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실명제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0/02/24 13:06
  • 수정일
    2010/02/24 13:06
  • 글쓴이
    진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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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실명제를 도입한 국가가 있다. 어느 해인가 이 나라가 국가적인 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낙서"가 문제라는 언론 보도가 일었다. 화장실, 음식점, 학교 담벼락을 비롯해 공공 장소의 벽마다 가득한 낙서가 국가 브랜드 이미지에 누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곧 정부는 허가받지 않은 장소에는 낙서를 금지한다는 정책을 수립했다. 하지만 정부가 전국 방방곡곡 모든 벽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장실처럼 지극히 사적인 장소에서 낙서하는 것까지 정부가 어찌 해볼 도리는 없다는 회의론도 제기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정책을 현실적으로 수정했다. 벽이 있는 공공 장소를 소유한 모든 업자는 입장하는 사람들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 추후 낙서가 발견될 경우 낙서한 사람들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기록하지 않는 업자들은 수천만원에 달하는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법률도 만들어졌다. 낙서 실명제가 시행되자 낙서하지 않는다는 방문객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낙서는 나쁜 것', '당당한 자는 이름을 밝힐 수 있다'는 정부의 성명과 언론 보도가 계속되자 수그러들었다. 업자들 입장에서는 출입자를 관리하는 것이 건물 관리에 편리했기 때문에 큰 반대가 없었다. 어느덧 모든 시민들은 공공 장소에 출입할 때마다 신분을 밝히는 데 익숙해졌다. 

여기서 낙서는 '악플'이다. 우리는 악플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1년 365일 인터넷 게시판에 입장할 때마다 신분을 밝혀야 하는 국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 실명제에 너무나 익숙할 뿐더러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정직한 사람은 국가와 기업 앞에 언제든 자기 신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악플이 테러보다 나쁘다"는 공익 광고와 일부 언론의 여론 몰이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명분도, 국가의 수사 편의를 위하여 모든 국민을 잠재적 악플러 혹은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근대 시민사회 이후 수립된 인권관이다. 우리가 여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인권 의식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반증한다. 

더 나쁜 소식은 이렇게 확보된 게시자의 신상 정보를 국가가 사찰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정부에 비판적인 게시물을 작성한 이용자의 신상정보를 경찰과 정부가 수집하고 공유한다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다. 이 소식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러한 관행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이미 감시 사회이다.

2월 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올해의 '본인확인제' 대상을 발표하였다. 지난해보다 46개가 추가된 167개 사이트에 실명확인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발표에 따라 <미디어오늘>도 올해부터 인터넷 실명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6월 2일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올해는 선거운동 기간 중 모든 인터넷 언론에 실명제가 중복적으로 실시된다. 장담한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면 실명제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런 정책에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독자 댓글과의 소통 문제가 더욱 절실할 소규모 인터넷 언론들이다.

전세계 유일한 낙서 실명제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우신가. 아니면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이신가. 슬쩍 사이버 망명을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어째서 이제는 실명제에 대한 작은 비판의 외침들도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가.

 * 이 글은 미디어오늘 2010.2.24자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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