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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와 미국의 사드 배치 강행을 규탄한다.

  • 문재인 정부와 미국의 사드 배치 강행을 규탄한다.
     
    사드 철거!!! 자본가 정부, 제국주의 전쟁위기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국가를 넘어 투쟁하자!
     
     
     9월 7일 문재인 정부와 미국은 주민을 비롯한 수많은 반대에도 성주 소성리에 사드 배치를 강행했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북핵 문제 해결에도, 한반도-동아시아 평화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위선적인 안보 놀음'이다. 그것은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한반도 전쟁 위기 고조 프로그램이자, 제국주의 격돌의 최전방에 한국을 앞세우는 전략일 뿐이다.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목적이 체제 보장이라는 주장에도 끝내는 민간인 특히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량 학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또한,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한 유일한 세력이 미제국주의 세력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역사는 남북한에서 서로 다르게 보이는 두 개의 체제가 노동자계급 착취라는 면에서 동일하며, 노동자계급의 절대적인 '적'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어느 한 쪽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긴장의 극대화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의 충돌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위험을 훨씬 더 키웠다.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최악의 맞수로 충돌하고 있다.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모두 강력하게 무장한 채 군비경쟁을 가속하고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수많은 전쟁은 항상 노동자계급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치명적 악순환 속에서 더는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인류를 야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노동자계급은 애국주의(민족주의)와 군비경쟁(군사주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계급에 유일한 해결책은 남과 북(중, 미, 일)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배계급에 맞서 결연하게 투쟁하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한다던 문재인 정부의 이번 사드 배치는 북핵 억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무기 경쟁을 포함한 군사적 대립이라는 화약고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이번 사드 추가 배치 결정과 강행은 문재인 정부의 '평화 정책', '민주적 절차', '자주외교' 주장의 위선과 무능을 넘어 제국주의 세력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현 정부의 정치적, 계급적 본질을 온 세상에 드러냈다.
     
    출범 4개월도 되지 않아 이전 박근혜 정부와 다를 것 없는 만행을 저지른 문재인 정부에 맞서, 
    노동자 계급은 정권교체-적폐청산이라는 '문재인 환상'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문재인 정부와의 연합전선-협력을 반대해야 한다.
    사드 철거는 물론 자본가 정부, 한반도 전쟁위기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1. 미제국주의와 그 동맹국들의 북한 위협(전쟁 위협, 안보 캠페인)과 그에 대항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전쟁 위협을 반대한다.
     
    2. 핵무기로 민간인을 실제 학살한 미제국주의와 또 다른 전쟁(위기)으로 향하는 북한의 핵무기 모두는 노동자계급에 가장 큰 재앙이 될 뿐이다. 노동자계급은 모든 핵무기를 반대한다.
     
    3.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과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무기경쟁과 전쟁 위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들의 어떠한 '평화 정책(협정)'도 믿을 수 없다.  
     
    4. 자본주의 아래 인류를 위협하는 야만주의,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핵 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끝장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인 투쟁과 노동자 혁명임을 선언한다.
     
    5. 사드 철거!!! 자본가 정부, 제국주의 전쟁위기에 대항하여 자본주의-국가를 넘어 투쟁하자!
     
    노동자들에게 수호해야 할 조국은 없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2017년 9월 7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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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4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4 

    - 토론을 위한 테제 -

     

    5. 노동자계급의 부활과 혁명의 가능성을 위하여

     

    1) 노동자계급의 부활을 위하여

     

     노동자계급은 분열되었을 뿐 해체되지 않았다.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은 없었지만, 우리의 과제는 여전히 계급의식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 고유의 전투성(직접 행동), 단결력(투쟁의 확장), 창발성(자기 조직화와 자기 권력 창출)을 찾는 일이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전면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주체를 창출하는 것과 노동자 투쟁이 혁명적 투쟁으로 향하는 데 있어 계급의식의 발전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첫째,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 아래 어떠한 정권이 들어선다 할지라도 적대적 계급과는 항구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계급적 적대가 높아질 때엔 경제투쟁에서조차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그러한 투쟁 속에서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거리투쟁뿐 아니라 노동자 고유의 투쟁인 파업투쟁에서도‘전투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박근혜 정권 당시 민중총궐기 투쟁이 평화기조로 전환된 이후 촛불 투쟁까지 방어적 전투성은 간간이 나타나고 있으나 폴리스라인을 넘어서는 공세적 전투성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또한, 파업투쟁, 현장투쟁, 농성투쟁에서도 물리적인 충돌보다는 자기희생적 투쟁 전술이 주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전투성을 상실한 요인에는 투쟁할 권리조차 박탈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일차적이다. 하지만, 계급 간의 적대성을 가리는 노사협조주의, 조합주의 등의 만연으로 스스로 투쟁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것,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자 조직에서 스스로 방어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가 방위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둘째, 노동자 계급의 가장 큰 무기인 ‘단결력’도 전투성보다 더 넓고 깊게 무너졌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투쟁 회피와 방해에서 보듯이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명제는 내부로부터 이미 처참하게 붕괴했다. 그들의 연대란 자신들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형식적인 연대이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가장 어렵고 치열한 투쟁사업장 연대에서조차 계급적 연대는 사라졌고, 시민단체, 종교계, 물적 지원 연대체가 주요 연대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혁명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창발성’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혁명적 정치세력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세력 다수는 노동자 권력 투쟁, 계급으로서의 자기조직화의 험난한 길보다는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후퇴하는 대중의식을 쫓아 꾸준히 퇴보해왔다.

     

     위와 같은 계급의식의 붕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87년 이후 노동자 운동의 전형이었던 이른바 민주노조 운동이 이미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민주노조 운동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새로운 주체를 창출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 내부의 자정 능력 또한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과거의 복원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2) 무너진 계급의식을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

     

     그것은 여전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내외부의 적들과 전면적으로 투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계급 운동을 왜곡하고 새로운 운동과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운동사회 내부 모순과의 단호하고 전면적인 투쟁이 더욱 절실하다. 피억압 계급은 생산과 생존의 현장에서만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억압구조 아래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은 적대적인 계급사회뿐 아니라 운동사회 내부로까지 스며들었다. 운동을 왜곡하고 주체를 분열시키며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역할을 해왔다. 새로운 주체와 운동은 내부투쟁을 통해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부패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모순의 노출, 사회적 긴장의 악화 때문에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옥한 지형이 휴경지로 남겨져 있으면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정치적인 이해를 일반화시키기에 좋은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내서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심지어 투쟁의 소강상태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경험을 반성해 볼 수 있고, 그들이 경험해 왔던 승리와 패배의 대차대조표를 그려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주어진 상황의 즉각적인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이론적 과업을 실행하기 전에 다음 투쟁의 물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발전은, 계급의 다수 속에서 동질적이고 지속해서 살아있을 수는 없을지라도, 끊임없는 이론적 성찰, 과거 경험의 비판을 요구한다. 그것은 코뮤니스트 강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정련을 포함한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국제코뮤니스트흐름)

     

     계급의식의 복원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내서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민주노조 운동의 복원이 아니라 민주노조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과거 민주노조 운동에서 우리가 끌어낼 교훈은 낡은 민주노조 운동을 과감하게 넘어서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그 주체는 새롭게 노동조합으로 조직되는 민주노조 운동의 일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오지 않는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직 현실에서‘원칙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소수의 의식적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다시 한 번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독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노동자 직접행동’과 노동자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결합하는‘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공산주의를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 과정은 지난한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주체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의 획득을 획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이 과정은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쫒아 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의 분출과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집합적 존재여부가 중요하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촉진하고 실천 속에서 준비하고 장기적인 전망을 세워, 새로운 주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3) 혁명의 가능성을 위하여

     

     1905년 출현한 소비에트는 오랜 기간 사라졌으나 잊히지 않고 사회주의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1917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파시즘(스탈린주의)과 2차 세계대전의 기나긴 반혁명의 암흑기를 거치면서도 생존한 혁명 세력들은 68혁명에서 급진정치에 대한 영감을 주는 것을 넘어 혁명전통과 새로운 세대를 만나게 해 독자적인 정치로 발전했다.

     우리는 다시 극심한 침체기를 겪고 있다. 2011년 대중투쟁의 부활로 잠시 희망이 보였으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민주주의 환상) 공세와 스탈린주의(민족주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다. 극단적 테러리즘과 포퓰리즘은 대중의식을 더욱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와 68혁명과 같은 성장하는 계급과 새로운 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혁명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끊임없는 성찰과 그 정치적 성취들의 적극적인 일반화를 수행해 낼 수 있는가?

    한 가지는 명확하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일들을 전체 구성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사회적 안정기에,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과업은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분파들 덕분에, 즉 그 자체의 이러한 일부(정치적인 관점으로 정의된) 덕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식에 있어서 즉각적인 우연성과 부분적인 경험을 극복함으로써 의식에서의 성취들을 집단화할 수 있다. 이러한 분파가 운동의 목적을 더 일찍 이해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그 경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파편화하고 약화하는 고립과 분열을 분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강력하고 의식적인 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급의 요소들은 그들의 책무를 만족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그들 자신을 혁명적인 코뮤니스트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계급투쟁 속에서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만약, 계급 전체가 각각의 파업 뒤에, 투쟁에서의 부분적 패배와 승리 이후에 만들어지는 이론적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억’들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의 전투 이후에, 리용 직공들의 투쟁부터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거쳐, 오늘날 1982년의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르는 역사적 길을 다시 걸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동질화가 가능하겠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의 교훈들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러한 교훈들이 뜬구름 속에서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교훈들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들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 중의 하나라면), 그것들은 물질적 인간의 형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신비스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의식과 행동은 혁명 강령과 혁명 조직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필요성은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에 의해 부과된다. 만약 코뮤니스트 혁명과 사회의 변혁을 이뤄내려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질적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세계혁명의 실패,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반혁명적 세력의 등장,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한 생산력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 2차 세계대전 이후 25년간의 일시적 호황,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로 불리던 (국가)자본주의 국가들의 몰락,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과 생태적 위기, 국가부채의 엄청난 증가를 통한 재정위기 등의 공황은 다시 한 번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가속화시키며 야만인가 혁명인가를 선택하게 하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의 이론의 분리가 아닌 변증법적 통합으로 인간의식과 정치경제에 대한 분석을 해야한다. 맑스 이후 주체에 대한 깊은 구조를 통한 유물론적 접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풍부하게 결합시킴으로써 혁명의 당위론적 낙관론이나 혁명불가능의 자조적 비관론 모두를 넘어서는 맑스주의자와 코뮤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 (‘한국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혁명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연구’, 오세철)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한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 하는 과업은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가며, 그것은 그들 자신을 혁명적인 코뮤니스트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킬만한 계급투쟁이 사라진지 오래다. 계급투쟁을 통해 생성되는 전투적인 인자도 더 이상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 자신부터 코뮤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적더라도 혁명 강령에 기반을 둔 집단적 실천을 해야 한다. 모든 계급투쟁에 함께할 수는 없지만,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해 꾸준히 실천하면서 코뮤니스트(공산주의) 노동자 운동의 주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과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글을 마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끝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롭게 분출될 계급투쟁에 능동적이고 장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위해 코뮤니스트 운동은 노조와 대중운동의 배후정치가 아니라 대중(운동)과 만나 직접 코뮤니스트 정치를 펼쳐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코뮤니스트 혁명을 염원하고 그 운동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작업장,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을 뛰어넘어 기존의 현장조직과는 질적으로 다른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은 현장에서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블라인드 협상, 이면 합의, 어용 행위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미조직, 비정규직, 실업노동자 중심의 평의회적 운동의 창출이고 하나는 조직노동자 운동에서 어용-조합주의 세력과 맞서는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용세력과의 비타협적 투쟁뿐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노동조합 조직 질서 자체를 넘어서려는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본과 협력-상생해가는 조합주의의 한계를 넘어 계급적으로 투쟁하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이러한 두 축이 공동으로 행동하는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이형로)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여러 분열적이고 반혁명적 경향의 민족주의와 개량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운동이 근본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의 계급투쟁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 방어하면서 현실의 계급투쟁에 끝까지 전략적으로 함께하는 정치조직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사회주의를 직접 만나게 하는 정치활동이 코뮤니스트 조직의 일차 역할이다.

     자신들이‘가장 올바르다’거나‘세계에서 유일하다’라는 종파주의는 자신의 입장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이다. 공산주의자는 결코‘진리의 담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토론과 사상투쟁에 있어 모든 것을 열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조직 안과 밖으로부터 모든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공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집합적인 정치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의 역할에 대해’, 국제코뮤니스트전망)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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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76300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2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76342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3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76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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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3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3
    - 토론을 위한 테제 -
     
     
    4. 문재인 정권 : 위기와 위기의 대립

     

    -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 공황 등 세계 자본주의의 체제 위기

    - 정치 사회적 극우-보수 포퓰리즘의 부상, 극단적 민족주의, 테러리즘 위협 등 퇴행적 위기

    - 제국주의 대립 격화, 북핵 등 제국주의 전쟁위기

    - 세계 자본주의 위기에 더한 국내 정치경제적 위기를 떠안은 문재인 정권의 위기

     

    * 이글은 문재인 정권의 성격과 구체적인 정책을 분석하는 글이 아니기에 한국 자본주의 체제 관리자로서의 ‘통치 전략’ 중심으로 서술했다.

     

     

     문재인 정권은 시작부터 박근혜 정권이 심화시킨 치명적인 위기를 떠안고 출발했다.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어떠한 개혁적인 정책을 펼치더라도 그 해결책을 기존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국내적으로, 계급적으로 얽히고설킨 여러 위기와의 경쟁과 대립 속에서 반드시 어느 한쪽(또는 동시의)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특별히 박근혜 정권이 초래한 촛불 투쟁이라는 배경을 안고 탄생한 정권이라서 모든 위기와의 대립에 촛불의 대중적 힘과 정치적 성과를 내세우며 대처해 나갈 것이다. 그것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외교, 안보 문제에서도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중적 지지’라는 명분으로 당분간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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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자 이번 정권교체의 주역이었던 촛불 민심을 끌어안는다는 명분으로 노동자 운동 내부를 포섭해 나갈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본가계급에게 형식적인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개혁과 위기극복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에게 다시 희생을 강요하는 절차가 될 것이다.

     이러한 세련된 착취체제 구축을 내건 문재인 정권 초기 대표적인 자본가 이익단체들은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 하지만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인 그들의 힘과 무기는 민주노총의 선언적 총파업 카드보다 훨씬 강력하고 실질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정부의 정책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착취의 깊이와 무게는 더욱 증대할 것이다. 이미 널리 유포된 4차 산업혁명 환상은 그들이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유용하고 치명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허구인 4차 산업혁명2) 열풍은 가장 먼저 노동자들을 압박3)해 생산현장과 노사 대립이 일어나는 곳곳에서 자본가계급에 우월적 힘을 실어줄 것이다.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정 농단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돼 맥없이 무너진 것도 몸을 사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경제주체의 한 축인 재계의 목소리를 계속 억누를 수는 없다. 이미 지난달 29일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은 공개적으로 ▶성과연봉제 도입 ▶금산분리 완화 ▶금융규제 개혁을 요구했다. 이런 내용이 포함된 14개 항목의 요청사항을 국민인수위원회에 전달했다. 모두 문 대통령의 공약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초기에 추진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정부와 경영계가 대립할 게 아니라 서로 설득해 합의가 가능한 부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7. 6. 1일자 기사, ”재계, 문 정부 정책 30개 반박할 자료 만들어 놨다“ [중앙일보])

     

     문제는 여전히 문재인과 같은 ‘기수’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라는 쇠퇴와 야만을 향해 ‘달리는 말’이다. 말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투쟁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운동 진영이 문재인 정권에 협조하고 참여하면 할수록 개별 자본과의 투쟁마저 어려워질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의 정치 투쟁이 문재인 정권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위기와 위기의 대립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큰 위기와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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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민주노총의 대표적인 노사협조주의-조합주의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정규직을 위한 일자리 기금 2,500억 원을 내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민주노총은 형식적인 중립성마저 결여된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에 참가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노동조합 상급단체에서 부르주아 여야 정치 구도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전혀 검증된 바 없는 일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는 참사까지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와의 협조는 노동자 운동 진영과 자본가 정부 사이의 가교역할을 넘어 노동자 투쟁을 무장해제 시키고 체제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거대한 통로가 될 것이다. 앞으로 개별 자본가와의 싸움도 타협과 양보라는 투쟁 회피 세력의 ‘노동개혁’ 논리가 지배할 것이며, 총자본-대정부 투쟁 또한 ‘노동 적폐 청산’이라는 개량적 요구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원칙적이고 타협 없는 투쟁, 급진적이고 계급적인 요구는 다수를 차지하게 될 내부의 협조자들과 조직질서에 의해 차단당하고 고립화될 것이다.

     게다가 이들과의 전면전을 이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내부 투쟁’, ‘의식적 노동자들(과거에는 선진 노동자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다른)의 상층 관료주의(조합주의)와의 투쟁’은 소수의 주체마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따라서 문재인 정권의 위기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위기를 먼저 직시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와 위기의 대결’을 준비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모든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정권교체 환상에 빠진 다수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른바 좌파, 사회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세력들의 ‘운동 논리로 포장된 허상’도 함께 깨트려야 한다.

     

     노동자 운동이 문재인 정권에 포섭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문재인을 우파가 공격할 때는 우파의 공격을 반대해야 한다"4)든가, “독자적인 노동자 투쟁 강화를 통해 개혁? 을 완수하도록 정부를 견인/견제해야 한다”5)는 발상은 문재인 정부가 자본가 정부임을 은폐한다.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태도이다. 우리가 방어해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이해관계이지, 부르주아 정부와 그들의 정책이 아니다. 설사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정책 일부가 일치한다고 해도 정부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방어해야 한다. 또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견인이라는 환상은 문재인 정부가 노자 투쟁에서 최소한 중립은 지킬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 독재 권력은 행정부뿐만 아니라 국회, 사법기관, 군대, 경찰, 사설경비대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계급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재인 정부라는 기수와 자본주의라는 말은 한 몸이다. 우리는 기수를 견인해 말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기수와 말 모두와 싸워 야만의 체제를 끝장내야 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계속>

     

     

    <주>

     

    2) 리프킨은 슈밥의 '4차 산업혁명' 주장에 대해 "제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현재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들은 제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 혁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세계경제포럼은 2016년 1월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던지면서 이로 인한 일자리 영향을 분석한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했다. 향후 5년간 세계 고용의 65%를 차지하는 선진국 및 신흥시장 15개국에서 일자리 710만개가 사라지고, 4차 산업혁명으로 21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어 500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4)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가 잘되길 바란다는 덕담 행렬에 동참해선 안 된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길 바란다”고 초좌파적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잘되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 설사 잘돼 봤자 한국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더 효과적으로, 또 덜 낭비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정부를 격려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물론 2004년 우파가 노무현을 국회에서 탄핵했던 것처럼 문재인을 우파가 공격할 때는 우파의 공격을 반대해야 한다. 당시든 지금이든 문재인은 민중주의자(물론 중도 포퓰리스트)로서 노동자 운동의 일부(물론 온건파 지도자들) 및 시민단체 간부들과 연계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우파를 반대한다는 것은 노동자 및 피차별자 대중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사회주의적 좌파로서 우리의 대의명분이 개혁주의자들의 그것과 혼동되지 않도록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필요한 만큼 해야 할 것이다.“  [00000, <00000 투쟁본부 000 (2017.5.26) 발제문> 중에서

     

    5)  “‘공동정부’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노동자민중)의 투쟁과 맞서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고, ‘공동정부’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진보’는 ‘공동정부’에의 참여가 아니라 민주노총/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을 통해 이 힘으로 문재인 정부를 견인/견제해야 한다. ”  [0000, <00000 투쟁본부 000 (2017.5.26) 발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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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2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2
    - 토론을 위한 테제 -
     
     

    2. 촛불 투쟁에서 못다 한 토론

     

    “지난 촛불 투쟁이 노동자들에게 던져준 과제는 선거(대의) 민주주의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 자체였고, 노동 중심 정치가 아니라 ‘국가와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지배(통제) 문제였다.”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코뮤니스트 5호])

     

    ◆ 촛불 투쟁의 성과물은 누가 가져갔는가?

     

    ◆ 촛불 투쟁은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으로 마무되었다. 촛불 정세를 무사히 넘긴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촛불에 자극받아 보다 세련된 통치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계급투쟁을 잠재울 것이다. 촛불 투쟁 다음의 투쟁은 촛불 투쟁의 연속(적폐청산-개혁 촉구)인가? 그것을 넘어서는 투쟁(반자본주의 투쟁)인가?

     

    - 1905년에 소비에트는 갑자기 자발적으로 출현한다. 소비에트의 본질은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다양한 계획들, 토론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들,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 1905년의 ‘기억과 자극’은 1917년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러시아에서 재탄생한다.

    - 러시아 혁명의 자극과 1920년대 혁명적 물결은 독일과 헝가리에서 노동자계급에 생동하는 힘과 넘치는 생각들을 강하게 분출하게 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 평의회’와 ‘총회’가 나타났다.

    - 그리고 암흑과도 같았던 기나긴 반혁명의 시기가 지나가고,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적 부활은 ‘상상력’의 해방과 함께 더 큰 자극이 되어 ‘급진적인 행동’과 ‘혁명적인 운동’에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1968년 프랑스와 1969년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의 특징인 ‘폭넓고 심도 있는 토론’ 문화를 만들었다.

    - 2011년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물결은 ‘광장을 점거하자!’는 공통의 구호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광장의 정치는 앞선 모든 역사적 자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진정한 연대’, ‘대중총회’, ‘토론문화’로 재현되었다“ (대대적 촛불 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 [코뮤니스트 5호])

     

    ◆ 계급(대중)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대대적 파업’, ‘민중 봉기’와 같이 혁명적 사건-상황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저항 속에서도 ‘진정한(계급적) 연대’와 ‘대대적인 토론’이 가능하다. 촛불 투쟁이 대중 의식을 일부라도 바꿔 놓았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촛불 광장의 ‘열린 정치’와 ‘직접 민주주의’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나?

     

    “지난 촛불 투쟁은 대중 행동의 침체기 속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양적인 분출과 대중 행동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촛불 대중의 다수를 이룬 노동자들도 일부가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대부분은 개별적으로 참여했지만, 촛불 투쟁의 자극으로 다시 생산현장과 거리에서 토론하고 투쟁할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촛불 투쟁에 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참여한 노동자들이 다시 자본가 계급과 맞서는 노동자 계급으로 돌아왔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전면적 투쟁으로!!!, [코뮤니스트 5호])

     

    ◆ 촛불 투쟁에서 ‘계급’은 어떻게 사라졌나?

     

    ◆ 촛불 투쟁에서 문제는 자본주의이었나? 자본주의에 포섭된 노동자계급이었나?

     

     

    3. 촛불 대선과 노동자계급의 쟁점

     

     촛불 투쟁과 조기 대선에서 수많은 주장과 쟁점과 공약이 있었다. 하지만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현안은 주목받지 못하거나 ‘가공된’ 쟁점에 의해 가려졌다. 대선 기간 고공농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안은 대선의 쟁점이 되지 못하고 외면 당했다. 민주노총과 부르주아 야당이 함께 주장한 재벌개혁과 자칭 변혁세력이 주장한 사내유보금 문제는 유력 대선 후보들의 토론 주제로 자주 거론되었지만, 다수 비정규직-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은 주목받지 못했다. 국가, 사회, 가족, 공동체에서 이중 삼중의 차별과 고통을 받고 있는 성소수자의 인권은 짓밟혔다. 상시적인 생존권 위기와 위험한 생활조건에 처한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책은 시혜적 차원에서만 다루어졌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는 현 위기와 모순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문제로 나아가지 못했다. 방어적인 노동자 기본권 요구에 머물렀던 노동자 운동 진영은 대선에서도 자신들의 현안과 쟁점을 계급투쟁-권력 투쟁으로 모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극우 친자본 세력의 ‘강성노조’ 공격이 쟁점이 되었을 때, 자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지 못하고 억울함과 노동 존중을 호소하는 데 그쳤다. 촛불투쟁의 주역이었다는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은 대선에서 공세적이지 못했다. 노조 할 권리,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최소한의 방어적 요구도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투쟁으로 쟁취하겠다.'는 계급적 요구가 아니라 '투쟁과 정책협약'을 병행하는 애매모호한 시민적 요구에 그쳤다. 

     노동자 계급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냐, 노동존중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죽이고 생존권을 파탄 낸 ‘자본가 계급의 대리-협력세력에게 권력을 바치는 선거냐, 노동자를 살리고 스스로 생존권을 지키는 투쟁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했다.오히려 대선으로 세상을 바꾸자면서, 대선이 ‘노동존중 평등사회’를 가져올 거라는 환상을 유포했다. 하지만 ‘노동존중’은 노동자 투쟁과 단결의 힘이 자본가 권력과 맞설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평등사회’는 선거가 아니라 노동자 투쟁과 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자기 권력을 가질 때 가능하다.

     

     선거가 노동자계급에 중요하거나 선거 공간을 반드시 계급투쟁(권력투쟁)의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부르주아 선거라도 계급적으로 최대치를 요구해야 한다. 완전한 파업권, 정치사상의 자유, 노동자 통제(생산수단 몰수), 자본주의 타도 , 노동자혁명-노동자 권력의 필요성을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실현할 수 없는 주장이더라도 ‘권력’과 ‘국가’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때에는 끊임없이 구체적인 노동자의 언어로 설명하고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은 자신들의 조합원들에게조차 계급의 강령적 요구를 꺼내놓지 못했다.

     

     이른바 좌파 정치세력 중에는 ‘계급의식’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정의당 후보를 지지하는 곳이 있었고, 지지할 후보가 없다면서 노동자 혁명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곳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계급정당-노동자혁명당이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들에게 선택지를 하나 더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에게는 자본가 정권-체제에 맞서 싸우고 노동자 혁명-노동자 권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노동자혁명당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를 타도하는 목적을 갖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독립적이고 적대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혁명당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부르주아 선거 참여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매번 반복되는 선거에 대한 전술과 입장이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의식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후퇴시키는 역할만을 해왔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요원한 혁명당 건설 전망 속에서 선거 때마다 당위로 주장하는 당 건설 주장은 더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독립적이고 적대적인 선거대응을 하는 일이다. 그것은 초기에는 당 없는 선거 대응, 당 건설로 향하는 선거 대응, 소수가 할 수 있는 선거 대응, 선거를 넘어서는 투쟁 창출, 선거를 거부하며 투쟁과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실천과 자기조직화 전망이 될 것이다.

     

     아무리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고 투쟁의 힘이 지속해서 약해졌어도,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자본가 계급에 밀려있는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첫걸음은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이다.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 계급의 방식으로 직접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세력들은 부르주아 정치판에 끼어들지 말고 비록 소수일지라도 항상 노동자계급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참상의 원인이고, 이를 넘어서는 공산주의 사회만이 대안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싸워야 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정치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 정치광장을 통해 자기 사업장 투쟁을 넘어 노동자들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고 행동하는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 비용(선거자금)을 모금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직접행동과 연대의 장에서 함께 할 수 있도록 직접행동(투쟁) 기금을 조성하여 선거 이후의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연대 세력은 투쟁과 조직 모두에서 소외되었던 비정규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 장애인, 빈민, 이주노동자들의 현실과 투쟁에 관심을 갖고 적극 연대해야 한다. 노동자 투쟁과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결합만이 계급 운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선거에서 노동자계급의 쟁점은 선거공약과 후보검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만 존재한다.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담아내고 분출하게 하는 노동자 정치도 부르주아 정치판이 아닌 노동자의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자신의 자리도 지키지 못하면서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지 말자.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용납하지 말자.

     

     

     

    <부르주아 선거와 선거 전술에 대한 토론>

     

    ◆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계급의 쟁점은 무엇이었나? 쟁점은 현실에서 표출된 것인가? 기획되어 가공된 것인가?

     

    ◆ 선거 국면에서 차악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후퇴시키는가?

     

    ◆ 프랑스 대선에서처럼 기권이 아닌 투표 거부-모든 후보 반대 행동은 조직할 수 있는가? 코뮤니스트는 왜 차악을 선택하지 않는가?

     

     

    ◆ 현재의 노동자들에게 선거란 무엇인가? 혁명 세력에게 선거전술이란 무엇인가?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의 환상일 뿐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위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의 군대, 사법기관, 국가관료, 보안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는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제도 포함)들을 파괴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이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의회주의 보통선거권의 잔해 위에 노동자평의회의 계급기구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잔재들 위에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세워야하는 역사적 장도에 올라있다. 이때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떠한 혁명적 의도들과는 무관하게 단지 죽어 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코뮤니스트 5호])

     

    ◆ 의회주의(선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부르주아 선거를 노동자계급의 강령을 위한 선전 및 선동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고, 부르주아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유용한가?

    반대로 의회와 선거개입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에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나?

     

    ◆ 낡은 부르주아 선거(의회) 제도와 기구를 파괴하는 목표와 현실에서 투쟁으로 만드는 것은 상당한 괴리가 있는데, 중간 단계가 필요한가? 지속적인 선전과 직접행동 촉진 이외에 방법은 없는가?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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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 토론을 위한 테제 -

     

     

    들어가며

     

    “딱히 심상정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정의당이요? 딱히 지지하지 않아요. 뭐랄까, 투표라는 행위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선택하는 거잖아요. 일상적인 지지와는 다르죠. 그럼에도 심상정을 찍은 이유는, 촛불 정국 이후 마치 문재인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 경계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번 대선은 대중적 성취를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달랐잖아요. 만약 문재인의 당선으로만 수렴이 되면 과거 대선과는 큰 차이가 없어지는 거죠. 누가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정치세력이 지지 받는지도 중요하다고 봤어요. 진보정당이자 소수정당인 정의당이 존재를 좀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30대. 남) [워커스 31호])

     

    그렇다. 부르주아 선거는 정당(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지지와 참여가 아니라 제한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와 지배체제를 유지해주는 근간이다. 선거 메커니즘은 부르주아 정치와 적대적이어야 할 노동자 투쟁마저 포섭한 지 오래다. 대대적인 노동자 투쟁이 부르주아 선거 지형을 바꾸어 독자적 노동자 정치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투쟁’은 선거 결과로 수렴되어야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투쟁을 교란하고 후퇴시키고 있다.

     

    위의 면담자(interviewee)는 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세력의 성격을 계급적으로 판단한다. 정의당을 계급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자본의 진영에 포함된 부르주아 정치 세력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가 혼합한 개량주의 세력으로 규정한다. 대선이 끝나고 선거 결과를 분석하고 노동자계급의 의식 흐름을 판단해야 하는 시점이다. 굳이 정의당을 먼저 언급한 것은 선거 거부-기권을 택한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의 의식적 노동자와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이번 대선에서 차악인 정의당 후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심상정이 얻은 200만 표 중에 민주노총 조합원의 표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도 10%대의 득표를 한 것은 정의당과 민주노총 모두 서로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정의당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선택과는 별개로 자신의 계급적 성격에 맞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촛불 투쟁에 임했다.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다른 부르주아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득표게임에 뛰어들었다. 정권교체와 권력분점 사이에서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한편의 부르주아 정치 쇼를 흥행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양적으로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급적인 행동과 자기 권력을 위한 투쟁이 없었기에 이른바 촛불 혁명과 정권교체의 들러리를 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촛불 투쟁에서‘시민’이 되어 계급을 잊었고, 대선에서는 부르주아 정치세력의‘국민’이 되어 계급을 상실했다. 민주노총은 우여곡절 끝에 대선 방침으로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조합원들의 진보정치? 에 대한 지지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를 실현하거나 대변할 노동자 정치가 부재하자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정권교체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과 그 성과물인 조기 대선에서 노동자들에게‘계급’과 ‘권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계급성을 드러내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들에게는 국회를 포함한 부르주아 정치 공간뿐 아니라 촛불 광장(태극기 광장), 언론(여론), SNS, 모든 사적-공적 조직들(풀뿌리 조직 포함) 모든 곳이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이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은커녕 계급마저 잊은 채 수동적으로 촛불 집회에 수차례 또는 수십 차례 나가는 동안,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손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계급적’으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촛불 투쟁과 대선의 결과인 정권교체로 나타난 것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선거와 권력투쟁에서 ‘계급적’이라는 것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것을 반영한 정치가 적대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그 반대이다. 계급 간의 이해관계 대립과 적대적인 정치를 감추고 정당(정치세력) 간의 경쟁으로 돌리는 것이 ‘계급적’정치인 것이다. 그들은 소수의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벌개혁이나 노동 기본권 보장 등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지만, 자본가 계급에도 적대적인 정책은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없었던 홍준표와 한국당 세력은 반노동조합, 반공, 친자본 이미지를 부각시켰지만, 그것은 내부 결속을 위한 목적이었다. 실제 노동자들의 ‘계급적’ 행동을 억제시킨 것은 정권교체 세력이었다. 결국,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계급적’이지 못했던 민주노총과 노동자 정치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주었다. 선거 이후에도 노동자 운동의 전망은 일부 낙관론자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매우 어둡다고 본다.

     

    이른바 자본주의 체제 정상화? 인 ‘적폐청산’을 내걸고 ‘노동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이전 정권과 같이 ‘노동(운동) 적대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 속에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적폐청산에는 재벌개혁이 중요시되고 있지만,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개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보진영이 금기처럼 여겨 온 노동시장의 문제, 임금개혁의 문제 해결에 나서야한다."

    문재인 정부 대통령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2년 전 한 좌담회에서 강조했던 말이다. 옆에 있던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문제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셔야 한다."고 거들었다.1) (2017. 5. 26일자 기사, [내일신문]

     

    촛불 투쟁과 대선 기간 나타난 정권교체 환상은 단순히 반박근혜 정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적폐청산이라는 촛불 광장의 요구가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는 재벌개혁, 노동존중 등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비정규직 문제, 일자리 문제까지 파고들어 정권교체 열망으로 수렴된 것이다. 이렇듯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권교체 환상이 걷히지 않는 한 당분간 노동자 운동은 선거기간에 포섭된 것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정부의 품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것을 제어할 ‘계급’과 ‘권력투쟁’이 없었기에 전면적인 내부 투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혁명의 기억마저 거의 잊혀 진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선언적인 정권과의 대립각 주장이나 이미 정권에 포섭된 노동자 운동 배신세력에게 남 탓하듯 비난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낡은 운동은 이미 민낯을 드러내다 못해 태생적 본질마저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소수의 발본적, 혁명 운동 세력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계급 운동의 위기에 직면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혹독하고 길었던 반혁명의 암흑기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파시즘 아래에서도 소규모의 혁명가들은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으로 후퇴하지 않고 “미래는 코뮤니스트의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한 실천을 벌여나갔다. 그들에게는 혁명(전통)에 대한 ‘기억’과 투쟁과 실천에서의 ‘인내’와 자기조직화에 대한 ‘전망’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오늘날 ‘혁명의 가능성’과 무너진 ‘계급성의 복원’과 그것을 위해 우리가 ‘꾸준히 해나가야 할 실천’에 대한 토론을 위한 제안이다.

     

     

    1. 촛불 투쟁에서 대선까지의 노동자계급

     

    촛불 투쟁은 수많은 기록과 역사를 남기며 문재인 정권의 탄생과 함께 막을 내렸다. 촛불 투쟁이 이렇게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지면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위기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었다.

     

    연인원 1,700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가 다수는 조직적 참가자가 아닌 개별 단위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다. 촛불 집회는 ‘퇴진행동’이 주최하고 조직노동자(민주노총)가 일부 역할을 했지만, 수십만 명을 넘는 인원이 지속해서 참가한 것은 단체의 조직력보다 자발적인 참가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촛불 투쟁의 확산은 자본주의 위기 아래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사회와 일상에서의 기득권세력, 지배계급에 분노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표출할 ‘광장’이 필요했고, ‘촛불 집회’가 일부 실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직노동자들은 예상치 않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에 자극받고 고무되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투쟁에서 그래왔듯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 물결에 자신들이 가진 노동자 고유의 무기로 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형식적으로 대응했다.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계급적 투쟁’보다는 편하고 이익이 되는 ‘조직적 집회 참가자’의 길을 택했다. 조직노동자들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을 만나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재벌(대자본)에 맞선 직접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들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은 박근혜 정권의 반대편에서 정치 권력을 나누며 정파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던 국회를 압박해 탄핵소추를 이끌어냈다. 선출되지 않은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촛불 투쟁이 만든 박근혜 파면 정세는 선거법에 따라 대선으로 이어졌다. 촛불 투쟁의 성과도 정권교체 민심(?)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민심은 촛불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과 열망의 온전한 표현이 아니라 촛불 투쟁의 한계가 만들어 낸 불가피한 결과였다.

     

    박근혜 파면 이후 “탄핵은 끝이 아니라 촛불 혁명의 시작이어야 하고, 대통령 교체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촛불로 타올라야 한다.”며 투쟁을 지속하자고 했던 민주노총은 대선 시기 “세상을 바꾸는 대선, 노동존중 평등사회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민주노총과 산하 조직들은 대선 시기 대통령 후보와 그들의 정당에 ‘정책 협약’이라는 부탁 또는 압력을 통해 약속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들은 사회연대노동포럼과 같이 문재인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을 강하게 비난하면서도 부르주아 대선의 본질과 정권교체의 환상에 대해 정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선거로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어려워도 ‘선거가 아닌 투쟁으로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내자’고 호소하지 않았다.

    선거를 넘어 투쟁으로 정세를 돌파하자고 고공농성에 돌입한 것은 가장 어렵고 끈질기게 싸워 온 소수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계속>

     

    <주>

     

    1) 기사원문 : 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238653

     

    *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을 위한 1차 토론회>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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