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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7/09/05

[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4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4 

    - 토론을 위한 테제 -

     

    5. 노동자계급의 부활과 혁명의 가능성을 위하여

     

    1) 노동자계급의 부활을 위하여

     

     노동자계급은 분열되었을 뿐 해체되지 않았다.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은 없었지만, 우리의 과제는 여전히 계급의식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 고유의 전투성(직접 행동), 단결력(투쟁의 확장), 창발성(자기 조직화와 자기 권력 창출)을 찾는 일이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전면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주체를 창출하는 것과 노동자 투쟁이 혁명적 투쟁으로 향하는 데 있어 계급의식의 발전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첫째,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 아래 어떠한 정권이 들어선다 할지라도 적대적 계급과는 항구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계급적 적대가 높아질 때엔 경제투쟁에서조차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그러한 투쟁 속에서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거리투쟁뿐 아니라 노동자 고유의 투쟁인 파업투쟁에서도‘전투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박근혜 정권 당시 민중총궐기 투쟁이 평화기조로 전환된 이후 촛불 투쟁까지 방어적 전투성은 간간이 나타나고 있으나 폴리스라인을 넘어서는 공세적 전투성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또한, 파업투쟁, 현장투쟁, 농성투쟁에서도 물리적인 충돌보다는 자기희생적 투쟁 전술이 주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전투성을 상실한 요인에는 투쟁할 권리조차 박탈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일차적이다. 하지만, 계급 간의 적대성을 가리는 노사협조주의, 조합주의 등의 만연으로 스스로 투쟁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것,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자 조직에서 스스로 방어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가 방위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둘째, 노동자 계급의 가장 큰 무기인 ‘단결력’도 전투성보다 더 넓고 깊게 무너졌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투쟁 회피와 방해에서 보듯이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명제는 내부로부터 이미 처참하게 붕괴했다. 그들의 연대란 자신들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형식적인 연대이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가장 어렵고 치열한 투쟁사업장 연대에서조차 계급적 연대는 사라졌고, 시민단체, 종교계, 물적 지원 연대체가 주요 연대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혁명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창발성’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혁명적 정치세력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세력 다수는 노동자 권력 투쟁, 계급으로서의 자기조직화의 험난한 길보다는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후퇴하는 대중의식을 쫓아 꾸준히 퇴보해왔다.

     

     위와 같은 계급의식의 붕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87년 이후 노동자 운동의 전형이었던 이른바 민주노조 운동이 이미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민주노조 운동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새로운 주체를 창출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 내부의 자정 능력 또한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과거의 복원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2) 무너진 계급의식을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

     

     그것은 여전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내외부의 적들과 전면적으로 투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계급 운동을 왜곡하고 새로운 운동과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운동사회 내부 모순과의 단호하고 전면적인 투쟁이 더욱 절실하다. 피억압 계급은 생산과 생존의 현장에서만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억압구조 아래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은 적대적인 계급사회뿐 아니라 운동사회 내부로까지 스며들었다. 운동을 왜곡하고 주체를 분열시키며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역할을 해왔다. 새로운 주체와 운동은 내부투쟁을 통해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부패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모순의 노출, 사회적 긴장의 악화 때문에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옥한 지형이 휴경지로 남겨져 있으면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정치적인 이해를 일반화시키기에 좋은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내서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심지어 투쟁의 소강상태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경험을 반성해 볼 수 있고, 그들이 경험해 왔던 승리와 패배의 대차대조표를 그려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주어진 상황의 즉각적인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이론적 과업을 실행하기 전에 다음 투쟁의 물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발전은, 계급의 다수 속에서 동질적이고 지속해서 살아있을 수는 없을지라도, 끊임없는 이론적 성찰, 과거 경험의 비판을 요구한다. 그것은 코뮤니스트 강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정련을 포함한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국제코뮤니스트흐름)

     

     계급의식의 복원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내서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민주노조 운동의 복원이 아니라 민주노조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과거 민주노조 운동에서 우리가 끌어낼 교훈은 낡은 민주노조 운동을 과감하게 넘어서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그 주체는 새롭게 노동조합으로 조직되는 민주노조 운동의 일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오지 않는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직 현실에서‘원칙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소수의 의식적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다시 한 번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독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노동자 직접행동’과 노동자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결합하는‘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공산주의를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 과정은 지난한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주체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의 획득을 획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이 과정은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쫒아 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의 분출과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집합적 존재여부가 중요하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촉진하고 실천 속에서 준비하고 장기적인 전망을 세워, 새로운 주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3) 혁명의 가능성을 위하여

     

     1905년 출현한 소비에트는 오랜 기간 사라졌으나 잊히지 않고 사회주의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1917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파시즘(스탈린주의)과 2차 세계대전의 기나긴 반혁명의 암흑기를 거치면서도 생존한 혁명 세력들은 68혁명에서 급진정치에 대한 영감을 주는 것을 넘어 혁명전통과 새로운 세대를 만나게 해 독자적인 정치로 발전했다.

     우리는 다시 극심한 침체기를 겪고 있다. 2011년 대중투쟁의 부활로 잠시 희망이 보였으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민주주의 환상) 공세와 스탈린주의(민족주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다. 극단적 테러리즘과 포퓰리즘은 대중의식을 더욱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와 68혁명과 같은 성장하는 계급과 새로운 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혁명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끊임없는 성찰과 그 정치적 성취들의 적극적인 일반화를 수행해 낼 수 있는가?

    한 가지는 명확하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일들을 전체 구성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사회적 안정기에,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과업은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분파들 덕분에, 즉 그 자체의 이러한 일부(정치적인 관점으로 정의된) 덕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식에 있어서 즉각적인 우연성과 부분적인 경험을 극복함으로써 의식에서의 성취들을 집단화할 수 있다. 이러한 분파가 운동의 목적을 더 일찍 이해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그 경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파편화하고 약화하는 고립과 분열을 분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강력하고 의식적인 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급의 요소들은 그들의 책무를 만족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그들 자신을 혁명적인 코뮤니스트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계급투쟁 속에서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만약, 계급 전체가 각각의 파업 뒤에, 투쟁에서의 부분적 패배와 승리 이후에 만들어지는 이론적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억’들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의 전투 이후에, 리용 직공들의 투쟁부터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거쳐, 오늘날 1982년의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르는 역사적 길을 다시 걸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동질화가 가능하겠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의 교훈들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러한 교훈들이 뜬구름 속에서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교훈들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들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 중의 하나라면), 그것들은 물질적 인간의 형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신비스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의식과 행동은 혁명 강령과 혁명 조직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필요성은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에 의해 부과된다. 만약 코뮤니스트 혁명과 사회의 변혁을 이뤄내려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질적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세계혁명의 실패,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반혁명적 세력의 등장,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한 생산력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 2차 세계대전 이후 25년간의 일시적 호황,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로 불리던 (국가)자본주의 국가들의 몰락,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과 생태적 위기, 국가부채의 엄청난 증가를 통한 재정위기 등의 공황은 다시 한 번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가속화시키며 야만인가 혁명인가를 선택하게 하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의 이론의 분리가 아닌 변증법적 통합으로 인간의식과 정치경제에 대한 분석을 해야한다. 맑스 이후 주체에 대한 깊은 구조를 통한 유물론적 접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풍부하게 결합시킴으로써 혁명의 당위론적 낙관론이나 혁명불가능의 자조적 비관론 모두를 넘어서는 맑스주의자와 코뮤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 (‘한국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혁명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연구’, 오세철)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한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 하는 과업은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가며, 그것은 그들 자신을 혁명적인 코뮤니스트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킬만한 계급투쟁이 사라진지 오래다. 계급투쟁을 통해 생성되는 전투적인 인자도 더 이상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 자신부터 코뮤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적더라도 혁명 강령에 기반을 둔 집단적 실천을 해야 한다. 모든 계급투쟁에 함께할 수는 없지만,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해 꾸준히 실천하면서 코뮤니스트(공산주의) 노동자 운동의 주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과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글을 마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끝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롭게 분출될 계급투쟁에 능동적이고 장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위해 코뮤니스트 운동은 노조와 대중운동의 배후정치가 아니라 대중(운동)과 만나 직접 코뮤니스트 정치를 펼쳐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코뮤니스트 혁명을 염원하고 그 운동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작업장,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을 뛰어넘어 기존의 현장조직과는 질적으로 다른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은 현장에서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블라인드 협상, 이면 합의, 어용 행위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미조직, 비정규직, 실업노동자 중심의 평의회적 운동의 창출이고 하나는 조직노동자 운동에서 어용-조합주의 세력과 맞서는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용세력과의 비타협적 투쟁뿐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노동조합 조직 질서 자체를 넘어서려는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본과 협력-상생해가는 조합주의의 한계를 넘어 계급적으로 투쟁하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이러한 두 축이 공동으로 행동하는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이형로)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여러 분열적이고 반혁명적 경향의 민족주의와 개량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운동이 근본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의 계급투쟁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 방어하면서 현실의 계급투쟁에 끝까지 전략적으로 함께하는 정치조직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사회주의를 직접 만나게 하는 정치활동이 코뮤니스트 조직의 일차 역할이다.

     자신들이‘가장 올바르다’거나‘세계에서 유일하다’라는 종파주의는 자신의 입장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이다. 공산주의자는 결코‘진리의 담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토론과 사상투쟁에 있어 모든 것을 열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조직 안과 밖으로부터 모든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공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집합적인 정치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의 역할에 대해’, 국제코뮤니스트전망)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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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2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7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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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3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3
    - 토론을 위한 테제 -
     
     
    4. 문재인 정권 : 위기와 위기의 대립

     

    -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 공황 등 세계 자본주의의 체제 위기

    - 정치 사회적 극우-보수 포퓰리즘의 부상, 극단적 민족주의, 테러리즘 위협 등 퇴행적 위기

    - 제국주의 대립 격화, 북핵 등 제국주의 전쟁위기

    - 세계 자본주의 위기에 더한 국내 정치경제적 위기를 떠안은 문재인 정권의 위기

     

    * 이글은 문재인 정권의 성격과 구체적인 정책을 분석하는 글이 아니기에 한국 자본주의 체제 관리자로서의 ‘통치 전략’ 중심으로 서술했다.

     

     

     문재인 정권은 시작부터 박근혜 정권이 심화시킨 치명적인 위기를 떠안고 출발했다.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어떠한 개혁적인 정책을 펼치더라도 그 해결책을 기존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국내적으로, 계급적으로 얽히고설킨 여러 위기와의 경쟁과 대립 속에서 반드시 어느 한쪽(또는 동시의)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특별히 박근혜 정권이 초래한 촛불 투쟁이라는 배경을 안고 탄생한 정권이라서 모든 위기와의 대립에 촛불의 대중적 힘과 정치적 성과를 내세우며 대처해 나갈 것이다. 그것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외교, 안보 문제에서도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중적 지지’라는 명분으로 당분간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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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자 이번 정권교체의 주역이었던 촛불 민심을 끌어안는다는 명분으로 노동자 운동 내부를 포섭해 나갈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본가계급에게 형식적인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개혁과 위기극복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에게 다시 희생을 강요하는 절차가 될 것이다.

     이러한 세련된 착취체제 구축을 내건 문재인 정권 초기 대표적인 자본가 이익단체들은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 하지만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인 그들의 힘과 무기는 민주노총의 선언적 총파업 카드보다 훨씬 강력하고 실질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정부의 정책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착취의 깊이와 무게는 더욱 증대할 것이다. 이미 널리 유포된 4차 산업혁명 환상은 그들이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유용하고 치명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허구인 4차 산업혁명2) 열풍은 가장 먼저 노동자들을 압박3)해 생산현장과 노사 대립이 일어나는 곳곳에서 자본가계급에 우월적 힘을 실어줄 것이다.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정 농단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돼 맥없이 무너진 것도 몸을 사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경제주체의 한 축인 재계의 목소리를 계속 억누를 수는 없다. 이미 지난달 29일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은 공개적으로 ▶성과연봉제 도입 ▶금산분리 완화 ▶금융규제 개혁을 요구했다. 이런 내용이 포함된 14개 항목의 요청사항을 국민인수위원회에 전달했다. 모두 문 대통령의 공약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초기에 추진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정부와 경영계가 대립할 게 아니라 서로 설득해 합의가 가능한 부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7. 6. 1일자 기사, ”재계, 문 정부 정책 30개 반박할 자료 만들어 놨다“ [중앙일보])

     

     문제는 여전히 문재인과 같은 ‘기수’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라는 쇠퇴와 야만을 향해 ‘달리는 말’이다. 말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투쟁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운동 진영이 문재인 정권에 협조하고 참여하면 할수록 개별 자본과의 투쟁마저 어려워질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의 정치 투쟁이 문재인 정권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위기와 위기의 대립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큰 위기와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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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민주노총의 대표적인 노사협조주의-조합주의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정규직을 위한 일자리 기금 2,500억 원을 내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민주노총은 형식적인 중립성마저 결여된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에 참가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노동조합 상급단체에서 부르주아 여야 정치 구도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전혀 검증된 바 없는 일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는 참사까지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와의 협조는 노동자 운동 진영과 자본가 정부 사이의 가교역할을 넘어 노동자 투쟁을 무장해제 시키고 체제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거대한 통로가 될 것이다. 앞으로 개별 자본가와의 싸움도 타협과 양보라는 투쟁 회피 세력의 ‘노동개혁’ 논리가 지배할 것이며, 총자본-대정부 투쟁 또한 ‘노동 적폐 청산’이라는 개량적 요구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원칙적이고 타협 없는 투쟁, 급진적이고 계급적인 요구는 다수를 차지하게 될 내부의 협조자들과 조직질서에 의해 차단당하고 고립화될 것이다.

     게다가 이들과의 전면전을 이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내부 투쟁’, ‘의식적 노동자들(과거에는 선진 노동자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다른)의 상층 관료주의(조합주의)와의 투쟁’은 소수의 주체마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따라서 문재인 정권의 위기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위기를 먼저 직시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와 위기의 대결’을 준비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모든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정권교체 환상에 빠진 다수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른바 좌파, 사회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세력들의 ‘운동 논리로 포장된 허상’도 함께 깨트려야 한다.

     

     노동자 운동이 문재인 정권에 포섭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문재인을 우파가 공격할 때는 우파의 공격을 반대해야 한다"4)든가, “독자적인 노동자 투쟁 강화를 통해 개혁? 을 완수하도록 정부를 견인/견제해야 한다”5)는 발상은 문재인 정부가 자본가 정부임을 은폐한다.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태도이다. 우리가 방어해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이해관계이지, 부르주아 정부와 그들의 정책이 아니다. 설사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정책 일부가 일치한다고 해도 정부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방어해야 한다. 또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견인이라는 환상은 문재인 정부가 노자 투쟁에서 최소한 중립은 지킬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 독재 권력은 행정부뿐만 아니라 국회, 사법기관, 군대, 경찰, 사설경비대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계급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재인 정부라는 기수와 자본주의라는 말은 한 몸이다. 우리는 기수를 견인해 말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기수와 말 모두와 싸워 야만의 체제를 끝장내야 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계속>

     

     

    <주>

     

    2) 리프킨은 슈밥의 '4차 산업혁명' 주장에 대해 "제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현재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들은 제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 혁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세계경제포럼은 2016년 1월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던지면서 이로 인한 일자리 영향을 분석한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했다. 향후 5년간 세계 고용의 65%를 차지하는 선진국 및 신흥시장 15개국에서 일자리 710만개가 사라지고, 4차 산업혁명으로 21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어 500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4)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가 잘되길 바란다는 덕담 행렬에 동참해선 안 된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길 바란다”고 초좌파적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잘되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 설사 잘돼 봤자 한국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더 효과적으로, 또 덜 낭비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정부를 격려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물론 2004년 우파가 노무현을 국회에서 탄핵했던 것처럼 문재인을 우파가 공격할 때는 우파의 공격을 반대해야 한다. 당시든 지금이든 문재인은 민중주의자(물론 중도 포퓰리스트)로서 노동자 운동의 일부(물론 온건파 지도자들) 및 시민단체 간부들과 연계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우파를 반대한다는 것은 노동자 및 피차별자 대중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사회주의적 좌파로서 우리의 대의명분이 개혁주의자들의 그것과 혼동되지 않도록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필요한 만큼 해야 할 것이다.“  [00000, <00000 투쟁본부 000 (2017.5.26) 발제문> 중에서

     

    5)  “‘공동정부’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노동자민중)의 투쟁과 맞서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고, ‘공동정부’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진보’는 ‘공동정부’에의 참여가 아니라 민주노총/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을 통해 이 힘으로 문재인 정부를 견인/견제해야 한다. ”  [0000, <00000 투쟁본부 000 (2017.5.26) 발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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