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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4
    [펌]이 세상에서 노동자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은 '불법''투쟁'
    짜루

[펌]이 세상에서 노동자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은 '불법''투쟁'

-울산노동뉴스 문화기사-

 

이 세상에서 노동자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은 ‘불법’ ‘투쟁’밖에 없다(?)

- 2007년 전국 노동자 대회를 다녀와서

 

지난 11월 11일, 서울 시청 앞에서 전태일 열사 37주기, 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을 맞이하는 2007년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수 만의 노동자들이 불법으로 당당하게 시청 앞 전 차로를 점유했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경찰 선무 방송이 무색했다. 전날 저녁 서울 상암동 홈에버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가 세상의 한 공간을 잠시나마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은 ‘불법’ ‘투쟁’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서울 하늘을 빼곡이 채우는 높은 빌딩 그 어디도 노동자의 공간은 없었다.

 

= 세종 문화 회관’을 만들고 지키는 노동자에게, 그 곳은 일터 일뿐...

공무원 노조 교육청 지부가 사전 집회를 열었던 장소 옆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예술 공간인 세종 문화 회관이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권위가 느껴지는 높은 대리석 건물이었다. 여기 저기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이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매표소에 여성 노동자가 부지런히 입장권을 판매하고 있다. 계단이며 화장실에는 청소 노동자들이 또 열심히 바닥을 닦고 쓸고 있다.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 오페라’ 등 공연 현수막이 내려져 있다. 그리고, 그 시각 노동자들은 거리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집회를 하고 있다.

문득, 어이가 없다. 그 엄청난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노동자에게 그 곳은 그저 일터 일뿐, 그들에겐 자신의 문화를 펼칠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다. 울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화 공연을 위해서 장소를 대관할 때마다 느끼는 건, ‘노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해도 그 공간 안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저급하고 불온한 무엇을 만난듯 차갑게 빗장을 건다. 대한민국의 수 많은 문화공간 담벼락에 노동하는 삶을 노래하는 가수들의 콘써트나 춤, 연극 현수막을 보기는 어렵다. 대관료 마련도 어렵거니와 내용에 대한 그들의 시선과 겹겹의 차단막을 뚫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열리는 문화 공연을 향유할 수도 없다. 너무 비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으로는 몇 만원씩 하는 공연은 사치품일 뿐이다. 시간도 없다. 오로지 허용된 공간은 거리다. 그것도 불법으로 그저 눌러 앉는 수 밖에 없다.

 

= 투쟁과 문화의 어색한 만남, 2007년 전국 노동자 대회 전야제.

이 세상 건물이며 땅들은 모두 자본이 사들였다. 그리고 엄청난 가격대로 올리며 앉아서 수 백 억씩 벌어들인다. 더러워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현재로선 ‘불법’ ‘투쟁’으로 잠시 잠깐 세상의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자신의 삶을 쏟아내고 나눈다. 전국 노동자 대회는 그런 장이었다. 전야제는 노동 문화의 결집의 장이었다. 그런데, 2007년 전국 노동자 대회 전야제는 뭔가 서걱거렸다.

상경 전부터 전야제가 ‘있다’ ‘없다’를 반복하더니 거리 투쟁 이후 일정이 분명하지 않다. 분명, 상암동 홈에버 앞에서 투쟁 일정이 있는데 왜 전야제가 없다고 하는 것일까? 오리 무중...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전야제는 그저 무대 위의 문화행사가 아닐 것이다. 전날 모여 서로의 투쟁을 이야기하고 싸울 일이 있으면 함께 싸우고 한 판의 싸움 뒤에 서로의 삶을 나누고 토론하는 것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중 어떤 이는 예술로 자본의 세상과 싸워왔을 것이고 그들이 그들의 투쟁을 다른 노동자들과 나누는 것이 노래고 춤일 수 있다.

그것들이 마당에 펼쳐지고 서로 보고 나누면 되는 것 아닌가? 또 술 한잔을 기울이며 곳곳에서 투쟁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전국 노동자 대회 전야제가 만들어온 소통의 문화이며 의미이다. 결국, 차로를 점유한 투쟁이 일정 시간이후 정리되자 사람들은 머뭇머뭇 전야제 장소로 간다. 20여년 동안의 전국 노동자 대회 전날 밤에 대한 기억으로. 그런데, 그날 무대 위에는 알 만한 사람들의 정치연설과 문선대의 공연이 모두였다. 열사 투쟁, 홈에버 투쟁, 곳곳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진한 나눔에 대한 기대가 무색했다.

전국 노동자 대회 ‘전야제’는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때는 그냥 밤을 새워 거리를 점유한 투쟁으로 채워질 때도 있는 것이고, 어떤 때는 투쟁이후 문예 마당 한 판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야제 없다’는 공문은 필요 없는 것이고, ‘전야제 없다’는 것이 전날 상경을 조직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노동자에게 허용된 공간이 ‘불법’ ‘투쟁’의 공간이라면, 그것 속에서 최대한 노동의 가치를 나누는 문화의 판을 열어가는 것이 자본의 땅에서 노동자의 땅을 만들어가는 길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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