁘띠부르주아 사고방식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전과 세계혁명의 지체는 전직 차르 관료 재고용과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하게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새롭게 나타난 관료를 포함하여 자신을 소비에트 국가와 동일시하는 관료 계층을 형성케 한다. 결국, 관료주의의 성장과 국가기구의 강화는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를 제압했고, 국가의 이익이 노동계급의 이익보다 우선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강화는 볼셰비키당의 흡수로 이어진다. 레닌은 볼셰비키당과 중요한 당원들이 정부의 관여한다면, 스스로 그 체계에 갇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세계적인 관점을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1918년 7월 소비에트 정부가 최종적으로 볼셰비키화 되자 볼셰비키당은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 전직 차르 관료들, 멘셰비키 전향자들로 들끓었다. 그들에게 당은 출세와 취업의 수단이었다. 그 후 볼셰비키당은 수많은 숙청을 통해 이런 유입과 싸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력해진 국가기구와 볼셰비키당의 통합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로 이론화되었고, 볼셰비즘은 당국가로 변화한다.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치적 장악과 당의 지배를 결정했고, 카메네프는 “공산당(볼셰비키당)은 러시아의 정부이다. 60만 명의 당원이 러시아를 지배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920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모든 의식적인 노동자는 노동계급의 독재는 계급의 전위인 공산당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결국,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 일부로서 전위 역할을 포기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전위로서 볼셰비키당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다 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기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끊임없는 투쟁과 토론, 참여의 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기구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노동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며, 토론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진정한 계급의 기구이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혁명적 소수-볼셰비키를 비판하는 또 다른 혁명적 소수에 대해서도 정확히 비판해야 한다.

     

    먼저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세계혁명 패배의 한복판에서 볼셰비키의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소비에트)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 동안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소비에트를 약화했고, 1921년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소멸로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당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 실패에 따른 고립으로 혼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안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가 있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런 오류들은 범하지 않거나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훈은 앞으로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혁명적 소수는 국제적 전망을 하고 국제적 수준에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을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평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지나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평의회주의자들은 또한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 ‘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 조치의 채택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도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과업(세계혁명)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4) 평의회주의자들의 볼셰비키 비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세계혁명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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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다시 혁명적 소수의 복원을 위해

     

    우리는 한 시대, 한 계급의 혁명을 언급할 때 한편의 무용담이나 화석화된 경전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혁명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역사는 일어날 것 같은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다. 러시아혁명은 실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이자, 계승해야 할 혁명 전통이다.

     

    100년 전 혁명을 돌아보며 필자는, ‘혁명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과 현재도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거짓 환상’ 공세가 같은 맥락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공세는 너무 오랜 기간 지속하였고 지금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유일한 혁명의 기억, 미래에도 필요한 혁명적 전통까지 망각할 위험에 놓여있다. 그래서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지금과 같은 계급투쟁과 혁명운동의 극심한 침체기에 그것은 더욱 혁명적/계급적 소수의 책임이다.

     

    혁명적 소수의 복원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혁명적 실천의 복원은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과거를 지우고 혁명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왜곡되고 지워졌어도 과거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찾고, 혁명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에서 러시아혁명이 지워진 것은 지배계급의 공세 때문이지만, 혁명적 소수의 책임도 크다.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거짓 환상’과 다른 한 편의 ‘가짜 사회주의’와 철저히 단절시키지 못했고, 계급투쟁에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이라는 최종목표를 분명히 하면서 전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후퇴와 패배의 연속은 혁명적 소수를 계급투쟁과 계급의식 발전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는 작은 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의 극심한 침체는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에서 겪어야 할 필연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실패의 유산을 반복하지 말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낡은 운동인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로부터 시작했듯이, 낡은 운동과 지금 당장 단절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필자는 낡은 운동과 단절한 혁명적 소수의 운동을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과거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이라 규정했다.

     

    첫째,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치사상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여러 운동과 다양한 대중행동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더욱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발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운동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문화와 심리 등 인류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영역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자본주의 가치법칙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 총체적 운동이어야 한다.

    둘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혁명적 계급의식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개별 활동의 연합이 아니라 ‘집단적 활동’, ‘지속성’, ‘실현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혁명 강령과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집단적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해주며, 이것은 코뮤니스트 조직의 생존 기반이자 물질적 힘이다.

    셋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조직에서도 코뮤니즘 원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기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코뮤니스트조직은 과거 왜곡된 전위당 노선이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과 같이 일방적 지도체제와 획일적 성원 규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에 기반을 두고 성원들의 자발성, 다양성, 창조성을 극대화하는 조직체계를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조직 운영은 총회에 책임을 지는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내부 소통에서는 이론과 지식, 정보에 대한 정직한 표현과 전달, 그리고 토론에서 상호 존중과 모욕 금지, 차별금지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이형로, (코뮤니스트 5호, 2017 . 4)

     

    여기에 더해, 그동안 계급 운동을 왜곡하고 새로운 운동과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운동 사회 내부 모순과의 단호하고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또한,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차별에 대한 ‘집단적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피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계급 내부에서도 다양한 차별과 억압구조 아래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동은 바로 이러한 공감과 투쟁을 통해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5. 혁명적 소수의 기본임무는 분파 활동

     

    노동자운동과 계급을 위한 교훈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조직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원칙 없이 ‘계급정당’을 선언하거나 퇴행적 강령(정치원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혁명조직’을 자임하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한 과거의 반복이거나 퇴행하는 노동자운동에 따른 결과이다.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역사에서 우리는 혁명적 소수의 진정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제 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본주의 체계 속으로 통합(자본주의와의 어떠한 혁명적인 단절 없이도 사회주의를 향해 평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개혁주의적 흐름)되어 갈 때,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최초로 인지했던 ‘좌파’ 흐름(분파)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레닌,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판네쿡, 이탈리아의 보르디가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으로 활동해야 했지만, 이들 중 누구도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았다. 기회주의 흐름이 제2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퍼지자 그들은 각각의 정당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분파로써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타락해가는 제3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리해 나왔던 코뮤니스트좌파들의 국제적인 분파 활동이 있었고, 1928년 이후 스탈린주의 반혁명세력에 맞서 투쟁해 온 수많은 코뮤니스트들의 공헌이 있었기에, 소수이지만 오늘날 진정한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 형성에 기여할 혁명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역할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 << 4/3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Bilan(빌랑), (1933. 11)

     

    그러므로 혁명적 소수는 여기서 후퇴를 멈추어야 한다. 모든 낡은 실천과 조직을 멈추고 다시 ‘혁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낡은 운동의 복원이 아니라 혁명적 전통의 복원을 통해 다시 한번 제대로 된 운동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것의 시작은 혁명적 분파 형성과 활동이다.

     

    현실에서 원칙을 지키며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의식적 노동자들과 함께 다시 한번 소수파 운동, 그 고난의 길에서 투쟁하자.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혁명적 분파 운동으로 전진하자.

     

    혁명 강령,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적 실천에 기반을 둔 분파 형성, 혁명조직 건설로 나아가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토론회> 발제문을 보완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주>

     

    1.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1930년대는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이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는 혁명운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2. "계급에 대한 당의 궁극적 목표는 계급을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이 다수가 되어, 계급 자신의 힘으로 혁명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시기(계급의식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균질하지 못했을 때) 당의 역할은, 이러한 상태의 계급 안에서 다수를 획득하거나 국면적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가 되더라도 혁명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계급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당장 인기와 계급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판단하여 “미래에 계급이 얼마나 혁명적으로 변화되었나?”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것도 혁명적 정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일상시기 또는 침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다수의 계급의식과 타협하는 영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수에 대한 영향력을 잃더라도, 혼란에 대해 단호하게 단절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노동계급에 진정으로 공헌하는 길이다. 혁명조직이 노동계급에 근거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끈기 있는 인내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모든 활동의 방향이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변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는 것에 있다." <<사노위 실패의 교훈과 혁명당 건설 투쟁의 연속성>>, 이형로, (마르크스21 제11호, 2011.9)

     

    3.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이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하게 하려면 모든 토론이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었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생 시몽(Saint Simon)과 오웬(Robert Owen)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 문화 : 계급투쟁의 무기>>, ICC, )International Review no.130 - 3rd quarter 2007)

     

    4. (필자)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장애물이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코뮤니스트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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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김민수 조합원 인터뷰

  •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김민수 조합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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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이재용과 박근혜 재판 판결은 한국 사회가 "삼성 공화국"임을 증명했습니다. 삼성 권력이 사법 판결도 좌우하는데, 이렇게 거대한 권력에 맞서 직접 싸워오신 주체로써 느끼는 현실은 어떠신지요?

     

    A. 삼성의 탄압이 있는 동안 법원은 과연 조사할 마음이나 있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2014년도 염호석 열사의 시신탈취에 삼성이 개입한 정황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 염호석 열사 유골 탈취를 위해 경찰 3개 중대를 끌고 온 경비과장을 향해 저는 “왜 세월호부터 여기까지 가족이 죽어 슬픈 유족들만 따라다니며 괴롭히느냐, 그 게 경찰이 할 일이냐” 고 크게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성과 결탁한 (정부의) 경찰 앞에 열사의 유골함까지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작년 촛불에서 드러난 삼성의 박근혜 정부 로비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본이 정부를 지배하는 삼성공화국은 모두 사실 이었다는 것을 알고 치를 떨었습니다.

    염호석 열사의 묘는 아직도 동해안의 모레 한 줌만 들어있는 가묘입니다. 반드시 저들을 처벌하고 열사의 시신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사의 시신부터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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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호석 열사의 유서>

     

      염호석 열사 시신탈취 사건 경과

       - 5월 17일 : <삼성> 염호석 열사 부친 접촉

       - 5월 18일 : <삼성> 부친 회유, 시신 값 6억

                                        <경찰> 1차 대규모 경력 투입, 시신 탈취

    - 5월 20일 : <경찰> 2차 대규모 경력 투입

                 <경찰, 친부> 유골함 탈취

     

    Q. 최근 폭로된 노조파괴 문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다시 구속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삼성이 노조파괴까지 하면서 반노동자적, 반인권적 경영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삼성 서비스 지회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직접 경험하신 삼성의 노조파괴에 대한 사례를 말씀해 주세요.

     

    A. 사내유보금 늘리기와 그룹 경영 3대 세습 구조가 반노동, 반인권 경영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부터 한 회사 내에서 각 셀로 무리를 구분하여 서로 경쟁 또는 반목을 하도록 유도하는 경영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전국의 많은 삼성노동자들을 하청비정규 노동자로 다시 분류하여 노동자 간 계급을 구분하고 서로를 반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노조를 세우니 각종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전산에서는 수리기사의 제품별 수임 능력이 A, B, C, D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직원들에게 티비, 냉장고, 모니터 등 콜 수임 능력을 모두 A로 규정해서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확인해보니 조합원들은 모두 C나 D등급으로 분류되어 있고 비조합원만 모두 A등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측은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조합원만 낮은 수임등급을 주고 일감 줄이기를 하여 고사작전을 펼친 게 분명했습니다. 결국, 투쟁으로 제자리에 돌려놓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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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뇌물공여, 노조파괴, 산업재해 등 헤아릴 수 없는 삼성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절대권력을 가진 재벌의 잘못된 사회 지배, 노동자 통제 시스템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현재와는 반대로 사회가 기업을 지배하고, 노동자가 일터를 통제해서 스스로 안전과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무엇보다 학교에서 노동법 한번 배워보지 못하고 사회에 나오고, 아침 일찍 등교해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자연스레 회사의 장기노동시간을 예비체험 시키는 교육구조 개혁이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과 수동적 행태 속에 모두 예비노예가 된 상황이라 노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힘들고, 지속시키기도 힘들고, 조합원의 생각이 사측과 흡사해서 함께 좌절을 겪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육을 먼저 바꾸고 그 바탕 위에 노동조합을 세우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약한 처벌규정이 조합 활동에 큰 걸림돌입니다. 삼성과 같이 사내유보금이 많은 대기업은 벌금에 연연하지 않고 노동자를 납치, 감금, 해고, 폐업 등 수단 가리지 않고 탄압을 합니다. 이번 노조파괴 문건을 계기로 더 강력한 처벌 규정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Q. 박근혜를 연인원 1,700만 명이 넘는 촛불 투쟁이 계기가 되어 끌어내렸듯이, 삼성도 전 사회적인 투쟁이 있어야 작은 승리라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싸워오셨습니다만, 삼성의 태도로 봐서는 앞으로도 긴 싸움이 계속될 것 같은데, 오랜 기간 싸우시면서 바뀐 상황(삼성, 정부, 노조)은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삼성의 사회적 책임보다는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싸움의 과정에서 삼성의 본질은 얼마나 폭로되었나요?

     

    A. 박근혜 투쟁 때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이재용 구속’이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광화문 광장에 오는 분들에게 아주 많은 양을 배포했습니다. 그 결과 이재용도 구속하라는 구호가 촛불 투쟁 속에서 묻어나왔습니다. 결국, 박근혜와 이재용은 함께 구속되었지만, 아쉽게도 박근혜만 감옥에 있고 이재용은 풀려났습니다.

     

    삼성은 무노조경영을 신화라고 불렀던 기업입니다. 6천 번에 걸친 사상 초유의 헌법 유린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를 가만히 덮어두고 가면 안 됩니다. 이재용을 처벌하고 3대 세습을 반대하며, 그간 반도체공장의 산재노동자와 각 현장의 산재 은폐, 삼성물산의 폭력적인 제주 해군기지 건설과 그 건설자재인 철근이 세월호에 무리하게 실렸던 모든 정황까지 밝혀내고, 대한민국의 헌법은 삼성의 것이 아닌 노동자와 빈민의 힘에서 나오는 것임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Q. 한국사회에서 삼성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삼성 노동자의 문제는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고, 삼성의 노조파괴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비롯한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삼성 서비스 지회 투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A. 염호석 열사는 저 뜨는 정동진의 해처럼 지회가 빛나길 기도하며 떠나갔습니다. 가는 길까지 함께했던 조합원의 아버지 병원비를 걱정하며 떠나갔습니다. 삼성이 6천 번의 돌을 던졌지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염호석 열사 정신입니다. 누군가를 구분하지 않고 만인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 바로 그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자본가와의 대투쟁 앞에 동지들의 사소한 아픔은 잠시 접어둔다는 전제를 깔고 서로를 혐오하고, 노동자 간에 차별을 두고, 빈민, 장애, 여성, 성소수자 등을 차별, 혐오한다면 우리가 모두 조직화 되어도 해방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곧 무너질 따름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더 희생할 때 비로소 해방세상은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곧 열사정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Q.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삼성 서비스 지회 투쟁에 연대했던 분들께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A. 연대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승자이며 저들은 패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무노조경영은 무너졌었고 우리는 이겼었습니다. 함께 도와주신 모든 연대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정신 잊지 않고 몸이 다할 때까지 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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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탄생 200주년 기념 토론회 「자본주의와 맑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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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 탄생 200주년 기념 토론회

    「자본주의와 맑스주의자」

     

    ▶ 일시 : 2018년 12월 8일(토요일) 오후 2시 ~ 5시

     

     

    ◆ 사회 ┃ 한형성

     

    ◆ 발제

     

    21세기 맑스주의??? ┃ 원영수

    자본주의 쇠퇴기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 오세철

    계급투쟁 100년과 노동자계급의 험난한 길 ┃ 이형로

    현 시기 격화하고 있는 제국주의 패권쟁투와 사회주의자의 임무 ┃ 양효식

    미제국주의에 맞선 북한식 사회주의의 선택 ┃ 배성인

     

    ◆ 토론 ┃ 김진업, 김종원, 김충석, 최규진

     

     

    주최 : 사회실천연구소,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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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복간호]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김수행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자이었던 그는 강단의 학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한데 어우러져 노동자 관점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취지와 만나 지금의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천』지는 “맑스주의 이론 진영의 동향을 점검하고 좌파 저널에 실린 해외논문과 세계사회주의 정치운동 진영의 주요 기관지 등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한국 맑스주의 이론진영에 튼튼한 밑바탕을 제공”하기 위해 발간했습니다.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실천』지를 복간하는 시점에서 김수행 선생의 ‘특별한 실천’이 새겨져 있는 사회실천연구소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왜 다시금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토론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이자 영원한 동지인 오세철 선생과 함께 그분을 다시 만나러 갑니다.

     

    다시 김수행 선생을 만나다

     

    Q : 올해가 68혁명(또는 68투쟁) 50주년입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오세철 선생에게 68년 반란의 물결은 실제 현실에서 존재했는지요? 존재했다면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A : 1968년은 미완의 4.19혁명, 5.16쿠테타 이후 유신으로 가는 길목이었어요. 당시 베트남 전쟁, 유럽의 68운동, 남미의 민족해방운동의 간접적인 영향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럽과 같은 반(反)관료주의 등의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1965년 한일회담 반대 같은 민족주의 경향,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투쟁, 월남(베트남)파병 반대 등에 간접적 영향이 있었죠.

     

    Q : 세계적으로는 68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군사정권까지 격동의 20~40대를 보내셨는데, 당시의 (급진적, 실천적)지식인과 지금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A : (1963~1983) 이 시기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기였어요. 그 중 1979년 말에서 1980년 봄까지 짧은 민주화 기간을 빼고, 이 시기의 지식인 운동은 군부독재 반대(타도) 투쟁에 집중하면서 민주투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지식인 운동이 부르주아 세력에 흡수되어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비판적지지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는 사회주의, 코뮤니스트 운동으로 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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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19혁명 49주년 - 교수․연구인 시국선언 (2009년 4월)

     

    Q : 같은 시대를 보낸 김수행 선생과 오세철 선생 두 분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처음 만나셨습니다. 코뮤니즘이라는 목표에서 같은 곳을 향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셨는데 어떤 계기로 사회실천연구소까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까?

     

    A : 2004년 명예퇴직 후 실천 운동에 전념했어요. 맑스주의 연구자들과 『사회이론연구소 : 빛나는 전망』을 만들었고, 혁명적사회주의 운동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정치연합』을 만들었고, 『맑스주의 대학원』을 설립하여 젊은 맑스주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을 양성하자는 운동도 시작했죠. 그동안 한국에서 맑스주의는 분과학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에 갇혀있었고, 역사학을 포함한 보다 넓은 지평과 만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맑스주의 종합연구소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과학과 역사학(최규진), 그리고 인문학이 결합한 연구소, 연구자(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의 김수행)와 실천가(사회주의자로서의 오세철)가 결합한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오세철, 김수행, 최규진이 깊은 토론을 거쳐 『사회실천연구소』의 설립을 결정합니다. 김수행에게는 최규진과 내가 사회실천연구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했는데, 에피소드로 사당역에서의 대취사건이 있었고 김수행의 제자들은 반대했지만 함께 하게 되었죠.

     

    “ 더 중요한 것은 2006년 11월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제안이 있기 전, 종합 사회주의연구소를 향한 주제를 놓고 김수행과 나 그리고 최규진이 나눈 토론이었다. 나와 최규진은 연구소 설립문제를 여러 해 고민해 온 사이인데, 사회과학대학원 설립과 맞물려서 김수행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의 전제였다. 김수행은 흔쾌히 동의했고, 그 날 우리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수행은 나처럼 자주 많은 양의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애주가이고 술맛나는 자리에서는 대주가가 된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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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013년 여름 김수행 교수 자택에서의 사회실천연구소 수련회가 끝난 후

     

    Q : 사회실천연구소를 만들 때, 그리고 연구소 주요 성원들이 참여한 사회주의노동자연합과 국가보압법 탄압사건이 있었을 때, 김수행 선생의 도움(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A : 책에 쓴 내용대로입니다.

     

    “김수행은 경상도 사나이라 말수가 적지만 한마디 하면 그 뜻이 확실하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사무실을 얻어야하는데 목돈이 없었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사무실 보증금에 돈을 보탠 적이 있는데, 그 일부를 차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김수행을 만났다. 얼마를 빼 갈테니 그 부분을 메꿔달라고 했다. “그래 알았어”라고 한마디 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Q : 김수행 선생과 함께했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연구소 활동을 돌아보면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무엇이었고,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김수행 선생께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요?

     

    A : 긍정적인 것은 5~6년간의『실천』지 발간입니다. 맑스주의 관련 주요 글을 망라한 의미 있는 실험이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연구소 안에 활동가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실천」의 빈곤이었죠.

     

    김수행이 답했다면, 긍정적인 것은 연구자들의 단합과 헌신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사회과학대학원』의 실험에 역부족이었다는 것 아닐까요. 『자본론』수강생이 70%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었으니까...

     

    Q : 오세철 선생께서는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지인 김수행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수행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 일상에서 사람과 운동을 대하는 모습은 어떠셨습니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A : 하나는 사노련 재판 때의 모습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걸린 「사노련」재판 때에도 변호인 측 증인으로 참석해 판사와 검사에게 호통치며 일갈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법원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과 집회에 꼭 참석하여 힘차게 발언하는 김수행의 실천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 같은 사람도 잡아가야지” 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두 번째는 사회실천연구소에서의 모습입니다. 연구소의 『자본론』 강의 후 자주 가는 ‘을지로 골뱅이’에서 있었던 뒤풀이 에피소드인데요. 강의에 참석한 수강자들과 남궁원, 김수행, 나 이렇게 뒤풀이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김수행은 나에게 처음으로 “나 공산주의자야” 라고 고백했어요. 그러니까 2014년경, 당시 72세의 김수행이 맑스주의자, 공산주의자(코뮤니스트)로 커밍아웃 한 것이죠.

     

     

    다시 김수행 선생을 부르다

     

    Q : 올해는 맑스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코뮤니즘)을 지향하고 현실에서 투쟁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로서 평생의 과제이자 삶의 동인(動因)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추구하고 실천하던 맑스주의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느 점에서 다른가요?

     

    A : 맑스주의자로서의 사상이론(특히, 『자본』과 관련하여)의 기본은 둘이 같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맑스의 삶, 즉 그와 연관된 세계 코뮤니스트운동,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공언하기 전에 실천적으로는 사민주의좌파로서의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 상황에 방점을 둔 것은 사실입니다.

     

    Q : 김수행 선생의 친한 벗이자 동지였던 선생께서는 그분이 쓰신 책과 논문을 대부분 보셨을 텐데, 지금 우리가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십시오.

     

    A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신정완 편, 2007년, 서울대 출판부.입니다. 이 책은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으로 김수행과 제자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제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 제1장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김수행이 집필했고, 나머지 장과 2~4부는 제자들이 썼어요. 「제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 「제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 「제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

    이 책을 보면 당시의 김수행과 그 제자들이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 상과 그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Q : 김수행 선생이 못다 이루고 간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과제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 김수행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와 나는 공동으로 새로운 사회의 강령을 포함한 구체적 방법론을 대담형식의 연재물로 『실천』지에 싣기로 했으나 미완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코뮤니스트의 공동의 과제로 남아있고 이를 위한 공동의 연구와 그 실현을 위한 혁명적 투쟁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진정한 코뮤니스트들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Q :  첨부한 글은 사회실천연구소의 성원이었던 남궁원 동지가 김수행 선생을 인터뷰한 글입니다. 인터뷰 내용 중 김수행 선생이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라는 책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다.

     

    “내가 (소련을)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리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김수행 선생의 답변에 동의하시는지요? 선생의 맑스주의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 주제가 발전적이고 심화된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지요?

     

    A :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1) 상품, 화폐, 임노동, (시장)의 소멸을 말한 것, 계획경제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 이라고 한 견해에 동의합니다. 2) 그러나 계급과 국가의 소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부분적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3) 새로운 생산자의 연합을 국가로 등치시킨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개념과 혼동한 것 같습니다.

     

    <보충>『한겨레신문』에 베네수엘라 차베스주의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나와 김수행의 차이 : 물론 이는 전태일연구소와 사이버노동대학과의 관계이기도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민주의에 대한 태도와 비슷하게)

     

    Q : 김수행 선생은 평소에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호소하셨습니다. 지금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작년의 촛불 투쟁과 지금의 미투 운동에도 함께 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두 분이 무엇을 함께 하셨을까요?

     

    A : 그가 살아있었다면, 촛불투쟁에 분명히 함께 하고 토론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이야기 했을 겁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세대를 넘어선 코뮤니스트운동으로서의 의미를 논의하고, 우리세대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적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진지하게 터놓고 토론했을 겁니다.

     

    2018년 5월

    오세철 사회실천연구소 회원 인터뷰

    이형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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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Q : 2008년 자본주의 공황 이후 유럽에서도 『코뮤니스트 선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맑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까?

     

    A : 내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간 게 1961년이야.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방법이 없느냐 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1학년 때, 책 읽기 위해서 일본 말을 서너 달 배웠어. 그때 상과대학에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책이 많이 남아있어서 일본 책으로 이론에서, 경제사에서, 경제사상사에서, 맑스와 맑스의 위치를 공부했지.

     

    독학으로 맑스주의 입문

     

    Q : 선배들 권유가 아니라, 선생님은 독학하셨네요.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하고 남산에서 고초도 당하셨죠?

     

    A : 우리 때는 권유 그런 거 없었어. 독학을 했지.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으로 [금융자본에 관한 일 연구]를 썼는데, 힐퍼딩과 독점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은행자본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느냐 하는 공부를 했지. 주로 일본 책 읽으면서,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경제학과 조교가 됐어. 신영복 선생님과 만나는 것은, 상과대 경제학과에 동아리가 있었는데, 경우(經友)회가 있었지. 내가 들어갔는데, 6기더라고, 신 선생은 2년 선배니까 4기지. 1년에 선후배 관계로 한 두 번씩 보는데, 신 선생하고 통일혁명당 사건에 걸린 것은, 내가 종암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가까운데 신 선생이 살았어. 그때 신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고 있었어, 내가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하도 힘들어서, 재밌는 책이 없느냐고 했더니, 신 선생이 갖고 온 책이 레닌이 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꽃 파는 처녀』로 기억해, 근데 보니까 한글로 돼 있더라고.

     

    Q : 선생님 그러면, 북한판본이네요.

     

    A : 맞아, 북한에서 나온 책이야. 그때는 그런 책이 남한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그걸 보고서, 어, “이거 어디서 난 거에요” 물었지. 그랬더니 신 선생이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읽고 나서 돌려줬지. 근데 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는데, 신문에 신 선생이 잡혀가고 청맥회가 거론됐지. 나는 68년 한여름에 잡혀 들어갔지. 상과대 경우회 사람들이 잡혀가고, 나한테도 올 것 같더라고. 부산에 도망가 있었는데, 내가 조교라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보부 사람들이 교무실에 매일 와서 앉아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갔지, 바로 잡아가더라고. 근데 사건이 종결될 때가 된 거야. 나 같은 사람은 크게 가치가 없는 거야. 신 선생하고 걸린 게 별로 없어서,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조사받으면서, 신 선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많이 맞았어. 정보부에서 사건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신 선생이 진술한 내용을 내게 던져주더라고. 근데 보니까, 책 빌린 내용밖에 없잖아. 그 사람들이 “이걸 읽어보고 인정해” 그러잖아, 그래서 인정했지. 그 당시 내가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부 수사관들이 조교하고 조교수를 구분을 못 해서 신 선생이 나한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나갈 때쯤 되니까, 정보부 수사관이 “당신은 기소 유예될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기소유예 받은 거지. 그러고 나서 학교 조교 사표를 냈고, 은행에 들어가서 영국에 갔지. 런던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인데, 거기에 영국 좌파들이 다 와 있었다고. 내 지도교수는 로렌스 해리스(Laurence Harris)라는 사람이고, 심사위원은 벤 파인(Ben Fine)이었어.

     

    “구소련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Q : 자연스럽게 대안 사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말하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최근에 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6장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결국 소련 사회가 레닌의 정치혁명 시기나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에도 결국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시나요?

     

    Q : 그래요.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도 소련 경제를 어떻게 개발할 거냐 하는 문제에 집중된 것 같아. 혁명과정에서 적군이 백군을 진압한 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거나 ‘국가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농업 집단화나 중화학 공업화의 추진 등에서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노동자의 해방’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요. 내가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런데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문제라는 것이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무계획성이다, 계획적으로 운영하면, 자본주의적 공황도 없고 낭비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개념이 빠지는 거야. 국유화의 의미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소유를 이전하는 것이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표지인데, 소련에서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군수산업 등 각종 산업을 건설하는 이런 식으로 갔다고.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인간의 탈을 쓴 게 자본가라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국가, 당과 정부의 관료나 노멘클라투라가 자본가계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Q : 선생님, 소련의 국영기업과 달리 예를 들면 콜호스, 소프호스는 소련의 집단 농장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해서 농민이 집단 경영을 하고,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콜호스, 소프호스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볼 수 있나요?

     

    A : 집단농장도 모두 정부가 통제했어요, 자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지. 생산량 할당하고 임금도 위에서 다결정하고.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그런데 소련에서처럼 정부나 당의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 노동자들이 일할 맛이 나겠어.

    소련 사회가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넘어갈 때, 레닌이 그러잖아, 경제를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가 빨갛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잘 모르는 사람이 공장 운영을 어떻게 해? 네프 도입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야.

     

    Q :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난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스탈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봅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나,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 정치적으로는 진영테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 비판을 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과거 소련 사회 경험에서 본 것처럼, 국유화가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 일부 운동진영에서도 국유화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A :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다가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부르든, 공산주의 사회로 부르든)로 간다는 거야, 이거는 엥겔스 도식이야. 새로운 사회가 계획경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노동자가 어디에 있어? 없지. 엥겔스 도식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계획경제의 실현을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했어. 진영테제는 이론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나 강제수용소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얘기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야. 옛날 소련경제를 전형으로 하는 중앙지령형 통제경제에서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동원한 노동하는 개인들은, 사실상 국가에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 노예에 지나지 않아.

    맑스가 생각한 노동자 해방,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동하는 그런 개념이 없어진 거야. 평의회나 이런 게 없어진 거야. 이런 게 문제점이라고 생각해. 혁명적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이 공장을 접수하여 임금노동제도를 폐기하고 자본가계급을 ‘노동하는 개인들’로 전환시켜서 계급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결국, 해방된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하고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잔재를 부수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급인 당이나 정부의 관료가 하니까 안 돼. 정부 관료가 “금년 목표는 이거야” 노동자들한테 “따라와” 이렇게 하니까 말로만 계획경제야. 지금 새롭게 나오는 소련 문서를 보면, 국영기업들이 이윤율을 올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센티브(incentive),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전체적인 계획경제도 안되고, 거짓말 보고만 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와 무엇이 달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이런 특수한 소련 자본주의를 시장에 다 맡겨 경쟁적 자본주의로 전환시켜야 비리가 없는 능률적 사회가 된다는 거야. 지배계급인 당과 정부의 관료가 국유재산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여 경쟁적 자본주의의 자본가계급으로 둔갑했는데, 소련의 역사 80여 년이 이런 식으로 쭉 연결된 거야.

     

    Q :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북한도 자본주의로 볼 수 있겠네요.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계급에게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가 잘 안 돼. 박정희체제를 국가 주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벌한테 모든 걸 맡긴 거야. 새로 탄생한 국영기업이 별로 없잖아? 정부가 재벌한테 금융혜택, 세제혜택 줬지. 외국 차관의 도입에 정부가 지급 보증을 했지. 재벌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것을 박정희가 총칼로 보호한 거야.

    흔히들 박정희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을 제압했다고 보면서 ‘국가주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킬 뿐이야. 독재적 정치권력은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해서 증권파동을 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재벌에 크게 의존했고, 미국 정부가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지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 권력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 따라서 ‘국가 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낡은 사회를 타파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혁명적 전환기’일 뿐이야. 실제로 해방된 노동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하여 공장을 접수하면서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야 한다고.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상품 화폐 자본을 없애야 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Q :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이행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이행기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행기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행기 강령에 시장도 사라지고 화폐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일반 노동자들이 볼 때 쉽게 다가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좌파들, 트로츠키 이행기 강령보다도 더 센 이행기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 :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론』에서 상품부터 시작하잖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고, 상품교환에서 화폐가 생기며, 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잖아. 상품, 화폐, 자본은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돼 있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는 노동하는 개인들이 모든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동으로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기에 생산수단이든 소비수단이든 사회적 생산물을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처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야 해. 이래야만 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거나, 가치에 따라 교환되거나 하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와 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이행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모든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이행기의 초기에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니까 화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공장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전국평의회로 가면서) 노동자들의 연합이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여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생산한 것을 각 가정에 ‘택배’로 배달하면 될 것이므로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이 화폐를 갖고 물건을 살 필요도 없어. 화폐가 계속 사용된다면, 화폐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폭등시켜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쿠바혁명에서도 체 게바라가 몇 번에 걸쳐 화폐개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붉은글씨』 창간호 중에서

     

    2012년 11월

    김수행 교수 인터뷰

    남궁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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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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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1970년 11월, 전태일)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1848년 2월 , 코뮤니스트 선언)

     

     지구상의 모든 인류 가운데 오직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지배를 전복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거대한 투쟁에서 성공했다. 영웅적 저항으로 그들은 국제자본이 조직한 용병군대의 집중공격을 물리쳤다. 그리고 지금 비길 데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주의 기반위에 재건하는데 경제는 세계전쟁과 2년 넘게 지속된 내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러시아 평의회 공화국의 운명은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에 달려있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우리는 오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깃발을 높이 들어 이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노동자가 이제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비인간적인 생활조건과 정치적 무권리 속에서 노예적인 삶을 강요당해 왔던가. 그러나 보라!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일어서서 힘차게 진군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전국적 대오를!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부르주아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 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영구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투쟁을 가로 막았던 자본가와 국가권력의 온갖 탄압과 회유를 분쇄하고, 우리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광산에서, 거리에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해 왔다. 단위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투쟁 속에서 지노협과 업종협을 결성하였으며 마침내 지역과 업종을 뛰어 넘어 전노협으로 결집한 것이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차치하고 노동조합은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장벽이다. 세계대전 동안 그들의 태도는 잘 알려져 있다. 옛 사민당의 주요원칙과 전술에 대한 그들의 결정적 영향은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전쟁선포에 해당하는 “신성한 노조”의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사회반역자로서의 그들의 효능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의 발발시기에 논리적으로 지속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평화를 위한 “노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위기를 느낀 독일 산업가들과 협력함으로써 반혁명적 의도를 드러냈다. 그들은 독일 혁명의 전 과정동안, 오늘까지 반혁명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 노동계급속에 점점 깊이 뿌리 내리는 평의회 사상을 가장 폭력적으로 반대한 것은 노조의 관료주의이다. 경제영역에서의 대중행동으로부터 나오는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을 위한 모든 노력을 성공적으로 마비시키는 수단을 발견한 것은 노조이다. 노조조직의 반혁명적 성격은 악명이 드높아 독일의 수많은 지도자는 노조집단에 속한 노동자만 고용할 것이다. 이는 노조관료주의가 줄기로부터 갈라지는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에 적극적 부분이 된다는 것을 전 세계에 드러낸다. 이처럼 노조는 부르주아 하부구조와 함께 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축 중의 하나이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를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코뮤니스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코뮤니스트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코뮤니스트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코뮤니스트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코뮤니스트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코뮤니스트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코뮤니스트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코민테른의 정신에 충실하게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정복이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파괴한다는 의미에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 창설자의 사상에 따를 것이다. 부르주아 관료의 지도 아래 있는 자본주의 군대, 그 경찰, 간수와 판사, 그 성직자와 관료와 함께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총체를 파괴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번째 임무이다. 승리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타격에 대항하여 단련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과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착취자의 내전을 분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마지막 투쟁이 국경 내에서 해결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국경 앞에서 멈추고 세계를 통한 습격에서 민족적 양심이나 그 어떤 것 때문에 물러서는 것이 적을수록,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최면당하거나 국제적 계급연대의 기본사상을 상실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국제적 계급투쟁의 사상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명확하게 이해할수록,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원동력이 되고 해체되는 자본주의를 조각낼 세계혁명의 타격은 더욱 충동적이고 대규모적일 것이다. 모든 민족적 특수성을 넘어서서,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 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1970년 11월, 전태일)

     

     

     우리는 이제 이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통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전노협의 건설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밝힌다. 우리는 또한 정권과 소수 재별의 억압과 수탁을 제거하여 4천만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제 민주세력과 힘차게 연대해 나갈 수 있는 전국노동자의 조직적 대오가 출범하였음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1848년, 모든 지배계급을 코뮤니스트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코뮤니스트 선언)

     

    1920년, 모든 국경과 조국을 넘어서서, 영원한 봉화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비칠 것이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1990년, 억압과 굴종의 세월, 어용과 비민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전노협이 깃발 아래 강철 같이 단결하여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향해 힘차게 진군하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만세! 노동운동 만세! (전노협 창립선언문)

     

    1970년,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전태일)

     

     

    그리고 2018년? 2019년?

     

    전태일 열사 정신이란 무엇인가?

    전노협(민주노조) 정신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정신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당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는 왜 대답하지 못하는가?

     

    코뮤니스트 8호를 이렇게 엄중한 물음으로 발행합니다.

     

    2018년 11월 10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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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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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가 나왔습니다.

     

    □ 가격 : 1만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내일(토)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코뮤니스트>를 판매합니다.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지도 함께 판매합니다.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

     

     

    □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 특집. 맑스 탄생 200주년  

    ‣ 혁명 투사 칼 맑스  ㅣ ICC / 한동이 

    ‣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ㅣ ICT / 편집부

     

    □ 정세 / 쟁점

    ‣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해산 사태와 민주노조 원칙  ㅣ 구재보 

    ‣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ㅣ 조덕연 

    ‣ 인종주의와 노동자계급  ㅣ 이혜원 

    ‣ 성차별, 페미니즘 그리고 성해방  ㅣ 조덕연

     

    □ 코뮤니스트 정치

    ‣ 코뮤니스트 사회의 차별철폐와 평등에 대하여  ㅣ 이형로

    ‣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ㅣ 이혜원

     

    □ 문화

    ‣ 너희가 말한 모든 것은 불법이 되었다  ㅣ 임성용

    ‣ 장애인문화공간  ㅣ 라나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 민족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자 입장  ㅣ 이형로

    ‣ 민족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  ㅣ ICP

     

    □ 국제정세

    ‣ 세계의 계급투쟁 : 국제주의 노동자들의 목소리  ㅣ 신디

    - 러시아의 연금 '개악'에 맞선 투쟁  

    - 그라나다 지하철 노동자 투쟁  

    -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노동자계급  

     

    □ 기획번역

    ‣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  ㅣ ICC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회의를 제안하며  ㅣ 계승회의

    ‣ 코뮤니스트 혁명가 : 붉은 로빈 후드 막스 횔츠  ㅣ 이형로

     

     

    □ 코뮤니스트 조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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