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코뮤니스트 13호] 자본주의의 쇠퇴이론 : 회고와 전망Ⅱ

자본주의의 쇠퇴이론 : 회고와 전망Ⅱ

 

web_cover.jpg

 

 

3. 자본주의 쇠퇴론에 대한 최근의 문제 제기와 토론

 

3-1. 자본주의는 1914년 이후 쇠퇴에 들어섰는가? (1차 토론)

 

최근 ICC의 자본주의 쇠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이 발표되어 자본주의의 쇠퇴 문제를 다시 토론하고 논쟁하는 장이 마련되고 있다A Free Retriever’s Digest는 ‘ICC의 오류라는 제목의 C.Mcl의 글을 A Free Retriever’s Digest(2020. no.6)에 싣고 이를 토론하는 세 개의 블로그 토론을 잇달아 게재하였다.[16]

 

C.Mcl의 글은 ICC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로 위장해왔던 모든 국가의 자본주의 본질로노동조합을 포함한 이른바 좌파조직의 제도적 통합, ‘혁명적 의회주의의 낡은 성격임금노동자의 자기착취 같은 자주관리 등의 정치적 입장을 비판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그러나 ICC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론적 틀은 쓸모없고사실과 모순되며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시대착오적이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초월하고 있기에 객관적 기초가 없는 설명의 혼합으로 실제로는 관념적 틀이라고 혹평하고 있다.[17]

 

그 결과 위험한 정치적 편견을 드러낸다는 것이다보기를 들어 1914년 이래 실질적 개혁을 획득하기 위한 즉각적 투쟁의 불가능성, 20세기 실질적 국가발전의 불가능성인간 본질과 도덕(관념)적 개념노동계급의 객관적 분화를 고려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한다따라서 ICC의 기본입장은 진화(민족문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1917~1923년 봉기 운동의 패배 이후 개량주의 세력이 차지한 위치 등)에 기초하여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끝으로 ICC 입장에는 젠더인간 본질자연과 관계신기술프롤레타리아트 구성과 변화이행기생태 등의 수많은 문제가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글은 1914년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하여 1부에서는 생산력 제동인가 아니면 가속인가의 문제를 절대적상대적 부의 생산인구소득분배노동계급의 발전 등의 세부항목으로 구분하여 통계적 경험치로 비교하면서 생산력의 증대를 분석하고 있고, 2부에서는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개혁을 1914년 전후로 구분하여 임금노동시간착취율실업노동조합 본질과 기능으로 세분하여 통계분석을 하며 개혁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18]

 

C.Mcl의 글은 첫째, ICC의 혁명적 맑스주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개량주의 입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둘째의회주의노동조합주의 등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하는 ICC의 입장과 기본 입장이 다르다는 점, 1914년의 전후 시기의 통계수치 비교는 자본주의 쇠퇴론 본질과 크게 연관이 없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따라서 이 토론은 내가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서 정리한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코뮤니스트 좌파진영 내의 토론과 전혀 다른 개량주의 세력의 문제 제기일 수 있다.

 

그러나 C.Mcl의 글에 대한 세 가지 토론 글과 C.Mcl의 답변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19]

 

첫 번째 토론자 Link의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Link는 C.Mcl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경험적 사실의 제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면서 ICC가 비자본주의 시장에 의존하는 룩셈부르크의 축적이론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지만이것이 쇠퇴의 개념을 거부하거나 ICC가 오류라는 제안으로 이끄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룩셈부르크주의는 1960년대 세계발전의 맥락에서 정당화되었다고 설명한다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와 세계인구의 지속적 성장의 확장된 시기만 유효하다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나아가 룩셈부르크주의의 오류가 제국주의와 세계시장의 완결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이 개량주의민족문제 등을 거부하는데 위해(危害)를 가하는 정치적 탈선으로 이끈다고 인식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따라서 쇠퇴는 그 스스로 경제 위기가 아니지만자본주의 내의 모순이 점점 커져 위기를 창출하는 환경을 만드는 정치적사회적 역사발전이다다시 말해 쇠퇴는 생산력 성장에 대한 족쇄이지 그 하강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토론자 Fredo Corvo의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그리고 다른 나라 코뮤니스트 좌파의 역사적 공헌을 종합하는 ICC의 영웅적 노력의 필요한 수정에 C.Mcl의 글이 이바지하지만실제 계급투쟁에 공헌하고 입장을 취하는 실재 분석 작업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그의 최근의 출판물이 중동으로부터 인도차이나까지 그리고 코스타리카로부터 리비아에까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은 제국주의 전쟁의 일반화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C.Mcl은 자본주의의 지속적 생존을 결정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생산적 질서를 보여주고 있지만자본주의 쇠퇴 이후의 ICC를 반박하는 목적을 위해 1914년 전과 후라는 장기적 관점을 따랐지만쇠퇴이론의 본질인 전쟁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Fredo Corvo는 자본주의도 모든 생산의 역사적 양식같이 상승최고점하강이라는 곡선에 따라 발전하는가를 되묻고맑스와 엥겔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그리고 맑스가 프랑스 내전」 초고에서 코뮨이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실행할 유일한 형식이라고 보았는데이는 ICC가 보기에 레닌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에게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그들을 스탈린주의의 맑스로 비난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면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을 통한 세계재분할이 이루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재분배를 통해 자본주의는 지속한다고 전망하면서, 1914년 전후가 아닌 경제인구 수치의 분석이 중요하고 자본과 노동의 실질적 발전에 따라 전쟁재건위기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셋째첫 번째 토론자였던 Link는 2020년 11월 13일에 추가토론을 블로그에 올린다그는 C.Mcl의 텍스트에 대해 자본주의가 아직도 부흥기에 있다는 말인가를 묻고 20세기 착취율 통계가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의 대표치가 아닌 영국의 통계를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신은 쇠퇴(decadence)를 위축(obsolesce)으로 사용한다고 덧붙인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주의의 전환점이었음을 다시 확인하고 자본주의 위기의 어떤 경제이론도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변화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어서 1914년 후 이 시기의 변화가 세계시장의 완결이에 따른 군사적 충돌그리고 민족경제와 국제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국가자본주의의 출현나아가 혁명과 전쟁의 시대라는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결론짓는다.

 

넷째세 토론자의 토론에 대한 C.Mcl의 답변(2020년 11월 15)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그는 자본주의가 중국과 인도(더 일반적으로는 아시아 대륙)를 통합했을 때 자본주의가 쇠퇴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1945년 안톤 판네쿡의 분석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2013년 중국의 경제성장의 하강국면을 시작으로 자본주의가 서서히 쇠퇴 시기에 들어섰다는 자신의 입장을 새롭게 제시한다.

 

또한, 1914년 전후를 비교하는 실증분석을 통해 ICC를 비판한 것이 쇠퇴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며, 1차 세계대전이 자본주의의 삶에서 중요한 단계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발 물러선다그리고 코뮤니스트 좌파가 방어하는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지만, ICC처럼 관념적 틀이 아닌 실제 자본주의의 진화에 대한 일관된 분석을 근거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1914년 이후의 쇠퇴이론은 세계와 노동계급의 역사적이고 즉각적 이해에 대한 걸림돌이라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3-2. 자본주의 쇠퇴 문제에 관한 토론 (2차 토론) (2021년 3월 A Free Retriever’s Digest)

 

앞의 토론(1) 이후 2차 토론이 이루어졌다첫 번째 토론자는 Aníbal & materia인데그의 토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0] 현재 논쟁에 관한 한 자본주의 쇠퇴는 유지될 수 있는 틀이 아니라고 보는 Aníbal & materia는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Fredo Corvo, 21세기 초에 쇠퇴에 들어섰다는 C.Mcl, 그리고 자본주의가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 미래시기로서 쇠퇴를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이 있다고 정리한다.

 

그는 발전되는 이 논쟁의 맥락을 다음 몇 가지로 세분하고 있다.

 

첫째위기-전쟁-재건-위기의 순환이 타당한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점

둘째정확한 접근이 되려면 중국동남아시아 영역이 자본주의로 통합된 후 쇠퇴로 들어섰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점

셋째쇠퇴이론은 필요한데 과거의 오류와 맑스주의의 부적절성과 약점은 쇠퇴이론을 회피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

넷째쇠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견해이지만어떤 조건에서 그러한가 하는 것은 전략전술의 의미를 구체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

다섯째쇠퇴 시기 이전의 가정적인 혁명 과정에 직면했을 때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은 그 조건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점.

여섯째요약하면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의 경험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적절한 조건을 발견하지 않는 혁명 과정에서의 참여를 피하도록 한다는 것

일곱째소련의 경험은 대리주의적 자본주의(프롤레타리아독재가 코뮤니스트 당독재라는데 종합되어 있는)가 코뮤니스트당과 노동자평의회 사이의 나쁜유명무실해진 접근임을 되새기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

여덟째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대조되고 경쟁하는 체제로 자본주의 내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 토론자인 Fredo Corvo는 이미 첫 번째 토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는데이번 토론에서는 자본주의는 끝나고 있는가그러나 어떻게?라고 하면서 몇 가지 질문과 입장을 추가하고 있다.[21] 그는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통합이 자본주의의 쇠퇴로 이끄는가를 묻고 자본주의 생존이 일을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속적 성장을 전제로 한다는 (그 당시 맑스의 산업예비군’ 또는 잉여인구의 개념판네쿡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몰락한다는 견해에 반대하고 ICC가 의존하는 룩셈부르크의 시장포화론을 비판한다.

 

또한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생산력 발전의 의미가 기술적 의미(기계설치물 등)로만 이해했다는 한계볼셰비즘에 따른 생산력 발전도 일면적 기술적 개념에 머물렀고 모든 유파(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 개념을 사적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단계에 한정하고 동구 블록중국북한베트남쿠바 등을 사적 자본주의의보다 우월한 약한 자본주의로 보았다는 점을 지적했다그러면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일깨운다는 판네쿡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문제로 제국주의 전쟁이 세계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잉여노동의 재분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전쟁은 위기환경보건의 쟁점과 함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의 주요 부분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쇠퇴이론이 더는 차지할 위치가 없는데현실과 반대될 뿐 아니라 맑스주의의 이론적 기초에도 반대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4. 결론 자본주의 쇠퇴론의 토론이 남긴 과제

 

자본주의 쇠퇴론의 중심에 있는 ICC는 2020년 12월 팬데믹과 노동계급에 대한 논쟁을 온라인(영상토론회로 개최했다토론회에서 ICC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시대의 일반적 특징으로 부흥(상승), 쇠퇴그리고 해체로 규정하는 자신의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오늘날 자본주의가 성장하지만뿌리로부터 썩어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그리고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근본 모순역사의 주요 동력으로서 계급투쟁을 무시하지 않지만혁명으로 전복하지 않으면 상호 유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22]

 

그리고 코비드19 팬데믹은 세계 자본주의의 황폐한 조건이라는 글에서는 코뮤니스트 혁명이 가능하다는 보다 적극적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23] 그러나 독자 편지 왜 ICC는 역사적 경로의 개념을 포기했는가?라는 글에서는 ICC의 기존 입장을 강변하고 있다.[24] ICC는 맑스의 방법과 맑스주의 운동을 채택해왔고 그에 따라 1989년 동구 블록의 몰락 이후 역사의 경로’ 개념이 철 지났다고 판단하고, ‘세계전쟁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인가?’가 아니라 일반화된 혼돈에서의 인류의 파괴인가프롤레타리아 혁명인가?’다 라고 결론짓고 스탈린주의 체제의 몰락이 마치 코뮤니즘의 몰락이라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전투성이 약화하였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최근에 제기된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논쟁에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이는 아마도 이들 입장이 코뮤니스트 좌파진영의 입장이 아니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추정이기도 하다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론 논쟁을 검토하면서 몇 가지 잠정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ICC가 의존하는 룩셈부르크의 시장포화론만으로 자본주의 쇠퇴를 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비자본주의 시장과 자본주의 시장의 구획은 1차 세계대전의 시점과 그 이후 비자본주의 시장이었던 식민지국가들이 자본주의로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1960년대 이후는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그렇다고 해서 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금융자본주의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와 생산관계의 모순 심화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역사적 계기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셋째아직도 세계전쟁인가 세계혁명인가의 문제는 1차 세계대전 때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하며코비드19 팬데믹 이후의 자본주의 모순과 위기의 전망 아래에서도 더욱 유효하다는 코뮤니스트 좌파의 기본입장은 더욱 원칙적인 맑스주의 방법과 맑스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넷째몇몇 토론자들이 제기한 판네쿡의 입장즉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해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인식이 코뮤니스트 좌파가 되새겨야 할 혁명원칙임을 상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섯째자본주의 쇠퇴론은 역사적 경로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총체적 틀로 분석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좌파의 역사적 책무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오세철

 

 

<>

 

[16] A Free Retriever’s Digest - An internationalist Articles Selection & Review」 Vol.5 #1 (January – March 2021)

C.Mcl의 글 출처는 Les impostures du CCI (Courant Communiste International)

http://leftcommunism.org/spip.php?article468&lang=fr

Translation: H.C., September 2020. Reviewed by the author.

Latest corrections: 17 November 2020. 이다.

그리고 “1914 이후 자본주의는 쇠퇴에 들어섯는가의 블로그 토론은 A Free Retriever’s Digest」 (November 2020)에 실려 있다.

[17] C.Mcl의 글, 6

[18] 위 글, 7~27

[19] 블로그 토론, Link, November 6. 2020, 13~16

[20] Aníbal & materia, February 5, 2021 (Translation of March 2021)

A Free Retriever (2021년 3월 14)

https://afreeretriever.wordpress.com/portfolio/discussion-contributions-on-the-question-of-capitalisms-decadence/5/

[21] Fredo Corvo, January/March 2021

A Free Retriever (2021년 3월 14)

https://afreeretriever.wordpress.com/portfolio/discussion-contributions-on-the-question-of-capitalisms-decadence/4/

[22] ICC, Netto (2021년 2월 20)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80/icc-virtual-discussion-meetings-contacts-december-2020-lively-debate-pandemic-and

[23] ICC, Sylver (2021년 2월 17)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83/covid-19-pandemic-reveals-dilapidated-condition-world-capitalism

[24] ICC, Sofiane (2021년 3월 5)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82/readers-letter-why-has-icc-abandoned-concept-historic-course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710
 

 

 ▶ 더 자세한 내용과 토론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에서 이어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자본주의의 쇠퇴이론 : 회고와 전망Ⅰ

자본주의의 쇠퇴이론 회고와 전망

 web_cover.jpg

 

 

1. 들어가며

 

코뮤니스트」 12(2020년 11) “코뮤니스트 좌파진영 최근 내부 논쟁(3)”의 머리글에서 나는 논쟁(1)과 (2)를 정리하면서 역사의 경로에 대한 논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1]

 

첫째,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는 역사의 경로’ 개념이 해체’ 시기에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하는 반면, ICT(국제코뮤니스트경향), IGCL(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 NC(신경로), GCCF(걸프만 코뮤니스트 분파등은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의제가 여전히 유효하며, ICC는 계급투쟁을 폐기했다고 비판한다이는 근본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이해 등의 근본적 논쟁을 내포하기 때문에 더욱 깊이 있는 문제 제기와 논쟁이 요구되는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자.

 

둘째, (자본주의의해체 시기를 양대 제국주의 블록의 소멸(소련 해체로 인한)로 보고 계급의 힘의 균형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는 ICC는 소련을 포함한 이른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미 세계 자본주의 틀 안에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을 자본주의 해체라는 새로운 의미로 규정하기에는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다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계급투쟁은 필연적인 역사발전의 동력이기 때문에 해체’ 문제를 자본주의를 넘어선 인류의 파괴로 본다면 우주적 차원의 더 넓고 깊은 인식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셋째코뮤니스트 좌파진영 논쟁이 맑스주의 원칙정치 노선강령 등의 본질적 개념과 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회주의’, ‘기생주의라는 조직 문제로 한정되고 서로를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세계혁명과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루어 낼 세계혁명당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의 경로’ 논쟁이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 새로운 토론논쟁 그리고 연대-단결을 전망하며에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2]

 

(첫째둘째셋째는 생략)

 

넷째그러나 논쟁이 시작된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중심의제는 ICC가 전쟁을 세계적 혼돈으로 대체하면서 이윤을 강조한 ICT 등의 입장과 혼돈야만 등의 질적인 차원이라는 인류문명 차원의 ICC 대립 구도는 앞으로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섯째팬데믹 위기가 자본주의 위기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전망맑스주의와 코뮤니즘 원칙에 굳건히 서 있는 젊은 코뮤니스트들의 성장과 발전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혁명적 노동계급의 복원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그 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들의 연대단결통일을 위한 자기반성상호비판이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2021A Free Retriever’s Digest」 5호부터자본주의의 쇠퇴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되면서 위에 언급한 역사의 경로’ 논쟁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ICC의 자본주의의 쇠퇴를 번역하고(2009)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2006)>에서 자본주의의 쇠퇴를 둘러싼 코뮤니스트 좌파 내의 논쟁을 정리한 글을 발표한 나로서는 자본주의의 쇠퇴이론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미래를 전망하는 글을 준비해야만 했다.

 

 

2. 자본주의 쇠퇴 이론에 대한 회고

 

2-1. 2006년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

 

좌익 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빛나는 전망2008년 9) 편집자인 나는 편집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3]

 

“2006년 10월 23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가 열렸다그 대회에 참가한 조직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과 [국제주의자전망](Internationalist Perspective), (초청받은 [혁명당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Revolutionary Party)은 참여하지 않았다)이며한국에서는 주체자로서 [사회주의정치연합], [노동해방당건설투쟁단], [노동해방연대], [울산노동자배움터]가 대회 발제자로 참여하였다나는 주최 측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맑스주의자 대회(모임)가 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그러나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 논리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한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 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하나의 국가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이번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 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첫 번째 경험이 될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실천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우리는 이번 국제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그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

 

이 대회에서 내가 발표한 글은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이다.[4] 코뮤니스트 좌파 내부에서의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은 주로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논쟁은 주로 ICC와 IBRP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IP는 자신의 입장을 ICC/IBRP와 구별하면서 제출하고 있다이번 호는 이들 세 흐름의 최근 글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5] 자본주의 쇠퇴이론은 맑스 역사적 유물론의 중심 이론으로 앞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략의 기초가 되며 코뮤니즘의 전망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이번 호는 논쟁의 지점을 정리하고 각 세력의 입장을 대비하여 그 차이를 드러내려고 하였고주로 직접 인용문을 대상으로 하였다.

 

논쟁의 쟁점들은 1) 쇠퇴 이론(개념)을 포기했는가의 문제, 2) 쇠퇴 기원에 대한 논쟁, 3) 경제 결정론인가의 문제, 4) 쇠퇴의 양적 기준과 질적 기준 문제, 5) 전통적 맑스주의 문제이며 더 공개적 논쟁을 위하여 잠정 결론을 짓고 있다.[6]

 

첫째자본주의 쇠퇴이론과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코뮤니스트 사회 건설의 핵심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자본주의 위기에 대해 경제 이론의 양적 기준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따라서 유물론에 철저하게 기초하면서 총체성의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경제 메커니즘과 계급투쟁의 변증법적 통합인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넷째부르주아지의 저항 능력이나 기술발전의 힘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부적절하다.

 

다섯째쇠퇴와 자본의 실질적 지배와의 관계가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여섯째주체로서 노동계급에 대한 인류학적문화적 연구가 쇠퇴와 관련되어 폭넓게 연구되어야 한다.

 

일곱째자본축적에서 포드주의포스트포드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쇠퇴 시대의 울트라 포드주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여덟째맑스주의 핵심과 그의 이론적 간극과 빈틈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2-2. 자본주의의 쇠퇴」 (ICC 지음오세철 번역빛나는 전망, 2009)의 출간

 

코뮤니스트 좌파 정치조직 가운데 자본주의의 쇠퇴이론을 앞장서서 주창하고 책으로 출간한 조직은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다. 2006년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고 그 대회의 중심이론이 자본주의 쇠퇴이론이었음을 앞서 밝힌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옮긴 이의 글을 썼다.[7]

 

생산관계의 근본적 모순의 심화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어 결국 그 족쇄를 깨뜨리는 생산양식의 단절이 필연적이라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인류 역사의 발전에 대한 탁월한 과학적 사상이론이다봉건제 이후의 자본주의가 상승기를 경험하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어 그 자생적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체계적 몰락의 길로 나가고 있음은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공황과 자구적 처방의 속절없음을 보아도 자명하다.

 

1919년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자본주의 선택의 길을 전쟁이냐 혁명이냐고 단언한 이래 자본주의의 쇠퇴에 대한 이론적 입장은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의 중심적 화두였고 논증의 대상이었다. (...)

 

이 소책자는 1970년대에 발간되었으나 최근에 ICC가 수정 보완한 수정판이다. (...)

 

자본주의의 위기를 잉여가치 생산에 초점을 맞추는 이윤율저하 경향법칙과 잉여가치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는 자본주의 시장 포화론 사이에서 ICC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인 후자에 기반하고 있고 이는 현재 세계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 쇠퇴이론의 몇 가지 핵심을 말하고 있다.

 

임노동 관계의 본질로 인해서 자본주의는 그것이 추출한 모든 잉여가치를 그 자신의 사회적 경계 내에서 실현할 수 없다는 맑스의 주장에 기초하여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역사적 하강은 자본주의적 총생산에 따라 창출된 잉여가치의 양에 비해 자본주의 외부의 시장들이 모두 소진되는 그 시점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룩셈부르크에게 자본주의는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그래서 매개나 토양으로 다른 경제체제가 필요한 최초의 경제 양식이었다동시에 그것은 세계적 보편 체제가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그러한 체제가 될 수 없어서 파괴되고 마는 것이었다.”(자본축적론). 요약하면자본주의는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된 그 시점에 과잉생산의 영원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8]

 

룩셈부르크의 인터내셔널 그룹레닌의 볼셰비키 분파브레멘의 좌익급진파 등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한 세력들로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맑스가 예측한 전쟁과 혁명의 시기의 시작을 나타냄을 확인하고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혁명적 투쟁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할 것을 요구했다.”[9]

 

쇠퇴론은 ICC가 고안한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전통 전체로부터의 진정한 유산이다그리고 그것은 일관된 혁명적 활동의 필수 불가결한 기초이다그것이 작동하는 시대에 대한 이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조직의 강령은 그 분석과 계급 내 개입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지향성을 가질 수 없다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캠프를 구별하는 계급 경계가 확고하게 방어될 수 없다.”[10]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11]

 

1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43~85)

2위기와 쇠퇴(89~98)

쇠퇴의 징표들 (경제적 수준에서상부구조의 수준에서이데올로기 영역에서사회적 관계의 영역에서정치적 영역에서)

3자본주의에서의 쇠퇴(101~120)

4쇠퇴생산력의 총체적 정지?(123~134)

5_ 1914년 전쟁이라는 전환점(137~159)

6_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163~177)

7쇠퇴의 위기들(181~188)

8총체자본의 개념(191~216)

 

그리고 자본주의 쇠퇴 문제가 이것으로 모두 다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이 중에서 조사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이 있다라고 한계를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12]

 

우리의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첫째프롤레타리아 혁명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의제라는 우리 확신의 기반을 설명하는 것둘째자본주의 사회가 거쳐 온 심각한 변화를 다루는 것이러한 변화는 혁명가의 전통적 입장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즉 19세기에 유효했던 전술들(의회주의노동조합에서의 활동민족투쟁에의 참여)이 오늘날 반()혁명적으로 되었다.”

 

2-3. 역사유물론 자본주의 쇠퇴론 그리고 코뮤니스트 혁명

 

맑스는 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13]

 

임금노동과 자본을 양측 면으로 가진인간 활동이 취한 노예체제의 마지막 형태는 그리하여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 사라진다이것이야말로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귀결점이다. (스스로 이미 부자유한 사회적 생산의 이전 형태들에 대한 부정인임금노동과 자본의 부정을 위한 정신적물질적 조건들은 자본의 생산과정 자체의 산물이다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현존하는 생산관계 사이에 점증하는 부조화는 모순위기변동으로 표현된다.”

 

맑스의 이 대표적 언명은 자본주의 쇠퇴론을 말하는 축약된 표현이며역사유물론의 핵심이기도 하다여기서 쇠퇴 의미는 사회주의 기초 형성과 파국을 향한 모순을 포함한다자본주의 쇠퇴론의 쟁점들 속에는 위기자동붕괴상승기와 쇠퇴기의 구분이행의 의미주체와 객체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가 담겨있다.

 

한편 엥겔스가 확립한 에르푸르트 강령은 당 강령의 중심에서 자본주의 쇠퇴론과 자본주의의 붕괴를 지지한다.

 

이러한 (사유재산체제를 지키려는 노력은 더는 사회발전을 불가능하게 하고 사회가 정체와 쇠퇴로 가게 한다. (...)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립은 단순히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오늘날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문명은 지속할 수 없다우리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든지 야만으로 전락하든지 해야 한다인류의 역사는 관념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누구의 바람이나 변덕이 아닌 특정한 기본법칙에 복종하면서 저항할 수 없이 진보하는 경제발전으로 결정된다.”[14]

 

에르푸르트 강령은 내부모순에 의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몰락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적 목표와 전술도 담고 있다그리고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유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상속받은 경제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았다이처럼 제인터내셔널이 맑스의 경제학만을 채택해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형식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경제학으로서 정치경제비판을 한 것은 맑스의 공헌이 경제학이 아닌 정치와 경제의 분리에 대한 비판즉 경제학 비판임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1916년 이후 부하린과 레닌의 이론은 제국주의와 전쟁을 금융자본의 피할 수 없는 정책으로 보았고이러한 금융자본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는 자본주의 쇠퇴로 보았다로자 룩셈부르크는 다른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반면 코뮤니스트 좌파는 프롤레타리아트 패배와 투쟁의 고립에 직면하여 자본주의가 쇠퇴한다는 객관적 분석에 몰두하게 된다.

 

그로스만(Gossman)과 그 추종자들은첫째 자본주의가 파국으로 가면서 쇠퇴하고 있음을 보이는 경제학을 이해하였고둘째 새로운 경제 질서를 도입하는 정치혁명의 필요성을 보았다그들은 맑스의 자본을 자본주의 몰락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완전한 경제학으로 선언했다그러나 이들은 정치와 경제의 연결 관계가 내부적이 아니라 외부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자본의 완결이 자본주의 정치경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정치경제라는 맑스의 총체적 이해 부족이었다.

 

이러한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는 그로스만의 입장을 비판한 판네쿡은 혁명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지막 위기를 믿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자본주의는 위기에서 위기로 이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을 통해서 배우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파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그는 프롤레타리아트 자기해방이야말로 자본주의 몰락이라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입장이 아닌노동계급 입장에서 자본주의 쇠퇴와 몰락을 이해하고 있다.

 

21세기 오늘날 코뮤니즘의 역사적 필요성을 주장하는 코뮤니스트 좌파는 다음과 같이 결론 맺고 있다.[15]

 

맑스주의 혁명적 기초는 자본주의가 위기 체제일 뿐만 아니라 자기 확장의 객관적 한계에 직면한 생산양식임을 증명하는 능력에 있다이 견해는 코뮤니즘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 필요성이라는 것이다쇠퇴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이러한 필요성은 21세기 오늘날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전쟁이라는가치의 물질적 파괴를 통해 해결하려는 방법이 인류 전체를 절멸시키려고 위협하고 있기에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맑스주의 핵심이론인 역사유물론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쇠퇴이론에 대해 정통 맑스주의 입장을 역사적으로 검토하였다자본주의 쇠퇴론에서 이탈과 포기는 사실상 맑스주의 포기일 수밖에 없고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폐절이 아닌 수정주의나 개량주의로의 노선 전환임을 인식할 수 있었고, 2차 세계대전 후 호황과 되풀이되는 위기를 경험하면서 단기적 국면의 주체성 이론들의 등장과 소멸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과 계급투쟁을 뒤섞은 조류인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동반 몰락은 자본주의 쇠퇴론이라는 정통 맑스주의 입장을 다시 한번 힘차게 부여잡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본주의 쇠퇴라는 객관적 자본 법칙과 이를 폐절하려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의 투쟁이 상호작용하면서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코뮤니즘의 객관적 물질적 기초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생산력으로서의 혁명 세력을 강력하게 형성시키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코뮤니즘 본질에 대해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최대강령의 원칙을 찾아내야 한다.   <계속>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오세철

 

 

<>

 

[1] 코뮤니스트」 12, 2020년 11국제코뮤니스트전망, 172~173

[2] 코뮤니스트」 12, 2020년 11국제코뮤니스트전망, 189

[3]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오세철 편저빛나는 전망, 2008, 5~6

[4] 위 책, 262~278

[5] ICC의 경우International Review」 no.96, 97, 105, 115, 117, 118, 119, 121

IBRP의 경우Prometeo」 no.8, Revolutionary Perspectives」 no.32, Internationalist Communist」 no.21

IP의 경우INTERNATIONALIST PERSPECTIVE」 no.30, 31, 34, 35, 44 그리고 이번 대회 발제문

[6] 위 책, 277~278

[7] 자본주의의 쇠퇴국제코뮤니스트흐름 지음/오세철 번역빛나는 전망, 2009년 1, 1~2

[8] 위 책, 19

[9] 위 책, 20

[10] 위 책, 36

[11] 위 책, 41~218

[12] 위 책, 221

[13] 칼 맑스 요강」 <전집> 29, 133~134

[14] 에르푸르트 강령, 117~119

 

[15] “모순의 축적인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제적 결과인가”, Revolutionary Perspectives」 43, 2007년 8

 

▶ 더 자세한 내용과 토론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에서 이어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200년: 엥겔스와 그의 혁명적 기여

 200엥겔스와 그의 혁명적 기여

 

  photo_2021-01-10_14-14-20.jpg

 

2020년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태어난 때로부터 200년이 된 해였다이를 기념하여 우리는 1995년 엥겔스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며 출간했던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 1(시리즈 3)의 글 하나를 다시 펴낸다이것은 축하라거나단순한 일대기가 아니다이것은 맑스주의 방법과 19세기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헌과 그의 사후 125년 동안 이어진 그의 중요성을 평가하려는 시도이다여기서 엥겔스의 공헌을 방어하며 제시된 주장은 이른바 ()엥겔스주의의 근원도 추적하는데이 주장이 제기된 25년이 지난 이후새로운 세대(보기를 들어몇몇 아마추어 코뮤니스트들과 가치 형태 이론가들)가 다시 한번 맑스주의에서 엥겔스를 퇴치하려는 시도에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없어서는 안 될 엥겔스

 

칼 맑스의 전 생애에 걸친 친구이자 협력자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95년 8월 5일에 사망했다노동계급이 자신의 가장 위대한 투사이자 혁명적 코뮤니즘의 공동 설립자를 잃은 해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엥겔스가 없었더라면맑스주의도맑스주의 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1847년 코뮤니스트 동맹(Communist League)의 발족으로부터, 1864년 국제 노동자 협회(인터내셔널설립말하자면 가장 익숙한 정치적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1889년 제인터내셔널의 준비에 이르기까지엥겔스의 기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현재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마찬가지로 퇴조 시기맑스와 격리되어 있었음에도조직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 바로 엥겔스였다많은 서신을 통해 분파의 필수적인 작업을 계속했던 것도 그였다. 1883년 맑스 사후엥겔스는 당의 정신으로서 살아 숨쉬며인터내셔널까지 바로 조직의 원칙과 경험의 지속성을 전달했고역사적인 오늘날그 정치적 유산을 체현한 유일한 전통코뮤니스트 좌파에게까지 전달했다.

 

엥겔스의 이론적 투쟁에 대한 고발은 최종 분석에 있는데이는 정치적 상황과 따로 떨어질 수 없으며그의 위상에 동등한 증언으로 남아있다그들의 공식화 이후 100오늘날 그의 사상은 뜨거운 논쟁거리분란의 원인으로 남아있다. 1844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a Contribution to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부터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인 본질에 맑스의 눈을 뜨게 한 작업인 공동저작코뮤니스트 선언(Communist Manifesto), 청년 헤겔주의자에 대한 응답으로 맑스와 함께 맡았던 초기 작품신성 가족(The Holy Family)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들인 -뒤링(Anti-Dühring)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자연변증법(The Dialectics of Nature)에 이르기까지그리고 맑스의 자본(Capital)」 초안에 대한 물적지적 지원부터 혁명적 코뮤니즘의 원칙들을 유명하게 한 수많은 팸플릿과 논쟁적인 글들에 이르기까지엥겔스의 지적 에너지는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에 끊임없이 기여했다.

 

이 글은 그를 칭송하기 위한 일대기가 아니다우리는 학계의 맑스주의 전문가들이 안락의자에 앉아 연대기적 자료들의 유골을 살펴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엥겔스의 결정적인 전기는 계급투쟁의 페이지 속에서만 작성될 것이다우리는 그 대신 엥겔스의 혁명적 맑스주의를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며이는 전문적인 중상모략의 정통이 된 이들에 의해 폄하된 그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엥겔스주의의 기원

 

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시기패배를 모르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세대가 등장했는데계급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필수적인 주관적 조건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좌익 급진주의의 등장을 목격했다새로운 축적 싸이클 위기의 징조냉전 시대 첫 번째 균열, CND(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핵군축 캠페인)와 새로운 좌파의 성장베트남전 반대 등지식인 집단의 새로운 계층들을 급진화하고 필연적으로 동시에 맑스주의 사상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몇몇 조건이 존재했다.

 

이 과정은 몇몇보다 명백한 개량주의의 공허함그리고 스탈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돌덩이의 무거운 무게에 대한 더 큰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결과적으로 비판자들은 맑스주의 설립자들의 저작에서 스탈린주의의 씨앗과 개량주의의 실패를 찾기 시작했고이는 학계 맑스주의의 확장에 기름을 부었다이와 동시에 맑스의 초기 인본주의적’ 저작들이 널리 이용되었다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엥겔스의 사상이 완전히 관념적 방법의 결과였다는 것 지면의 한계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 영향력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주류는 스탈린주의의 조악한 환원주의와 개량주의의 반-이론적 왜곡에 대한 반응으로 종종 철학적문화적 분석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신좌파(New Left)의 맑스 계승주의자들(marxicologists)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현상들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이론에서 환원주의나 실용주의가 스탈린주의나 개량주의 보다 덜한 원인이라 가정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맹목적으로 관념론적 방법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일단이 논리가 받아들여지면유산의 지식인들은 곧 어떤 사상가가 이런 잘못된 사상들을 운동에 처음 들여왔는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원죄’ 탐색이 시작되었다.

 

비판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 사이의 틈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주장한 연구 중 하나는 게오르그 리히트하임(Goerge Lichtheim) 맑스주의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연구(Marxism: An Historical and Ciritical Study, Routlege, 1961)이다리히트하임은 맑스의 비전에서 비판적 사고는 혁명적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validated)”는 것이엥겔스에게서는 사회주의가 필연이라는 것이 거의 기계적인 확실성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점에서이는 철의 법칙으로 등장한다.”(1)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가 역사적 진화가 자연적(보편적진화의 한 측면이고기본적으로 같은 법칙에 종속된다고 했을 때 맑스와 갈라선 것으로 여겨진다맑스는 헤겔로부터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자기 의식적 행동의 중요성을 가져왔다반면진정으로 엥겔스를 도취시킨’ 것은 헤겔의 결정론자연과 역사가 이미 정해진 과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었다.(2)

 

리히트하임의 책은 발간 이후 20년 넘게 출간된 저작들에서 매우 친숙해진 여러 가지 주제들을 반복한다엥겔스가 맑스의 주체적 행동을 과학의 경험론적(실증주의적개념으로 대체했고이는 다윈주의 진화론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적 세계와 자연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맑스주의를 잘못 확장했으며이 결정론적 환원주의적 공식이 필연적으로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독일 사회 민주주의당(German Social Demoratic Party)이 개량주의적 정책을 지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리히트하임은 서유럽 맑스주의으로 알려진 사상적 흐름의 뿌리 깊은 특징이 된 반()엥겔스주의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알프레드 슈미츠(Alfred Schmidt)의 맑스의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 in Marx)(1962)에서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자연과 사회적 역사의 관계에 대한 개념에서 엥겔스는 맑스의 개념을 넘어섰고이 지점에서 그는 교조적 형이상학으로 빠져들었다.”(3)

 

슈미츠는 맑스가 물질세계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사상을 찾았다면엥겔스는 인간 존재의 두뇌 속에서 외재적 세계의 조악한 반영만을 보았을 뿐이며 이를 알량한 의식 이론의 모조품이라고 믿었다.

 

1969루시오 콜레티(Lucio Colletti)는 거의 무심결에 아래와 같이 질문할 수 있었다.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가 저지른 맑스주의 사상에 대한 왜곡은배아 상태였을 뿐이지만 엥겔스의 저작의 몇몇 측면 속에서 어디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는가자연과 역사 발전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에 대한 탐색이 이러한 시도를 전반적으로 헤겔주의와 다윈주의와의 오염의 경향(preconstitution)으로 만들었는가?(4)”

 

그는 계속해서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 대한 엥겔스의 영향력이 철학적-우주론적 발전다시 말해 자연 철학’, 다른 말로 역사적 유물론을 확장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에 넣은 그의 작업의 부분적 결과라고까지 주장한다.

 

콜레티에 따르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엥겔스가 홀로 잘못한조악한 오해이다엥겔스는 유물론을 더욱 우월한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착각으로이미 헤겔에 통째로 존재했던 사물의 변증법’ - 이에 대해 헤겔이 이미 명시적으로 반-유물론적 기능을 부여한 것도 모른 채 을 진부한 방식으로 재생산했을 것이다.

 

엥겔스로부터모든 맑스주의를 아우르는 가짜-맑스주의 전통이 확산했을 것이다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맑스주의와 헤겔(1958)의 첫 부분에서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으나두 번째 부분(1968)에 의하면 완전히 이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서유럽 맑스주의라는코르쉬(Korsch)와 초기 루카치(Lukács)에서 마르쿠제(Marcuse)에 이르는 이들은 반()유물론과 반()엥겔스 논쟁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에 대한 엥겔스의 오류 계승을 역시 배신한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그 양식이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엥겔스는 악당이었다정치적 입장이나 이론적 입장 콜레트의 신칸트주의가 되었든슈미츠의 인본주의가 되었든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의 알튀세르주의가 되었든 에 관계없이결론은 항상 같았다 무엇이 되었든 맑스주의가 잘못된 뿌리는 엥겔스였다르빈(Levine), 카버(Carver), 콜터(Coulter), 조던(Jordan), (Gunn) 등 몇몇 소수만이 이러한 경향이 가상의 정통에 엉겨 붙어 있음을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 사상의 통합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입장은명백한 현실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평생에 걸친 동반자 관계 을 무시한다코뮤니스트 운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의 삶에 관한 기본적인 전기적 사실들을 뛰어넘는 것은 상당한 왜곡이 필요한 일이다오직 가장 조악한 방식의 관념론만이 그 위업을 행할 수 있다오직 미리 상상 속에서 정해놓은 결론만이 그러한 수정된 사상들을 유지하기 위해 실증적인 데이터를 왜곡할 수 있다.

 

카버(Carver)에게, ‘살아 있는 두 사람의 지적 관계는 바로 그들이 독립적으로 성취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맑스 사후, ‘변증법을 창조하고 그에 따라 맑스의 삶과 저작들을 재구성했다’(5)는 점에서 엥겔스는 전능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르빈(Levine)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관념론의 반동적 논리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지적 차이가 어째서 유형화되어진정한명확하게 구분되고인정된 논쟁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나지 않았을까?”(6)

 

맑스와 엥겔스가 서로 다른 이론적 경로를 따라 발전했다는 아이디어는 어떤 전기적 증거도 없는 주장이다후자는 곁눈질로만 봐도 이를 지지한다.

 

1840년대 두 사람은 역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지게 될 관점에 도달했고몇몇 중요한 예시에서 길을 이끌어 간 것은 엥겔스였다전체가 공동작업인 코뮤니스트 선언은 코뮤니즘의 원칙들에서 엥겔스가 처음 윤곽을 잡았다엥겔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썼을 때맑스는 여전히 헤겔 철학의 엉킨 실타래에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이것은 40년 동안의 경제 분석에 몰두하기 위한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한 것이었고또한 그의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 그 과정이 기록된맑스가 완전한 유물론적 계급 분석으로 이행하는 즉각적인 영감이 되어주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동의 견해에 도달하면서그들의 견해를 정교화한 신성 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공동 집필했다그들은 그들이 개입한 의인 동맹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설득하고 코뮤니스트 동맹으로 전환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일련의 부르주아 혁명이 발발했다맑스와 엥겔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촉진할 조건을 갖추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맑스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고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 지낸 것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공동 작업 유형을 변화시켰다– 그들 사이에 새로운 정치적지적 노동 분업을 확립한 것이다오랜 기간의 자본론」 작업 동안 엥겔스는 그들이 거의 매일 주고받은 서신에서또는 방문 토론을 통해 맑스의 변함없는 조언자였다이러한 지속적인 협업은 자본론」 집필의 모든 단계에서 계속되었으며이는 맑스가 엥겔스에게 대개 위임했던 교정작업을 포함한다맑스에게는,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당신의 만족스러운 응답은 나에게 있어 세계의 나머지 누구의 만족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그 마지막에서 우리는 그의 엥겔스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부채의 본질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절대 이 작업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겁니다그리고 확신컨대당신의 뛰어난 에너지를 낭비하고특히 주로 나와 관련된 돈을 버는 문제들 속에서 녹슬게 한 것에 대해더욱이 여전히 나의 소소한 문제들에 대해 나를 대신하여 당신이 개입해야 했던 것이 항상 내 마음을 무겁게 해 왔습니다.”(7)

 

르빈은 맑스의 죽음이 엥겔스가 자유롭게 그의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된 저작을 출판하게 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르빈이 제공한 연대기 출판물조차 그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킨다반뒤링은 맑스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된 저작이며모든 프로젝트가 맑스의 아이디어였고맑스는 스스로 그 일부 챕터를 서술하였다우리는 맑스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의 철학을 학살하는 것그 자신의 사상에 안티테제인 형이상학적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낼 필요를 명백하게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두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다고 이해해야 하는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반뒤링에서 나왔고이 또한 맑스 죽음 이전에 출판되었다. 가족사적 소유국가의 기원은 맑스 사후에 나왔으나맑스가 그의 손으로 작성한 문화인류학적 노트로 엥겔스가 만든 것이다루트비히 포이에흐바흐는 맑스 사후 출판되었으나그의 초기 저작들의 관점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엥겔스는 맑스의 새롭게 발견한 포이에흐바흐에 대한 테제를 부록으로 출판했다명백히 그는 인본주의적’ 젊은 맑스와 결정론적’ 늙은 엥겔스 사이의 모순을 발견할 수 없었다.

 

로라 맑스(Laura Marx)의 남편폴 라파르그의 아래 편지 발췌는아마도 어떤 역사적 회고보다도 그들의 진정한 취지와 독특한 관계에 대한 본질을 훨씬 더 잘 전달하고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말하자면맑스 가족의 일원이었다맑스의 딸들은 그를 그의 두 번째 아버지라 불렀다그는 맑스의 또 다른 자아였다그들은 젊었던 시절부터 함께 발전하고 서로 평행하게 함께 나아갔으며사상과 감정들의 친밀한 동료관계 속에서 살았고같은 혁명적 호소를 공유했다.···그러나,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엥겔스는 맨체스터로 향해야 했고맑스는 그동안 런던에 남아있어야 했다그렇다고 해도그들은 거의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쓰며 공동의 지적 삶을 지속해 나갔다.···엥겔스가 자신 일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그는 맨체스터에서 서둘러 런던으로 향했고거기서 그는 친우 맑스로부터 10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했다. 1870년부터 그의 친구가 죽을 때까지그들은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때때로 그들의 집에서때때로 다른 이들의 집에서 만났다.··· 맑스는 다른 누구의 의견보다 엥겔스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였는데이는 맑스가 엥겔스를 그의 협업자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며맑스에게 엥겔스는 그의 온전한 청자였다엥겔스를 납득시키고 그의 사상을 설득하는 데에 맑스는 그 어떤 것보다 큰 노력을 들였다보기를 들어나는 엥겔스의 어떤 부차적인 부분에 대한 견해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사실들을 찾으려고 맑스가 모든 서적을 몇 번이고 읽는 것을 보았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엥겔스가 자신의 견해에 동의해주는 것이 큰 업적이었다맑스는 엥겔스를 자랑스러워했다그는 엥겔스의 모든 도덕적이고 지적인 뛰어난 점들을 열거하는 데에 기쁨을 느꼈다그는 지식의 다재다능함을 존경했고어떤 조그마한 나쁜 일이라도 그에게 생길까 경계했다.”(8)

 

저속한 유물론자의 저속한 비판

 

콜레티는 슈미츠와 페처(Fetscher)(9)와 마찬가지로 엥겔스가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하려 할 때그가 반대하고자 했던 매우 저속한 유물론의 저주 아래쓸모없고 부정적인 작업에 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간단하게이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맑스의 인식론적(gnoseological)(10), 사회정치적 위대한 성취는 인간 존재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변형하는 기능 외 지식은 없다이러한 혁명적 통찰 – 과거의 모든 철학에 비해 목적방법그리고 사상에 있어서 우월한 에 도달했으면서 어째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철학으로 회귀하여 되돌아가야 하는가?

 

그러나자세히 들여다보면이러한 의견은 이론적으로그리고 역사적으로 오해임이 밝혀진다그것은 청년 맑스가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비판을 공식화한 시대와 비교하여 1850년 이후 유럽의 철학-과학적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데 실패했다몰레스홋(Moleschott) 또는 부흐너(Buchner)는 순수 철학적 입장에서 포이에르바흐보다 열등했음에도 불구하고그들의 유물론은 포이에르바흐의 본질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인본주의보다 자연과학에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있다.

 

전자는 단순히 개념에 대한 감각적인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신학을 인류학으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그들은 감각– 지성과 도덕성과 마찬가지로 을 생물학적 용어로 설명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맑스가 제기한 포이에흐바흐에 대한 반대는후자의 경우 능동적인 면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점을 간과하였으나그래도 충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왜냐하면 새로운 유물론(18세기 프랑스 유물론도 마찬가지로)의 주장은 심지어 이런 능동적인 면조차 과학적 용어로그러니까 특정한 법칙을 따르는 여러 유물론적’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단순하고 조악하다 할지라도 그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이 조악함은 주요하게 두 가지 요인의 결과이다. 1) 인간 문화도덕그리고 정치적 행동을 어떤 심사숙고 없이 생물학적 활동으로 환원시켜 버리고따라서 동물의 세계에 속한 인간 존재를 구분해주는 노동이 부여한 두 번째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2) 사회적 불평등과 부당함을 과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이해하며따라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과학자 자신들의 계급 위치와 어떻게 이것이 그들의 이론적 결과물을 조건 짓는지에 대한 어떤 분석도 누락해버린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편향적인 지적 발전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주관적 요소의 재발견으로서뿐만 아니라 유물론의 틀 안에 주어져 있음이 틀림없다이것은 자연이 영원한 순환’(여전히 몰레스홋(Moleschott)은 이 개념을 공유하지만)이라는 개념을 전복시키고역사적 확실성이란 인류에게만 존재하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다윈의 위대한 발견이 유물론의 2차 유행을 불러온 이후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진화주의는 인간 이전 자연의 존재인류의 기원과 미래의 소실에 대한 의문을 다시 제기하였다노동의 등장과 함께 하는 두 번째 본성이 확립되는 한코뮤니즘의 출현과 함께 세 번째 본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인류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어떤 점에서는 조악하고 반동적일 수 있었던 한 철학이 제기한 이러한 의문은 과학적 연구가 인류의 객관적 현실을 밝혀냄에 따라 새로운 빛을 비추었다그것은 그 자체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치료제였다.

 

19세기 중후반 이러한 사상이 등장함과 동시에퇴색한 실증주의 또한 등장했다이 실증주의는 불가지론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종교로 장난을 치진 않았다.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반응이 된 것은, 20세기 초쇠퇴 시기의 등장과 함께 유행한 관념론적 르네상스로실증주의 그 자체 내부에 이미 발아하고 있었다.(12)

 

바로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맑스주의의 이른바 우주론적 개발이 이뤄졌다그러나 이것은 엥겔스가 행했던 충동적인 지시를 보여준다기보다오히려 객관적 정치-이론적 필요를 의미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맑스주의의 두 설립자 사이의 차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라면 그것이 한 사람의 철학적 심오함과 다른 한 사람의 이른바 피상적인 이해라는 식의 손쉬운 비교가 아니라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강제한 한계의 산물인 노동의 분업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이 시기 당시의 문화와 논쟁하는 일을 맡은 것은 엥겔스였고맑스는 그동안 그의 모든 에너지를 단 하나의그의 위대한 작품자본에 쏟았다.

 

자연과학에 대한 엥겔스의 저작을 단순히 헤겔의 자연 철학의 진부한 반복이나 저속한 유물론에의 부분적 항복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러한 저작의 근본적인 특징실증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에 반대하는 논쟁이라는 특징을 간과하는 것이다이러한 부정적 특징은 한 편에서 가 능한 한 생각(사고)을 금지하는 실증주의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고또 다른 한 편에서는 독일의 저속한 유물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 이론을 사회에그리고 사회 개혁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3) 엥겔스가 헤겔주의 변증법의 이름으로 진정한 유물론’, 다시 말해 오늘날의 근대적인 과학을 형이상학의 한 형태로 거부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콜레티가 지적한 대로헤겔주의 변증법은 머리로 물구나무선’ 것이거나 신비주의의 껍질로부터 추출한 것으로서저속한 유물론이나 불가지론적 실증주의(경험주의)의 단점을 수정하는데 부적절한 도구라는 것이 진실이다그러나 헤겔주의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거부를그것을 인문과학에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유효하게 사용한 맑스와 자연과학에 잘못 적용한 엥겔스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헤겔과 관련해서는맑스와 엥겔스는 둘 모두 근본적인 지점에서 동의했다둘은 변증법의 유물론적 재해석을 위해서는 1) 객관적인 존재가 있는 법칙이나 법칙들로 취급되어야 하며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가 오직 현상적으로 투영될 뿐인 사상의 법칙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2) 현실에서 이러한 법칙들의 존재는 실증 방법을 통해미리 생각하고 있는 법칙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실재를 위반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정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납득하고 있었다그들에게 있어 어려웠던 점은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두 번째 작업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할 것이냐에 있었다.

 

보기를 들어 맑스의 글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부정의 부정과 같이변증법의 사용이 더 날카롭게 묘사된다면역사-인문학 내에서 기원한 논리적인 절차들의 사용을 자연과학에 적용할 때 보다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는 사실로 아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까지 자연 과학이그리고 여전히 자연과학은 과학적 정확성의 길을 따라 진보했고양적 용어로 공식화되지 않은 불만족스러운 특징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졌다맑스가 스스로 자연의 변증법이란 생각에 전혀 적대적이지 않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는 점은 언급해 두어야겠다그는 자본」 1, ‘잉여 가치의 비율과 양’ 챕터 주석에서 작은 예시를 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그가 언급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납득했다:

 

헤겔의 발견 –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전환된다는 법칙 – 은 역사와 자연과학에서 유사하게 옳다.”

 

이런 언급은 맑스가 변증법을 잠깐 건드려 보았을’ 뿐일 가능성을 배제하거나우리가 반()엥겔스 진영이 주장하는 바처럼 맑스가 엥겔스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스스로 허락했다고 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엥겔스와 개량주의

 

엥겔스의 기계적 유물론이 독일 사민당(SPD)와 그들 중 일부가 참여한 제인터내셔널의 주류가 된 개량주의 전략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흔한 비난이다만약 사회주의가 필연적이라면왜 혁명적 모험이라는 그 과정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가의회 다수가 되는 필연적 과정을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이것이 개량주의로 알려진 전형적인 공식화이며이는 엥겔스의 엄격한경직된 객관주의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이러한 개량주의가 엥겔스의 사상이나 전반적인 정치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선택적 인용과 왜곡의 결과이다.

 

이 암시의 씨앗은 사실 맑스가 제인터내셔널 헤이그 회의 이후 암스테르담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 제기된 주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그는 여기서보기를 들어 영국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목표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다라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이 인용에 부여된 해석의 중요성을 부과하는 것은 맑스의 파리코뮨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전제한다그는 파리코뮨에 대한 분석에서 노동자들은 반드시 국가 기계를 때려 부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이후유사한 맥락에서엥겔스를 폄하하는 이들은 자본의 첫 영어 번역판의 엥겔스가 작성한 서문에 집착하는데여기서 엥겔스는 맑스의 언급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응답한다:

 

적어도 유럽에서영국은 평화롭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필연적 사회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러나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인다:

 

(맑스)는 확실히 영국의 지배계급이 -노예 반란’ 없이 평화롭고 합법적인 혁명에 항복할 것이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따라서엥겔스가 한 언급의 전체 의미는 만약 영국의 노동계급이 평화롭게 권력을 획득한다고 할지라도그들은 혁명적 내전의 방식으로 그것을 방어해야만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엥겔스가 죽기 얼마 전 작성한 그 유명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소개 글에서 도시에서의 무장봉기의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판단과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의 선거 승리에 긍정적 가치를 표현함으로써개량주의의 등장을 사주했다는 것이 가능한가?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이것은 엥겔스를 개량주의의 죄악에 연루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편의적으로 빠뜨리는 것인데엥겔스의 소개 글은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승인을 받기 위해 다양한 결정적인 측면에서 검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엥겔스는 이 문구를 그의 주장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했는데, 1895년 4월 3일 라파르그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리프크네히트는 저를 속였습니다그는 프랑스 1848-50년에 대한 맑스의 글을 소개한 나의 글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롭고 반()폭력적인 전략을 지지하는 그의 목적에 맞는 것들만 추출하였습니다그러나 저는 이 전략이 오직 오늘날 독일만을 위한 전략이며그것조차 많은 유보사항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사한 맥락에서카우츠키에게 보낸 혹독한 항의 서한에서그리고 SPD의 기관지 새 시대(Neue Zeit)의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놀랍게도전진(Vorwarts)에서 나의 소개글 일부가내가 모르는 상태로나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사랑하는 합법의 숭배자로 보이도록 편집되어 인용된 것을 보았습니다새 시대(Neue Zeit)에서는 전체 글을 모두 실어준다면이러한 매우 수치스러운 인상이 일소될 것입니다.”

 

혐의와는 반대로소개글은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권력 쟁취의 목표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부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오히려그 목적은 합법적 환경에서 당의 성장이며부르주아지가 스스로 평화로운 타협의 영역을 포기할 때필연적인 마지막 결전의 순간이 왔을 때보다 강력한 힘을 갖춘 상황에서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론적 생산의 조건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은 보편적인 과학적 개념과 사상의 생산 조건에 의존한다이 조건은 다시 보편적인 생산 조건에 연결된다생산양식은 과학이 이론적으로 정교화하는데 실질적으로 적용될 뿐만 아니라사상과 과학이 정교화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이 생산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극단적인 전문화를 강요하는 것처럼사상의 형성특히 과학의 영역에서도 역시 노동의 분업을 심화시키는 극단적인 전문화를 강요한다.

 

지배계급은 과학의 영역에서 착취의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통합을 이뤄낼 수 있다하지만 이를 건드리자마자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왜곡한다사실 통합은 그들의 혁명적 비평을 위한 필수적인 출발 지점이다따라서 노동자 운동에서의 지식의 발전은 자기 자신의 과학의 이론적 발전을 엥겔스의 자연 철학과의 대립을 위한 동기와 출발 지점으로 보는 것을 포함한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의 레닌과 마찬가지로엥겔스는 그가 전혀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문제에 대해 다뤄야만 했다더욱이 맑스 사후엥겔스는 자본을 편집하고 출간해야 하는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고그가 직면한 보다 큰 정치적 조직적 책무들을 수행하고 남은 가끔의 시간 동안 그 일을 해야만 했다-뒤링의 제2판 서문은 그가 자연변증법을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과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런데도 자연과학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철학에 대립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엥겔스 또는 레닌이 이러저러한 이론적 오류를 저질렀는지가끔 그들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거나 과거의 부르주아 유물론과 유사한 철학적 견해에 빠졌는지 여부는 그들을 평가하는데 필수적인 기준이 아니다그것은 그들의 일반적인 활동계급투쟁에 대한 고발과 관련하여 그들의 정치적 지향에 대한 판단 기준일 것이다중요한 지점은 어떻게그리고 왜 그들이 맑스의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실천 영역에 스스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적 발전을 보다 전반적인 이해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사회 혁명 – 모든 진정한 진보의 기반 의 실천적인 실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이것이 엥겔스와 레닌의 실천에서의 추동 원칙이었다.

 

노동자 운동은 자본주의 내에서 그 독특한 혁명적 존재다시 말해 그 투쟁을 통해 확인된다결과적으로 그 지식의 발전은 이중적인 측면이 있는데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해방으로 가는 진척 상황에 달려있다한 편에서 그것은 정치적이며즉각적이고 뜨거운 이슈들을 포함한다또 다른 한 편에서 그것은 이론적이며 과학적인데좀더 천천히그리고 지금까지는 주요하게 계급투쟁의 퇴조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진화하는 측면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작업의 차이는 강령에 제기되고그 이후에 실천 적용에서 제기되며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제기된다이러한 차이의 진화는 사회의 보편적인 진화계급의 진화투쟁의 방식이데올로기이론과 정치적 실천을 반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수하게 철학적 영역에서의 과학적 변증법은 실천적정치적 계급투쟁의 즉각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계급투쟁의 변증법은 더욱 거리가 멀고간헐적이며지역 사회 또는 보다 넓은 사회적 환경과 명백한 연결이 없다이는 봉건제도 말기와 자본주의 초기의 자연과학 발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식의 더 많은 영역이 실천적 적용에 즉각적으로 연결될수록그 진행 상황을 알아채기 쉽다다른 한 편더 폭넓은 통합을 시도할수록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진다왜냐하면 그러한 통합은 엄청난 복잡성의 법칙에 의존하고매우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결국 오늘날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그런 연구들에 씨름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글은 오직 그런 노력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하나의 기여에 불과하다코뮤니스트 좌파 전통이 영국에서 부활한 많은 부분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고고학의 정지작업과 맑스주의 경제 이론 기초의 재()서술 덕분이다노동자 운동 역사상 가장 긴 반()혁명에 직면하여맑스주의의 목소리가 소멸한 것과 다름없는 곳에서, 20년 이상 동지들의 가장 큰 에너지를 소모한 것이 이 필수적인 책무였다.

 

이러한 실천적-정치적 요구사항들이 압박하는 맥락에서우리가 다른 문제들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반복해서 나타나는, ‘서유럽 맑스주의가 철학적문화적 분석들 주변을 회전하는 상황에서우리는 우리의 관심을앞으로 이 저널에서 출간된 글 속에 담길 몇몇 문제들에 쏟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주장해 왔듯이()엥겔스주의는 본질적으로 관념론의 독특한 변종이다그 기원은 한 세기의 초반 등장했던 신-관념론극단적 반-객관주의를 포함한 변형에서 찾을 수 있다그 시작은 과학의 인식론에 있는 실제심각한 문제였으나이 위기가 등장한 관련 역사적 맥락에서 신비주의적 자유와 인간의 창의성새로운 주관주의-자발주의와 같은실제 인간 존재가 속해 있는 진짜 조건을 무시하는 사상들에 대한 재주장에 이용되었다.

 

비록 엥겔스가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주어진 해답을 제공한 것은 아님에도이러한 이론적 질문들을 직면하는 데 있어서 매우 많은 중요한 방법으로 우리의 정치적 기원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그는 우리의 출발 지점이다.

 

A.S.

 

 

<>

 

(1) 리히트하임, p.238

(2) 같은 책, p.253

(3) 슈미트, p.55

(4) 같은 책

(5) 루소에서 레닌까지(From Rousseau to Lenin), p.26

(6) 카버(Carver), 맑스와 엥겔스지적 관계(Marx and Engels: The Intellectual Relationship)

(7) 르빈(Levine), 비극적 속임수맑스와 엥겔스의 대립(The tragic Deception: Marx contra Engels)

(8) 맑스와 엥겔스서신집(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9) 어빙 페처(Irving Fetscher), 맑스와 맑시즘(Marx and Marxism)

(10) 다시 말해지식 철학에의 기여로서(편집자 주)

(11) 몰레스홋(1822-93): 독일 생리학자이자 철학자유몰론과 헤겔주의 관념론을 배치함.

(12) 세바스티아노 팀파나로(Sebastiano Timpanaro), 유물론에 대해(On materialsim)

(13) 자연의 유물론(The Dialectics of Nature), p.153, p.85

 

2020년 11월 28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photo_2021-01-10_14-14-28.jpg

 

<원문 출처>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11-28/200-years-on-engels-and-his-revolutionary-contribution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코뮤니즘 세상에서… 누가 농업에 종사할 것인가?

코뮤니즘 세상에서

누가 농업에 종사할 것인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우리는

파인애플오렌지또는 커피를 먹지 않을까?

 

  photo_2021-01-06_13-04-52.jpg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은 코뮤니즘 아래에서의 농업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물었다늘 그렇듯이코뮤니스트 사회는 예상된 강요되는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개방될 사회적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하지만우리는 이미 진행 중인 추세를 읽을 수 있고 코뮤니스트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리즈에서 그것들을 탐구할 수 있다.

 

코뮤니즘 아래에서 누가 수확을 할 것인가모두를 위한 커피파인애플아보카도가 있을까자연은 어떻게 될까?

 

코뮤니즘에서는…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누가 수확할 것인가게다가만약 생산과 운송이 환경을 훼손한다면모든 것이 현지 생산이 될 것인가우리는 오렌지커피 또는 아보카도를 먹지 않을 것인가그리고 우리가 파인애플을 먹는다면코뮤니즘 역시 자연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농업의 모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보기를 들어 예술 작품이나 약품산업 상품에 대해 생각할 때보다 농업에 대해 생각할 때 코뮤니스트 사회에 내재한 풍요를 상상하는 것이 왜 더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자본주의 농업은 다른 부문보다 더 악명 높은 노동 조건을 낳고자연환경과 잔인한 모순을 일으키며지구촌의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식량을 대량으로 버리게 되어 결국에는 빈곤하게 만드는 역기능 식량 시스템을 생산하게 된다최근 마 메노(Mar Menor)나 브라질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 볼 수 있듯이 필요한 물을 오염시키면서 사용하는 바로 그 땅을 살균하는 시점까지...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지난 2년은 오늘날 자본주의 농업의 모순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우리는 (산업과 서비스보다영세 농민들의 열악한 자본 조달 능력이어떻게 농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게 하는지 봐왔다이는 집중에 저항하는 특징적인 방법이다.

 

감염병이 돌기도 전에 우리는 그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다이후 이어진 봉쇄는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축적의 논리)에 맞서 영세업자를 필연적으로 몰아붙이는 똑같은 힘이 어떻게 점점 더 낭비되고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 시스템으로 이어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과일특히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세계 반 바퀴를 돌아다니는 과일들에 대해 생각해보면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상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견딜 수 없는 노동 조건비참함그리고 거대한 자연 보호 구역을 파괴하고 있는 농장들.

 

이 모든 것은 19세기 말최초의 제국주의 팽창 속에서 운송과 냉장의 기술적 진보로 영국프랑스미국에서 신선한 과일을 위한 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시작되었다오란(Oran)과 자파(Jaffa)의 오렌지색 숲이나 코트디부아르와 과테말라의 파인애플은 차코코아커피가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 큰 물류 상의 문제를 일으켰지만그들은 자신을 강하게 이식했다세계 시장을 완성한 자본주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가 면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던 것처럼 보편적인 식단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분명한 진보의 요소를 보여주었다그리고 재결합한 인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은 곧 점점 더 눈에 띄는 모순을 보여주었다.

 

재배경제는 유럽 농촌의 사회관계 파괴가 공장 노동자계급과 안정적인 농업 프롤레타리아를 만든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를 대량으로 형성시키지 않았다목화코코아담배와 같은 과일나무 자체가 문제였다한편으로는 도시 노동자계급을 저렴한 비용으로 먹여 살리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수출용 사치품이었으며한편으로는 1년에 한 번 또는 많아야 두 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뿐이었다.

결과 과일 재배(그리고 수출을 위한 다른 식민지 농장)가 주요 농업 활동이 된 나라와 지역에서는산업 자본이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충분하지 않아 도시에서 번창하지 못했고대부분 먹고 살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영구적인 잉여 노동력이 고정적으로 이루어졌고그 결과 고용주들은 약간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이 자동화에 내기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과일 과수원이나 사탕수수를 생각할 때우리는 여전히 두 가지 -노동과 불행에 대한 무거운 계절적 요구를생각한다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우리가 묘사한 메커니즘은 19세기 중반에 노예제도를 보존하기 위해 미국 남부의 대규모 토지 소유자들과 그리고 영국 산업 섬유 부르주아지들인 그들의 동맹들몰아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육체노동의 노동자로서 산업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유로운 노동자로서 인정을 받았더라면 그들을 노동자로 예속시켜서 비참한 임금을 지불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이후에도 진정으로 통일된 노동시장이 임금을 인상했을 것이므로 강제노동을 대대적으로 이용했다민주당이 조직하는 전체의 이념적억압적심지어 인종차별적 토지이용 계획기구는 포로가 되고 자유로운 예비 노동자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기능이 없었다.

 

오늘날 코뮤니즘 아래에서 면화 의류의 존재를 생각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면1차 세계대전과 세계 자본주의 위기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구조조정과 자본 집중으로 인해 미국 면화농업 부르주아지가 자동화를 시작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의 생산력의 발전 자동화와 사회화

 

자본주의가 과수원 경작을 자동화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반역사적 성격의 또 다른 징후일 뿐이다불가능하지는 않다.

 

사실 이미 오늘날에는 빅데이터의 형태로 시스템이 허용하는 생산 사회화의 아주 최소한의 표현과 생산적인 처리즉 이른바 인공지능이 과일 작물의 효과적인 자동화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해충 방제를 통해 많은 경우에 살충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아주 섬세한 커피 덤불조차도 로봇으로 수확하게 되면 덜 손상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전 세계적으로 존재할 것이며 자연과 공통된 신진대사를 형성할 것이며그 물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태적 재앙과 그린딜(Green Deal)의 논쟁적인 함정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어떤 독자들은 이 논쟁에 대해서 우리에게 장황하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맞다코뮤니즘에서는 생산력의 해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파괴적이지 않은 농업과 동물을 사육하는 모든 사람에게 풍부하고 건강한 음식을 생산하도록 만들 것이고그리고 사실상 노동 시간의 비용도 들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은 지역 농업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그들이 지금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여행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코뮤니스트 사회는 지역 공동체와 근거리 농업의 사회가 될 것이며대규모 운송 시스템을 이용하여 수용할 수 없는 생태적 비용을 동반하는 과일을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운반하게 할 것이다.

 

실제로 코뮤니스트 사회의 국제적인 성격이 출발점이다사회주의는 단일 국가에서는 불가능하다그리고 임금 노동과 희소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수준에만 존재하고 정확히 자본주의의 주요 유산인 생산력이 필요하기에 단일 국가에서는 그보다 가능한 것이 많지 않다그리고 주요한 생산력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체이다그것 없이는진정한 인간 사회보편적인 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제적인 생산의 본질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그리고 이것이 국제적이고 파괴적이지 않은 물류 및 교통 능력을 암시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미 이것을 가능하게 할 기술을 발전시켰다.

 

2년 후 노르웨이에서 최초의 전기 화물선 노선이 개통될 것이다이 선박은 완전히 자동화된 과정 내에서 로봇으로 구현되는 300개의 표준 컨테이너(평균 중량 14t)의 적재 용량을 갖춘 선박으로보관 및 비보관 시에 사람의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 없다이것은 크기가 가장 작은 컨테이너선인 공인된 공급자 유형의 해안 선박이다하지만 더 큰 톤수나 대양 횡단 설계와 비슷한 선박을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실수소나 배터리로 움직이는 엔진과 이를 위해 설계된 견고한 돛을 결합한 선박들이 이미 생산 중이다.

 

스웨덴의 해운회사인 월레니우스 마린사(Wallenius Marine)는 스웨덴과 미국을 오가는 이 배 중 하나와 함께 한번 운송할 때마다 7,000대의 자동차를 실을 것으로 예상한다.

 

코뮤니즘 아래에서

 

우리는 코뮤니즘 아래에서 사용될 모든 기술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게다가오늘날 존재한다고 해도우리가 이러한 시스템을 없애지 않으면그들 중 많은 것들이 사용되거나 개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발명과 기술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생산의 자동화와 사회화의 조건을 만들어냈고보편적인 인간의 필요 때문에 이끌려온 자연환경을 되돌릴 수 없이 파괴하지 않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뮤니즘에서는 단단한 돛을 사용할지수소로 움직이는 배배터리태양 전지판 등을 사용할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코뮤니스트 사회가 종족의 노동과 지식의 열매를 인간의 필요에 대한 보편적인 만족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맞다코뮤니즘에서 우리는 아마도 망고와 파인애플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착취 없이 그것을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 그것은 가능하다 – 또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 오늘날에도 가능하겠지만 – 사회는 더는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다른 시대에는 매우 훌륭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맛이 없거나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 더는 먹지 않는 것처럼.

 

2021년 2월 28

해방

 

<원문 출처>

https://en.communia.blog/under-communism-agriculture-communist-society/

 

  photo_2021-01-06_12-49-23.jpg

 

<관련 글>

 

 

 

코뮤니즘 세상에서... 도시와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47

 

 

 

코뮤니즘 세상에서... 힘든 일을 누가 할 것인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563

 

 

 

코뮤니즘 세상에서... 예술, 공예/장인, 전통 작품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9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4호]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의 역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의 역설

 

photo_2021-01-12_00-17-07.jpg

 

들어가며

 

내년에 치러지는 부르주아 선거와 맞물려 한국 사회는 때아닌 공정 담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1) 공정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능력주의를 전제로 진행되고 있다공정한경쟁을 통해 능력을 갖춘 사람을 사회의 모든 요소에 선발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물적 토대인 생산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개인의 능력은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게다가 가족을 경제단위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가족 배경이 능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또한노동력이 상품으로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능력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관점에 따라 좌우된다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순수한 개인의 능력은 환상에 불과하고이러한 능력주의를 전제로 한 공정은 계급지배의 통치 수단이다.

 

공정 담론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는 수단이 될 수 있다자본주의에서 형식적 공정은 실질적 불평등을 은폐시킨다역설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에 정의공정 담론이 주장되고 있다그래서 자본주의는 정의공정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는 생산양식이다이렇게 정의공정이 있어야 하는 계급사회에서 공정은 실현될 수 없는 허구이자 환상에 불과하지만부르주아는 공정능력주의 담론을 유행시키고 있다이것은 경제 위기와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함이다.

 

능력주의의 역할

 

노동계급 분열

 

공정의 핵심 전제인 능력주의는 봉건귀족에 대항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였다또한무산자계급에 대한 차별과 배제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원시적 자본 축적기부터 자본주의가 세계적 지배 질서가 된 이후에도 자본은 능력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막고 분열을 획책했다이에 포섭된 노동계급 일부는 능력주의 신분 상승 대열에 개별적으로 합류하는 데서 전망을 찾으면서 불평등 사회를 인정했다한국의 주류 노동조합운동도 능력주의에 편승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그러면서 노노 갈등은 증가하였다그 흐름은 노동운동의 역할을 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당면 생존권에 대한 협소한 방어로 제한했다.

 

노동계급 일부의 능력주의로의 편승은 노동자 자기해방에 대한 전망 부재를 스스로 폭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이런 상황은 미래 노동계급에 능력 중심의 불평등 사회를 지양하기보다는 더욱더 능력과 공정에 집착하도록 하였다전망의 부재는 한편으로는 불평등 완화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기대로 나타나기도 했고한편에서는 공정성 시비로 적법한 노동권마저도 빼앗고 있다올여름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의 직고용 요구를 내건 재파업에 대한 취업준비생건보공단의 정규직에 의한 '공정성논란이 대표적 사례이다이렇게 능력주의에 갇히는 순간 노동운동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체제를 인정하게 된다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과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노동운동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라지고 형식적 공정성과 실질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탄압하는 자본주의 신봉자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모순 은폐와 왜곡

 

자본주의에서 불평등과 노동자 민중의 생활에 필요한 자원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이윤을 목적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생산의 사회화가 커다란 발전을 이룩했지만이윤의 사유화는 코로나19 백신전쟁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류 생존에도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2)

 

자원의 불평등 분배는 이렇듯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에서 유래한다하지만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이 부족한 개인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시킨다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수한 개인의 능력주의는 환상이며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한 왜곡된 시각이다따라서 능력주의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노동계급에 초등학교부터 취업 이후까지 학업/취업/임금인상/승진 경쟁을 요구한다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에 부합하도록 노동자를 재창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능력주의에서 패자에게는 결과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사회 부적응자로서 온갖 차별에 노출되고 적법한 요구마저도 무시된다그래서 능력주의는 인종주의엘리트주의평가주의성과주의 등 차별의 여러 형태와 같은 패러다임을 가진다하지만 부르주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란 부와 권력에 대한 세습이 가장 중요할 뿐실수로 거액을 날려도 그들의 태생적인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능력주의는 계급마다 다르게 적용되며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자본가계급에는 공정을 초월한 정의이지만노동계급에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다.3)

 

불평등 사회 은폐 대장동 게이트계급 간 착취!

 

능력주의는 자본이 요구하는 기술도 지식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을 정리처분폐기도태시키는 명분이며차별과 혐오의 근거이자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다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능력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간 모순은 부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이러한 상황에서 공정한 경쟁은 더욱 실현되기 어렵다작년의 조국 사태최근의 화천대유 사건을 비롯하여 지배계급의 부동산 투기 의혹학력 위조 등 수많은 편법과 불법은 이 사회가 형식적으로도 공정한 경쟁을 지키지 않는 사회임을 증명하고 있다장기간의 경제 위기는 노동계급에는 착취의 강도 증가로 나타나지만자본에는 이윤의 증가로 나타난다공정과 능력은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배경 속에서 착취를 합리화시키고사회구조적 불평등이 격화될수록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최근 논란이 된 대장동 게이트가 대표적 사례이다.

 

부르주아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의힘 게이트’, ‘검언정 게이트’, ‘이재명 게이트라고 불리는 대장동 게이트의 본질은 자본검사언론정치인 등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개발이익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대중을 착취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은 사건이다지배계급은 자신이 만든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법망을 빠졌나갔고 필요하다면 관련 법규를 수정보완까지 하였다이것은 적법이라는 명목하의 자본주의적 방식의 이윤 착취이다이런 점에서 대장동 게이트는 지배계급의 부패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간 착취이다이처럼 능력주의는 지배계급에 의한 개발 의혹이 비리나 부정으로 인식되는 것을 방어하는 이데올로기이다그럼으로써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시키는 요인이다.

 

능력주의 비판 한계 경쟁을 넘어 코뮤니즘을 향한 연대로

 

지금까지 능력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공정에 기준을 두고 조건과정에 대한 평가였다또한 능력주의가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며능력이 세습되는 시대에는 능력주의 자체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등장한다하지만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을 공정의 기준능력주의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한 결과이다그래서 비판의 결론은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능력주의를 다시 계급 상승의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정의공정능력주의는 언제나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힘이다계급 단결로 노동력이 상품이 되지 않는 사회생산수단이 사회화된 사회가치법칙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코뮤니즘 사회로 나아가야 비로소 노동계급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정의공정능력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더는 필요 없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사유재산과 착취계급 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 국가적 경계와 분할은 사라지고 인간의 보편적 정체성과 창조성이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코뮤니스트 사회’,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자원 희소성자원의 불평등 분배의 원인이었다자본주의 고유의 모순을 감추고 노동계급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서 공정 담론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켰다하지만 노동계급에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는 결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오로지 계급의 단결과 연대로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해야 억압과 모순을 뿌리 뽑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가장 큰 능력은 야만과 착취의 낡은 사회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집단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이다반대로 지배계급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은 노동계급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단결과 연대라는 진정한 능력을 빼앗아가는 반동 이데올로기이다현장에서부터일상에서부터 자본주의적 경쟁능력주의공정 논리에 맞서 코뮤니즘의 전망으로 투쟁하자!!!

 

2021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

 

1) 정의공정 담론은 자본주의가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다때로는 구질서(봉건 질서)에 대항하기 위해서때로는 노동계급을 분할 통치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정능력주의 담론이 이슈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쇠퇴기 경제 위기의 장기화에 따른 부의 불평등한 경제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2) ‘()코로나19 백신보건은 단지 자본주의의 상품이다.’(코뮤니스트」 13국제코뮤니스트흐름)

 

3) 최근의 화천대유’ 사건과 관련해서 곽상도 아들의 퇴직금 50억은 큰 논란이 되었다그는 부동산에 집중해서 열심히 일한 대가를 얻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하지만 50억은 곽상도의 뇌물 의혹으로 이어지며 수사대상에 올랐다뇌물이든 부동산 분야 일을 열심히 했든지 간에 이것이 부르주아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었던 공정이고 능력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크론슈타트 봉기; 반혁명 100년

크론슈타트 봉기반혁명 100

 

1919-01-01-kronstadt.jpg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러시아 해군기지 크론슈타트 봉기만큼그 이후의 세월 동안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엄청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많은 신화로 이어진 사건은 많이 없었다한 세기의 거리를 두고서우리는 그 사건이 얼마나 비극이었으며유의미한 사건이었는지 평가할 수 있다.

 

봉기는 1921년 3월 2핀란드만 코틀린섬 해군기지에 정박한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키의 선상에서 시작했다크론슈타트 선원군인노동자들은 절대 어떤 한 편을 지지하지 않았었고다른 소비에트(평의회)가 단순한 관리 기관으로 축소된 데 비해 그곳의 소비에트는 생생한 논쟁의 중심으로 남아있었다크론슈타트 사람들은 (1917년 7월처럼언제나 계급 봉기의 전위에 있었다그러나식량 부족에 항의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위한 페테르스부르크의 파업 소식을 접했을 때그들은 페트로파블롭스키 혁명 15항을 지지하기로 했다이는 1만 6천명의 선원과 노동자들이 모인 앵커 광장(Anchor Square)에서의 대중집회에서 채택되었고봉기의 강령이 되었다코뮤니스트당원(볼셰비키) 1,400명 중 900명이 이를 지지했다지지하지 않은 300명은 수감되었다크론슈타트 사람들은 유혈 사태를 바라지 않았으나모든 협상 시도는 실패했는데이는 부분적으로는 러시아 다른 지역의 지지를 기대했기 때문이었고또 부분적으로는 정부가 가장 큰 존재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론슈타트는 하나뿐인 사건이 아니었다체카 정보원에 따르면 안토노프(Antonov)가 이끈 2만명 이상의 탐보프(Tambov) 반란을 포함하여 이미 진행 중인 개별적 봉기들이 118건에 달했다정부는 유혈 내전 사태로부터 여전히 회복하는 중이었다정부는 핀란드만의 얼음이 녹고크론슈타트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활한 제국주의의 개입에 기지가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모든 풀뿌리의 반대에는 충분한 실질적정치적 이유가 있었다러시아가 직면한 기근이 그 원인 중 하나였다. 1920~1921년 겨울페테르스부르크에 여전히 남아있는 노동자들은 끔찍한 연료 부족으로 동사하고 있었고이미 부족했던 배급조차 1/3이 감소했다빅터 세르주(Victor Serge)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도시인들에게 겨울은 고문(이를 대체할 다른 단어는 없다)이었다난방도 안 되고불빛도 없었으며오직 기근의 황폐함 뿐이었다아이들과 연약한 노인들은 수천씩 사망했다온갖 티푸스가 전염되어 끔찍한 피해를 줬다사람들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귀리죽이나 반쯤 썩은 말고기로 식사를 했고한 덩이의 설탕이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 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세르주혁명의 기억)

 

평균 수명은 약 20년 감소했다미국 아나키스트 역사가 폴 아브리치(Paul Avrich)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추위와 배고픔에 몰려사람들은 기계를 포기하고 여러 날에 걸쳐 나무를 모으고 음식을 찾기 위해 근방을 돌아다녔다걸어서 여행하는 와중에또는 사람들로 붐비는 철도 차량 속에서 그들은 어떤 것이 되었든 음식과 교환하기 위해 자신의 사적 소유물과 공장으로부터 도둑질한 물건들을 지고 다녔다.”

(아브리치크론슈타트 1921)

 

그러나 여기에서조차거래를 독점화하는 정부에 반대했다.

 

정부는 이러한 불법적 거래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다무장한 독전대(zagraditel’nye otriady)가 도시로의 접근을 막고 투기자들이 빼돌리려는 귀중한 음식물들을 몰수하기 위해 배치되었다이 독전대의 잔인함은 전국적으로 유명했고그들의 제멋대로의 조치들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의 인민위원회를 덮쳤다.”

(아브리치크론슈타트 1921)

 

소비에트의 새로운 선거를 위한 요구는 내전에서의 축소에 기인했다. 10월 혁명 직후전과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소비에트가 러시아에서 건설되었다. 1918년 초반그들은 생생한 토론의 현장 – 노동계급의 정치적 삶이 얼마나 활력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 – 이었다. 1918년 7월 이전 혁명의 신혼기에는 3개월마다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그러나 그 이후그것은 매년 주기가 되었다이에 더해 그 구성원들이 적군과 관료로 점점 더 많이 선발됨에 따라그들은 종종 성장하는 당-국가의 무기가 되었다전쟁 경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 있었으나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혁명에는 치명적이었다소비에트의 규칙은 점차 더욱 지배력을 키워가던 당 아래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코뮤니즘 ABC)로 점차 대체되었다. 1919년 중반레닌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소비에트는 그 강령에서는 노동계급이 이끄는 정부의 기관이었으나사실 노동 인민 전체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지도하는노동 인민을 위한 정부의 조직이었다.”

(레닌당 강령에 대한 보고서, 1919년 3월 19)

 

하먼(Harman)과 클리프(Cliff) 같은 트로츠키주의 옹호자들이 러시아노동자들의 국가에서 국가 자본주의로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페트로파블롭스키 결의안은 코뮤니스트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하지 않았다그것이 진짜 요구한 것은 즉각적인 소비에트 새 선거아나키스트와 좌익 사회주의자 당을 위한 발언의 자유평등한 배급이었다또한 농민에게 노동을 고용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동의 자유를 줄 것을 제안했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특별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그들은 곡물의 자유로운 거래와 다가오는 기근에 대비하여 독전대의 해산을 요구했다트로츠키 자신도 그보다 한 해 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제안했었다여러 트로츠키주의자의 주장처럼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계급 구성이 1917년에서 1921년 사이 변화했다는 것 또한 역시 진실이 아니다. 1917년 농민 출신이었던 선원 대부분은 1921년에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식량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 준 것은 크리스마스 동안 마을에서 가족과 접촉한 사건이었다징발을 그만두라는 요구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상황이 있었다그들이 몰랐던 것은 레닌이 이전 11월 이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10차 전당대회에서이후에 페테스부르크 기조연설로 발표할 신경제정책’(NEP)의 일부로 바로 정확히 그것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진압

 

3월 8핀란드만의 얼음을 건넌 첫 번째 기지 공격은 실패였다많은 군대가 크론슈타트로 탈주했다체카 부대적군 장교 후보생(курсанты)과 10차 당대회의 300명 이상의 대표들로 새로운 군대가 만들어졌다. 3월 16투하쳅스키(Tukhachevsky)는 2번째 공격을 감행했고, 3월 18전체 도시를 재점령했다적어도 700명 이상(그중에는 15명의 볼셰비키당의 대표들도 있었다)의 공격군이 크론슈타트의 총격에 사망했고, 1,500명의 방어군이 사망하고 2,500명은 포로로 잡혔다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후에 체카가 총살한다.

 

크론슈타트 함락 며칠이 지나지 않아 레닌이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그 주요 항목은 크론슈타트 사람들이 요구했었던 곡물 거래에 대한 자유 시장의 복원이었다농민들은 이제 괴롭힘에 시달리지 않고 합법적으로 그들의 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었고 일종의 세금을 지불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는 당시 수백만의 사람들을 사망케 한 1921년 기근을 생각했을 때 너무 늦은 조치였다이윽고 그 조치는 실제 곡물 생산량의 회복과 정권 안정화로 이어졌다레닌이 인정한 것처럼 한 걸음 후퇴였으나, 80%가 농민이며전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고세계 혁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국가가 그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독일 3월 봉기(March Action)의 패배는 레닌이 코뮤니스트 정부가 10년은 버텨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도록 했다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레닌은 국가 자본주의로 후퇴가 단순한 현상 유지 정책이 되길 희망했다.

 

크론슈타트 봉기는 혁명을 쇄신’(세르지)하기 위한 실패한 시도를 상징한다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만약 크론슈타트 사람들이 승리했다 한들고립된 러시아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가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명확한 교훈

 

고립된 어떤 노동계급의 전초 기지도 사회주의 건설의 책무를 완수할 수 없으며상대적으로 노동계급의 비율이 낮은 나라에서는 특히 그러하다혁명은 세계적이어야 한다긍정적으로 보자면크론슈타트의 그 파괴적인 경험조차도소비에트가 역사적으로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임을 확인해주었다소비에트는 그 자체로 계급 대중을 다른 사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역량이 있다이것은 단순히 당에 의해 이뤄질 수 없다자본주의를 압도하는 데 있어 계급의 단결을 위한 국제적인 정치 조직이 필수적이다그 구성원은 확산하는 세계 혁명에 가장 열정적일 것이다그러나 인터내셔널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이에 대해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당은 1952년 강령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그 어떤 시점에도그 어떤 이유로도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다른 이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며누구에게도심지어 그 정당에도 권력을 그저 줘버리지 않는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당」 정치강령, 1952)

 

보다 깊이가 있는 분석은 곧 출간할 우리의 책, 1917~1923년 러시아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3월 1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1921kron.jpg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3-01/the-kronstadt-revolt-one-hundred-years-of-counter-revolution

 

<관련 글>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 빅토르 세르주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490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500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584

 

 

1921년 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봉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589

 

 

크론슈타트가 남긴 역사적 교훈들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59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크론슈타트가 남긴 역사적 교훈들

크론슈타트가 남긴 역사적 교훈들

 

 Anarchy second series Second Cover.png

 

최근에 국제주의 <시카고 혁명가 네트워크>(이하 CHIREVNET)에서부터 1921 3월 러시아 크론슈타트의 수병들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라는 팸플릿 하나를 받았다우선 우리는 팸플릿 작가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그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이 있는 사건을 검토하고 있다그 사건의 교훈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이다이 팸플릿은 최근에 영어로 번역된 우리의 책 네덜란드독일 코뮤니스트 좌파를 인용하고 있다이 책은 크론슈타트 봉기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하는 혁명운동의 역사에 관한 저작이다그러나 CHIREVNET의 팸플릿은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가 볼셰비키가 반란을 진압한 것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여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한다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이 팸플릿은 우리의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고오해하고 있으며 잘못 표현하고 있다수년 동안, ICC는 계속해서 날카롭게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무력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며 잘못된 시각을 방어하는 정치 그룹들을 비판해왔다그 비판들은 아래 글이나 국제평론 103호와 제104호에서 두 부분으로 된 연재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의 팸플릿은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아나키스트적이고 평의회주의적인 크론슈타트에 관한 신화들과 그것에서 나온 교훈을 반영한다이것은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데 볼셰비키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그것만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가상의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에서 반당적 교훈들 역시 끌어내고 있다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혁명 정당은 아무런 필요도 없다왜냐하면이는 자본주의 선거 놀음에 참여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그것은 대자본가 지배계급에 의한 낡은 자본주의권위주의 독재즉 국가권력을 위한 욕구에 불과하다.” 이 과도하게 단순화된 반당 정치적 결론은 완전히 혁명 정당의 역할과 의식화 과정에서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당의 역할은 부르주아지가 퍼뜨리고 다니는 선거를 신비하게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욱이팸플릿의 방법론적 준거의 틀은, CHIREVNET이 자주 다른 모든 곳에서 맑스주의 변증법에 호소함에도이 사건들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유효하지 않다보기를 들어, CHIREVNET은 크론슈타트 반란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그리고 그 저자는 이점을 처음부터 인정한다크론슈타트 반란의 의미와 중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그들 나름의 목적에도 불구하고그 팸플릿은 이 사건을 역사적 전망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그런데 이는 사회정치역사적 사건들을 과학적이고 맑스주의적으로즉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이러한 기초지식의 부족 때문에 당연하게도 CHIREVNET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관하여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적 설교에 사로잡혀 있다아나키스트들의 판에 박힌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때문에 그 의미가 희석되어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과 자본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전반적인 관계에 있어서 진정한 역사적 공과(功過)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이처럼 비판적 준거의 틀이 없기에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이 단지 볼셰비키의 특정한 이론적 오류나 레닌의 ‘대리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비록 이것이 분명 중요한 요인들이기는 하지만-궁극적으로 혁명을 다른 나라로 확산하는 데 실패하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노동자 대중운동에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가 고립되었다는 맥락적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이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CHIREVNET에게 러시아 혁명의 퇴보를 낡은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로 설명하는 것은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이러한 훗날의 퇴보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권위주의적 경향 때문이다이는 본질적으로 문제를 역사상 인물들의 선악 대립으로올바른 도덕적 관점의 소유 또는 부족의 문제로 제한한다즉 이러한 이론은 결국 역사유물론에 대한 이상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거부감을 반영한다.

 

이 팸플릿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두 편의 기사를 번역하여 출판한다이 기사들은 앞서서 2001 3 ICC 프랑스 지부의 매체인 국제혁명 310호에 실렸다이 기사들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에 대한 ICC의 입장을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그리고 그 기사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타락한 제인터내셔널에서 분리한 좌익분파들에 속한 우리의 선배들이 만든러시아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적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코뮤니스트 좌파들의 정치적 입장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부디 CHIREVNET이 우리의 답변을 동지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그리고 계속해서 논쟁과 토론을 이어나가기를 바란다논쟁과 토론은 노동자 운동 내에서 정치적 명확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우리의 독자들이 투고하여 이 논쟁에 개입하고 그들 가운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확산시키기를 촉구한다이 논쟁에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의 투사들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한 <로스앤젤레스 노동자의 목소리>(이하, LAWV)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긴 문서를 발표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게 중요하다여기에서 그들이 과거 알바니아 스탈린주의의 지지자들에서 현재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에 대한 기생충 같은 공격으로 다소 정치적 입장이 변화했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이번 호와 국제주의122호를 보시오.)그것은 LAWV CHIREVNET이 이야기하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분석이 분명히 비슷함에도 불구하고두 그룹이 현재 완전히 다른 정치적 궤적을 그린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두 출판물의 기사들 모두 비슷하게 심각한 자유주의적이고 아니키스트적인 혼란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CHIREVNET의 입장은 명백히 노동자 투쟁이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치적 명확성을 찾고 있다반면 LAWV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현재 입장은 1917 10월 봉기가 일어난 직후인 1918년부터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였으며 볼셰비키는 반()혁명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그러한 주장은 지난 5년 동안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현재의 ICT)와 제휴하면서 그들이 방어했던 코뮤니스트 좌파의 역사적 입장으로부터 확실히 갑작스럽게 퇴보한 것이다.

 

우리는 LAWV가 크론슈타트에 대한 견해에서 자유주의적 정치세력 쪽으로 도약한 이유는 자유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영향받은 그룹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고 본다이 그룹들은 현재 ICC IBRP와 같은 코뮤니스트 좌파 조직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기생충 같은 캠페인을 해대고 있다. LAWV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신국제주의자의 최근호 표지로 CHIREVNET의 팸플릿 표지를 다시 사용했다더군다나 같은 제목으로 ICC를 공격하는 그 기사에서 LAWV ICC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옹호한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단언하면서그러한 옹호는 ‘우리 자신에서 권력을 부여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위에 군림하는 당-국가 독재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HIVREVNET이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 오독을 한 반면, LAWV는 뻔뻔스럽게 거짓말하고 중상모략을 저질렀다.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계급과 관련된 이슈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과거의 투쟁에서 교훈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그룹들과는 긍정적인 태도로 논쟁하고 싶다그리고 그것은 LAWV처럼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같은 분자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평형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BK.jpg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노동자 운동에서 비극적인 실수

 

1921년 3,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볼셰비키는 무력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작은 코틀린섬에 있는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년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해외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의 반혁명 책동에 맞선 내전에서 피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그런데도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반란은 이러한 반혁명 시도의 일부가 아니었다그것은 10월 혁명의 선두에 섰던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노동계급 당파의 반란이었다이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권 세력의 수많은 권력남용과 참을 수 없는 탈선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에 앞장섰다크론슈타트에 대한 유혈진압은 전반적으로 노동자 운동에 커다란 비극을 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그것은 1914~1918년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노동계급의 응답이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 도상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10월 봉기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과정의 일부였다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두둔했다봉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고립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의 진정한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난 혁명은 전()유럽과 다른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동계급의 여러 노력에도 국제적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그 자체는 기나긴 피의 내전에 의해서 찢겨나가서 경제는 황폐해졌고소비에트 권력을 떠받드는 기둥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가 제거되고점차 소비에트가 국가기구에 종속되었으며노동자 민병대가 파괴되었다내전 동안 긴장된 시기가 이어지면서 점차 사회 전반이 군사화되었고이와 함께 여러 관료적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이러한 것들 전반이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타락이 만개하여 진행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였다차츰 -국가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현재 당면한 시기에는 반혁명세력에 맞서서 군사적 투쟁을 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효율성의 원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원칙들을 훼손하기 시작했다효율성의 원칙이 지배하면서 국가는 노동의 군사화를 실시하기 시작했다그것은 감시와 극단적인 착취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복종시켰다공장위원회를 이미 약화했기 때문에 국가가 일인 관리와 테일러주의 착취 시스템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과거에 레닌은 테일러주의 시스템을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전쟁경제의 혼란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더욱 증폭되어 국가 전체를 기근의 위기에 빠뜨렸다노동자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으며그조차도 종종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많은 공업지대가 전반적으로 조업을 중단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다많은 노동자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시골에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서 함께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소비에트 국가는 주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했다왜냐하면소비에트 국가는 구()소유계급에 대항한 투쟁으로 자신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노동자미숙련공소농 등 각 부문에 따라서 내전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는 상대적이었다그러나 백군을 물리치면서많은 사람이 생활 조건이 앞으로 덜 가혹해질 것이며경제와 사회생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볼셰비키 지도부는 항상 전쟁으로 야기된 생산의 파괴에 직면하여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어떠한 조치를 하는 것도 다소 내키지 않아 했다.

 

크론슈타트 봉기

 

1920년 말탐보프주중부 볼가우크라이나서부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을 가로질러 농민봉기가 퍼져나갔다군복 입은 농민인 적군이 빠르게 무장을 해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 반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이 반란의 주요 요구는 곡물 징발 중단과 농민 스스로 자신의 생산물 처분 결정권을 갖게 하라는 것이었다. 1921년 초반란의 기운은 10월 봉기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크론슈타트 등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자발적인 파업들이 일어났다공장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식량과 의복 배급 증가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많은 노동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경제적 불만들과 결합하여 다른 좀 더 정치적인 요구들 또한 나타났다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중단하고투옥된 노동자들을 석방하며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를 원했다틀림없이 몇몇 반혁명 분자들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러한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그런데도 페트로그라드의 파업 운동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생활조건에 대한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반응이었다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노동자들이 봉기 이후의 국가그들에 의하면 노동자 국가에 맞서서 파업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파업 노동자들을 선동자게으름뱅이개인주의자로 비난했다.

 

이러한 것들이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반란을 일으켰던러시아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론슈타트의 사회적 문제들이었다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조차트로츠키가 혁명의 영광과 명예라고 묘사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미 관료적 경향과 붉은 함대 내에서의 군사적 규율 강화에 맞서서 저항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이 도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수병들은 즉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 대표를 보냈다같은 날 순양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선원들은 회합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이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이 결의안은 경제적정치적 요구안들을 제출했다특히 요구안에는 가혹한 전시 공산주의’ 방책들의 중단과 연설의 자유출판의 자유그리고 모든 정당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속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재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3월 1일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승무원들과 만나서 그들의 결의안을 규탄하고 만약 수병들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즉각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이 건방지고 자극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3월 2일에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재선거를 하였으며, 300명의 대표가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안에 찬성 투표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평화로운 재편을 위한 동의안을 채택했다대표들은 시행 정부를 떠맡는 지역 혁명위원회와 어떠한 정부의 무장 개입에라도 맞서기 위한 방어조직을 만들었다이렇게 크론슈타트 코뮌이 탄생했다크론슈타트 코뮌은 그 자신의 이즈베스티야(정부 기관지역자)를 발행하기 시작해서 첫 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이 나라의 지배자인 코뮤니스트당은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출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최근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사건들은 코뮤니스트당이 노동대중의 신뢰를 상실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코뮤니스트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를 무시한다왜냐하면이러한 불만들이 반혁명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이러한 믿음으로 코뮤니스트당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코뮨의 반란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았다그들이 세 번째 혁명이라고 부른 반란을 확대하기 위한 반란자들의 소집 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 대표를 파견했음에도소책자들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배포했음에도붉은 함대의 요청은 전체 러시아 노동계급을 결집하는 데 실패했다러시아 노동계급은 반란자들의 강령에 공감했을 수도 있으며 그 반란을 완전히 지지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 투쟁을 중단했으며 계엄령 하의 일터로 돌아갔다내전의 혼란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사기를 꺾어놓았으며 분해해버렸다.

 

크론슈타트 코뮨의 분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그런데도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 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 병사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티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대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동시에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 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게 하려고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체카는 약식재판으로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선고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 운동의 오류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모든 반()레닌주의 조류들이 계속해서 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그 당시에 볼셰비키의 오류를 전체 노동자 운동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추방된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들과 조류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반대 분파인 노동자 반대파는 반란 진압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그리고 이 분파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녀의 분파 성원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에 앞장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심지어 그들의 입장이 콜론타이처럼 반란의 진압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볼셰비키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그러므로 그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크론슈타트 반란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 음모라는 주장을 두둔했으며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네덜란드 좌파의 투사인 헤르만 호르터는 볼셰비키의 방책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왜냐하면그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농민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혁명 봉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내에서빅토르 세르쥬는비록 그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맞서서 무장하는 것을 반대했지만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진압에 맞서서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비극적인 오류는 볼셰비키 당과 그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사실상 볼셰비키는 단지 비극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시행했을 뿐이다다만 이 정책은 당시 전체 노동자 운동이 반혁명은 봉기 이후에 국가 그 자체로부터 자라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해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7년에 구더기는 이미 과일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계급정당의 존재가 언제라도 그 안에 반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고립 때문에 볼셰비키가 국가로 흡수되고국가 그 자체가 자신을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이러한 그 당시의 전체 노동자 운동의 오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출현한 제도장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생각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Internationalism, Vol. 123, 2002년 가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한국어 출처실천」 2007년 10월호

1921kron.jpg
 
 
<관련 글>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 빅토르 세르주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1921년 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봉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1921년 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봉기

1921년 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봉기

 krontstadt-1921_petropavlovsk.40.jpg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봉기가 격렬하게 진압되고신경제정책(NEP)이 도입되면서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을 통해 성립된 국가 자본주의 체제의 통합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이끄는 코뮤니스트 없는 사회주의’ (즉 볼셰비키 없는)를 위한 투쟁은 이른바 평의회(소비에트)를 망가뜨린 '전시-코뮤니즘'이라는 러시아 내전의 압박으로 지배력이 강화된 러시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의 정치적 권력을 재탈환하려는 마지막 시도가 될 것이었다전례 없는 군사화를 통해 '백군'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달성한 후볼셰비키 정권은 남부의 막노브치나(Makhnovchina)처럼 대량 기근과 농민 반란을 초래했던 경제적 수준에서 명백한 재앙에 직면했다크론슈타트 봉기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조자였던 대중운동의 최고봉이었다패배와 더불어 그에 따른 정치 활동의 억압으로, 1905년 이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대중파업의 중추는 붕괴하였고볼셰비키당의 반혁명적 퇴축이 봉쇄되었다.

 

(Willy Huhn)의 저서 트로츠키 실패한 스탈린의 다음 장은 1950년대 초볼셰비키당그 지도부특히 이러한 주요 사건들에서 트로츠키의 역할특히 트로츠키주의의 후기 정치적 흐름과 관련하여평의회 코뮤니스트인 윌리 훈(Willy Huhn)은 상세한 분석을 제시한다.

 

 

윌리 훈(Willy Huhn), 트로츠키 – 실패한 스탈린 (1952)」 에서

[1트로츠키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6]

 

 

 

볼셰비키는 크론슈타트 봉기를 반혁명적백군으로 훼손하려 했고안토노프-오브센코(ANTONOV-OVSEYENKO)는 무신론자와 아나키스트당에 대해 말했다그리고 클라라 제트킨 조차도 남러시아 농민 반란과의 연관성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그가 최고 혁명법원 앞에서 코민테른을 대표하여 연설하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재판 기록을 연구한 사회혁명가들의 재판(1922년 여름)에 비추어서 크론스타트 봉기를 본다. 그러나 그는 농민운동(자유무역민간자본과 외국자본의 수용민주적 자유제헌의회)의 요구와는 대조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크론슈타트에서는 "제헌의회 만세 – 그리고 코뮤니스트 없는 자유 소비에트!" 이라고

 

그는 이 요구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공식적인 양보라고 생각한다.(1) 볼셰비키 없는 평의회! 오스카 안바일러(OSKAR ANWEILER)는 이 슬로건이 크론슈타트가 제기한 것이 아니라 이민 온 밀류코브가 먼저 제기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평의회 운동 1905-1921, Leiden 1958, E.J. Brill, 317각주 229). 그러나여기에는 러시아 볼세비키에 있는 파리코뮨의 비밀이 있다보기를 들어노동자 반대파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의 입을 통해 "소비에트와 당 조직에서 동시에 직함을 가지고 있는 주요 인사들의 수를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이제엠마 골드먼(EMMA GOLDMAN)에 이어서루스 피셔(RUTH FISCHER)는 크론슈타트 프로그램의 다섯 번째 요점으로서 인용하였다.(2)

 

모든 소비에트 기관에 당 대표를 위임하는 관행 폐지어떤 당도 사상의 전파에 있어서 특권을 가질 수 없으며 국가의 지원 또한 받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1921년 3월 6일의 라디오 메시지에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당이 아니라 평의회의 권력을 위해 투쟁한다우리는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자유 선거를 지지한다코뮤니스트(볼셰비키)는 언제나 우리의 요구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그들은 총알로만 응답했다..."

 

다음날레닌과 트로츠키의 명령에 따라 크론슈타트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그래서 이번에는 볼셰비키들이 포탄으로 응했다!

 

우리는 여기서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해서 몽환적인 설명을 할 의도는 없다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은 이미 1년 후에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이 일을 잘했다왜냐하면그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와 선원들을 대신하여 지노비예프와 협상했기 때문이다.(3) 우리는 우리의 맥락에 속하는 몇 가지 특징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1921년 2월 말에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고볼셰비키들은 이 파업을 쿠르산티’(Kursanti, 생도 연구소 학생들)을 시켜서 진압하게 했다그들은 파업 막바지에는 공장 노동자들을 가둬놓고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서 식량 배급을 빼앗았다크론슈타트 선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페테르스부르크로 위원을 보냈다이 위원은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에서 열린 인민총회에 보고했는데이 회의는 발트함대 1여단과 2여단이 공식적으로 소집하고 16,000여 명의 적군함대 선원적군 병사노동자들이 참석했다분개한 총회는 유명한 크론슈타트 결의안을 채택했는데다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부이며 여기에 보충된 것이다.

 

1. 비밀투표로 소비에트의 새로운 선거를 즉시 시행할 것

 

2. 언론의 자유와 노동자와 농민모든 좌파 사회주의정당과 아나키스트들을 위한 언론의 자유;

 

3. 당시 볼셰비키 러시아를 동요시켰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운동으로 체포 수감하였던 사회주의정당의 모든 정치범 해방은 물론 노동자농민적색 근위대선원들의 해방.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바셀리에브( VASSILYEV) 위원장과 RSFS(4)의 칼리닌(KALININ) 위원장만이 이 결의안에 반대했다총회는 공동의 행동 방침에 대해 그들과 상의하기 위한 페트로그라드의 파업노동자들에게 위원들을 보냈다. 3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도시로 들어서면서 볼셰비키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그들은 다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회의 직후인 1921년 3월 2일 아침레닌과 트로츠키가 서명한 명령이 내려졌는데 크론슈타트 운동이 소비에트(평의회정부에 대항하는 무장봉기(myatosh)라고 선언하였다크론슈타트에서 발트 함대의 수석 보좌관인 쿠즈민(Kuzmin)과 바실리에브(Vasilyev)를 제외하고는 크론슈타트의 볼셰비키가 체포되지 않은 동안트로츠키는 1921년 3월 6일 고약한 저널리즘 중상 캠페인을 마친 후에 크론슈타트 반란군에게 선언했다"나는 너를 꿩처럼 쏘겠다!" 버크먼(Berkman)과 지노비에프의 중재 시도는 실패했다지노비예프 자신은 1921년 3월 4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에서 크론스타트에 대한 비난을 전달하였고크론스타트를 반혁명적 선동으로 고발하고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도입한 것은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 예브도미코브(YEVDOMIKOV)였다트로츠키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3월 5일 밤에 도착했다그와 스탈린은 크론슈타트 청산 명령을 받았다. 투차체브스키(TUCHACHEVSKY)는 일반 참모 임무를 맡았고트로츠키는 공식적인 군사 영웅 역할을 맡았으며스탈린은 봉기의 진압 임무를 맡았는데 크론슈타트는 10일간의 전투 끝에 패배하였다트로츠키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서둘렀다크론슈타트에서 트로츠키스탈린투차체프스키가 승리한 결과는 약 14,000여 구의 시쳇더미였다그래서 1921년 3월 1일의 격렬한 대중 집회 전체를 파괴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원칙적으로 볼셰비키에 대항한 크론슈타트 봉기의 탄압은 당 권력에 찬성하고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최종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정치적이고 실천적 결정임을 의미했다. 1918년 11월 9일 저녁 이후당 권력에 찬성하고 독일 소비에트에 반대한 에버트(Ebert)와 노스케(Noske)의 명백한논쟁의 여지가 없는 정치적-실용적 결정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알렉산더 버크먼(Alexander Berkman)이 크론슈타트를 파리 코뮨과 비교했을 때그들과 함께 레닌 그리고 갈리펫(GALLIFET)과 함께 또 다른 비교는 트로츠키 자신을 암시하고 있으며그것을 우리에게 암시한 것은 노스케 자신이다그가 한때 사회민주당 후원하에서 독일군을 재편성하려는 의도를 말했을 때그는 독일의 트로츠키가 될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5)

 

크론슈타트 이후, ‘트로츠키주의’ 전체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 트로츠키의 결정과 행위에 대한 사과일 뿐이었고따라서 동시에 볼셰비즘 시대의 신조어였다따라서 1921년 봄 이후또한 이 사과론의 강요 아래트로츠키의 변증법은 이미 젊은 트로츠키를 토론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에 대해서 정당성을 제공했던 쇼펜하우어의 논쟁적인 변증법’ 수준으로 가라앉는다.(6) 마찬가지로 그의 역사학은 자신의 사과 필요에 의한 어떤 결정적인 부분에서 손상을 입게 된다보기를 들어 레닌의 러시아 혁명 개념에 정반대였던 '영구혁명'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자우리는 이미 10월 혁명의 첫 번째 시기(1917년에서 1920)가 레닌의 원래 개념에 부합하지 않고 1905년 트로츠키의 개념에 부합한다는 마르티노프(Martynov)의 의견을 들었다그는 1905-06년 혁명사에 관한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그것을 발전시켰으며루나츠샤르스키(LUNATSHARSKY)가 한때 그를 레닌보다 더 정통적이라고 묘사했던 것은 정확히 그의 러시아 혁명에 관한 관점과 관련되어 있었다. 10여 년 먼저 트로츠키는 적어도 첫 번째 단계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성격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농민과 부르주아 혁명은 도시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는 도시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였다따라서 레닌의 원래 개념은 단순히 역사의 의제에서 제외되었다고 동시에 말들을 한다그리고 자살하기 전(1927년 11월 16아돌프 요제프(ADOLF JOFFES)의 마지막 편지를 인용한 사람은 트로츠키 자신이다.

 

“1905년 이후부터는 항상 정치적으로 옳았는데레닌조차도 인정했다결국나는 종종 내 귀로 그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1905년에는 그가 아닌 당신이 옳았다고죽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 나는 오늘 그것을 당신에게 반복한다.”

 

그러나 이 편지를 부록에 수록한 같은 권에서우리는 또한 의견의 실제와 주장된 차이에 관한 부문도 찾을 수 있는데, 18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7)

 

"우리는 전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앞에서 말했다 : '우리가 트로츠키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싸웠던 모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특히 영구혁명과 농민 문제에 대해서 레닌이 옳았다고 인터내셔널에서 말했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전체를 위한 이 서술은 스탈린 단체가 인쇄하는 것을 거부한다그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트로츠키주의로 비난한다물론 이 서술은 레닌과의 과거 불화를 언급하고 있으며 스탈린과 부하린이 부도덕하게 제기한 불화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1928년 알마 아타(Alma Ata)로 망명한 강제적인 여가 중에 "연필을 손에 들고영구혁명에 관한 옛 저술을 다시 검토했을 때그는 "정확히 그의 개념, ··· 즉 그가 그것이 실현되기 13년 전에 10월 혁명의 필연성을 예측했던 영구혁명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다시 한번 결론짓는다그래서 그는 1905년에 그가 처음 공식화한 영구혁명 이론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하지만 추가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다.(8)

 

나는 내 입장이 실제로 레닌의 입장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그리고 그것이 모든 결정적인 상황에서 레닌의 입장과 어떻게 그리고 왜 일치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사과 방법은 이제 레닌과 트로츠키의 초기 입장과 서로에 관한 예리함(실제로 불일치)을 완화하고본질적으로 그의 저술의 제목과 표제인 다음과 같은 주장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구성된다.

 

인터내셔널에서 레닌과 함께’ – 농민 문제에 관해서 레닌과 함께’ – 레닌의 비어있는 권력’ (1919년 7월 트로츠키– 산업 건설에 관해서 레닌과 합의’ – 스탈린라이코프(Rykov), 칼리닌(Kalinin)과 부하린에 대항하여 레닌과 함께’.

 

1917년 이전과 동시에 트로츠키가 레닌에 반대하는 모든 예리함을 나타내기 위해그리고 동시에 트로츠키가 1909년 일찍 볼셰비키 독재 정권의 퇴위를 예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그러나그는 빨라도 1923년까지 그의 권력이 반드시 녹아버린 후에야 그 시작에 주목했다. ‘전시 코뮤니즘의 개념과 신경제정책 시대의 첫해에 우리는 폴란드 정기 간행물 프레제글래드 사회민주주의(Przeglad Social-demokratyczny) - 아마도 1909년에 실린 트로츠키 기사의 몇 문장으로 우리 자신을 만족시킬 것이다. ‘영구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만을 필요로 한다는 트로츠키는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 민주 독재에 대한 테제에 반대하며레닌이 승리한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르주아-농민 혁명에 대한 제한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방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농민들의 협력자 형태로 사회주의 반대자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자제력을 보완하기 위해’ 심지어 옹호하기까지 했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생각하는 것이 실현될 경우 혁명정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충돌이 임박할 것으로 예상했으며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안만을 알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농민당에 의한 노동자들의 길들이기나 후자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이로 인해 볼셰비키가 혁명이 승리하는 순간까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주도하게 되면 농민들이 사회주의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에 전체의 불행이 있다트로츠키는 당시 혁명에 대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멘셰비즘의 반혁명적인 부분들이 지금도 온갖 힘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더 커다란 위험은 혁명적인 승리가 있을 때만 볼셰비즘의 반혁명적 특징에서 위협을 받게 된다.”

 

1909년 이 기사를 인용한 1905년 혁명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그는 1922년 초에 그 말을 덧붙였는데몇 년 후 그의 반대자들에게 "트로츠키주의"의 증거로 제공되었다.

 

"이것은 (볼셰비즘의 반혁명적 위험잘 알려진 바와 같이레닌 동지의 지도 아래에 볼셰비즘이내부 투쟁이 아닌,- 1917년 봄즉 권력을 쟁취하기 전에 이러한 극도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변혁을 구현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볼셰비즘으로 건너간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넘어간 볼셰비즘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입증했다.(9)

 

따라서 트로츠키의 사과론의 모든 원리에 대해서 보기를 한번 들어보자:

 

1922 : (트로츠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권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17년 봄 레닌은 '영구혁명'의 입장으로 옮겨갔고옛 볼셰비키(카메네프지노비예프스탈린 등)의 상당한 저항을 극복하며 트로츠키주의적인 의미에서 당을 재편했다는 견해를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1923 : (트로츠키의 권력은 위협받고 흔들린다)

전 멘셰비키 마르티노프(Martynov)는 트로츠키의 관점을 이행한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농민으로부터 떼어내어" 1921년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여 볼셰비키당(신경제)의 광범위한 후퇴를 강요했다고 주장한다그 후 그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1925-1927 : (트로츠키는 권력을 완전히 잃었다)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전체 앞에서 영구혁명이라는 명제에 대해 레닌이 옳았다고 선언한다.

 

1928 : (트로츠키는 알마 아타(Alma Ata)에서 망명 중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과정이 1905년에 그의 예측이었던즉 영구혁명이라는 관점에 해당한다고 다시 한번 주장한다.

 

1930 : (트로츠키는 터키 프린키포(Prinkipo)에 망명 중이다)

트로츠키는 1917년 이전에 레닌과의 차이를 완화하고 모든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레닌과 동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그런 입장을 취했다!

 

스탈린이 10월 혁명의 역사를 위조한 것을 비난하는 글에서 그는 이미 1929년에 선언한다.(10)

 

"레닌과 나의 의견의 불일치는 매우 부수적인 부분에서였고단호한 혁명가로서 나는 볼셰비즘을 향해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점점 더 발전해 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성명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의 활동을 가리킨다그렇다트로츠키가 퇴임했을 때혁명전쟁 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하고(1925년 1월 15퇴임했을 때 그는 심지어 오래전에 자신의 가르침이 청산되었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지난 8년 동안 나는 이른바 트로츠키주의라는 관점에서 어떤 문제에 접근할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트로츠키주의는 나에게 있어서 오래전에 청산되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이 표현이 1917년 10월의 교훈(11)이라는 그의 책의 토론 과정에서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우리는 트로츠키가 적어도 1922년에 그의 이론을 청산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1925년 이후 트로츠키의 정치적원칙적인 태도는 옛 레닌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와 투쟁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그는 스탈린만이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의 '친위대'가 아니라 스탈린주의 인식에 맞서 레닌의 진정한 생각과 의도를 대변하고 옹호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입증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그러나 늦어도 1920/21년 겨울까지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그리고 레닌조차도 농민 운동과 그의 오래된 당 동지들의 압력으로 1921년 트로츠키주의 과정을 수정하고 자신의 원래 개념으로 돌아간 후에 트로츠키의 몰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레닌조차도 더는 당 다수당에 대항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트로츠키를 지지할 수 없었고트로츠키는 저항 없이 일어났던 결국엔 자신의 개념을 종식한 신경제로 전환을 허락했을 때 이것을 알고 있었다.(12) 그렇다레닌은 1925년까지 살아있었더라도 트로츠키를 붙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트로츠키는 전시 코뮤니즘’ 인물이었고그 일을 떠맡았고 또한 그 일에 몰두했다.

 

 

1952년 1월 21

윌리 훈(Willy Huhn,), Berlin-Wannsee

 

 

<>

 

1. 클라라 제트킨우리는 고소한다사회 혁명가들의 과정에 기여한 말이다.」 Verlag der Komintern, Hamburg 1923, p. 57.

2. 루스 피셔(Ruth Fischer), 스탈린과 독일 코뮤니즘, US-American edition, Cambridge 1948. 프랑크푸르트/메인(w.y.)의 "프랑크푸르트 헤프트"의 출판소와 독일어 번역. ), p. 203.

3.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 크론슈타트 러시아의 파리 코뮨!(1922년 3)"생디칼리스트"의 화우드(FAUD)" 4(1952), 11이것은 1951년 "(30)"에 나온 같은 저자의 연장된 에세이 "크론슈타트의 반란"의 원본 버전이다.

4. 공식 지정 : 1918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련 공화국 (RSFSR)의 러시아 사회주의 연맹 (RSFS); 1922년 이후 사회주의 소련 공화국 연합 (USSR)에서 확장되고 재구성되었다. [편집자주]

5. 루스 피셔 인용 99

6. 엘리아스 후르위츠(Elias Hurwicz), 국가와 모험가들위트에서 트로츠키까지의 러시아 초상화 1891-1925라이프치히 1925, p. 319.

7. 레온 트로츠키 루 랜드의 경제위치정식판이다. [독일어빌헬름 크레머의 번역아발룬 출판사 헬러라우 베이 드레스덴 페이지 264-265 (새책 쇼 1929년 6월 6)은 우연한 신문 기사에서 편집된 것이다여기 서베를린에서 트로츠키 문학은 트로츠키 자신이 쓴 "공교롭게도"라는 신문 기사만 실렸다면 아마 트로츠키와 아발룬-베를라그 와의 차이를 넘겨야 할 것이다게다가우리는 그의 "동시의 신문 기사"에 매우 관심이 크다.)

8. 레온 트로츠키영구혁명베를린 윌머스도르프 1930, p. 31.

9. 그리고리 디미트로프 (편집자), 트로츠키 비극, 1925년 베를린, S. 55-56.

10. 레온 트로츠키러시아의 실제 상황페이지 165-166 인용.

11. 그리고리 디미트로프(Grigori Dimitrioff) 54 인용

12. 아서 로젠버그(Arthur Rosenberg), 맑스로부터 현재까지의 볼셰비키의 역사베를린 1932, p. 153.

 

 

2021년 3월 27

A Free Retriever

 

kronstadt-map-1715177501.jpg

 

 
<원문 출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e0019270_46fb9c7f5dbe6.jpg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난 뒤 4년째지금(2001)으로부터 80년 전인 1921년 3볼셰비키당은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핀란드 만의 작은 섬 코틀린에 주둔하고 있는 발트 함대의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일으킨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볼셰비키당은 러시아와 외국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군대에 맞선 몇 년 동안 피로 물든 내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었다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는 새롭고 달랐다이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지지자가 내부로부터 일으킨 봉기였다그들은 10월 혁명의 전위였고이제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왜곡과 새로운 권력의 남용을 바로잡으려는 계급의 요구를 들고나왔다.

 

볼셰비키가 이 투쟁을 무력으로 짓누른 것은 그때부터 줄곧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지닌 뜻을 이해하는 데서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왔다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 맑스와 레닌을 스탈린과 굴락(gulag)에 연결하는 끊어질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하는 오늘날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이해는 더욱더 중요하다.

 

우리의 의도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다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에 실린 이전의 논문들은(“크론슈타트의 교훈들,” International Review n°3과 “1921: 프롤레타리아계급과 이행기 계급,” International Review n°100) 이미 상세하게 그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와 달리 우리는 이번 기념일을 기회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첫 번째로 아나키스트는 크론슈타트 사건을 맑스주의자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 당이 지닌 권위주의적 반혁명의 본질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다두 번째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여전히 있는 생각즉 반란을 짓누른 것은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방어하려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견해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볼리네(Voline)에 따르면: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거나또는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그와 그의 당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맑스주의자권위주의자국가주의자로서볼셰비키는 대중에게 어떠한 자유 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볼셰비키는 자유로운 대중을 믿지 않았다볼셰비키는 그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신들의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위험에 빠트린다고 믿었다……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에서 자신을 해방하고 사회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인민이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일으킨 시도였다그 시도는 정치적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서 직접단호하게대담하게 이루어졌다그것은 제3의 혁명사회 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무너졌지만크론슈타트에서 봉기한 사람들은 과업을 해냈다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봉기에 참여한 대중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흐릿한 미로에서크론슈타트는 올바른 길을 밝혀주는 밝은 횃불이었다봉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들이 권력이라는 말과 생각을 모두 없애지 않고 그 대신에 협력과 조직화관리를 말하면서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그것은 과거에 바친 마지막 찬사였다노동계급 스스로가 토론과 조직화와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얻어낸다면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에서 참된 길을 찾아낸다면나머지는 자동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볼리네(Voline)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그들에게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진압은 볼셰비키가 지닌 맑스주의 사상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결과였다당의 대리주의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를 당 독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그리고 이행기 국가의 형성은 볼셰비키가 믿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권위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다볼리네에 따르면볼셰비즘은 억압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볼리네는 크론슈타트를 그저 봉기였다고만 여기지 않았다그에게 크론슈타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만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업(협력조직화관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적 과업에 대해 잊었다면(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발언), 그것을 교훈 삼아 우리는 진정한 사회 혁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이를테면 지도자 없고당이 없는국가가 없는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도 없는 사회즉각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아나키스트가 끌어낸 첫 번째 교훈은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한다.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양쪽 모두 위계 제도와 폭정과 독재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와 우애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부르주아지는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 맞서 무력으로 개입하고 경제 봉쇄를 이끌었던 반혁명 세력의 잔인성을 정당화하려고 10월 혁명에 반하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으로 이용했다다른 한편 아나키스트가 볼셰비즘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딪혀야만 했던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녹여 없애는 순진한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확증한 것처럼아나키스트가 지닌 순진성 때문에그들은 맑스가 세운 혁명에 대한 역사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부르주아 진영이 일으킨 실제 반혁명 앞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볼리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권력욕 때문에 근본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더라도아나키즘은 그와 견주어 볼 때 역사의 진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만일 볼셰비키가 끝내 권력만을 탐했다면왜 그들은 사회민주당의 다수와는 달리제국주의 전쟁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되도록 요구함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추방당할 운명을 지웠는가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는 달리,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을까?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아주 뒤떨어졌고 부르주아지를 뒤엎기에는 수적으로도 모자란다고 여긴 대부분의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10월에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량을 믿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연합국의 봉쇄를 이겨내고 반혁명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는가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유럽과 나머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혁명의 시도에서 러시아의 지도를 따르도록 세계 노동계급을 고취했는가어떻게 볼셰비키당은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창건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왜 당을 국가 기구로 통합하는 과정과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 조직에 대한 권리 침탈그리고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에 맞서 무력의 사용은 하룻밤 새에 일어난 게 아니라그저 질질 끌다 일어난 것인가?

 

볼셰비키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더러운 속성을 지녔다는 이론으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또는 구체적으로 크론슈타트를 설명하지 못한다.

 

1921년쯤 러시아에서 혁명그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볼셰비키 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독일과 다른 국가로 혁명의 확산은 1919년과 견주어 볼 때 훨씬 가망 없는 것으로 보였다세계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러시아 안에서 내전을 이겨냈지만반혁명 군대의 거듭된 공격과 국제 부르주아지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경제적 질식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공업 기반은 무너져 버렸고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희생되었거나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떼지어 몰려갔기 때문에 크게 줄어들었다볼셰비키 정권은 지방에서 일련의 폭동을 일으킨 농민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또한 무엇보다도 1921년 2월 중순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점점 더 인기를 얻지 못했다그리고 그때 크론슈타트가 일어났다.

 

어떻게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특히 유럽의 노동계급 혁명에서 지연된 도움을 기다리면서 세계 혁명의 요새로 남고 노동계급의 불만과 경제적 붕괴를 이겨낼 수 있는가아나키스트는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그들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우위권력의 집중화혁명의 국제적 팽창그리고 코뮤니스트 사회로 이행기의 문제에만 집중했다이것은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배반과 반혁명 행위로 다루게 한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오늘날 혁명가들이 지닐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가늠자를 갖지도 못했다그들은 그때 그저 노동자 운동의 이득을 이용할 수 있었다그 노동자 운동은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권력을 보유하는 몹시 어려운 과업에 부딪혀야만 했다성공적인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계도부르주아 국가를 필연적으로 분쇄하게 될 이행기 국가에 대한 이러한 두 계급 조직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고차츰 노동자평의회와 공장위원회를 국가에 통합하면서볼셰비키당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그리고 그때 노동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혁명에 대한 주요한 위험은 새로운 국가 기구 밖에서즉 국제 부르주아지와 추방된 소작농과 러시아 부르주아지에서 나왔다비록 볼셰비키당 내부에 그때 정권의 관료화에 맞서 경고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코뮤니스트 운동에서 어떠한 경향들도심지어 좌파도 대안의 전망을 갖지 못했다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콜론타이와 쉴라프니코프의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자평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조직으로서 국가를 초월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국가의 과도함에 맞서 노동자를 방어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볼셰비키당 내부에는 봉기를 분쇄하는 데 반대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운동에 결합했던 크론슈타트 당원들도 있고 훗날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적 해결을 반대했던 가브릴 미아니스코프(Gavriil Miasnikov)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당과 코민테른 내 있는 좌파 경향은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했지만폭력의 사용을 도왔다심지어 노동자 반대파도 진압 세력에 자원했다당의 독재에 반대했던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맞선 군사적 행동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요구는볼리네의 의견과는 달리 대안의 전망을 주지 않는다왜냐하면그것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맥락 안에서 주로 틀지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보루)와 세계적 상황에 대한 더 폭넓은 내포(함의)를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특히 그러한 요구들은 전위당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변하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그것을 주도했던 혁명적 흐름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려고 애쓴 혁명가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교훈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리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적들에 의한 책략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다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우리는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계급에 폭력과 강압 때문에 강요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시작해야만 한다크론슈타트를 잃어버리는 편이 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이러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즉 바로 그 바탕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했던 행동의 내용을 바꾸는 결과이다

Octobre, 1938, Italian Fraction of the Communist Left 발행

 

코뮤니스트 좌파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즉 국가가 노동계급에 맞서 폭력을 쓰는 데서 볼셰비키당은 자신을 반혁명의 수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크론슈타트에서 거둔 승리는 볼셰비키당이 노동계급에 맞서 러시아 국가의 도구로 되었다는 경향을 가속했다이러한 견지에서코뮤니스트 좌파는 또 다른 대담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었다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전위로 남으려는 코뮤니스트 좌파는 현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진보를 막으려는 필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율성을 지켜야만 한다.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의 견해

 

그러나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에서 이러한 결론은 전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사실좌파의 몇몇 부분은특히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는 1938년 이탈리아 분파(Italian fraction)의 태도와는 완전히 모순되게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를 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크론슈타트를 진압하게 한 끔찍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탄생이나 강화의 과정에서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부닥쳐야만 한 끔찍한 문제의 제거는 장밋빛이 감도는 안경과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이트로츠키에 따르면, ‘비극적 필요였지만 필요이고 심지어 의무였다는 이해를 통해 혁명의 비전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Programme Communiste n°88, 국제코뮤니스트당의 이론적 기구, 1982년 5

 

그들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을 회피한보르디가주의 경향은 볼셰비키당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를 방어할지 모른다그러나 그 경향은 또한 볼셰비키의 실수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당과 혁명이 왜 타락했는지 하는 문제에서 배울 수 없게 한다.

 

그들에 따르면혁명 과정에서 계급과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 대한 당의 관계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편의주의의 문제즉 어떻게 각각의 상황에서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커다란 투쟁은 그저 프롤레타리아계급 안에서 끔찍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사실상당이 혁명을 만들 수 없거나 대중없이 또는 대중에 반하여 독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 의지는 수적 다수’ 또는 심지어 더 모순되는 것으로서 만장일치 합의를 찾기 위해 선거 협의체나 의견 투표(여론 조사)에 의해 나타내지 않는다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 의지는 투쟁의 등장과 좀 더 정확한 투쟁 방향을 통해 표현된다그러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분파가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고필요하다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다내전과 독재의 변화 과정에서서로 다른 층위의 태도와 관계는 바뀔 수도 있다그리고 몇몇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의해 노동자-노동자 또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모든 계층에 대한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중요성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트로츠키는 자신의 책 테러리즘 또는 코뮤니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구인 소비에트에 참가할 권리가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에 따라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어떠한 헌법상의 규칙도 어떠한 민주주의 원칙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부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없다어떠한 비책도 지역적 필요와 국제적 혁명의 요구 사이의직접적 필요와 역사적 계급투쟁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다양한 분파의 반대 속에서 드러났던 모순을 풀 수 없다어떠한 형식주의도 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분파와 계급의 혁명적 투쟁 조직인 당과지역적이고 직접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통해 서로 다른 정도로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의 관계를 분류할 수 없다레닌이 말했듯이, ‘대중의 정신을 관찰하고 대중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가장 훌륭한 당도 때때로 대중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좀 더 정확히당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찾고 있다. (같은 글)

 

1921년에 볼셰비키당은 그들을 지도할 이전의 경험이나 요소 없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은불합리하게도 볼셰비키의 실수에서부터 장점을 끌어오고 원칙은 없다.’고 선언한다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공통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비웃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실행하는 문제를 마술로 쫓아버린다.

 

아주 유동적인 상황에서 합의를 세울 수 있는 결코 완벽한 수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가 전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의지를 담아내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다비록 1918년의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드러난 경험이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트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회복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다하지만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대중없이 혁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웠지만당을 통해 그리고 당의 허락하는 것을 빼고는 대중은 전체 계급으로서 그들의 혁명적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지니지 못했다그리고 당은 필요하다면 크론슈타트에서처럼 기관총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로잡을 수 있다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두 가지 모순적인 표어(슬로건)를 갖는다즉 혁명 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혁명 후에는 : “모든 권력은 당으로.”

 

Octobre의 편집진과 달리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혁명과는 대조적으로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업이 소수집단에 대표될 수 없지만자기 의식적인 다수를 통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노동자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둘 다마치 기만인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그러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자신을 동원하는 수단인 소비에트와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계급 내의 긴장과 차이를 담아내고 조절하는그리고 이행기 국가를 통한 무장 권력을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이어야만 한다당은특정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나머지보다 명확히 앞서 있는없어서는 안 될 전위는이러한 권력을 노동계급 자체와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비록 원칙적이지’ 않지만당이 노동자를 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하면서보르디가주의자들은마치 이러한 결론의 끔찍함에서 피하려는 것처럼크론슈타트 봉기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그때 레닌의 규정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크론슈타트는 백군 반동 세력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쁘띠부르주아적 반()혁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혼란되고 심지어 반동적 생각들이 크론슈타트의 모반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그리고 몇몇 내용은 강령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반혁명 세력의 조직된 군대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진실이다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는 그들 자신을 1917년 혁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의 통합 부분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소비에트의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사회 혁명의 획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이기거나 죽을 것이다. (the Kronstadt Pravda, p. 82)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아무리 혼동을 표현한다고 하더라도그들이 내건 요구는 또한 비참한 생활 조건국가 관료제의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쇠퇴한 소비에트에서 정치적 권력의 손실에 부닥쳤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그때 볼셰비키가 반란자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대리인으로서 낙인을 찍은 시도는 물론 힘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 안에 있던 끔찍한 위험과 복잡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핑계였다.

 

코뮤니스트 좌파가 역사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지혜와 이론적 작업 때문에우리는 일련의 추론이 지닌 기본적 오류를 볼 수 있다즉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고 반()프롤레타리아 독재즉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절대 권력인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스트를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사실소비에트를 다시 세우려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노력을 진압하고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볼셰비키는 알지도 못한 채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볼셰비키는 백군의 복원보다 노동계급에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반혁명 과정의 가속화를 도왔다러시아에서 반혁명 세력은 자신을 코뮤니스트로 선언하면서 승리했다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살아있는 사회주의의 체현이며 10월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 선상에 있다는 생각은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계급 대중에게 끔찍한 혼동과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우리는 여전히 1989년 이래로 부르주아지가 코뮤니즘의 죽음과 스탈린주의 사망을 같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 대한 이러한 왜곡의 결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런 경험을 했지만여전히 1921년의 비극적인 실수와 동일시하고 있다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비극적’ 필요가 아니라되풀이되어야만 할 코뮤니스트의 의무이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보르디가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조직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무장된 의지를 이끌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 1917년 볼셰비키당과소비에트를 그들의 이전 권력의 그림자로 축소하고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했던 1921년의 볼셰비키당 사이에 있는 모든 모순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현재 캠페인들에서 볼셰비키를 마키아벨리적인 압제자들로서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돕지만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혁명적 비타협의 극치로서 찬양한다.

 

그러나 코뮤니스트 좌파는 볼셰비키 유산에 관계하면서도 그 이름에 걸맞게 실수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은 가장 해롭고 끔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International Review, 2001, vol. 104,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한국어 출처실천」 2007년 10월호

 

 

 

<관련 글>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 빅토르 세르주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490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50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3호] 코뮤니즘 세상에서... 힘든 일을 누가 할 것인가?

코뮤니즘 세상에서...

힘든 일을 누가 할 것인가?

 

 

<편집자 주>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자본주의를 대체할 체제에 관한 토론이 많아졌다하지만 대부분 코로나19 이전으로의 일상복귀이거나 자본주의 개혁 수준에 머물고 있다일부 사회주의자 자임 세력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자고 주장하지만자본주의 체제 내 최대개혁을 사회주의와의 연결로 착각하게 하는 낡은 과도적 요구에 집착하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전복 이후 사회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 글은 스페인의 코뮤니스트 그룹이 작성한 것으로 코뮤니즘 세상에서의 노동과 삶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다우리는 이 글이 자본주의 이후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에 단초를 제공하고 비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생각한다다음 호에는 여기서 제시한 질문에 대한 (확장된)우리의 토론 결과와 입장을 소개할 예정이다.

 

  KakaoTalk_20210811_141329631.jpg

 

모두가 꺼려하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일은 사회에서 필요하다대부분 그런 일은 가장 운이 없는 사람들에게 맡겨지거나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도록 강제한다하지만 우리는 혁명 후에도 하수구를 청소해야 한다그렇지 않은가?

 

요즘 시대에는 값싼 노동력이 많아서 위험하고 힘든 많은 직업이 자동화되지 않는다하지만현재에도비엔나 하수구 터널 청소의 많은 부분은 이미 로봇이 수행하고 있으며사실상 유럽 전역에서 쓰레기 재활용 시스템은 모든 가정에서 시작된다더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착취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이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보편적 필요성의 (프롤레타리아트독재는 과정을 변화시키고 일부를 자동화하고 다른 것을 사회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그것은 이미 존재하지만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제약받는 두 가지 경향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생산의 사회화와 생산력으로서의 노동의 발전.

 

 

생산의 사회화

 

  KakaoTalk_20210811_141334517.jpg

<사진> Guadalinfo 개발자들의 파티무료 소프트웨어 공동체

 

생산력 발전을 위한 필요성으로서 생산의 사회화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와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충돌해 왔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상승기 발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주식회사 확장을 통해 자본주의적 기업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생산의 자본주의 사회화를 향한 새로운 추진독점의 발전발명의 조직과 기술의 진보계획 수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에 이 제도가 쇠퇴기로 들어서면서 부르주아계급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국가자본주의로 사회화할 정도로 이 과정을 급진화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 축적의 요구를 왜곡하고 종속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구조 아래에서 살고 있다재활용 시스템에서 구글 번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에는 점점 더 많은 공동 작업자가 참여하지만이는 시스템의 주요 목표에 따라 주어진다.

 

구글과 같은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은 실제로 이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웹에 게시 한 모든 번역을 사용하는 것이다아파치(Apache : 대부분의 웹 사이트를 지원하는 서버), 워드프레스(WordPress : 대부분의 디지털 출판물을 위한 출판 시스템또는 파이어폭스(Firefox)나 크롬(Chrome) 등의 브라우저와 같은 무료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수십만 명의 사용자와 수백 명때에 따라서는 수천 명의 프로그래머그들 중 상당수는 비전문가인 사람들의 공헌에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회화(집단 노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더 많은 부문과 활동이 있다아마존이 거의 모든 제품을 기록적인 시간 안에 배달할 수 있게 하거나 자라(Zara)가 어느 정도의 추가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지, 수요가 가장 많은 상점이 어느 곳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사용자와 고객의 데이터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교한 시스템에 비해쓰레기를 다른 봉투에 분류하고 다른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원시적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그것은 또한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데 인간이 필요로 하는 수백만의 시간을 줄이는 사회화의 원칙이기도 하다.

 

 

왜 자본주의는 생산의 사회화를 더 발전시키지 않는가?

 

  KakaoTalk_20210811_141336270.jpg

 

자본주의 구조 아래 생산의 사회화 발전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이는 모든 디지털 제품에서 매우 명확하게 볼 수 있다자본의 가치를 유지하고 보상()으로 가는 추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르주아지는 20년 이상 지적 재산을 발작 수준으로 왜곡해 왔다.

 

우리는 코비드 백신에서 비극적으로 이것을 보고 있다그 백신들은 이전의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지식국가가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자원그리고 전 세계 임상시험에 참여했던 수십만 명의 협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그러나 백신은 소유주가 있다각각의 자본 기금은 수익성 이익을 부과하고사회적 사용을 줄이고가능한 한 생산량을 줄이고백신을 세계의 절반에만 공급해서 그것의 효과를 위태롭게 한다심지어 너무 많은 폐기물과 전체 대륙의 주변화새로운 변종이 출현할 시간을 주고 있다.

 

독점과 국유화가 시장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면서 왜 자본주의 혼란과 낭비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한 차원 높이는지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현재 백신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화 원칙은 금융자본 주변의 소유권 집중과 계속 모순된다그것은 소유 관계와 생산의 사회화 사이의 모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보편적인 인간의 필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계급)와 부르주아지(다양한 형태에서 사적기업 또는 국가로부터의 계급사이 모순에 관한 또 하나의 표현이다자본은 노동을 착취하여 이익을 창출하고무슨 일이 있어도 자본 축적의 구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불쾌하고 위험한 일은 사회화된 시스템과 기계가 대신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비록 현재로서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을지라도 그 일 중 일부는 더는 필요하지 않으며 다른 것들은 자동화되고 사회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코뮤니스트들은 인간 개입이 거의 없이 석탄을 안전하게 채굴할 수 있는 로봇과 기계를 100년 동안 꿈꿔왔다보기를 들어러시아혁명 기간 동안광산 트랙터를 상상하고 설계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고그 개발은 어느 지점에서 갱도를 따라 내려가는 것을 피할 것으로 기대되었다그들은 석탄이 한동안 필수불가결한 에너지원으로 남을 것이라 당연하게 여겼다그러나 오늘날 환경론자들과 다양한 색깔을 가진 생태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그들은 이미 전기의 일반화가 위험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광산 작업의 필요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 러시아 소비에트 의회는 차르 군대에 대한 내전과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으로 전국에 걸쳐서 지열 및 수력 발전 계획을 승인했다아니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것은 광업을 성 평등하게 만들려는 것도깨끗하고 환경친화적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었다그것은 인간 노동과 인류 자체가 갱도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광업을 폐지하려는 의도였다.

 

우리가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 것은 기술적인 방법은 가용 수단즉 세계적인 규모에 의존하겠지만노동해방을 통한 정치적 방법은 자본의 설정(=착취)과 경제(=축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필요에 따라 표현된 인간의 필요에 의한 과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정반대다.

 

화물 운송의 전기화 및 자동화 또는 인적 견인으로 회귀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생산력은 자본주의 아래에서심지어 쇠퇴기에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그렇지 않을 수 없다쇠퇴가 매주기마다 파괴되는 자본이 항상 재평가되는 것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단지 위기 경향이 일정해지고 생산 능력의 발전 경향이 자본의 필요에 따라 점점 더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생산과 생산성의 지속적인 감소보다는체제는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생산적 발전을 점점 더 억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자본주의가 생산 능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은 모순적이고 점점 더 그렇게 된다자본주의의 상승기 동안상대적으로 쉽게 흑자를 낼 수 있는 첫 번째 세계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윤 측면에서의 생산성의 발전은 물리적 생산성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었다새로운 발견과 대규모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해 촉진된 생산성 향상은 시장을 발견했다그리고 새로운 시장 확장으로 재조정된 짧은 주기적 위기만을 낳았으며이는 결국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했다.

 

상대적 측면에서의 착취(미지불 사회노동 시간의 비율)의 증가는 노동자의 소비 능력 향상과 일치하는 노동시간의 급격한 감소를 동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보기를 들어 스페인에서는 평균 근무일이 1830년 16시간에서 1919년 8시간으로 감소했다내부와 외부 비()자본주의 시장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될 무렵부터시장의 부족은 모든 기술적 개선을예상할 수 있는 노동력의 잉여로 바꾸기 시작했다자본이 생산을 확대하거나 생산한 모든 자본을 기존 생산 장치에 다시 투자하는 것은 수익성이 없기에 모든 노동력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실업과 빈곤은 만성화한다자본 발전과 노동 발전 인간발전 은 점점 더 모순되고 대립한다그리고 이러한 틀에서 자본은 기술 회귀에 투자한다소년이여 페달을 밟아라환경친화적이다!!!. 새로운 수준의 능력 낭비는 각각의 새로운 위기와 새로운 전쟁으로 대표되는 생산 능력을 미친 듯이 파괴하는 와중에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력 발전으로 나아가는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보기를 들어 물류 부문을 살펴보면거의 모든 창고가 전체적인 로봇화생산의 사회화 된 경향 등이 명백해진다맑스가 자본론에서 정식화했듯이이러한 추세는 지배적인 생산 관계와 충돌하거나 다시 말해서 자본의 수익성에 종속되어 있고오늘날 그리고 아마도 한참 동안은 값싼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이러한 추세는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가 아닌 그리고 다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을 위한 이윤이라는 그 잔인하고 독재적인 족쇄는 인간 보편적 필요 논리를 인계받으면서 사라지는 것이다노동해방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노동의 변혁적 능력의 개발은 독립적이 되고 자본의 필요에서 해방되고그것에 종속되는 것을 멈추게 한다우리는 노예 노동에서 우리를 해방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 개발이 필요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왜냐하면 계급으로서 우리는 노동자들이 갱도 아래로 내려가거나피자 배달을 위해 페달을 밟거나하수도를 청소하기 위해 기어 다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불쾌하고 위험한 일을 할 것인가?

 

  KakaoTalk_20210811_141341769.jpg

<사진로봇의 하수구 점검

 

일반적으로 현재 모든 경향은 점점 더 사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로봇과 기계가 그 일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얘기해준다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마존에게 사회적으로 말하는 방식또는 자유 소프트웨어와 같은 다양한 수준의 자발적 책임을 지고집단으로 유통하는 방식이다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구덩이로 내려갈 필요가 없고, 도시와 시골 사이의 대립에 의해 부과되는 많은 필요가 제거되는 것처럼 자본주의에 의한 발작과 그것의 축적과 집중 논리는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과정이 될 것이다그러나 첫날부터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시작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2021. 02. 16

해방

 

 

<원문 출처>

https://en.communia.blog/in-communism-who-will-do-the-jobs-that-nobody-wants-to-do/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