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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주의-부르주아 선거연합은 노동자 투쟁과 자기조직화의 큰 걸림돌이다!

선거주의-부르주아 선거연합은 노동자 투쟁과 자기조직화의 큰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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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총선을 50여 일 앞두고 선거주의로 점철된 '진보정치세력'의 실체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민주당이 주도하고 진보당, 새진보연합이 참여하는 비례대표 위성정당 '민주개혁진보연합'이 다음 달 3일 창당한다. 이들은 비례대표 나눠 먹기와 지역구 후보단일화를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9월 '노동자 직접정치', '윤석열정권 퇴진과 불평등체제 전환 투쟁 확대·강화', '진보정치세력의 연대연합 실현', '친자본 보수양당 지지를 위한 조직적 결정 금지 및 전·현직 간부의 친자본 보수양당 지지 행위 금지'를 총선방침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조직 노동자 운동 내 다수파 세력인 진보당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민주당의 비례대표 위성정당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들은 윤석열 정권 심판을 명분으로 부르주아 선거연합(민주개혁진보연합)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진보-노동을 팔아가며 지속해 온 민주대연합-야권연대 사기극의 연장선일 뿐이다. 
 
이는 선거주의, 조합주의에 기반을 둔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파산선고를 받은 실패한 진보(좌파)정당 운동과 선거 전술에 대한 반성 없이, 야권연대/부르주아 정치로의 투항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 정치세력 사이의 사상/노선 차이를 통일할 강령과 실천적 검증을 통한 정치적 신뢰 없이, 계급 정치의 광장이 아닌 부르주아 정치 서커스 판에 뛰어들어 연대연합 실현과 연합정당을 건설하겠다는 '선거주의' 폐해가 진보당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선거주의-부르주아 선거연합(위성정당, 후보연대-단일화) 참여는 노동자 투쟁과 자기조직화의 큰 걸림돌이다. 우리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모든 선거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생존권 투쟁 전면화를 통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정치·총선방침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며, 선거주의와 조합주의를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 계급적 연대 강화를 통한 노동계급 자기조직화를 호소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선거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조차 민주노총 지지 후보보다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인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투표했다. 이것이 부르주아 선거에 포섭된 계급의 현실이며, 그동안 민주노총과 이른바 진보정당들이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한 선거주의-조합주의 중심 노동자 정치의 결과다. 이들의 곁에는 ‘계급의식’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는 ‘선거주의 좌파’ 가 늘 함께하고 있다. 말로는 선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참여하는 선거는 훌륭한 전술로 둔갑한다. 그들은 노동자 정치를 노동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표 구걸하는 것을 ‘선거 투쟁’으로 미화해 왔다.
 
그동안 이러한 선택을 반복해 온 노동계급의 현실은 어떠한가?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했고, 누구도 안전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가짜 ‘노동 존중’을 표방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노골적으로 친(親)자본 정책을 펼치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온갖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또한,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좌파/노동 정당들이 자신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그들은 제대로 된 반성도 없이 선거철만 되면 선거연합, 독자 후보, 비판적 지지까지 반복되는 선거 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노동자 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기 위해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반대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노동계급 정치, 코뮤니스트 전망을 제시해 왔다.
 
부르주아 의회 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계급에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자신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고, 투표 행위로 자신도 권력의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당 사이 노선과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는 오늘날에도 다수 유권자는 지역/비례대표 후보의 당적에 따라 투표한다. 하지만 일단 당선되고 나면, 유권자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표가 필요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그들은 국회에서 자신을 선출해 준 유권자 뜻과는 상관없이 소속 정당과 자신을 위해 정치 활동을 할 뿐 유권자의 요구를 위한 진정한 활동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의제의 의미이다. 유권자들은 국회의원에게 유권자를 위해 일하도록 위임했지만, 그들이 일하지 않거나 반(反)하는 일을 해도 다음 선거까지 그들을 바꿀 힘이 전혀 없다. 물론 국회가 모든 유권자에게 발언권과 결정권을 갖게 하는 근본 변혁 방안을 내놓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 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부르주아 선거에서도 주인공은 ‘유권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자본’이고, 모든 선거 과정과 결과는 그들이 정한 규칙대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착취체제를 지키기 위해 노동 악법을 함께 만들고 국가보안법을 유지해 온 장본인들이다. 또한, 장애인, 빈민, 이주노동자,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체제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정치에서는 대중 투쟁의 성과조차도 전문 정치인들이 위임받아 정파적으로 이용한다. 우리는 그동안 부르주아 정치에 기댄 투쟁이 어떠한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투쟁으로 지켜내지 못한 권리가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지는지를 수없이 경험해 왔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구의 파괴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대부분의 일상에 대한 지배를 지배받는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이른바 ‘민주적인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대의제와 반대로, 노동자 직접정치-노동자 민주주의는 국회의원이 아닌 평의회 대표자를 선출한다. 평의회는 그들을 선출한 단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한 번 국회의원을 선출하면 다음 선거 때까지 유권자가 통제할 수 없는 국회와는 다르다. 평의회의 대표들은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선출된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역사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대중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평의회에서 조직된 노동계급은 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종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시대에 '노동자 민주주의'가 필수적인 이유이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혁명의 과제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제도 포함)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떠한 혁명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단지 죽어 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비록 지금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정치에 맡기지 않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미래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 선거 사기극에 맞서 선거 참여 방침이 아닌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노동자평의회와 혁명당 건설에 나서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대의제와 수동성을 강요하는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 정치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과 계급적 연대를 통한 노동자 자기조직화(독립적인 파업위원회, 대중 집회, 노동자평의회 건설)에 달려있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니라 집단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며 토론하고 행동하는 곳,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곳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노동자 투쟁의 걸림돌! 선거주의 타파!
노동탄압 생존권 위협! 윤석열 자본가 정권 타도!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위기 전가-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2024년 2월 21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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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동서양의 위선적인 제국주의

동서양의 위선적인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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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의 사망자 수가 늘어나고 희생자 중 상당수가 어린이인 가운데 제국주의 현실 정치의 양면성이 드러나고 있다지배계급에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어떤 잔학 행위가 어디에서 논의될지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정치적군사적 동맹이다이는 최근 몇 가지 분쟁에 대한 유엔 결의안에서 투표권을 행사한 국가나 전 세계 주류 언론이 이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만 비교해도 알 수 있다더 나아가다음과 같이 존경받는 세계 지도자 몇 명의 이중적인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전에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을 전쟁 범죄로 불렀지만, 7,5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보고되자 그 숫자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그의 정권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얘기한다.

•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재앙적인민간인 사망에 대해 언급했지만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단 한 건의 민간인 사망(공식적으로는 1만 명이지만, 훨씬 더 많을 수 있음)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점령자'로 규정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비난했다한편 에르도안 정권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쿠르드 지역을 정기적으로 폭격하고 있다.

• 자신의 나라에서 대규모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한 후(이 과정에서 최소 500명이 사망), 에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이란 대통령은 이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자위권'을 가진 것은 팔레스타인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주장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자본주의의 도덕성은 홍보용에 불과하다전쟁에서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대중을 결집하는 데 사용된다양측은 상대방의 '전쟁 범죄'를 비난한다서방에서는 우크라이나 시민에 대한 물과 전력 공급 거부가 러시아의 '전쟁 범죄'이지만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전면전 정책은 정당화된다다양한 권리‘(자위권자결권 등)는 편리할 때 호출되고 필요할 때 거부된다이러한 '권리'는 국가 사이 제국주의 관계의 폭력적인 현실에 질서와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씌우기 위한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국제 정책을 좌우하는 것은 시장원자재기술토지이윤을 둘러싼 투쟁이다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맥락에서 '인종 청소또는 심지어 '()인도적 범죄'와 '대량 학살'에 대한 상호 비난이 일어난다지난 3년 동안 다양한 경쟁 소식통에서 이러한 용어로 설명된 분쟁이 다음과 같이 최소 4건 이상 발생했다티그라이(Tigray), 우크라이나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그리고 현재 가자 지구다민족을 표적으로 한 대량 학살과 추방 행위는 민족과 부족의 충성심에 기반을 둔 식민지 이후 정권의 자연스러운 산물이지만뒤틀린 체제 논리 속에서 이러한 사건은 제국주의 경쟁의 일부가 된다현대 전쟁에서는 인도주의적 관심조차도 자본주의 세력들이 피해자로 간주하는 국가에 대한 국제적 제재나 외국의 개입을 예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분쟁을 더욱 부추기는 정치적 무기가 된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은 현재 가자지구바흐무트(Bakhmut), 나고르노 카라바흐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포의 책임은 썩어빠진 제국주의 자본주의 구조 전체에 있음을 알고 있다우리는 수십 년 동안 이윤에 굶주린 체제의 위기가 어떻게 군사적 대결을 증가시키게 될지에 대해서 경고해 왔다이제 우리는 로켓과 드론에 의해 파괴된 도시와 마을세계 공급망 붕괴징병과 시위 진압최전선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민간인 대량 이주 등 전쟁으로 치닫는 현실의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자기국가를 위해 살인과 죽음을 강요당하는 피해자는 바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다.

 

어느 한 자본주의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외교적 해법은 피할 수 없는 것을 연기할 뿐이다적대적인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경제 및 군사적 경쟁에 기반을 둔 체제의 모순은 그 체제의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이 '휴전'을 요구하지 않고, '민주주의'나 국가의 '권리'에 호소하지 않는 것은 동정심이나 냉철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체제의 본질을 직시하기 때문이다노동자들이 전쟁을 포기하고‘, 국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같은 계급의 형제자매를 죽이고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지구를 점차 불바다로 만드는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다실제 전투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로 비전투원을 죽이는 제국주의적 전면 전쟁에 편승하는 대신우리의 임무는 이러한 전쟁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결국그것은 더 큰 세계 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가자지구이스라엘우크라이나나고르노 카라바흐 주민들이 '자신의정권을 지지하든 않든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여러분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여기에는 부르주아지 사이의 냉소주의가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잔학 행위위선자본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거짓된 감정적 관심의 표출이 결합해 있다비디오와 사진희생자들의 증언폐허가 된 가자 지구는 소셜 미디어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지금 당장 많은 사람의 시야가 팔레스타인 깃발에 가려져 있더라도이것은 모든 노동자가 각성해야 한다자본주의가 인류를 위해 준비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분쟁은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있다아무리 멀게 느껴지더라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사회주의다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 통해 잔혹한 이 체제를 끝장내야 한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10월 28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10-30/imperialist-hypocrisy-in-the-east-and-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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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해결책은 없다. 계급전쟁만이 해결책이다!

국가적 해결책은 없다계급전쟁만이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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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동자에게는 국가가 없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직 국제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가 모든 지배계급을 적(敵)으로 삼아 연대해야 한다"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국제주의 원칙을 지지하며 이 글을 공유한다. 우리는 국제주의 원칙의 방어와 국제주의자들의 연대를 위해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10월 7이스라엘 남부는 하마스 군이 가자 지구 국경을 돌파한 무장 세력과 함께 놀랍고도 예상치 못하게 조직적으로 침공했고공습은 이스라엘 중부의 텔아비브까지 이르렀다많은 가자 주민들이 국경 철조망을 허물고 야외 감옥 밖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이스라엘군도 욤 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후퇴했다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승리처럼 보였다그러나 하루 종일 천 명이 넘는 민간인이 무차별로 학살당했다한 키부츠(Kibbutz)는 10%의 사람들을 잃었다지금은 유명해진 사막 파티의 현장에서 200명에 가까운 이스라엘인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4인 가족이 모두 사망한 사진이 공개되었고다른 사람들은 뉴스 영상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대가로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약 150명이 가자지구에 인질로 잡혀 있다많은 친()팔레스타인이 학살을 옹호하는 데 뛰어들었고어린이난민의 후손심지어 점령 반대 운동가까지 포함한 일반 이스라엘인을 정착민-식민주의자로 간주했다설사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해도 베두인네팔 학생태국 이주 노동자의 죽음은 정당한 살인이라고 믿기 어렵게 만든다이란과 헤즈볼라는 하루가 지나기 전에 하마스와 경쟁자 팔레스타인 이슬람 정파 이슬람 지하드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밝혔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안보 실패는 이스라엘의 주요 정치인과 군 관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네타냐후와 리쿠드당우파의 성공은 일반적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자신감에 의존했다이스라엘의 자본주의 좌파가 끊임없이 고갈되고 있는 것은 경제 관리의 실패가 아니라 국경의 안보를 위협하면서까지 영토를 확보하려는 의지에 기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하마스는 하루아침에 네타냐후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은 안전하다는 이스라엘 국민의 신화를 무너뜨렸다네타냐후와 그의 장관들은 당연히 민족주의를 부추겼고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하며하마스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수만 명의 예비군이 군대에 징집되었고정치인들의 대량 학살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국경 마을 주변에서 지상전이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공습을 가해 병원과 난민 캠프를 공격하여 19명의 일가족과 45가구의 모든 세대를 살해했으며 마을 전체를 거의 초토화하는 등 매우 가혹한 폭력을 가했다또한전기식량연료 공급을 차단하는 봉쇄 조치가 취해졌고이는 유엔의 비난을 받았다인구 밀도가 높은 가자지구는 일반 시민들의 이동이나 대피가 거의 허용되지 않았고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집트와 국경을 접하는 라파(Rafah) 국경이 파괴된 후 가자지구는 현재 완전히 포위된 상태이다이스라엘 당국이 가자지구 북쪽에 거주하는 110만 명의 주민들에게 이미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게토 지역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이주가 계속되고 있다유엔조차도 이러한 요구를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가자지구의 사상자는 현재 이스라엘의 약 두 배에 달하며카타르와 이란의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기반이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군사 기반을 압도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인종 청소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확하게 묘사해 왔지만이번 전쟁의 규모와 백린탄 사용 보고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량 학살이다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의 레바논 국경에서 로켓포 사격이 확대되고 있다서안지구의 극우 및 종교적 근본주의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인 폭력 사태는 전쟁이 확산함에 따라 총기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유혈 사태가 누적될수록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노동계급인 이스라엘인팔레스타인인의 이야기다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선거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성급한 결정을 내린다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정부특히 사법 절차를 약화하려는 그의 이기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시도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대규모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그의 캠페인과 지원은 국가 안보 문제에 집중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에 초기 하마스 학살과 이후 인질 사태로 인해 불균형하게 많은 군사 기지가 서안 지구에 집중되어 있어 종교적 극우파가 팔레스타인을 도발하고 공격하고 폭력적인 대응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 심각하게 약화했다남부에서는 하마스의 군사력이 과소평가 되어 도시 노동계급이민자 커뮤니티키부츠인들이 사선에 놓여 있다이는 골다 메이르(Golda Meir)의 임기를 끝낸 1973년 욤 키푸르 전쟁과 비교되기도 했다그러나 네타냐후는 이미 수년 동안 극우파를 점점 더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서안지구 합병미국 대사관을 분쟁 지역인 동예루살렘으로 이전하기로 한 트럼프의 결정기본법 통과정착민 폭력에 대한 온건한 태도 등은 이스라엘의 우경화를 더욱 확고히 했다현재 이스라엘과 미국 모두 공식적으로 테러리스트로 간주할 정도로 극단적인 카하니스트(Kahanist) 출신의 장관들이 있다지금까지는 민족주의가 매우 우세하고 가자지구의 전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마스 근절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더 커지고 있다그러나 텔아비브에서는 인질과 사상자 가족들이 국방부 청사 밖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집회를 열고 있다이들은 애국적인 시위 반전점령 반대경제적 요구가 아니라 군사적 실패와 인질 구출에 충분한 조처를 하지 않은 네타냐후 총리의 전체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가장 심각한 범죄는 네타냐후 자신이 최근 하마스에 대한 (냉소적인지원이다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대표되는 준()국가는 주로 서안 지구에서 활동하며 가자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파타(Fatah)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대표한다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PLO 사이에는 평화 조약이 존재하며, PLO는 두 국가 해법을 선호하고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반면하마스는 두 국가 해법과 이스라엘의 존재를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선호한다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대체로 세속적이며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하마스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이다제국주의의 기괴한 발전 속에서 네타냐후는 하마스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마흐무드 압바스가 이끄는 온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서방과 정치 협상에 나서고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약속한 좀 더 현실적인 두 국가 해법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하마스가 폭력이슬람주의단일 국가 해법을 고집하는 한 서방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남부에서 거의 효과가 없는 로켓 공격은 IDF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네타냐후 정부는 가자지구 주민들을 달래고 간접적으로 더 많은 자금이 가자지구로 유입하기 위해 가자지구 노동자들에게 점점 더 많은 취업 허가를 내주고 있다가자지구로 들어오는 카타르의 현금이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이스라엘의 극우파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Bezalel Smotrich)는 이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짐이고 하마스는 자산이다 [...] 아무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두 국가 해법은 이츠차크 라빈 총리(극우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되기 전)가 주장한 온건한 계획이었다이제 이스라엘은 두 국가 해법을 위한 정치적 협상의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멸을 원하는 세력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

 

하마스의 이번 공격은 자신이 팔레스타인 국민의 대표라고 주장하려는 시도이다파타(Fatah)는 서안지구에서 증가하는 파괴에 맞서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시위교전개별 공격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이번 대규모 공격을 통해 하마스는 군사 전략과 자금 지원은 물론 저항 세력으로서 주도적 면모를 보여주었다올해 7월에는 수천 명이 가자지구 전역에서 하마스에 반대하는 경제 시위를 벌이며 거리로 나섰다하마스가 가난한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지원되는 카타르의 기부금에 세금을 부과하자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하마스 깃발을 불태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마스는 경제 불안의 책임을 이스라엘에 돌리고 시위를 국경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돌리는 데 성공하는 등 전술적인 면모를 보여 왔다가자지구의 또 다른 주요 권력 경쟁자는 하마스보다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이다초기 침공으로 하마스가 다시 인기를 얻었을지 모르지만현재 이스라엘의 끔찍한 공격에 직면한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400명이 넘는 이스라엘 사상자가 새로운 상황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 넓은 제국주의 망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전쟁이 고립되지 않으며고대의 민족국가종교적 갈등이 제국주의적 경쟁을 벌이는 강대국에 의해 이용당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미국과 대부분의 유럽연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이란과 헤즈볼라의 하마스 지지도 마찬가지였다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복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행동에 필적하는 인도주의적 비난을 받고 있지만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은 이란과 미국 간의 대리전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위협하고 있다애초에 제국주의 경제 조약이 이번 공격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바레인모로코수단과 정상화 협정을 체결했는데주로 경제 무역 관계에 도움이 되는 협정이었다이 협정으로 아랍 국가들은 서방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지만다른 곳에서는 경쟁이 격화되었다보기를 들어모로코와 알제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제국주의 블록에 헌신하면서 관계를 단절했다한 해 동안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수교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방과의 동맹은 더욱 공고해졌지만이슬람교도들의 주요 성지 순례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터키와 쿠르드족중국과 대만세르비아와 코소보/알바니아 간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주요 제국주의 열강은 군사 전략과 경제 자원을 위해그리고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작은 국가들을 채택하고 있다그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이스라엘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란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이 이 새로운 전쟁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터키는 평화를 추구하고 양측의 사상자를 애도하는 온건한 노선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제 이주를 비난하면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와의 불안한 동맹을 당분간 달래려고 시도했다국가들은 정중하게 평화를 촉구할지 모르지만제국주의 논리에 따라 전쟁이 일반화될 수 있다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분쟁의 언어일지 모르지만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세계 분열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현재의 폭력적인 경쟁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위기와 더 관련이 있다.

 

시온주의자들에게 이스라엘 유대인의 안전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국가와 군대는 계속해서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우리는 자본주의 국가가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국가는 지배계급의 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군대는 조국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도록 내몰고지배층은 경제적 대외 조약을 체결하고 권력 탐욕에 사로잡혀 조국의 적을 이중으로 돕고 있다한 민족을 보호하고 다른 민족을 괴롭히는 정책으로는 건강하고 안전한 삶이 보장되지 않으며이러한 정책은 전쟁의 악순환을 심화시킬 뿐이다이스라엘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라미 레비(Rami Levi)는 예비군이 군 복무를 위해 떠나고 이스라엘 국민들이 비상사태에 대비해 식료품을 비축하는 동안 전쟁을 돕기 위한 소매 보조원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수익성 있는 슈퍼마켓 체인에서 일하는 것은 무급 노동이지만민족주의 속에서 어떻게든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된다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는 군인을 응원하는 동안에도 계속 착취당할 것이다라미 레비의 사례에서 이미 드러났듯이예비역피난사망 등으로 직원을 잃으면 노동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고정부가 전쟁에 모든 재정을 투입하면 임금은 줄어들 것이다파업이나 경제 위기에 대항하는 집회는 국가적 대의를 배신한다는 죄목으로 즉시 진압될 것이다이스라엘 노동자의 적은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지배계급이다.

 

노동자에게는 국가가 없다.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의 말을 인용하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에게 탈식민지화는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다팔레스타인이 점령을 종식하고 독립 국가를 세우려면 이스라엘인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시온주의자들과는 달리 영국 자본주의 좌파 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입장이기도 하다탈식민지화는 코뮤니스트들의 요구가 아니다애초에 식민주의는 이스라엘에는 적용되지 않는 특정 경제 조직 형태이다이스라엘은 팽창주의 국가이며 군사적 점령과 폭력을 사용하여 팔레스타인의 집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의 집으로 대체하는 것은 제국을 성장시키려는 시도에 해당하지 않는다게다가 알제리남아프리카공화국중국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반()식민지 투쟁 중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단지 새로운 반동 세력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그쳤을 뿐이다민족 해방을 위해 싸워 알제리 초대 대통령이 된 벤 벨라(Ben Bella)는 훗날 민족 해방 운동은 "모두 실패했다"고 회고했다우리가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상업 생산관계에 의해 착취당한다."1) 팔레스타인 국가가 어떻게든 탄생하더라도그것이 이슬람 국가든세속적 사회민주주의 국가든스탈린주의 정권이든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코뮤니스트 혁명에 더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오직 더 강력한 팔레스타인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여 자신들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을 억압할 것이다민족주의 운동은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제쳐두고 자본가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라고 요구한다그것은 코뮤니즘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이른바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국기를 흔들고 최근 경제 위기에 대항하는 반()하마스 집회를 진압한 이슬람주의자들의 학살을 옹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두 국가 해법을 주장하는 소수의 자유주의자는 자본주의 아래의 평화에 대한 순진한 낙관주의가 깔려있다두 개의 자본주의 착취 집단이 하나보다 나을 것이 없듯이 두 개의 국가는 하나보다 낫지 않다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은 남아공 백인 자본가들을 종식한 것이 아니라 동등한 대표성을 내세우며 노동자 착취를 지속할 수 있는 남아공 흑인 부르주아 계급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두 국가 해법은 상비군제국주의 경쟁그리고 궁극적으로 유혈 사태를 배가시킨다.

 

우리의 입장은 예외 없는 국제주의이며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추상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그 제국주의적 생존 전략에 대해 일관된 유물론적 반대에서 예외는 없다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직 국제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이를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가 모든 지배계급을 적()으로 삼아 연대해야 한다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어떠한 진정한 국제주의자도 노동 분업의 고유한 적()인 지배계급과 함께 싸우며 다시 한번 강탈당할 수 있는 '자신의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 계급투쟁을 중단할 수 없다이제는 다른 지배계급이 아닌 자국의 지배계급에 의해 강탈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심지어 우리가 레닌과 결별한 레닌의 자결권 옹호조차도 식민지의 독립적인 노동계급 운동을 위해서는 민족 독립이 필수적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전술적 정책이었다항상 그래왔듯이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지 말고 실제 그들의 적()인 지배계급을 향해 총구를 돌리라고 촉구한다많은 사람이 이를 헛된 꿈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며현재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에 대한 민족주의가 우세한 것이 사실이다우리의 정치는 기회주의적이 아니라 일관성이 있으며우리가 흡수될 때까지 대중운동에 쓸데없이 편승하기보다는 혁명적 노동자의 올바른 선택을 지지한다우리는 민족 해방을 우리 자신의 대의에 다시 적용하고 계급투쟁을 포기하기보다는 우리의 문헌을 번역하고 전파한다게다가그것은 그렇게 헛된 꿈이 아니다네타냐후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는 일 년 내내 이어졌으며 줄어들지 않았었다이들은 자신의 깃발을 휘두르는 애국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그 깃발은 국수주의자들이 흔들던 것과 똑같은 깃발이었고지금 관을 덮는 것과 같은 깃발이었다그런데도 이스라엘 사회 내부에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하마스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는 하마스의 통제와 경제적 착취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여기에는 민족주의자들도 포함되었지만이 역시 팔레스타인 사회 내부의 불만을 보여준다노동자들은 자신의 정치 지도자들에 반대한다이는 헛된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는 진정한 국제주의의 목소리를 내는 보기 드문 존재이지만혁명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1915년 초에 쓴 퍄타코프(Pyatakov), 보쉬(Bosch), 부하린(Bukharin)의 글을 살펴보자.2)

 

그러므로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노예화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곧 금융 자본에 맞선 투쟁이고금융자본에 맞선 투쟁은 곧 자본주의 일반에 맞선 투쟁이다어떤 식으로든 이 길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 안에서 "민족 해방"이라는 "부분적인과제를 진전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에서 멀어지게 하고해당 민족 집단의 부르주아지 세력과 단결시키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어떤 상황에서도억압받는 민족의 반란이나 저항을 억압하는 강대국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동시에 우리는 "민족 자결권"이라는 구호 아래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동원하지 않는다이 경우 우리의 임무는 사회주의를 위한 내전계급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양국의 프롤레타리아트 세력을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모이게 하고, '민족 자결권'이라는 구호 아래 세력을 동원하는 것을 반대하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슈라가(Shraga)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10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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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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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호에서 설명한 것처럼이제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이 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은 50년 전 당시 맑스주의 정치 분석을 시작하고 있었는데그 첫 번째 시리즈 두 번째 판에만 실렸던 글을 다시 연재하고 개정판을 발행하기로 했다주로 추가된 부분은 몇몇을 제외하면현대 독자들의 우려에 주로 답하기 위한 것으로사실 원본 초안에서는 대부분 그 당시 지면의 제약으로 생략한 글을 다시 삽입한 것이다.

 

위기가 추동한 자본주의의 부상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맑스가 자본 3권과 다른 저작에서 발전시킨생산양식의 진정한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분석이다자본 1권이 출간되기 20년 전맑스는 이 확산하는 생산양식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생산력을 혁명화할 잠재력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이것이 그가 이 생산양식을 봉건제로부터의 진보로 본 이유이다그러나그는 자본주의의 기원이나 일상적인 공포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한 원시적 축적은 "그저 하나의 목가적인 것일 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정복노예화약탈살인요컨대 폭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잔혹한 사실이다.”(1)

 

대부분 농노를 자유롭고 가난한 노동자로 바꾸어버린 공유지의 약탈과 함께자본주의는 유럽 밖으로 터져나갈 수밖에 없었는데이는 지구의 나머지에 대한 약탈을 동반했다.

 

미국에서의 금과 은의 발견그 대륙의 광산에서 원주민에게 저지른 절멸노예화그리고 매장인도에 대한 정복의 시작과 약탈아프리카를 흑인 사냥을 위한 보존 구역으로 변화시킨 것은 모두 자본주의 생산 시대의 새벽을 특징짓는다.”(2)

 

최근의 연구는 전쟁을 통한 절멸”, 야만적인 착취그리고 미국으로 들여온 질병이 56백만의 인구 또는 1600년대 당시 인구의 90%를 죽였다고 보았다.(3) “자본은 (이 세상에머리에서 발까지 뚝뚝 떨어져 내린다모든 모공을 피와 먼지로 채우면서라는 맑스의 결론은 전혀 놀랍지 않다.(4)

 

이전 생산양식의 위기는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재화의 부족이 원인이었던 반면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는 이전 시대에는 부조리해 보였을” “만연한 과잉 생산의 산물이었다.(5)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 이후에야 맑스는 왜 그런지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고그 과정에서 우리가 앞서 설명한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을 발견했다이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러한 역동적 생산양식인지 뿐만 아니라왜 자본 축적이 위기에 뒤따르는 호경기의 형태인지도 설명한다고전적 자본주의 아래에서는자본의 평가절하집중의 고도화집중되고 새로워진 더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그러므로 위기의 속도와 강도가 모두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낮은 수준의 일반 이윤율로 이윤율 하락 경향이 극복되었다따라서 자본주의의 재생산 과정은 단순히 평가절하와 새로운 축적이 순환하며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더 정확하게는 나선(sprial)이 점점 좁아져궁극적으로 더 이상의 축적이 불가능한 특정 시점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왜냐하면이윤율이 너무 낮아 불변 자본에의 재투자가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일 때보다 더 적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점에 유기적 구성이 도달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처음에는 자본주의의 빠른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바로 그 동일한 법칙이이제는 자본주의 붕괴의 추동력이 된다.”(6)

 

그러나축적이 그 궁극적 한계에 이르기 훨씬 이전부터 자본의 중앙 집중화(concentration and celtralisation)는 생산양식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온다(wealth)가 축적될수록과도할 정도의 자본의 통제력 역시 소수 또는 독점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이는 함께 번영해 왔으면서또한 그 아래에 있었던 생산양식에 족쇄가 된다.”(7)

 

이는 특정 시점까지 자본의 축적은 인류의 역사적 이해에 전반적으로 기여하지만그 속에서 더 수준 높은 생산양식의 물질적인 전제조건이 발전한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그러나일단 자본이 세계적 수준에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게 되면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 – 상품 교환 없는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 – 의 물질적 기반이 이제 존재하게 된다그리고 역사는 새로워진 축적과 경제적 확장이 여전히 발생해 왔다는 것도 보여주지만그러한 축적은 인류의 이해관계에 가장 좋은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 또한 보여주었다.

 

그러나이것은 예상한 것이다. 19세기봉건적 관계의 마지막 잔여물을 무너뜨리고 보편적인 삶의 질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등 자본의 축적은 여전히 진보적인 힘이었다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확장과 기계화의 증가는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관련되어 있었는데대개 자본주의 생산 기술과 경쟁하는 것이 점점 불가능해진 가내수공업과 소규모 장인들의 점진적인 제거로 이뤄졌다보기를 들어영국에서는 1834년 면직물 산업에서 역직기(power-looms)보다 2배나 많은 베틀이 여전히 운용되고 있었다그러나 베틀 방직공은 점점 경쟁할 능력을 잃었고, 1846-48년의 위기 이후에는 이 산업에서 완전히 방출되어 공장 생산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여전히 상당한 정도의 수공업 생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산업 영역에서부터 증가한 자본의 축적으로 인한 생산향상은, 19세기 중반 유럽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다른 발전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비슷한 그림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그러나 1850년의 자본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 보았을 때 여전히 지배적인 생산양식이라 할 수 없었다하지만 19세기 중반쯤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의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기반이 국내외적으로 공고해졌다소규모 수공업자들은 제거되었다농노 제도의 점진적인 폐지이에 동반한 인구의 증가와 농업의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은 자본이 확장을 촉진할 임금 노동자의 지속적인 공급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수송과 의사소통 영역에서의 개선자본의 회전 기간의 단축은 (원자재와 완제품의 운송 시간의 단축과 필수적인 재고의 규모를 축소함으로써결국 이윤율 하락에 역경향(counter-tendency)를 제공했고동시에 자본의 확장을 더 강화할 기술적 기반을 제공했다.

 

대규모 초기 자본 지출이 필요한 철도와 같은 영역에 대한 몇몇 국가의 경제 개입에도 불구하고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향한 경향은 민간의 자본가들이 자본 축적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815년에서 1835년까지 영국의 정부 지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며, 1835년부터 1960년까지의 정부 지출 증가는 영국 국민소득의 약 10%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었다경제 영역에서의 많은 정부 조치는 사실 생산과 자본의 움직임에 제한을 가한 봉건적 법적 규제를 제거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그러므로 영국에서보기를 들어 전통적인 기업들의 특권적 독점 정책이 19세기 초반폐기되었다국가의 조치는 투자자들의 위험을 낮춤으로써 투자를 촉진하는 경향을 보였고회사의 빚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책임을 그들이 투자한 양만큼으로 제한하는 1862년 법에서 최고조에 달했다동시에국가는 계급투쟁에 대한 반응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노동과 삶의 수준을 개선하고 지원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보기를 들면, 1847년 10시간 법)

 

영국은 19세기 중반 가장 선진화된 자본주의 경제로서자유방임주의 조치를 외 무역 영역에까지 확장한 첫 번째 국가였다영국 식민지의 항구들은비록 그 속에서 영국 상품에 여전히 더 낮은 관세가 부과되었지만, 1822년에서 25년까지 해외 상품에 개방되었다. 1843년에는 기계류의 자유로운 수출이 허가되었고, 1842-45년의 관세 개혁이 이뤄졌는데이는 거의 모든 원자재가 무관세로 영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곡물 조령(Corn Laws)은 1846, 17세기의 항해 조례는 1849년 마침내 폐지되었다우리는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가진 해외자본과 무역이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가진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따라서,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가들이 자유무역 정책의 첫 지지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그렇게 함으로써덜 발전한 자본(국가)의 가격을 낮추는 동안 영국 수출은 그들의 가치 이상에서 판매되었다따라서 영국 수출은 유럽과 미국의 다른 개발도상국 국가들에 주로 이뤄졌다따라서 수출은 영국의 국가 총생산에서 점점 더 중요한 부분이 되어, 1800년 1억 85백만 달러에서 1850년 3억 5천만 달러까지 증가했다.(9)

 

1815년경 이후영국은 투자 자본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자본 수출이 상품 수출을 뛰어넘었다. 1854년 총자본 수출은 21천만 파운드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10) 이 현상은 자본 수출이 이윤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수단 중 하나라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를 제공한다. 1850년 영국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으로 이뤄져 있었고따라서 높은 수준의 이윤율은 영국 자본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해외 자본에 투자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11) 따라서영국 자본의 투자는 해외 자본의 축적그러므로 자본의 세계화에 기여했지만일단 해외 국가 자본의 축적 수준이 영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진행되자 각국의 자본가들은 자본을 가장 먼저 유럽과 그 외 지역의 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로 수출하기 시작했다그러나 1850년까지는 아직 영국이 유일하게 영향력 있는 자본 수출국이었다.

 

그러므로자본주의의 그림은, 19세기 유럽과 미국에 존재했던 것처럼생산된 상품의 양과 다양성의 증가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숫자와 생활 수준의 증가로 이어지는가속하는 축적 중 하나였다실질 임금은 증가하고 있었고 이는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부록 표1을 보라). 비록 수출은 산출의 작은 비율을 차지했으나세계 무역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고(12), 이는 자본의 세계적 확장을 반영했다그런데도 이 시점 자본주의 회사의 구조 대부분은 여전히 개인 기업가가 그 자신의 공장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자본의 축적에는 자본의 집중이 필요했고자본의 집중은 19세기 하반기 회사 구조를 빠르게 변화시켰다개인 기업가가 자신의 사업을 경영하는 것으로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이 필요한 양만큼의 자본을 모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첫 번째 신호는 합자 회사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합자 회사는 투자자가 아닌 이들에게서 이윤의 공유를 대가로 사업을 위한 자본 제공을 가능케 했다. 1872년 영국부터 프랑스까지, 1870-72년 사이의 독일에 퍼져있던 유한 책임의 주주들이 투자한 합자 회사들이 출범했다영국에서는 등록된 그런 회사들의 숫자가 1885년 8,692개에서 1914년 62,762개로 증가했다(13). 합자 회사의 등장은 세계의 모든 선진 국가들에서 더 높은 수준의 자본 집중을 가능케 했다.

 

19세기 후반 만들어진 대부분의 결합은 수평적 성격이었다(카르텔신디케이트트러스트지주 회사 등). 그 말은회사들끼리의 협정이나 실질적 결합으로 유사한 상품을 생산하여 경쟁을 제거하고 자신의 상품을 위한 독점적 시장을 만드는 시도였다는 것이다그러므로 20세기 초반 무렵이러한 나라들의 국가 생산의 많은 부분은 사실상 생산 독점을 이룬 몇몇 산업 연합체의 통제 아래 있었다미국 자본은 이 시기 유럽과는 달리 독점과 연합체 형성에 대한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빠른 속도로 집중되었다. 1897미국에는 약 10억 달러 규모 자본의 82개의 산업 연합체가 존재했다. 1904년에 이르러서 이 수치는 318개 산업 연합체, 70억 달러 이상의 자본그리고 5,300개의 개별 설립체로 증가했다.(14) 1910년쯤에는 산업 연합체는 미국에서 직물 생산의 50%, 유리 제품의 54%, 면직물과 인쇄 원단의 60%, 식품류의 62%, 음료류의 72%, 비철금속 생산의 77%, 화학제품의 81%, 철 금속의 84%를 책임지고 있었다더 높은 수준의 집중을 포함한 중앙 집중은미국의 이러한 주도적 회사들이 보유한 평균 자본 양의 증가로 뒷받침된다:

 

미국의 13개 선도 제조 산업에서 각 제조공장의 평균 자본 양은 1850년에서 1910년 사이 39배로 증가했고평균 생산 가치는 19배로 증가했다.”

 

1895년에서 고작 10년 후미국의 2,274개의 제조 회사가 이른바 대호황 시대”(Gilded Age)의 악덕 자본가들”(robber barrons)이 지배하는 고작 157개의 법인 기업으로 합병되었다대부분의 이 법인 기업들은 자신의 산업을 지배했으며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나 JP모건(J.P.Morgan)과 같은 이들의 재산을 불렸다그러나세기가 바뀔 때 즈음자본의 독점 조직으로 향하던 바로 그 경향이 다른 자본 국가들에서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1896년과 1901년 사이 영국에서는 재봉표백분포틀랜드 시멘트벽지담배그리고 대부분의 섬유가공 제조 부문에서 대규모 연합체들이 형성되었다. 1906년 독일에서는 생산의 다양한 부문에서 대규모 연합체들이 존재했고세기의 초반 무렵 프랑스에서는 금속설탕유리 등의 산업들에서 신디케이트가 있었다기타 등등세기초부하린은 F.라울(F.Laur)의 수치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산업 기업들에 투자된 5억 가운데, 2억 2천 5백만다시 말해 거의 절반이 카르텔과 트러스트로 조직된 생산에 투자되었다.”(18)

 

따라서세기가 바뀌는 즈음에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경제의 많은 산업에서 경쟁은 사실상 제거되어 있었다이것은 독점자본이 통제하는 산업들에서 경쟁이 한꺼번에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반대로국가 사이 경쟁이 전에 없이 치열해졌다는 것을 이야기했다각 자본주의 국가의 범위 내 개별 기업 사이 경쟁이 대부분이었던 상황이 독점 자본 사이의 국제 경쟁이 대부분인 상황으로 변했고이는 가치 법칙 작동의 변화와 초국적 수준에서의 이윤율 균등화를 포함하는 움직임이었다다시 말해이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존재를 암시했다:

 

가격의 수준은일반적으로 말하면지역이나 국가“ 생산에서처럼 생산 비용이 결정하지 않는다대개 국가“ 그리고 지역의 차이는 세계 가격의 일반적 결과로서 없어지고세계의 가격이 개별 생산자들개별 국가들개별 영역들에 압력을 행사한다.”(19)

 

부하린은 국제 수준에서의 가격의 균등화 경향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옥수수 가격을 인용하며 묘사했는데옥수수 가격은 곡물 생산의 크게 다른 다양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범위의 가격 차이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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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독점 자본간 국제 경쟁은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일정한 상호의존성을 암시했고이는 세계 무역의 증가세계 시장의 존재그리고 이른바 세계 수준에서의 분업으로 표현되었다일단 세계 경제가 존재하고가치 법칙이 세계적 수준에서 작동하면세계 자본의 개념과 함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이 현실이 된다.

 

다른 한 편자본의 입장에서 세계 경제의 성장과 국가별 독점자본 사이의 세계 경쟁은 제국주의의 등장을 의미한다여기서 제국주의는 일반적인 전쟁정복이나 영토 합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그러한 정의는 부하린이 그의 책제국주의와 세계 경제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설명한다.” -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정책부터 베트남에서의 러시아와 영국의 정복까지제국주의 시대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대표하는데무엇보다 자본의 가장 높은 수준의 구성을 이룬 국가 자본 간의 세계적 경쟁의 결과이다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책과 전쟁정복그리고 영토 합병 등의 앞선 예시를 구분할 수 있다제국주의는 특수한 역사적 범주이며세계 경제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다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것은 세계 경제의 발전이다.

 

세계 자본주의 경쟁의 발전을 이끌었던 19세기 중반부터 자본주의 국가들의 관계가 지속적인 세계화는 그 자체로 가속화된 자본 축적의 산물이었으며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하면서 나타나는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였다부하린이 보기로 든 것을 보면아래의 표는 1860년 – 1914년 사이에 어떻게 일반 이윤율이 하락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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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에 직면해 대부분 선진 국가의 자본은 하락을 상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욱 해외 수출(유기적 구성이 낮은 지역으로 공장 생산품을 수출하고값싼 원자재를 수입)과 자본 수출에 의존했다.

 

해외 무역에 투자된 자본은 높은 이윤율을 위한 역할이다왜냐하면그 자본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생산 시설을 보유한 다른 국가들에서 생산된 상품과 경쟁하게 되는데이를 통해 선진 국가는 설령 경쟁국보다 더 싼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해도그 가치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판매할 수 있다선진국의 노동이 더 중요하게 착취되는 만큼이윤율은 증가한다왜냐하면 높은 질적 수준의 대가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판매되기 때문이다특정 국가와의 관계에서 – 상품이 수출되거나또는 상품이 수입되는 같은 조건이 갖춰질 수 있다이 나라는 상품에 그것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물화된 노동을 제공할 수 있고그 대가로 이 나라가 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싼 가격에 상품을 받을 수도 있다같은 방식으로이러한 방식이 보편적으로 확산하기 전에 이를 맘껏 이용한 제조업자는 자신의 상품을 그의 경쟁자보다 싼 가격에그러나 그 개별 가치보다는 비싸게 판매한다다시 말해그는 그가 고용한 특별히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잉여가치로 착취한다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잉여 이윤을 지키고다른 한 편식민지 등에 투자된 자본은 높은 이윤율을 누린다이것이 가능한 단순한 이유는 그곳이 후진적 발전 수준으로 인한 높은 이윤율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이유를 첨가하자면노예들저임금 미숙련 노동자 등의 존재가 더 심한 노동 착취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우리는 특정하게 투자되고 그들에 의해 본국으로 회수된 자본이 현실화한 높은 이윤율이 평균 이윤율을 형성하는 한 요인으로 삼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20)

 

19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세계무역은 아래와 같이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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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이르면영국은 그 산업 생산의 25%, 독일은 약 20%를 수출했다.

 

처음에는영국 수출과 경쟁할 수 있는 지점까지의 유럽 자본의 발전은 자유 무역으로의 운동을 동반했다. 1860년대 동안유럽의 관세는 일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비록 미국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국내 자본 중앙집중화 심화와 함께한 국제 경쟁의 심화는 유럽에서의 자유무역을 향한 운동의 역전보호주의의 증가로 나아갔다따라서,

 

“... 1870년대 미국과 오스트리아 밀의 경쟁 증가서구 유럽 국가들의 산업 설비의 엄청난 증가, 1873년에서 1896년의 불황으로보호주의의 물결이 대륙을 뒤덮었다오스트리아는 1878, 1882년 그리고 1888프랑스는 1881, 1885, 1887그리고 1892벨기에는 1887이탈리아는 1878, 1887그리고 1891그리고 러시아는 1877년과 1892년에 관세를 높였다.”(21)

 

1870년대 후반 이후 개별 국가 경제’, 즉 자국 시장을 해외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지속적 관세 장벽의 상승은 독점 자본으로 나아가는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자본 경쟁의 세계 시장으로서의 확장 과정 일부로 봐야 한다.

 

따라서 관세 장벽은 제국주의 발전의 한 측면이다왜냐하면독점자본의 이해관계 속에 있는 다른 국가들과의 국경 강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관세 장벽은자국 시장에서 생산 비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상품이 판매되도록세계 시장에 판매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종종 생산 비용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덤핑)되도록 함으로써세계 시장에서 해외자본 사이의 경쟁을 촉진했다이러한 관행들은 자본주의의 성격에 있어 유의미하며 영구적인 변화의 초기 징후였다덤핑이 발생한다는 것은 해외 무역이 더는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는 유효한 수단이 아니며자국 시장에서의 높은 가격은 노동력의 교환가치결국 자본가의 생산 비용을 상승시킬 뿐이란 의미가 된다. (이는 노동자들이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사실, 20세기 초반실질임금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농업을 희생한 대가로 이룬 산업 자본의 확장은 생산이 단일 작물이나 육류를 생산하는 지역으로부터 식료품(주로 곡물과 육류)을 수입하는데 점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의미였다자본 축적은 산업을 위해 덜 발전된또는 저개발 경제로부터 더 많은 양의 원자재 수입을 필요하게 했다더욱이이러한 원자재가 값싼 가격에 구해졌다면그들은 생산 비용을 낮추고따라서 이윤율 하락 경향을 뒤집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10전동기 타이어와 발전소에 필요한 고무의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한 덕에 고무 가격이 파운드당 2/9(14p)에서 12/6(62.5p)로 상승했다일부 고무 회사의 이윤이 결과적으로 연 200% 증가했다이는 자본가회사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었고곧 수백만의 자본이 남미중앙아프리카인도실론 등의 고무 재배 플랜테이션에 투여되었다이윽고 고무 생산이 증가하자가격이 이전 수준 또는 그 이하인 2/6(12.5p)까지 떨어졌다전동기 오일의 경우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새로운 원자재를 향한 극한까지의 쇄도가 결국 현대 유럽에 정착한 과열된 비밀 외교를 불러온 많은 경제적 요인 중 하나였다는 것은 지적해 두어야 한다.”(22)

 

그러므로값싼 원자재 탐색은 유럽 국가 간의 과거 저개발 지역에 대한 통제합병을 위한 라이벌 경쟁의 증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870년 이후 중요한 광물의 매장지를 포함한 지역의 합병단일작물재배 농업 지역을 점령하고 개발 정도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19세기 자본주의 생산양식 세계화의 또 다른 측면은자본의 이윤극대화와 이윤율 하락 상쇄 시도로부터 비롯되었는데가장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 국가들에서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 국가들다시 말해높은 이윤율을 획득할 수 있는 지역으로 자본 수출 비중의 증가였다우리는 19세기 중반 가장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 영국이 프랑스와 미국으로 자본을 수출하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았다. 1875년 정도까지 영국의 자본 수출은 주로 수출된 지역 자본의 확장에 이바지하는 서유럽과 미국으로 이뤄졌다미국과 유럽 자본이 그 유기적 구성으로 인해 자본 수출국으로 바꾸는 지점에까지 축적됨에 따라영국 자본은 해외 투자로 더욱 이윤을 낼 수 있는 지역을 찾았는데이 지역은 명백히도 대영제국 식민지(Empire)과 라틴 아메리카였다. 1900년부터 1904년까지런던의 대규모 잠재 투자자는 채무자로부터 평균 수익률로 자국에서 3.18%, 식민지에서 3.33%, 그리고 해외 지역에서 5.39%의 이익을 거둬왔던 것으로 계산되었다.(23) 1913영국 해외 투자에서 대영제국 식민지가 47%, 미국이 20%,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가 20%를 차지했고영국은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자본 수출국이었다. 1914영국의 총 수출은 약 37억 파운드를 초과했다(주요하게 철도 40%, 정부 및 지방정부 대출 30%, 원자재 생산 10%). 그런데도 19세기 후반기처음은 프랑스이후에는 독일 자본이 덜 개발된 국가들에 대한 보다 높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투자로 영국 자본과 주로 경쟁했다. 1880프랑스 해외 투자는 5억 95백만 파운드에 이르렀고이 수치는 1914년까지 세 배로 증가했다이 중 반이 유럽에 투자되었다 다시주로 덜 개발된 중앙동유럽의 국가들이었는데그 외 17%는 미국에 또 다른 17%는 라틴 아메리카에 투자되었다.(24)

 

따라서 해외 투자는 자본의 세계화와 세계 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러나 부하린이 지적했듯이자본의 세계화는 자본의 이해관계의 세계화와 함께하지 않았다자본 수출 비율의 증가는해외 무역의 증가와 같이실질적잠재적 투자 지역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려는 대부분 선진 강대국의 경쟁그리고 그로 인한 적대적 관계의 첨예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후진의 지역에서 투자자 이해는 군사적 위협 또는 군대의 사용으로 결국 지켜졌다(보기를 들면 채무 불이행 이후 프랑스의 튀니스 식민화또는 채무 불이행 이후 영국의 이집트 식민화).

 

이 간단한 개요는 세계 경제의 발전과 제국주의의 발전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경제의 세계화자본의 세계화와 함께엄청난 결과로 가득한 자본의 국가적(자국중심주의적)” 결합 과정자본의 국가화(자국중심주의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25)

 

고도로 집중된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한 시도는자본주의가 세계적 체제가 되는 지점까지 자본 관계의 세계화로 이끌었지만또한 자본가들의 경쟁이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기 위한 선진국 간의 경쟁이 되는 지점까지자본의 국가화(자국중심주의)의 증가(보호무역주의 등의 증가)로도 이끌었다그러한 제국주의 국가 사이 경쟁에는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사력의 존재가 필요했는데이는 약한저개발 경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장 선진화된 강대국 사이의 직접적인 분쟁의 결과를 결정짓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1850년 이후 계속선진 자본 국가 사이의 경쟁이 증가함에 따라군무장 비용은 매년 증가했고, 1890년에서 1914년 사이의 군비경쟁으로 이어졌다이 시기모든 선진국에서 국방비 지출은 정부 지출 가운데 단일 항목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그리고 계속 증가했다). 아래의 표는 1875년부터 1908년까지, 8개 선진국의 정부 군비 지출 증가현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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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총국방비 지출은 영국이 77,029,300파운드독일 97,845,960파운드프랑스 1,717,202,233프랑러시아 825,946,421루블미국 313,204,990달러로 추정된다.(26)

 

세계대전은 이러한 제국주의 간 경쟁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욱일승천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이 매끄러운’, 간단한 확장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면우리는 축적이 잔혹한 경쟁과 호황-불황-회복의 이른바 경기 순환”(business cycle)의 맥락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겠다여기서 각 불황의 시기에는 가장 덜 경쟁적인 기업이 파산하고높은 유기적 구성의 경쟁자에게 인수된다자본의 평가절하(일반 가격 하락의 결과로)로 가능해지는뒤이은 회복기는 보다 더 집중되고 중앙화된 자본의 기반이 된다자본 확장에 따라 이윤율의 균등화 경향이 나타나면서자본의 주기적 위기는 세계적으로 균일해지고확산한다그러므로보기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는 1840년과 82년 사이같은 순환 단계를 공유한 것은 연 28%에 불과했으나, 1882년에서 1925년 사이에는 그것이 연 65%에 이르렀다세기가 바뀔 때 즈음분석한 17개국이 거의 같은 위기와 회복의 유형을 보여주었다.(27)

 

위기가 보다 값비싸지는 것과 같이각 연쇄는 체제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왜냐하면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듯이각 위기는 더욱더 높은 수준의 자본의 집중화와 중앙화로 이끌었고각 순환 위기마다 더 적은 수의 파산시킬 경쟁자를 남겼다궁극적으로 이러한 자본의 중앙화는 각 국가 자본 내에서의 독점 자본의 이해가 국가의 이해와 엮일 때까지 진행되었다자본주의 경쟁은지금까지 인류에 풍요의 진정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각 국가가 그 자신의 국가 자본을 보호하려 함에 따라이제 생산력에 대한 제한적 억제로 이끌었다우리가 볼 수 있듯자본주의는 이제 쇠퇴하는 사회체제였으며그 존속은 오직 국가 사이 첫 국제 분쟁으로 세계를 밀어 넘어뜨려서만 가능했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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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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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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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 1(Penguin Classics, 1990), 874

(2) 위의 책, 915

(3) H.W.French. Born in Blaqckness(Liveright, 2021), 175쪽을 보라.

(4) 자본, 1, 926

(5) 코뮤니스트 선언(1975, Peking Edition), 40

(6) 폴 매틱, The Permanent Crisis – Henryk Grossman’s Interpretation of Marx’s Theory Of Capitalist Accumulation, marxixst.org

(7) 자본, 1, 929

(8) W.Ashworth. A Short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Economy, 1850-1950. 131-132

(9) The Fontana Economic History of Europe, 4, 670

(10) Ashworth, 앞의 책, 170

(11) 사실 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이다영국은 보다 역동적인 생산 국가로 자본을 수출한 첫 번째 국가가 아니다자국의 소규모 생산경제에 직면한 네덜란드 상업 자본은 영국의 산업 혁명 대부분의 자본을 댔다영국이 미국 자본 축적에 자본을 댈 때, (미국자본이 지원한 (영국자본을 따라잡을 때까지똑같은 유형이 반복되었다. 1970년대 위기 이후 현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미국 자본이 상업적 경쟁자인 중국을 탄생시켰다후자와 다른 점은자본주의 맥락이 이제 변화했으며제국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이전의 평화로운 화해가 반복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12) 1800년 28천만 파운드에서 1830, 3억 8천만 파운드, 1850년 8억 파운드로 추정됨. Ashforth, 위의 책, 30.

(13) 위의 책, 94

(14) 위의 책, 96

(15) 위의 책, 68

(16) Timothy Wu, The Curse of Bigness(Columbia Global Reports, 2018), 24-5 

(17) Ashworth, 위의 책, 96

(18) 부하린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69

(19) 위의 책, 23

(20) 맑스자본」 3, 238(Larence and Wishart, 1974)

(21) D.B. Clough and C.W Cole, Economic History of Europe, 610-611

(22) John Maclean, The War after War, 8

(23) By A. Cairncross, Ashworth, 위의 책, 171쪽을 보라

(24) 수치는 Ashworth, 위의 책, 173-174그리고 Clough and Cole, 위의 책, 657-661쪽에서 가져옴

(25) 부하린위의 책, 80

(26) 앞의 인용에서, 126

(27) O. Schwarz, “Finanzen der Gegenwart” in Handworterbuch der Staatswissen에서 인용부하린은 “... 저자의 독일오스트리아 지출 수치는 부정확하다왜냐하면 특별 예산이 포함되지 않았고한 번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미국 관련 수치는 개별 주의 지출을 포함하지 않았으며따라서 33.5-56.9 증가는 실제로 더 크다.”

 

 

 

<출처>
 
 
<이전 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1)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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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Ⅱ

150년 후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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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후

 

헤이그 회의 이후 몇 년 동안 두 개의 인터내셔널이 존재했다미국의 제인터내셔널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었다맑스는 그 일에서 손을 떼었다그리고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지만독일에서 급성장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연구하고 조언하는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아 회의는 공식적으로 미국 제인터내셔널을 해산시켰고이들은 불과 며칠 후에 사회주의 노동당의 기반이 되었다한편헤이그 회의 직후결의안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들은 세인트 이미어(St. Imier) 인터내셔널로 재집결했다또한건강이 좋지 않았던 바쿠닌은 1873년에 공식직함에서 은퇴했다말년에 그의 가까운 동지인 기욤(Guillaume)과 카피에로(Cafiero)와 사이가 틀어져 1876년에 세상을 떠났다세인트 이미어 인터내셔널은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일부 진출했고한동안 미국의 제인터내셔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로 주도했지만봉기와 개인의 폭력 행위(행위에 의한 선전이라고 불리는 것)의 경로를 따라 지금은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로 회원들의 출혈이 있었다. 1877년 베르비에르 회의가 마지막이 되는 것이었다.

 

통념과는 달리두 경향의 통일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이 중 첫 번째는 이미 1877년 겐트에서 있었다이러한 세계사회주의 회의의 대표자 중에는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프란켈(Fränkel), 기욤(Guillaume), 크로포트킨(Kropotkin: 최근에는 아나키스트로 변신하여 곧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이 있었다공동 재산과 산업 투쟁에 관한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지만그 행위에 의한 국가정당의회주의선전의 주제가 나오자 오래된 주장이 다시 나타났다겐트 회의 이후 구체적인 조치는 없었지만이는 논쟁하는 용어의 변화를 상징했고맑스와 바쿠닌의 추종자들은 이제 각각 사회민주주의자와 봉기주의자가 되었다. 1881전자는 제인터내셔널을 결성하기 위한 긴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처르에서 만났고후자는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일명 흑인 인터내셔널)를 설립하기 위해 만났다사회민주주의가 전국적 기초 위에 노동계급 대중정당을 만드는 데 기반을 둔 것이라면봉기주의자들은 기권을 설파하고 폭력적 직접행동에 전념했다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을 때블랙 인터내셔널은 헤이마켓(Haymarket) 대학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1880년대에는 다양한 반()사회주의 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 발생하고 있었다맑스는 1883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것의 탄생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889년 제2차 인터내셔널 회의가 열렸을 때수천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수백 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그것은 전()아나키스트자에서 개량주의자로 변신한 폴 브루스가 이끄는 실증주의자와 전 아나키스트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한 쥘 게드와 라파르그가 이끄는 맑스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수반되었다(엥겔스는 이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후자를 지지했지만일반적으로 대회에 거의 희망을 두지 않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처럼 파리에는 실제로 두 개의 협회가 있었다그런데도 제인터내셔널이 태어났으며 헤이마켓 대학살을 추모하여 메이데이를 8시간 동안의 투쟁에서 연례 국제 노동 시위로 선언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이후 몇 년 동안현재 그리고 이전의 아나키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그들의 노동조합에 가입했고말라테스타(Malatesta)와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터내셔널 내에서 대표를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1893년 취리히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해 아나키스트들을 따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모든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조직과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회당 및 조직으로 회의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행동'이란 노동계급 조직이 가능한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 증진과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해 정치적 권리와 입법 기구를 활용하거나 정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내셔널 결의안, 1893)

 

그런데도 그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1896년 런던 회의에서 이 문제는 다시 논의되었다말라테스타는 반()의회주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고그는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웬후이스(Ferdinand Domela Nieuwenhuis),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톰 만(Tom Mann), 키르 하디(Keir Hardie)의 지지받았다그러나 장 조레스(Jean Jaurès)와 하인리히 하인드만(Henry Hyndman)은 취리히 결의안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리프크네흐트는 입법과 의회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당과 노동조합만이 다음 회의에 초대될 것이라고 명시한 새로운 결의안을 제안했다그것은 통과되었고 아나키스트들의 제명은 이제 공식화되었다역설적이지만인터내셔널은 맑스주의자의 세계관이긴 하지만중앙조직(국제사무국이 설립된 1900년까지)이 없는 강력한 국가 부문으로 구성된 더욱 연방적인 형태의 조직과 비슷한 것이었다.

 

1890년대와 1910년대 사이에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격화되었다아나키스트들을 숙청한 사회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선거에서 성공을 거둔 것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 내에서 혁명적 경향이 커지고 있었다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다시 한번 논쟁의 조건이 바뀌었지만러시아혁명과 제인터내셔널에서 맑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단순하게 모인 것은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맑스주의와 아나키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무엇이 맑스와 바쿠닌을 갈라놓았는지 돌이켜보면 원망과 오해편견은 물론 추종자들의 부정적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그런데도실제 조직과 그 이면에는 정치적 차이가 존재했다.

 

• 맑스는 노동계급의 모든 경제적 투쟁을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고유일한 문제는 어떤 사상이 흔들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따라서 그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정당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그러한 정당은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선거집회 및 결사의 권리언론의 자유를 활용해야 한다이것은 사회주의 강령을 선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다가올 전투에 대한 훈련과 경험을 제공할 것이었다.

 

바쿠닌은 노동계급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이미 사회주의적이라고 보았고그는 정치를 대중을 지배하는 예술로 여겼다그래서 그는 기권을 촉구했다대신 그는 모든 노동자가 부문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단일한 보편적 협회로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사회주의자들은 그러한 조직 내에서 소수를 형성하고 비밀리에라도 사회주의 강령을 선전하기 위해 함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맑스는 제인터내셔널이 계급투쟁의 발전과 함께 쓸모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고반면에 바쿠닌은 제인터내셔널이 미래 사회의 배아였다바쿠닌은 처음에는 총협회의 권한 이 증대되는 것을 승인했지만자치 구역 간의 단순한 통신 및 통계국으로 축소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맑스는 총회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행동을 중앙집중화하는 수단으로 보았고우편함에 지나지 않는 총회보다는 총회 폐지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응답했다이는 그들의 서로 다른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었고 양립할 수 없었다맑스와 바쿠닌은 모두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술을 사용했고곧 "중앙파"와 "연방파사이의 갈등(엥겔스가 공개적으로 거부한 차이)으로 비화되었다보기를 들어맑스는 비밀 조직(코뮤니스트 동맹)의 일원이었고바쿠닌은 선거에 출마하여 부르주아 정당과 전술적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카를로 감부치와 셀소 케레티에게 보낸 편지에서)하기도 했다마찬가지로 맑스와 바쿠닌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각각 총회와 동맹을 대표하여 서로 권위주의를 비난하였다.

 

다양한 국가적 관점은 어떤 맥락을 제공한다맑스에게 중앙집권화(국가자본생산수단재산사람)는 봉건주의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노동계급 운동의 기초를 만든 역사적 경향이었다바쿠닌은 이 과정이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본주의 침탈에 맞서 개인협회공동체지구 및 지방의 연합을 옹호했다그러나 맑스는 '진보'를 맹목적으로 방어하는 사람은 아니었고일단 러시아의 조건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농민 공동체가 코뮤니스트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만들었다(그러나 서유럽에서의 차리즘의 몰락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관련해서만). 그런데도 맑스의 사상이 산업화한 서유럽과 자본주의가 거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남유럽바쿠닌의 농촌에서 그들의 거점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쿠닌은 프루동주의와 코뮤니즘을 혼합한 독특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이 이론의 핵심은 그가 자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며따라서 사회 발전을 통해 발생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폐지해야 할 주요 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대신에 그는 국가를 주요 악으로 간주한다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국가 권력이란 지배계급지주자본가들이 그들의 사회적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제공한 조직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바쿠닌은자본가는 국가의 비호에 의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고따라서 국가는 주요 악이기 때문에그것은 무엇보다도 없어져야 하며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도르 쿠노에게 보내는 엥겔스 편지, 1872년 1월 24)

 

맑스와 아나키즘 사이 현대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맑스는 "국가주의자"이고 바쿠닌은 "()국가주의자"라는 주장이었다맑스는 바쿠닌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모든 사회주의자는 아나키 상태를 다음과 같은 강령으로 본다일단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목표즉 계급의 폐지가 이루어지면대다수 생산자를 극소수의 착취자소수에게 속박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가의 권력은 사라지고 정부의 기능은 단순한 행정 기능이 된다.” (맑스와 엥겔스인터내셔널의 가상의 분열, 1872)

 

바쿠닌의 많은 공격은 실제로 맑스가 아니라 독일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요소를 겨냥한 것이었다나중에 생각해 보면우리는 맑스가 바쿠닌이 그를 비난했던 "국가 코뮤니스트들"과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고 말할 수 있다현재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 맑스가 비판한 내용 대부분은 사후에 출판된 친서와 문서에 국한되어 있으며바쿠닌에 대해서는 그것을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쿠닌은 또한맑스의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해서도 반대했다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소동이 있었지만바쿠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는 비스마르크(Bismarck)는 말할 것도 없고 라살레(Lassalle)의 "인민국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 맑스와 엥겔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란 정치권력 획득과 모든 계급을 폐지하는 것으로 전환을 의미했다. 1848년 혁명의 경험 이후 그들은 이미 오래된 국가 기계의 해체를 수반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지만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지 않았다맑스와 엥겔스가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고정치 권력을 획득하고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보기는 파리 코뮌(프랑스 내전, 1871년 맑스)이었다.

• 그와 동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주창한 전체 혁명계급의 독재를 '혁명을 일으킨 소수'의 독재 그리고이전에는 한 명 또는 여러 개인의 독재하에 조직되어 있던 그들 자신의 독재라는 블랑키스트의 입장과 구별했다. (엥겔스, 1874년 파리 코뮌의 변하기 쉬운 블랑키스트 강령)

 

이미 적시한 바와 같이인터내셔널은 항상 불안한 정치적 경향들의 동맹이었다이론적으로프루동주의자블랑키스트라살레주의자 등의 메들리 옆에 맑스바쿠닌과 그 추종자들이 그 안에서 공존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분열이 되었든 아니든 제인터내셔널의 시대는 지나갔다그들의 개인 편지에서 맑스와 바쿠닌은 곧 이러한 부분을 인식했다노동계급 운동이 파리 코뮌에 이은 억압으로부터 회복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었다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그것은 다른 세계로 나타났다. 187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제2차 산업 혁명은 세계 노동계급의 성장을 가속했다노동자 운동의 무게중심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갔다자본주의 대도시에서는 바리케이드 시대가 끝나고 대대적 파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50년 후

 

인터내셔널 이후 아나키즘은 가끔 모순된 입장을 드러내면서 더 많은 경향으로 분열되었다일부는 제국주의 분쟁에서 한쪽을 지지하거나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체라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혁명적 관점을 완전히 포기했다바쿠닌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맑스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유물론적 방법의 전부는 아닐지라도)을 받아들였다여전히 우리 코뮤니스트를 어떠한 아나키스트들과 결속시키는 것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과 무국적 사회 설립의 목표이다오늘날 코뮤니스트가 지지하는 입장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과거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에서 비롯된다그것들은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연속적인 반사 과정의 산물이다맑스는 노동계급 운동에 절실히 필요한 유물론적인 근거를 제공했지만그것이 그가 자본주의 초기에 옹호했던 모든 전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래서 맑스와 바쿠닌 사이의 갈등이 15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면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자본주의는 (지금까지위기전쟁혁명의 폭풍을 이겨냈다그것은 최근 축적 주기의 진통 속에서 이제 세계적인 시스템 되었다그것은 중심지에서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거의 없애고세계 인구의 대다수에 임금 노동을 부과했으며사회주의 대안이 실행할 수 있는 정도로 생산수단을 발전시켰다국가기구가 확장되고금융자본이 지배하며이제 글로벌 전쟁의 대량파괴를 통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 없이는 새로운 축적 사이클의 시작이 불가능하게 되었다제국주의 경쟁과 환경 악화는 지구상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이런 암울한 상황에서국가적 관점은 부적절하다맑스와 바쿠닌이 독일과 러시아의 국가 발전에 대해 도달한 서로 다른 결론은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해결되었다두 나라 모두 자본주의의 우위에 있으며더욱이 그들은 제국주의 강국이 되었다점진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회를 혁명적 호민관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고갈됐다현대 민주주의는 조직적인 억압과 방대한 선전 기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의 독재 뒤에 놓여 있는 무화과 잎에 불과하다오늘날대중 정당과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을 국가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권위와 자유의 진정한 통합은 1905년 노동계급이 발견한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대안인 노동자평의회이다.

 

이처럼 국제주의()의회주의계급투쟁의 자기조직화노동자평의회 통치는 모두 화해의 잠재적 지점으로 작용한다인터내셔널 정치조직이 정치적 나침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분명한 강령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점노동자평의회가 독점적인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코뮤니즘으로의 불가피한 과도기적 단계 등 여전히 남아 있는 핵심적인 차이점들은 순전한 의지를 통해 해결될 수 없으며역사가 확인하듯이 훨씬 더 첨예한 반대 속에서 똑같은 차이점을 다시 한번 포기하는 통합에 호소한다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제인터내셔널의 분열과 종말이 젊은 노동계급 운동의 후퇴였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제인터내셔널(개량주의에 의해 쇠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하여 붕괴)이나 제인터내셔널(인터내셔널, 1920년대 러시아 및 국제혁명의 패배에서 나타난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의 외교정책 부문으로 끝남)의 실패는 재앙이 아니었다국가 자본주의 계승자들 모두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반대자로 남아 있지만우리는 미래의 인터내셔널 창설에 전념하고 있는데이는 순전히 스스로 규정한 꼬리표에 근거하지 않고그 뒤에 모든 종류의 혼란과 속임수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누구에게도 진보적인 것을 제공할 수 없는 낡아빠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처에 있는 임금 노동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공통의 강령에 대한 합의에 따라 혁명가들을 통합할 것이다우리는 모든 해답을 가진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그리고 바쿠닌과 맑스 시대에 여전히 열려 있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계급투쟁경제 위기전쟁 및 혁명의 굴곡진 역사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강령을 통한 대화에 항상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인류의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되는 이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우리는 자신을 계급투쟁에 헌신하는 아나키스트로 보는 모든 사람에게 150년 전 이후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향한 그 긴 노정에서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

 

2022년 6

다이즈버즈(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2-09-02/150-years-on-the-split-in-the-first-international
 

 

<이전 글>

 

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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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독자의 소리

독자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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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전처음 제주에 올 때 책을 열권 정도 챙겼는데 그중 절반이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에서 발간한 책들이었습니다그만큼 코뮤니스트는 생각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읽고 싶은 책들이지요읽다가 다소 어렵게 느껴져서 책장을 수월하게 넘기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읽어나가며 종종 해방감을 느끼기도 합니다특히 계급평등을 위한 여성해방장애해방과 관련한 내용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계급이 있는 곳에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으니 그 구조를 공고하게 만든 자본주의는 코뮤니즘으로 끝장내야 할 것입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국내 정세 및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는 앎의 차원을 넘어서 때때로 오랜 시간 동안 사유하게 하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삶에 대해 투지와 통찰력을 키워주기도 합니다비록 일상에서 쉽게 나눌 수 없는 내용이기에 주위 분들에게 책을 직접 권하지는 못하지만대화 중 은연중에 책 속에서 읽었던 부분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코뮤니스트를 읽을 때면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듭니다자본주의의 폐해를 줄기차게 짚어주며 혁명과 희망을 나누는 분들의 숨결이 글자 위로 느껴지기에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함께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문득 책장에 있는 책들을 보니 2018년에 ICP 동지들을 처음 만났나 봅니다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알게 되면서 진작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드는 분들이 있는데 ICP 동지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덕분에 이렇게 좋은 책을 알게 해주고 또 멀리서도 읽을 수 있도록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뮤니스트」 창간 10주년 축하 드리며 앞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분노하고 애도하며 연대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제주에서 5년 차 독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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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주년 그리고 투쟁

 

2014년도 염호석 열사 투쟁을 거치며 힘겹게 내려왔을 때였습니다노동법 세미나로 연대하시던 부산반빈곤센터 고 윤웅태 대표님과 당시 사무국장인 최고운 동지를 만나며 함께 운동의 길을 모색할 때였습니다. 11월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총파업 투쟁 이후 밤에 만났던 ICP 동지들을 뵈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어리둥절하게 코뮤니스트」 책자를 받았고그날 모인 모 동지는 여기까지 오면 참 많이 온 거다.” 잘 생각하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지금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선 조금 뒤로 많이 가는 행보인데 괜찮냐는 의미 같습니다하지만 저는 운동을 함께 하며 너무 힘이 차올라 하루하루가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깨닫는 요즘입니다.

 

 

힘들 때마다 ICP 동지들을 자주 만났었네요윤 대표님 돌아가시고 그해에 박근혜 몰아내는 투쟁을 할 때도 함께 만났고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파괴 문건 6천 건이 터져서 난리일 때도 당시 대의원 활동을 하던 제게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준 ICP 동지들 기억납니다그때 노조의 이야기를 코뮤니스트에 실어준 이형로 동지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며전국 9개 지회장이 운영위 성원이 되어 회의록을 집필한 뒤 당연직 대의원으로 돌아와 고작 40명 넘는 대의원 회의를 좌지우지하는 체제에 반기를 들고, ‘대의원 당연직 폐지’ 안건을 주장하며 1대 다수와 싸우며 대의원 회의장을 박차고 들어갈 때도 역시 ICP 선배 동지들의 좋은 조언들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코뮤니스트」 10주년 속에 저의 투쟁과 반빈곤센터의 투쟁과돌아가신 열사의 염원과 먼저 가신 윤웅태 동지만나 뵈진 못했지만남궁원 동지의 뜻까지모두의 힘이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10주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늘 함께 오랫동안 건강한 투쟁 하면 좋겠습니다.

 

부산에서 독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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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과제

2024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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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전망 23(시리즈 4) 사설

 

 

2024년이 시작되면서 세상은 끔찍한 곳으로 보인다물론 그 중앙 무대는 가자지구의 대학살이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잔인한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대적이고 무자비한 보복으로 인해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수만 명이 사망했는데팔레스타인 대 이스라엘의 사망자 비율이 20:1에 달한다가자지구에서는 7,000명 이상이 '실종'되었고, 19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이스라엘에서도 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매일 새로운 끔찍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명 피해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청소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가자 지구의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역사적으로 인구의 강제 이동이 잘 끝난 경우는 거의 없다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주민들은 하마스 민병대의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와 압도적 전쟁 장비를 갖춘 이스라엘 국가의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악랄한 덫에 걸려 있다모든 잔혹 행위는 상대방의 야만성에 공포를 느끼고 경악하는 더 많은 적()을 만들어내고그 공포를 이용해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잔혹 행위를 정당화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혁명적 전망」 이번 호의 첫 번째 기사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잔혹 행위의 역사적 맥락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이 지역의 여러 공동체 사이 관계의 역사지역 및 세계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이익을 위해 여러 집단과 국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설명한다.

 

전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레바논시리아이란예멘이 분쟁에 개입할 위험이 있다폭탄과 로켓 공격포격공습이 이 지역 전역에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이 글을 쓰는 시점인 1월 초헤즈볼라가 레바논 남부에서 '수백 발'의 로켓을 발사했다는 뉴스 보도가 나왔다지금까지 헤즈볼라는 하마스에 대한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은 거의 없이 말뿐인 지원에 만족해 왔다이 두 민병대는 서로 다른 이슬람 종파 출신으로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의 수니파 단체가 동맹을 맺고 지원하고다른 하나는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민병대이다그러나 둘 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주요 후원자인 미국에 반대하고 있다한편미국과 영국은 더 넓은 이란과 동맹을 맺은 후티 민병대가 국가를 장악하고 이를 홍해의 국제 선박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기지로 삼고 있는 예멘에서 더 넓은 분쟁에 연루될 수 있다.

 

이번 호에는 제국주의적 긴장이 고조되는 혼돈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담지 못했다이에 관한 추가 기사는 웹사이트에 게재할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물론 자본주의가 세상에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전쟁만이 아니다석유 매장량을 보호하거나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추진점점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이는 물 공급 분쟁리튬과 같은 원자재 확보에 이르기까지 환경 파괴는 전쟁이 일어나도 멈추지 않고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며그 자체가 전쟁의 원동력 중 하나이다한편 세계의 '지도자들'은 우스꽝스러운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 협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온실가스 배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효과적인 조치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이 연례 잼버리는 이제 화석 연료 회사의 로비스트 수천 명과 국영 석유 회사에서 선발된 국가 대표들이 참가하는 전 세계 화석 연료 산업의 선전 도구로 공공연하게 활용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에 합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화석 연료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목적과는 달리국가와 기업들은 지구의 천연자원에 대한 파괴적인 착취를 계속하기 위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무역 박람회로 이 회의를 이용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끝없는 이윤 추구로 인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녹색 자본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며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인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두 번째 기사에서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회의와 그 즉각적인 결과를 살펴볼 뿐만 아니라우리가 시작한 진로를 바꿀 수 없는 경우 헤드라인 뒤에 숨겨진 과학적 사실과 세계가 나아갈 전망을 살펴본다.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가 되고정치 위기가 환경 위기나 군사 위기인도주의 위기가 되어 경제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등 위기를 양산하는 체제이다. 2차 대전의 엄청난 파괴와 고통그리고 그 여파로 냉전의 적대감이 고조된 가운데 전후 호황을 누렸던 세계 자본주의는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 종료와 함께 전후 경제 합의를 종료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 이후 50년 이상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이윤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반세기 동안 경제 위기일시 모면하는 해결새로운 시작경제적 황폐화가 이어졌고기술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생활 수준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시리즈의 4부에서는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이 종료되고 1991년 소련 블록이 해체된 후 케인즈주의 합의가 종식되고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세계화'와 '금융화'가 시작된 시기 사이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이번 호의 마지막 기사는 레닌 사망 100주년을 맞아 레닌의 업적과 유산을 살펴보는 역사적 기사이다맑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역사가 '위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개념을 거부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역사적 시기에 중요한 인물이 살면서 활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100년 전세계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상징으로 새롭게 탄생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레닌이 사망한 1924우리는 '맑스-레닌주의'의 망토를 두른 소련을 포함해 세계 혁명의 물결이 가라앉고 반()혁명의 긴 밤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우리는 반혁명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당시에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지만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레닌을 역사적 맥락에 놓고 그의 위대한 공헌과 오류그리고 반혁명의 후계자들이 레닌의 유산을 왜곡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 국제주의자들에게 레닌의 가장 큰 공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내전', 즉 계급전쟁으로만 끝낼 수 있고계급전쟁의 무기로서 노동계급이 국제정치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또 다른 세계적 분쟁의 심연에 다다른 지금이것은 혁명가들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4년 1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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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를 비판하며

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를 비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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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의 주범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모든 인종주의-민족주의 반대한다!!!

 

 

1.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결의대회

 

지난 2023년 12월 27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는 대구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불법고용 이주노동자 단속촉구출입국관리사무소 규탄지역민 일자리 사수 건설노동자 총파업 투쟁결의대회'를 열었다그동안 건설노조 일부에서는 일자리임금노동조건을 지키겠다며 불법 이주노동자 단속을 계속 주장해 왔다이는 윤석열 정권과 건설 자본의 건설노조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일자리에서 배제되고 경기침체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배제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한국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유지하는 한 축이다노동력이 부족한 한국에서 자본과 정권은 매년 이주노동자 도입을 더 많은 업종으로 늘려가고 있다하지만이에 따른 이주노동자 인권은 현대판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주노동자 임금체불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엔 1,300억이 넘고이주노동자의 70% 이상이 비닐하우스컨테이너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역대 자본가 정권에 이어 윤석열 정권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해 온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이동의 제한에 더해지역이동마저 제한했고올해 이주노동자 도입을 16만 명으로 늘리면서도 체불임금과 산재 상담인권 상담을 담당했던 전국의 외국인노동자 지원센터 예산을 전액 삭감해 버렸다자본가들은 이러한 이주노동자의 신분상 제약을 악용해 장시간고강도 노동을 강요하고 임금도 상습 체불해 왔다.

 

그런데도 대경 건설지부는 가자 총파업불법고용 이주노동자 퇴출시키자!”라는 반()노동자 슬로건을 걸고 조합원 2,000여 명을 집결시켜 결의대회를 진행했다이렇게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방식은 정주 건설노동자의 권리를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분열정책에 부역하게 되어 그들의 공격에 맞설 힘마저 잃게 만든다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노동조합의 조직적 활동으로 더욱 확대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강력히 규탄한다우리는 자본의 분할통제 정책(이용하든 이용당하든)에 따라 노동자를 불법/합법이주/정주정규직/비정규직원청/하청남성/여성 노동자로 분열시키는 계급 단결-연대의 방해 세력에 맞서 노동자 국제주의 기치 아래 싸워나갈 것이다.

 

2. 인종주의-민족주의는 자본의 노동자 통치 방식

 

자본의 노동자 지배와 통제방식의 전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자본주의 주기적 공황과 그에 따른 차별 대우이다이것을 자본은 정의공정상대적 과잉인구인적 자본론성차별인종-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식적으로는 차별을 정당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차별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에게 수용하도록 한다이것이 지배계급이 주장하는 공정의 전제이다정당한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인적 자본론이다사람을 자본으로 보고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교육훈련)를 많이 할수록 인적자본(사람)이 받는 보상도 크다는 것이 인적 자본론이다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경영학에서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한 차별로 본다이 '능력'은 자본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능력이며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는 방향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소통과 연대보다 개인의 능력을 키우고 인정받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는데노동자 내부는 분열과 경쟁이 심해진다결국이것은 자본이 노동 전반을 통제하기 쉽게 만든다건설노동자 일부의 이주노동자 단속 주장은 바로 이러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시각이 여과 없이 투영된 결과이며민족주의-계급 협조주의에 기반을 둔 조합주의 병폐이다.

 

3. 노동계급 분열에 맞선 투쟁과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자 사이의 경쟁과 적대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계급의 연대를 약화하는데이것은 자본가계급이 민족국가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것과 부합한다그동안 자본가계급은 외국인(이주노동자혐오와 인종주의를 노동계급을 분할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왔다……

정주 노동자의 임금을 하락시키고 부족한 노동력을 값싸게 채우는 역할불법 이주자의 지위와 존재를 이용하여 공공서비스와 복지를 하락시키고 국경의 군사화를 이루는 데 이용하고종교적 인종주의로 노동계급을 분할 지배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인종주의로 분열되고 분할지배에 순응한다면 투쟁은 약화하고 착취의 강도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인종주의에 맞서 타협 없이 싸우는 것은 노동계급 단결을 복원하는 일이자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시급한 과제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혜원, ‘인종주의와 노동계급’, 코뮤니스트」 8)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대표적 통제방식인 인종주의-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과 맞물려있다조합원들의 고용안정과 생존권을 이유로 정부의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을 정당화하고노동조합이 이주노동자에게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고 단속하라는 집단행동을 하는 순간노동자들은 서로 분열되고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무력해진다자본주의 쇠퇴기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에 전가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자본가계급에 이러한 노동계급 내부 분열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체제의 생명을 연장하고착취자들에게 새로운 이윤 창출 기회를 줄 뿐이다.

 

자본주의는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고 있고모든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제국주의 전쟁경제위기기후위기팬데믹환경파괴에너지 위기생계비 위기위기의 폭주는 2024년에도 계속되고자본주의 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이 체제에서 고용불안저임금실업빈곤은 일상화되었다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노동계급 일부를 배척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모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동의 적인 자본가계급에 맞서 다수 노동계급이 단결하여 싸우는 길밖에 없다.

 

이주노동자난민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모든 세력에 맞선 국제주의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모든 인종주의-민족주의 반대!

 

우리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지배계급의 정책과 그에 부역하는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싸울 것이다나아가 모든 차별과 위기의 원인이자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위기를 전가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 분열과 희생을 거부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2024년 1월 24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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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그람시: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

그람시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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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신화는 끝이 없다가장 큰 신화는 공장점거 운동의 영웅이자 신질서( L’Ordine Nuovo)의 창시자이며, 1921년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d'I)의 창설자라는 것이다이 신화를 바탕으로 전후 개량주의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I)의 이론가들은 그람시의 이론적 개념과 범주를 사용하여 '유로 코뮤니즘'을 정당화하거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패한 시도로 러시아 블록에 대한 충성을 회피했다하지만이탈리아에 국한되거나 소련의 붕괴와 유로 코뮤니즘의 소멸로 사라지기는커녕그람시의 방대한 저서는 이제 전 세계 학술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언어학에서 인류학을 거쳐 정치학사회학, '교차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람시의 헤게모니 사상, '수동적 혁명', '현대 군주론', '진지전', '실천철학'은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고 사회를 개인의 집합체로 환원시키는 탈()진리 시대에 번성하고 있다오래된 자본주의 중심지에서 산업 노동계급이 파괴된 후이 모든 생각은 노동당과 같은 이전에 계급에 기반을 둔 정치 조직의 재구성을 합리화하고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그리스의 시리자 같은 자본주의 좌파의 새로운 포퓰리즘 운동에 기여하는 일에 이용되었다후자가 어떻게 차려입었는지에 관계없이그들은 대중의 노동계급 혁명이 가능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을 전복시키지 않고 국가의 역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위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가 선거 지원으로 지지받는 기존의 정치 체제 내에서 일련의 운동과 동맹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기될 필요가 있다는 공통된 견해를 공유한다.

 

이전 시대에-자본주의의 현재 축적 위기의 첫 번째 단계에서 노동계급이 사장의 공격에 저항하도록 자극받았을 때 자본주의의 좌파 정치 현장에서 아이콘의 무언가가 된 것은 또 하나의 그람시였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거치면서 1920년 토리노 공장점거의 대변자였던 신질서의 그람시가 공장점거와 노동자 협동조합의 급증으로 노동계급을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자 아나키스트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열정이 불타올랐다우리가 이탈리아 좌파의 전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과 그 전신인 혁명적 전망(1970년대 초)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는 노동계급이 작업장을 장악함으로써 코뮤니즘을 창조할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항하고 자본가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단순히 앞과 뒤로 움직이는 국가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람시와 동시대에 살았던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은 자신의 언어로 "10월 혁명의 불길로 촉발된 혁명적 시기를 공유했다." 그는 그람시가 신화든 아니든 당대의 노동계급에 남긴 유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맑스주의의 훼손과 코뮤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모호함그리고 정치적 계급투쟁의 본질에 대해서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일두체'가 1943년 말에 혼란스러운 북부 이탈리아에서 나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 때데이먼은 노동계급의 혁명적인 정치 조직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은 국가자본주의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일부임을 증명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설립되었다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미국이 지원하는 당파에 등록시켜 '민주적인 이탈리아'를 위해 '독일 나치'와 싸우는 대가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예우를 표시했다. (그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데이먼은 톨리아티 암살단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의 동지인 마리오 아쿠아비바와 파우스토 아티와는 달리 살아남았다.) 물론 이 시기에 그람시는 사망했지만, PCI가 이탈리아 국가자본주의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완전한 수용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은 주로 그의 사상과 점점 더 신화적인 인생 이야기였다. (실제로 1944년 러시아 망명지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은 PCI를 국가 통합,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PCI 당파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사회주의를 위한 무장투쟁'을 포기했다이는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을 점거하고 현상 유지로의 복귀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토리노밀라노제노바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에 다시 참여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영미 제국주의의 입맛에 맞았다.

 

PCI가 이탈리아 자본의 정치 체제 일부로서 전후 역할에 정착함에 따라데이먼은 1921년 리보르노에서 설립된 맑스주의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과 같은 혁명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을 고찰하고 있었다현재의 책은 데이먼이 수년에 걸쳐서 작성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분석적이고 실제적인 맑스주의자로서 그람시의 단점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다책이 완성되기 전에 그는 사망했고 초안은 사후에야 발견되어 1982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그 구조가 느슨하다지식인의 역할그람시의 역사관에 대한 크로체(Croce)의 영향 등과 같은 주제 중 일부는 현대 독자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그람시의 글에서 계급역사의 비극적인 주인공그들의 경제적 이익사회적 관계의 복잡성진보와 쇠퇴의 역학관계는 단지 그림자로 표현되지만반면에 개성과 학문 그리고 개인에 관한 측면이 지배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데이먼의 관점은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가 단순히 영리한 개인의 추상적 비평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적 신념을 변화시킨 누군가에 의해 종종 만들어진 노동계급의 경험과 지속적인 상호 관계의 일부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다. ("자본을  썼던  바로 그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과 노동자 인터내셔널 연설문도 작성했다.")

 

그람시의 초기 신질서」 시기(1919년 5월부터 1920년 가을까지)와 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화신으로 칭송되었던 대중 공장점거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데이먼은 그람시의 환상에 대해  전형적으로 관대하면서도 그들에게  공감하지는  않는다그는 역설적으로 코뮤니스트  지오반니 파로디(이탈리아 사회당(PSI)의 기권주의 분파선거 참여에 반대)는  "국가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고 기업가 아그넬리는 피아트의 사장으로 남아있는 동안 전무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패권적 역할을 위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에 주목한다그러나 동시에 기존 국가 내에서 노동자 통제의 전후 PCI의 그림과는 달리 그는 그람시가 노동계급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기능으로 적어도 공장 위원회를 구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1920년 11월 말 이몰라 협약이 체결될 즈음에 신질서」 그룹은 해체되었지만그는 그 흐름이 리보르노 이전의 정치 오리엔테이션 회의에 동등한 조건으로 참석했다고 관대하게 주장한다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된 그람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코뮤니스트-사회주의분파를 만들어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최대주의'와 근본적인 단절을 촉구하는 것을 지지했다그러나 그람시는 리보르노 대회에서 거의 일주일간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옛 토리노 그룹 중 오직 테라치니(Terracini)만이 강단에서 공장 평의회가 아닌 코뮤니스트 분파에 대해서 연설했다. (타스카와 톨리아티와 같은 그룹의 다른 주요 구성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PSI와의 분열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1919년에 설립된 코민테른의 규율)이 이탈리아당에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일어났다보다 근본적으로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어느 조직이 혁명당을 구성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을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었다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을 위한 혁명적인 맑스주의의 틀을 만드는 것은 보르디가에게 달려 있었다그 당이 결성되었을 때고립된 볼셰비키당에 의한 코민테른의 지배는 이미 반()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왜 '리보르노 좌파가 너무 분열된것을 바로잡기 위한 도구로서 러시아가 그람시를 첫 번째로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그는 1922년 제4차 코민테른 대회 이후 모스크바에 남게 되었다보르디가가 1923년 감옥에서 석방된 후 집행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맡는 것을 거부한 후 결국 그람시는 1924년 5월 당의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었다그는 당시 모스크바의 책략으로 직책을 맡은 4명의 신입 회원 중 한 명인 톨리아티가 집행부에 포함되었다그런데도 원래 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로서의 그람시의 역할에 대한 질문은 특히 자신의 개인적정치적 삶이 정책의 비참한 결과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데이먼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이 사건은 그람시의 약점이 노동계급 내부의 혁명 정당으로서 PCd'I의 소멸과 반()혁명의 과정을 어떻게 촉진하고 돕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모든 혁명가에게 매우 중요하다사실 CWO는 마테오티(Matteott)의 위기 동안 PCd'I에 대한 그람시의 지도력과 조정 위원회의 강령에 관한 두 장의 영어 번역본을 이미 출판했는데,  이는 1926년 리옹 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람시와 그의 모스크바 지지자들의 조작에 맞서는 전투에서 패배한 내용이었다. (설명 개요와 함께 이 팸플릿은 여전히 CWO 인터넷 주소에서 이용할 수 있다.)

 

이는 학계나 대중적인 오락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1926년 말 무솔리니의 모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 이후 그람시가 우스티카(Ustica)섬에서 그의 첫 정치적 망명 생활을 보낸 44일간의 유튜브 영화를 볼 수 있다. TV 시리즈 인스펙터 몬탈바노에서 파지오(Fazio)로 널리 알려진 페피노 마조타(Peppino Mazzotta)가 안토니오 그람시 역을 맡으면서이 영화는 '여론 형성자'로서 기획되었다망명한 동료 보르디가와 잠재적인 정치적 논의는 피하고 있다그들 중 누구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고 빌라 데이먼(Villa Damen)으로 알려진 '사라센 타워'가 즉흥적인 잔치 학교의 장소가 된 데이먼은 언급되지 않았다이것은 사소한 하나의 보기이지만디지털 세계에서 변화하는 지적 풍토에 맞춰 그람시의 이미지가 지속해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그러나 데이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계급 정치 운동은 결코 일반적인 지적 풍토의 일부로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람시를 다시 읽는 것은 그의 가르침의 이름으로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것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의 그람시주의는 개인과 정치적 혼란을 가중하는 연쇄효과를 가진 세계적인 지적 집착이다. 21세기의 혁명가들은 거짓된 친구들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종식에 대한 열망을 국제주의 노동계급의 입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흐름으로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좌파를 존속시키고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한 이러한 개요가 출발점이다그리고 그 누구라도 이 책이 읽기에 쉽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19년 7

E. 레이너(E. Ray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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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람시의 시간

 

그가 그럴 자격이 있든 없든, 10월 혁명의 불길에 의해 촉발된 혁명의 시대를 공유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람시의 운명을 분명히 부러워할 수 없다그의 개인적인 삶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이론을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의 투사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인 속임수의 수단으로 바꾼 당의 기구에 의해 이용되었다.

 

그의 삶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 유난히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일부로 기억되지만특히 초기 전후의 경제적정치적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파시스트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있었던 코뮤니스트당 활동가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그람시의 희생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치인들이 홍보하는 그람시는 그들의 정치적 이미지와 그들에게 어떤 오래된 헛소리도 흡수할 준비가 된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무리 사이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름과 대의명분에 대한 그들의 필요에 맞게 조정되었다혐오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그러한 필요성은 지난 20년간 책 시장을 포화시켰던 점령된 전기 작가와 논평가역사가와 지리학자문학 비평가심지어 함께하는 시인들을 대신했다이 점진적인 그람시에 대한 재구성은 그에게 가장 해로운 이데올로기적 프로필 중의 하나를 갖게 되었지만글을 쓰게 한 정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프로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람시를 아주 잘 아는 사람으로서그가 가장 큰 정치적 성숙기에 도달한 시기를 공유하고 그 이후 그의 후기 저술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우리는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그람시의 작품은 그의 해석 방식이 제공하는 도구나 그 자신의 목표 측면에서 볼 때 맑스주의에 기반을 두지도 않았고 맑스주의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문제들과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는 절박함이 그에게 팽배해 있었지만그런데도 그람시는 마치 자신이 앞으로 심각하고 지속적인 실천적인 방법을 찾음으로써 그의 신체적인 장애를 보충하고 싶은 것처럼 열정적인 창의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이상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신화에 의해 생성된 철학 사이에서그람시는 분명히 전자에 해당했지만실제로는 교육취향 및 경향 면에서 후자로 기울어졌다어쩌면 그람시의 성격과 그 불완전성그의 이론적 방법의 단점과 정치적 계획의 경험주의에 대한 이 논쟁은 기회주의가 어떻게 계속해서 자신을 정당화할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어쨌든 "좌파지성주의의 해부학적 표에 있는 그람시의 이 놀라운 생체 해부는 맑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방대한 가정과 관점들을 밝혀냈다여기서 빠르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1차 세계대전에 직면하여 그람시는 전쟁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문제에 대한 혁명이론의 발전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레닌과 룩셈부르크와 달리 계급적 관점과 혁명 전략 측면에서 제국주의의 현상을 감지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1914년 10그람시는 일 그리도 델 포폴로 [인민의 외침]에 등장한 전쟁의 문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작성했다.

 

"...역사를 사회의 다른 능동적수동적 세력에 대한 일종의 중단 없는 공격으로 구성된 자기 의지력 창조로 생각하고마지막 단절(혁명)을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준비하는 혁명가들은 '절대적 중립'이라는 잠정적 공식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이를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으로 전환해야 한다."

 

무솔리니를 파시즘의 논리적 서막인 혁명전쟁 이론으로 이끈 것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중립이었지만그것은 그람시를 혁명적 패전주의 이론이나 실천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람시가 자유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크로체의 역사주의(정신의 창조로서의 역사)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념적인 용어 외의 어떤 것으로도 맑스주의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실제로그람시는 10월혁명(라반티!(앞으로) 1918년 7월 25)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그람시는 "역사의 발전은 모든 기존 구도를 무너뜨리는 역사의 내재적 힘"이라고 하는 자유의 리듬에 의해 지배된다"라는 글을 작성했다."

 

그와 같은 관념론적 성향으로 인해 그는 평의회가 자본주의의 줄기 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객관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지만혁명당 건설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우리가 리보르노 및 리옹 대회에서 처음으로 알았던 사람그리고 마테오티 살해에서부터 예외적인 법에 이르기까지 당을 주도했던 후기의 그람시는 훨씬 덜 독창적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자생주의와 개성의 역할

 

같은 과정의 순간으로서 당과 계급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카우츠키의 사고에 대해 잘 언급한 것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그는 경제주의 및 자생성 경향에 대항하는 날카로운 반론을 정당화한다카우츠키는 "사회주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로 나란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제에서 일어난다현대 사회주의 의식은 심오한 과학적 이해에 기초할 수 있을 뿐이다사실 현대 경제 과학은 현대 기술과 함께 사회주의 생산을 위한 조건 중 하나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느 것도 만들 수 없다과학과 기술은 모두 현대의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한다과학을 깍아내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지식인들인데비록 현대 사회주의가 이 사회 계층의 일부 구성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중 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일부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전달했고프롤레타리아트는 조건이 허락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도입했다따라서 사회주의 의식은 외부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유입되는 요소이지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요소가 아니다."1)

 

이는 레닌이 확인시켜 준다.

 

"모든 국가의 역사는 노동계급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노동조합 의식즉 노동조합에 결합하고 고용주와 싸우고 정부가 필요한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확신만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그러나 사회주의 이론은 지식인들에 의해교육받은 대표자들에 의해 정교화된 철학적역사적경제적 이론에서 비롯되었다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이었다같은 방식으로러시아에서 사회 민주주의의 이론적 원칙은 노동계급 운동의 자발적인 성장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그것은 혁명적 사회주의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다."2)

 

분명히 그 질문은 전형적인 반론처럼 극도로 광범위하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그러나 논쟁의 영지가 있는 진리는 항상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므로 배제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더욱 보편적인 진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그들의 '궁극적인 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주의 의식만을 정교화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사회주의 의식을 전달하는 과학기술에 정통한 부르주아 지식인들 사이의 엄격한 구분으로 문제의 조건을 축소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이것은 결국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과는 거리가 먼 근본적으로 이원적인 학문적 결론에 빠지게 될 것이다비록 그들이 서로 다른 전제로부터 생겨났지만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여전히 하나의 과정계급의 존재-의 두 가지 얽히고설킨 순간의 결과이다.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과정에서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인간의 힘이 그것에 내재하여 있지 않다면 사회적 과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사회적 갈등과 투쟁 상황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는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이것은 다양한 사회 범주들 사이의 분열 의식이 나타나고 결국 계급 적대감으로 결정되는 맥락이다.

 

이론적과학적 지식의 축적은 삶의 질이 점점 더 높아지는 지표로서 인간 지식의 광범위한 증가미각감수성새롭고 미지의 것에 대한 더 예민한 호기심에 대한 필요성 등의 일부이다한마디로사물의 연결고리는 인간 활동의 연결고리와 얽혀 있다사회주의는 아무리 영리한 공식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실험실 연구의 산물이 아니다그것은 단지 과학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즉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등장하고 그 자체 모순의 무게로 점차 성장해 온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다.

 

자본주의 자신의 경제 조직의 변증법이 사회주의적 결과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면이것은 평등과 자유에 대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동경하는 인간의 목표이기도 하다보기를 들면맑스와 엥겔스 같은 과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심화시키고 있을 때이러한 부르주아지의 후예들은 부르주아지가 수십 년에 걸쳐 기술적 변화와 과학적 성과를 형성해 온 연구 도구를 이용했다자본주의 생산의 지원 아래 특히 동력의 엄청난 상승이 단순히 자본주의 때문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만큼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 인간 노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우리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헌을 부르주아 출신 학자들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하더라도그들의 신랄한 비판과 그들이 고찰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를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다면우리는 극단적으로 진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한다'라는 것은 이러한 거장들의 중요한 업적을 과학적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계급의 대의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업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보수적 순응주의에 대항하여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며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발전을 위한 존재 이유를 인식한 사람들이다그들은 현대사에서 두 기본계급 사이의 억제할 수 없는 투쟁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써 계급의 의의를 설명하고 혁명적 전복 이론을 발전시켰다자본을 쓴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과 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연설문도 썼다하나는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다기본적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이탈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중단했지만노동이 더는 인간에게 부담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자유로운 표현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소외된 노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맑스엥겔스그리고 후에 레닌과 함께 맑스주의와 연계된 사상가정치가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에 그 상황과 그 사명에 대한 의식을 도입하는임무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형성 요소들은 노동계급에 역사적 모체를 가지고 있으며이는 다시 과학적 체계화의 실험실에서와 같이 일부 개인의 의식에 반영되어 있으며따라서 이러한 지식을 계급에 반환하여 그것이 점점 더 분명하고 뚜렷한 방식으로 "목표를 의식할 수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은 또한 성격의 역할을 정의하는 방법인 것 같다자본주의 내부에서 성숙한 내재한 모순의 역사적 결과로써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생산과 분배그들의 비타협적인 과학적 분석은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적대적인 역할을 강조하도록 이끌었다무엇보다도그들은 혁명적으로 되기 위한 노동계급 사이에서 정치적 무장을 위한 성향을 추정하는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규정하는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계급에 충실하도록 그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을 했다.

 

우리는 반복한다유물론의 초기 논문은 인간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따라서 만약 실제로 이것이 사실이라면무엇보다도 그것은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이 사람들의 행동이 얼마나 정확하게 결정되는지 이해하는 것만 남게 된다이러한 부분에 관해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 국가에서 특정한 사람이 확실한 시기에 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순수한 우연이다하지만 그가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나쁜 것보다[tant bien que mal] 좋은 것이 더 많았던 것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결국그는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나폴레옹(이 특별한 코르시카인)이 프랑스 공화국의 소모적인 전쟁이 요구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어야만 했던 것은 우연의 문제였다하지만 나폴레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다른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채웠을 것이다이것은 그러한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항상 발견되었다(시저(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크롬웰(Cromwell) )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물론 맑스는 역사 유물론의 개념을 발견했지만티에리(Thierry), 미그넷(,Mignet) 귀조(Guizot) 같은 영국 역사학자들이 1850년까지 연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그리고 모건이 같은 개념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것을 발견할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래서 역사에서 다른 모든 그리고 명백한 사건들과 함께우리가 연구하는 분야가 경제에서 멀어질수록그리고 순수하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가까워질수록우리는 그 발전 과정에서 오류가 더 많이 드러나고 그 곡선의 흐름이 지그재그로 진행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완만한 추세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더 포괄적으로 취급되는 분야가 경제 발전 추세와 더 밀접하게 나란히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

 

"정신적 또는 사회적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의 '성격'은 경제적 발전과 병행하는 인류의 지적 발전의 '평균적선을 외모가 막지 못하는 사건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4)

 

이 점에서 레닌의 입장은 훨씬 더 정확한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우리는 이미 레닌이 당대의 경제주의와 자생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조합주의와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만으로 상사들에 대항하여 수행하는 투쟁에 내재한 근본적으로 협동조합주의적인 위험에 대해 어떻게 경고했는지그리고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와 그보다 더 준비된 간부들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으로 유입시키는 임무를 맡겼는지를 이미 살펴보았다그리고 일방적이고 제한적인 해석즉 비()변증법적인 해석을 배제하기 위해그의 일반적인 접근법은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경향"이 저지르는 근본적인 오류는 자생성에 굴복하는 것과 대중의 자생성이 우리 사회민주당에 높은 수준의 의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대중의 자생성 급증과 운동의 확산이 클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정치적조직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더 광범위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러시아 대중의 자발성 급증은 젊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러한 거대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정도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이러한 준비 부족은 우리의 공통된 불행모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불행이다대중의 급증은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확산하였다그것은 시작된 장소에서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역과 인구의 새로운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노동계급 운동의 영향으로 청소년 학생일반적으로 지식인심지어 농민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동요가 있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그들의 "이론"과 활동 모두에서 이러한 급격한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다그들은 전체 운동을 이끌 수 있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조직을 설립하는 데 실패했다."5)

 

진정한 사회주의자이자 혁명적 전위대의 임무에 대한 명확한 비전속에 레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이론적인 레닌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간그의 나라와 노동 대중의 현실과 접촉하고 있는 ― 침략적인 독점자본주의가 부과한 기계들의 새로운 노예화에 직면하도록 밀어붙일 필요와 본능에 의해 러시아 문명이 경제적정치적 중도주의의 마지막 흔적들과 결별하는프롤레타리아트의 원인과 동일시하고오늘날 맑스주의의 이론적 정확성의 증거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혁명적 투사이기도 하다한마디로이는 맹목적인 직감과 비합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투쟁에서 대중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투사이다이 경우 레닌은 집단적 열망의 구현으로서 이론강령과 구조 측면에서 그가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당과 하나이다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과 하나가 되어서당은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노동계급이 추구하는 가장 높고 완전한 "최종 목표에 대한 의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발전 수준이 어떠하든노동계급 자신에 대한 의식과 혁명적인 임무는 무엇보다도 전체 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상설 조직의 대변인으로 인정받는 그러한 개인들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된다.

 

<>

1)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참조

2) 앞에서 언급함

3) 엥겔스사회주의 학자, 1895

4) 플레하노프맑스주의의 근본 문제

5) 레닌앞의 책. (영어판 53: 9프로그래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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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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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수학경제학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참여했다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이라는 글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비록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대대적 파업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 되어야 했다독일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칼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이 시기 동안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독일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고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1차 세계대전의 서곡이 되는 과정과 개량주의의 한계를 매우 훌륭하게 서술한다

 

"오늘날 전쟁 탄생의 역사는 1914년 7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자연법칙의 필연성으로 한 가닥 한 가닥 짜인 제국주의 세계정치의 촘촘한 그물망이 5대륙을 감싸게 되는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이 그물망은 경제발달의 지각 심층에 뿌리를 두고 있는외부 가지들이 희미하게 동터오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자광대함에 비해보면 죄과와 원죄의 개념방어와 공격의 개념이 공허하게 퇴색해버리는 그러한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다."

 

"사회민주주의 여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병역을 위해 자본주의 여성 운동과 동맹을 맺었고 민족적 사마리아 작업을 위한 동원 이후 남아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배치했다사회주의 여성 운동은 당을 위한 선동 활동 대신 무료 급식소와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사회주의법 아래서 당에 반대를 표명했던 계엄 상태와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은 선동을 확산하기 위해 의회선거를 활용했고대중에 대한 확고한 세력을 유지했다이 위기에독일의회와 주의회 선거 동안사회민주주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모든 선전과 교육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지배계급은 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유명한 혁명가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관해 행한 연설에서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결국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제동지들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오늘날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합니다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사실로 만들며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 1918)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인터내셔널 좌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그는 민족문제에서 레닌보다 더욱 명확했다그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민족자결권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자본주의 쇠퇴민족주의제국주의 등에 대한 그의 교훈은 여전히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다그에게 자본주의 쇠퇴기의 민족전쟁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그는 민족의 이익은 단지 대중을 오도하고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에 도움이 되도록 유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주의는 동등한 권리와 더불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다그러나 사회주의 자체로도 그러한 민족을 창출할 수 있고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가져올 수 있다이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다른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건에 대한 사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혁신적적극적인 정책을 위한 이정표와 원동력과 같다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제국주의 세계정치가 민족의 삶의 안팎을 결정하고 규제하는 한전시든 평시든 민족자결권은 있을 수 없다현 제국주의 환경에서 민족방어전쟁은 있을 수 없다이러한 결정적 역사적 환경에 의존하고전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국가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책은 사상누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유니우스 팸플릿)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억압받는 민족도 제국주의 또는 전쟁의 결과로써 주어진 국가에 의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지배계급이 권력 집단에서 그들의 지배적인 동료들과 한통속이 된 약소국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게임에서 한낱 말에 불과하며그들을 위한 도구로서 전쟁에서 혹사당한그리고 전후에 버려지고 자본주의 이해관계로 인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자유로운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존재할 수 없다그 자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흡수되어야 하며 세계시장에 참가해야 한다이것은 민족운동에서 발생한 신생국은 그 크기 또는 경제력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제국주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표현이자 자본주의 존립의 최후 국면의 표현인자본주의의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는 경제적 흐름을 야기한다전 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킨다모든 구시대적이고 전(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사회는 일소된다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부와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대중을 임금 노예로 전환한다."

 

"제국주의는 국가의 어느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다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발전에서 성숙이라는 특정 단계의 산물이며국내에서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전체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유니우스 팸플릿)

 

"전 세계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정치적 세계지배의 가장 특색 있는 발현이자 자본주의 최종 단계에서 발생하는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숙적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처음으로 엄밀한 과학적 사상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트와 해방을 위한 길을 밝혀 주었다종파학파유토피아 및 다양한 국가에서 고립된 실험 대신에밧줄을 묶는 것과 같이 국가들을 단결시키는 한결같은 국제적인 이론적 기초가 발달하기 시작했다맑스주의 이론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에 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확고한 목표이자 최종 목표로의 정도를 항상 나타낼 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유니우스 팸플릿)

 

인터내셔널의 반역 이후룩셈부르크는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노동계급의 목표와 이익에 대해 그릇된 일을 저질렀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의 사회주의당 지도부의 반역 이후그리고 그들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서 부르주아 제국주의로 이동했던 퇴행 이후전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 행동을 이끌고 조직할 과업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사회주의에 가장 중요하다." (로자 룩셈부르크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수감 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그는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수감 중에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그리고 문학과 문화 문제도 다루었는데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러시아혁명에 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한 점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는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했고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수감 중에 룩셈부르크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감옥을 둘러싼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에게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에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있었다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1919년 1월 15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그 이전 룩셈부르크는 1916년 재투옥되었으며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이 시작했을 때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전후 1918년 11월 8룩셈부르크는 석방되자마자 독일혁명의 심장부베를린으로 달려갔다. 1918년 11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군화발로 짓밟았다. 1918년 12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을 창설했다집요한 추적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노동자 탄압 시기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룩셈부르크는 적기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떠나고 싶지 않았지만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벽보의 주제는 섬뜩했다.

 

평화일자리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년 1월 15일 밤베를린의 부촌 빌머스도르프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로 데려갔다범죄자들은 혁명가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재판이 열리지 못하도록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1919년 1월 15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병사들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