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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런 영화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니키 카로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2003년이었다. 그 때 나는 고향에 내려와 있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려고 하고 있었다. 친구녀석과 함께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관객상을 받은 작품이 눈에 띄었다. <웨일 라이더>. 나는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뛰어난 상상력의 판타지를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그 판타지에 어긋남없는 영화일 것이라고 제 멋대로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웨일 라이더> 는 내 제 멋대로의 상상과는 좀 다른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웨일 라이더> 는 부족의 토템에서 비롯되는 전설이지만 그 전설의 계승이라는 과제 아래 부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유년기로부터의 경쟁의 과정이 존재한다. 파이키아, 소녀는 그 지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의 과정에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것에 대해 항거한다. 즉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전혀 저항의 냄새를 맡지 못했지만 실은 이 영화는 지극히도 저항적인 영화였던 것이다.

 

니키 카로 감독의 영화 중 내가 두 번째로 접한 영화인 노스 컨츄리는 이 웨일 라이더의 주제 의식을 그대로 계승한다. 샤를리즈 테론이 분한 조시라는 인물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광산노동 그 자체에서 배제되는 것 - 단지 여성 인권의 침해 차원이 아니라 이는 명백히 광산노동 자체에서 배제시키려는 움직임이다 - 에 대해서 격렬히 저항한다. 남성 노동자들의 상습적인 성적 희롱은 그들의 밥그릇, 그들의 노동으로 일구어지는 세계에 여성이 들어오는 그 자체를 배제하려는 통일된 움직임이다. 그들은 여성이 노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를 원치 않으며, 무엇보다도 여성 노동자의 노동의 댓가를 통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1달러가 빼앗긴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이 영화는 광산에서의 현장노동의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억압의 기제를 나열한다. 그리고 그 억압의 기제에서 조시는 어쩌면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아이들과 식사하는 조시에게 사장이 다가와서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조시는 또다시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었고 그것에 타협했다면 조시는 아마도 노동자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장의 욕망 어린 호의를 이용해서 광산현장에서 벌어지는 여성노동에 대한 억압을 자본가인 사장에게 해결해 달라고 할 뜻을 품게 되지만, 그것은 남성이자 자본가인 그의 욕망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남성 노동과 여성 노동의 대립, 여성 노동권의 억압을 통한 각종 비용의 절감과 노동환경에 대한 전반적 문제제기의 약화 그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한 그 자본가들이 원하는 대로 노동현장 또한 움직여 간다. 노동 현장 내부에서도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는 또다른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바로 그 내부에서 소수자인 여성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투쟁의 과정은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얻게 되는 억압, 그것 이외에도 넓은 외연을 형성한다. 첫째로 노동자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사이의 투쟁이라는 지점에서 일반적인 인권 문제와 차원을 달리하는 정치적 투쟁이 되고, 둘째로 마지막 조시의 승리가 노동자들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방식이 아닌 자본가에 대한 승리가 된다는 점에서 이는 계급투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노동자와 인민의 억압과 수탈이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심각해져만 가고 있고 사회 양극화는 이미 정권이 조장하는 각종 신자유주의적 정책 아래 망가져 가며 그 아래에서 가장 심각하게 피해받는 이들이 바로 여성 노동자라 할 것이다. 얼마 전 KTX 투쟁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노동의 권리 침해를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습관적으로 우선하여 저지르는 것이 습관화 되어버린 한국사회를 직시할 수 있었던 바 있다.

 

바로 그래서, 노스 컨츄리같은 이런 영화가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영화일 것이다.

 

:::추신:::

단, 이 영화와 같이 법정에서 문제가 해결될 리는 전무하다. 여성 노동권도 그 어떤 권리도 현실에서는 물리력으로, 강고한 투쟁으로만 얻어낼 수 있는 투쟁의 대가일 뿐이다. 현실정세에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정치적 투쟁이 가장 효과적인 시점에 가장 강고하게 벌어졌을 때만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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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을 폭력의 기준으로 비난하는 자들에게

내 답은 이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 무장을 금지하는 국가의 제한을 넘어서야 했던 광주에서도, 농사를 짓기 위해 ‘군사보호시설법’에 따라 설치된 철조망을 넘어서야 했던 평택에서도, ‘공권력’이라는 국가의 조직된 무장력이 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공권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중들을 유린한다.


이처럼 기존의 법질서가 정상적인 중재 기능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의를 체계적으로 집행할 때, 즉 말의 강한 의미에서 ‘압제’로 타락할 때, 주권자로서 대중들은 기존 법질서에 대한 저항권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은 불가피하게 일정한 혼란과 무질서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대중운동의 새로운 조건이 된다.

 

- 사회화와 노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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