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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5

성실함과는 어느 새,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고

내 마음과 나의 행동은 점점 더 서로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남들이 읽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읽으라고 쓰는 모순에 가득찬

그래서 서글프지만 어찌 할 수가 없는 그런.

 

그것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 삶이라면

쌀에서 돌을 골라내듯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면 그만이라면

위에 서술한 등의 짓거리들을 안하면 그만인데

그리고 그런 짓거리를 하는 물질적 조건들을 폐기시키면 그만인데

 

나는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실로 허탈하기 그지없는 것이니

이러한 나약함과 도대체 어디서부터 싸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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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6

사회운동 세미나를 다녀왔다.

 

처음 가 보는 사회진보연대 사무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지나치게 정리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작업공간 치고는 깔끔한 편이었다. 꽤나 익숙한 얼굴들이 자주 보였다. 좌파 학생운동이라는 판에서 한 때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얼굴들이다. 세미나에 참석한 인원들 중에서는 나보다는 연배가 약간 낮지만 이미 사회에 진출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졸업하고 계속해서 운동을 결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미나를 하면서 학교에서 계획중인 세미나를 생각했다. 물론 학교에서 뻔히 잘 아는 사람들과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현실의 대학에서는 특히 더 필요한 일이다. 다만 캠에서 세미나를 진행할 때, 우리는 그것이 현실의 운동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씁쓸하다. 물론 처음 세미나라는 것을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모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어느 정도 운동을 접했고, 나름대로 자신의 고민을 풀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경우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동을 접했고 졸업을 앞에 둔 이들은 정확히 양분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 부류는 이론에 편향하고 한 부류는 이론과 실천 모두와 관계맺지 않는다. 이 두 부류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바로 자신들이 어쩄든 이 "학생운동" 이라는 어떤 실천과 관계맺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관계맺음의 의미가 그 자신에게 "운동" 의 의미로써 남아있는가 이다. 운동이란 이론과 실천의 결합 속에서 존재하는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한 각자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했던 어떤 정치적인 실천들이 존재할 때, 그것을 통해서 묶여졌던 "인간관계" 만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의미로 남는 것도, 아니면 그 시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무용한 시간이었다고 언젠가 평가하게 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금, 졸업을 하고 나가야 할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느낀다. 특히 실천을 강제하고 실천을 과학화 시킬 수 있는 이론과,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그 이론에 맞추어 살 수 있도록 강제하는 실천 두 가지 모두. 그 이유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운동은 종교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저 믿음만 가지고 계속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졸업한 이후에는 점점 더 책 읽기도 힘겨워 질 것이다. 또한 실천을 지속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저 내 조건 속에서 사는대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내가 고민할 수 있는 범위는, 어떤 부분에서 넓어지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좁아지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실천을 강제할 수 있는, 적어도 현실을 냉철히 스스로 분석해낼 수 있는 이론의 부재는 언젠가 자신에게 남은 "학생운동" 의 의미를, 더 크게는 "운동" 이라는 것의 의미를 부차화 시킬 수 있을 위험요소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론에 편향될 경우 그저 이론에 매몰된 채 자신을 강제하는 정치적 실천에는 둔감해지면서, 충분히 골방에 틀어박힐 요소로 충분하다.

 

지금 졸업을 앞둔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제기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삶을 조직하거나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의 "운동" 의 의미를 언젠가 실천적으로 부정하게 되거나, 추억으로, 인간관계로만 환원시켰을 때 그들의 젊었던 시간은 그리고 그들과 함꼐 했던 나의 젊은 시간들이 그만큼 초라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운동의 삶에 있어서도 그만큼, 조야해지고 더욱 더 외로워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 한 명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알면서도 계속해서 교안을 보내고, 연락하고, 그들에게 실천을 말하는 것이고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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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겨울철쭉님의 [[독서]소금꽃나무,김진숙] 에 관련된 글.

이 책,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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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가슴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얼마나 값싼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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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

미망에 빠져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후일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그 지나가버린 세월 때문에 또 아플 것이다.

가버린 세월을 탓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을 미망 속에 흘려보낸 자신을 탓할 것이다.

 

미망에 빠져있는 누군가를 보는 것보다 미망에 빠져있는 자신을 관조하게 되었을 때가 가장 슬픈 순간이다.

 

그 얼마나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인가.

 

당신은 어처구니없는 미망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미망이라는 것은 당신의 꿈이 아니다.

미망이라는 것은 단지 독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독소도 제 살이 되면 잘라낼 때 아픈 법이다.

하지만 독소를 잘라내야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독소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잘라내는 것만이 남았다.

모질고 단호하게 당신의 독소를, 피흘리며 잘라내거라!

 

다소 건조하다 할 지라도, 당신에게 남은 것은 현실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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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만난 후배의 눈물

장애인 차별철폐 문화제를 갔다오면서 그 때 처음 만난 장애인권 동아리의 후배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장애우와 장애인의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회적인 명칭은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호칭이 가능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단지 호칭의 문제를 논하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것때문에 그가 느꼈던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내가 감히 그 아픔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 해야 했다. 바로 그래서 맞싸워야 할 것이라고. 그것이 어쩌면 너무나 가벼운 이야기가 아닐까 라고,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느꼈던 고통, 외로움, 아픔은 지극히 현실인 것이다. '현실이 이래' 라고 함부로 떠들면서 이래서 안 된다고 떠들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었다. 적어도 효율의 논리로 세상을 가르는 신자유주의자들, 지배계급들이 함부로 떠들 수는 있어도, 지배계급이 아닌 이들이 떠들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정상인' 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계급의 말이 자기 말인줄 알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5년전 6년전 떠들었던 이 말이 여전히 새롭지 않은 이유는 현실이 새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후배의 눈물과 5년 전 함께 장애인권문화제를 준비하면서 흘렸던 내 친구의 눈물을 보면서 여전히 똑같이 뜨거워진 눈시울을 훔칠 수 밖에 없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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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그리고 생각

1. 책 - 아내가 결혼했다.

 

어제 우연찮게 생도에 누군가가 책을 기증했다고 했는데 마침 있는 책이 '아내가 결혼했다' 였다. 아내가 결혼한다. 아내가 결혼한다? 아내라고 하면 결혼이라는 계약을 이미 맺은 사람인데 어떻게 또 결혼할 수 있지? 의구심을 갖고 읽었는데 한 두 세시간 만에 쫘악 완독을 해 버리고 말았다. 간만에 즐겁게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

 

내 아내는, 나와 이혼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와 결혼했다. 속칭 일처다부? 한국의 법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녀는 참으로 영리하고 능숙하게 모든 사태를 해결해 가고 있다. 뭐 중요한 건 그녀의 엄청난 요령과 삶의 지혜와 말빨이 아니다. 중요한 건 결혼제도, 이성애와 일부일처의 가족제도 전반에 대한 논쟁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갔을 때, '질투' 라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는' (개인적으로 이성에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직 자신이 믿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관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타인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연애관계라 해도 똑같다. 생각해 보건대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솔직히 기분 좋지는 않다. 하지만 도대체 왜 기분이 나쁜 것일까? 그건 그녀의 권리이지 않을까? 물론 감정적으로는 아주 짜증이 난다. 정념이다. 그냥 만나는 거면 모르겠는데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하지만 양다리건 세다리건 간에 나 역시도 그녀와 하나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타인일 뿐이다.

 

물론 이건 생각이다. 생각에 다름 아닌 것인데 감정적으로는 나도 이러한 생각과는 별개로 아주 기분이 나빴던 경험, 슬퍼하기도 했고 절망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는 관계로 무어라 말하긴 힘들지만 도대체 이런 기분이 그냥 가부장제적인 이성애 및 일 대 일의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걸까? 사실 그런 게 없는 게 가장 올바른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하는데, 뭐 여튼 폴리뭐시기인가 소설에서도 제시하는 방향성이 있기는 있다. 다만, 그런 것보다도 나는 왜 도대체 내 여자친구가(참고로 나는 여자친구가 없다.) 나 말고 다른 애인을 만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상황을 가정하고)  

 

그런 작은 의문 하나.

 

2. 영화 - 밴디트 퀸

 

수업 시간 내내 영화 하나를 풀로 틀어주는 수업 형식 덕분에 한 영화를 다 보게 되었다. 웬지 배우들의 쏼라가 영어가 아니고 뭔가 아시아틱한 데다가 분위기도 딱 그런게 '인도 영화' 구나 싶었긴 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어야 할 발표수업이 존재함에 따라서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주의깊게 보게 되었다. 어쨌든 발표수업도 레포트이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졸업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밴디트 퀸은 몇년 전 암살당한 풀란 데비라는 여성의 삶을 영화화 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서술되는 풀란 데비의 삶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끔찍한지는 영화를 한 번 직접 보시기 바란다. 보고 나서 신문기사나 여러 가지를 검색했는데 거기서 글로 나오는 내용은 아주 쉽게 몇 개의 문장으로 간추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 과정은 정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상물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던 적이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였다.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고 다우리 제도가 있으며 각각 신분계급과 성차의 차별을 상징한다. 그것은 고착화되어 있고 폭력으로 유지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억압과 착취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민중은 대안적인 삶을 고민할 여지조차 없다. 그곳은 혹자가 말하듯이 고차원적 정신세계와 여유로운 삶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족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착취받는 민중이 있고 억압이 존재하는 한 사회일 뿐이다.

 

환상이란 필요하지 않다. 민중의 삶의 비참함은 그대로 현실이며, 그것은 그 어디를 막론하고도 존재하는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흘렸던 눈물은 풀란 데비를 대중이 환영하는 그  순간 때문이 아니라 풀란 데비의 삶이 바로 인도의 민중의 삶이며 동시에 그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삶이라는 생각, 정확히는 생각 이전에 그런 느낌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되고자 하는 그 노력 앞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이 밀려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아픈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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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내지 말고 살자

표내지 말고 살자.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들으며 표 내지 않으려면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표정 자체도 언제나 밝게 하며 관련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표내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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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발표수업을 무조건 지정으로 하는 요즘의 고약한 학제의 유행 덕분에 팔자에 없다고 믿었던 발표를 하게 되고 말았다. 조원들을 보니 다들 하나같이 삼삼하기 그지없는 고학번들인데 어쨌든 나보다는 학번이 아래가 된다. (어느새 대학에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수업의 전출을 위해서 노력하는 졸업대비 학생활동가라는 게 참으로 고약하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힘겨운 하루 하루가 지속되고 있다.

 

강의는 '복지행정론' . 교수는 전형적인 개혁 우파에서 조금은 왼쪽으로 나간 사람이라고 보이는데, 한 때 노무현의 지지자였고 지금은 노무현에 대해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화끈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강의를 듣다가 교수가 말하는 복지행정과 노무현 정부가 분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정부였지만 물적 토대가 없어서 실패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니,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지만 강의 시간에 굳이 질문을 해 가면서 교수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마 행정학과에 있는 교수들 중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관점에 '가까운'(단지 상대적으로 아주 약간 가깝다는?) 사람임에는 확실 - 3.8 여성의 날에 나름 기고도 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은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 하지만 여하튼 저 진보에 '가까운' 관점이 학생들을 호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심히 아프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발표수업은 4대보험에 관련된 것인데, 우리 조에서 나는 산재보험법 개악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할 생각이다. 이왕이면 신자유주의 까지 나가서 지극히 충실한 개혁주의자인 교수와 한 판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싶지만 발표 구성원들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P.S

 

요즘에 인터넷을 통 할 시간이 없다 보니 이렇게 한꺼번에 몰아서 할 일이 생기면 블로그에 애정을 갖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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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어제와 오늘,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면서 움직이고 움직이고 또 움직여 왔지만, 자신을 돌아볼 새가 없다가 문득 어쩌다가 돌아보게 되는 순간, 하나의 인연이 드디어 그 생을 다하였음을 알았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하나의 인연이, 실타래처럼 얽혀들었던 그 인연이 마침내 그 실타래의 생명력을 다한채 썩어 끊어졌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알고 보면 그렇게 생을 다한 인연이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제까지의 살아왔던 내 삶의 구성요소는 어쩌면 너무나도 많이 달라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끊어진 인연에 대한 장례식을, 홀로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아니, 올바른 것이 있을까.

 

먼 곳으로, 떠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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