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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1
    어떻게 살아야 할끄나?
    넝쿨
  2. 2010/10/31
    강권석 할아버지(4)
    넝쿨
  3. 2010/09/15
    2010/09/15(2)
    넝쿨
  4. 2010/08/31
    2010/08/31
    넝쿨

어떻게 살아야 할끄나?

 

 

요 며칠 새 마음이 안정되면서 급(!) 끓어오르는 걱정;;;

(마음이 안정되면 편할 새 없이 걱정을 해야하는 타입이로고...-_-;;)

어떻게 살아야 할까.

흐르는대로 사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약간의 결단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내년 2월이면 졸업을 하고, 6월 즈음이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끝날 것이다.

졸업을 한다는건, 별로 의미 없는 일 같이 보여도

근 20년간 갖고 있었던 '학생'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고,

(요 3~4년은 그 정체성이 희미하긴 했지만;;)

작업이 끝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뜻이고

무언가 잠정적으로나마 결정해야한다는 뜻이다.

 

#

어떻게 살까?의 질문에는 이런게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먹고살까?"

 

흠..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회사에 취직해서 살 것 같지 않다.

왜 이 가능성은 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걸까ㅠ_ㅠ

회사에 다니거나 안정적(물론 비정규직이겠지만 지금보다 정기적으로 임금이 나온다는 측면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규ㅠ_ㅠ

이것도 비중을 좀 두란 말이야!!!

 

-_-;;;

 

암튼, 회사나, 어떤 조직, 혹은 단체에 속해서 일하는건 못하지 않을까-_-;;;;;

안한다기보다는 못하는 것이............;;;;;;;;;;;;;;;;;;;;;;;;

어떤 직위, 직책을 갖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

포지션을 갖는 이름을 다는 것이 무섭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건지도.

 

암튼. 단체나 이미 있는 큰 조직(?)에 속하는 것도 내 계획 속에서 상위권은 아니다.

 

문제는 상위권이 없다는 것이 문제-_-;;;;;

 

아마도 미디어 교육이나, 영상 알바 같은걸 하면서 살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삶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이건 주위 사람들과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축복이겠지.

 

이 시대에는 당연하게도 '먹고사는 것'은 아마도 '직업'과 비슷한 말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흠. 뭉뚱그려서 활동가라는 '직업'을 갖는 것이 아마도 제일 많이 생각하고 있는 삶의 형태가 아닐까.

근데 뭔가 리스트가 좁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_-;;

 

어떤 활동을 해야할까?

아무래도 역시 미디어운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

정확하게 뭘 할진 알 수 없지만.

그건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꼭 동의어는 아니다.

지금은 이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 다큐멘터리스트라는 이름을 갖는다는 것이

나에게 맞는 일인지 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건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작업을 마치고 몇 십년 동안 작업이라고 불릴만한 건 하나도 안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카메라를 들고 싶어질 수도 있다.

혹은 프로듀싱, 연출, 조연출, 촬영, 편집 뭐 이런식으로 나눠진 역할,

역할이 나눠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한두사람, 두세사람이 거의 맡아서 작업을 다 해야하는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중 어느 하나에 큰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

음.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꼭 그렇게 하고싶은 일인지, 잘 할 수 있다고 느끼는지, 내가 해야하는 일이라고 느끼는지...

정말로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나는 준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근데 다큐멘터리 작업이란걸 하고 싶긴 한거야? 그것도 잘 모르겠다.

욕구가 솟아오르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카메라를 든다는건,

단순히 감독이라는 이름을 갖는것이 아니라,

어떤 기술이 뛰어나야 한다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스크린 앞에 앉아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인간과 사회와 관계를 맺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거다.

그래서 더 많은 통찰이 필요하고, 마음속에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고 느낀다.

음. 근데 지금의 나는 너무 비좁고, 비좁고, 비좁다. 시야도, 통찰도, 마음도.

그래서 불안하다.

왠지, 생각보다 엄청난 일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

무엇을 하더라도 그렇게 느껴지긴 하겠지?

늘 스스로를 닦아야 하고, 채우고 비워져 있는 스스로가 발휘되는 순간이 바로 기쁨의 순간일 것이다.

흐흐흐-_- 채울 곳은 텅 비었고, 비울 곳은 너무 꽉 차있구나. 쩝.

 

 

#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냐는 질문도 같이 나온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공부방 선생님들에게도 영향을 받고 있고,

주변의 사람들에게서도, 다큐멘터리 영화들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

 

인디보 사람들은 꿍짝꿍짝 맹꽁이 탈도 만들고 있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마음을 다 하는 것 같다.

장기투쟁하던 몇 곳의 사업장은 협상 타결이 됐고, 몇 곳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누군가는 죽은 이를 그리고 있고, 누군가는 살아갈 이들을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전선을 긋고 앞에서 싸우고 있고,

아마도 나처럼 헤메고 있는 사람도 있을테지.

물론 지금 이 시간에 빙하도 녹고 있다.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고,

나는 고작해야 내가 하고 있는 한두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 밖에 못한다.

심지어 뉴스도 잘 안본다.

 

난 원래 타인에게 별로 관심 없는 인간-_-;;;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냐는 질문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과도 비슷하다.

혹은 어떤 활동을 하고 싶냐는 질문과도 비슷하고.

삶 전반을 꿰뚫는 어떤 것.

아마도 나중 나중에 발견하게 되겠지.

죽을때까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괴로워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의미부여가 온전히 자기자신만을 향해서는 곤란하다.

 

이 1년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자기자신에게만 의미부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을거다.

 

문정현 감독의 <용산>을 보고, 뭔가 퍼뜩했다.

뭔가 영화와는 별로 상관 없는 것 같은 깨달음 같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했던 문제제기에, 스스로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언뜻 스쳤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를 가장 중심에 놓고 살 수밖에 없다.

나란 인간이 작고 비좁은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도 나는 나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회를 '위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대의에 희생하는 숭고한 나'를 설정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희생따위 개나 줘버려.(개 미안 ㅠ_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오는 의미는 더 이상 '대의'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을 당연히 만들어낼 수 있다.

간단한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깐?;;

 

스스로와, 주변과, 커다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살고 싶은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한계와, 우선순위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내가 좀 더 성장하고, 삶의 태도에 대한 고민이 좀 더 명확해졌으면 좋겠다.

"00한 태도를 가져야 해!" 라며 확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침반이 있었으면 좋겠다.

잘 가고 있다는 신호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도 변하지 않는 나침반 같은건 종교에서나, 신에게서나 받을 수 있겠지.

 

뭐, 가끔은 신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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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석 할아버지

 

#목요일

 

목요일에는 집에 내려갔다.

아직 정신을 온전히 찾은 건 아니지만,

일반실로 올라간 삼촌을 보러 엄마가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서울에 다녀가는 동안, 가게를 보러 내려갔다.

 

동네는 조용했고,

가끔 술 취해 비틀거리는 손님들이 소주를 사갔고,

약간 어려보이는 남자가 담배를 사갔고,

어린 아이들이 와서 새콤달콤이나 뿌셔뿌셔를 사갔다.

 

아빠는 막일을 나갔다고 했다.

 

저녁에 가게로 돌아온 아빠에게서 흙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본 아빠는 더 늙어있었다.

그래도 나는 콧속으로 들어오는 아빠의 흙냄새가 좋았다.

당뇨라 몸도 안좋으면서 막일은 왜 다니는지.

철딱서니 없이 그저 그런 생각만 들었다.

두 달 전에 난 상처가 낫질 않는다며

걱정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곤 곧 동네 아저씨들과 놀러 나가버렸지만.

 

#금요일

 

전날 언니랑 엄마랑 술을 또 진탕 마셨다.

아빠가 한잔 먹고 남긴 고량주를 전부 마셔버렸더니 속이 쓰리고 토할 것 같았다.

가게로 해장국을 시켰는데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애꿎은 엄마한테 막 짜증을 냈다.

엄마에게 나를 확인 받는 방식은 늘 그런것이었다.

속 쓰린데 밥도 못 먹고 가겠네.

이렇게 스스로를 자학하는 걸 보여주면 엄마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빨리 가야 되? 밥은 먹고 가야지.

라고 말한다.

언제나 엄마가 오바하지 않으면서 나를 걱정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왜 좀더 격정적으로 나를 걱정해주지 않는거야? 하며.

 

해장국을 기다렸다.

밥은 먹고 가고 싶었으니.

 

니*에게 카메라를 주러 새 대추리로 갔다.

팬션촌처럼 예쁘게 지어놓은 집들 사이로 콩쥐놀이를 하는 니*와 마리*가 보였다.

길에서 마주친 노영희 할머니댁에 놀러갔다.

"마리* 화장실 가고 싶대요!"

라는 말을 하고.

 

할머니네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뭐, 작은 집들이 꽤 많긴 했지만.

 

아직도 대추리를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다고 하셨다.

대출받아서 지은 집이라 마음이 편치 않다고,

돈 많은 사람들이야 모르지만 내년에 공공근로도 끝난다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먹고살지 막막하다고.

데모라도 해야겠다고 하셨다.

그 때 너희들도 다 와~, 다 와서 도와줘야해?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니*는 애인이 있다고 뻥쳤고, 할머니는 얼렁 시집가라고 성화셨다.

아직도 이런데 다니냐? 직장다니면서 돈벌어야지!

 

쇼파에 앉아서 주름진 얼굴로 보*의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그이는 잊지도 않아. 꼭 이렇게 기억나.

 

보*은 대추리에 있을 때, 들소리에서 미디어교육을 했는데,

노영희 할머니와 함께 영상을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의 기억이 각인되었나보다. 각인될만한 기억이었을거라 짐작한다.

 

어디를 돌아다녀볼까 하고 헤메다가 김영녀 할머니댁에 놀러갔다.

들소리 애들이 왔다고 하니 엄청 기뻐하며 반겨주셨다.

할머니 얼굴에는 주름이 는 것 같았고,

다리가 불편하신데, 이제는 운동도 잘 안나가신다고 하셨다.

이리로 이사하고 나서는 한번도 밖에 안나갔어.

 

이제는 왠지,

 

 

김영녀 할머니 댁에 나와서 나는 인천으로 가야했다.

머무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강권석 할아버지와 한대수 할머니를 만났다.

한대수 할머니는 마당을 쓸고 계셨고, 강권석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다녀오시는 길이셨다.

지금 왔어요?

아뇨, 좀 전에 왔는데 지금 가요;;;

가만있어봐, 버스 시간이..

지금 바쁘게 가면 저기 삼거리 있는데서 버스 탈 수 있겠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내일 올거죠?

네? 네.. 내일올게요

뻥쳤다. 내일은 못온다.

 

길을 나서려 하자 강권석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태워주신다고 했다.

버스타는데까지 가려면 바쁘게 가야한다며.

나도 급하기도 해서 좀 민망하지만 할아버지 오토바이 뒷자석에 앉았다.

 

삼거리에서 10분쯤 기다렸는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이번 버스는 놓쳤겠거니, 20분 후에 있다는 버스를 타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권석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려 오셨다.

아무래도 버스가 간거 같애, 객사리까지 데려다줄게요.

 

다시 할아버지 오토바이 뒷자석에 앉았다.

내일 오지요?

네, 내일 올게요.

 

삼거리로 나올 때였나, 객사리로 나올 때였나.

할아버지가 한번 더 확인을 하셨다.

나는 아마 지킴이 명단에서 제명당하고도 더 큰벌을 받을 거다.

 

추운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려니 달달 떨렸다.

할아버지도 '빔' 이라고 써진 캡모자를 다시 눌러써야 했다.

근데 참,

우리가 무엇이라고, 내가 뭐라고.

찬바람을 맞으며 이 사람의 등짝을 보고있노라니,

오토바이라 춥지만, 밭일하고 온 터라 운동화는 꺽어 신었지만,

바래다 주시겠다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

그게 너무 좋아서 왠지 미안해졌다.

 

할아버지에게서도 흙냄새가 났다.

내 몸에서도 흙냄새가 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객사리까지는 가지도 않았는데 추팔공단을 지나자 3번 버스가 옆에 섰다.

대로에서 갑자기 버스 문을 두들겨 버스에 올랐다.

급하게 버스에 타느라고 할아버지께는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다.

못난년.

 

 

 

#일요일

 

토요일에 있었던 마을잔치에 다녀온 니*가 집에 왔다.

마을잔치가 어땠는지, 백서가 어떻게 나왔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물론 좋은 얘기는 별로 없었다.

분위기는 싸-했다고 한다.

좋을턱이 있나.

쫓겨나서 빛져서 새 집 지으면, 집이 깨끗하다고 좋은가? 뭐.

노영희 할머니 댁 화장실에서 봤던,

쌔삥에 삐까리한 집과 어울리지 않게 있었던 놋대야가 생각났다.

 

지금와서 대추리를 기억하는 것은,

쫓겨나와야 했던 당시에는 너무나 슬펐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나는,

어떤 순간이고, 어떤 투쟁이고, 어떤 공간이고.

꼭 함께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지.

물론 그 와중에 당연히 상처받는 사람은 생기겠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처럼,

애도하는 것, 생채기 난 이후 그 상처를 보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걸,

잊지 말아야지.

 

 

아, 근데 지킴이 명단에서 제명당하면 안되는데.. 어쩌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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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

외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다.

의식불명이다.

남들한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더니 바로 내 눈앞에서도 벌어졌다.

사실 좀 얼떨떨하다.

뭐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삼촌은 사십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도 안했다.

못했는지 안했는지. 아무튼.

옆에서 지키고 돌봐줄 부인이나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모들과 엄마가 더 마음을 조린다.

 

의식불명이라길래 드라마에서 본 것 처럼

가만히 숨도 안 쉬듯이 있을 줄 알았더니

다리를 꿈적거리고 손을 꽉 쥐길래 깜짝 놀랐다.

그래도 손을 꼭 쥘 수 있어서 조금 기뻤다.

맥아리 없이 축 늘어진 손을 봤으면 정말 포기해버렸을것만 같다.

 

중환자실이라 한명씩밖에 면회를 못했다.

나중에 나와서 이모에게

"삼촌이 다리를 막 움직였어!"

라고 얘기했더니

아파서 그런거라고 한다.

의식이 없어도, 마약투여 수준으로 진통제를 놔도,

몸을 비틀어야할만큼 고통스러운가보다.

 

엄마도, 이모들도, 친척언니들도 팡팡 울었다는데,

나는 찔끔. 하고 말았다.

뼈가 다 부스러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덜덜거릴 뿐이었다.

 

.

 

담배를 피우고 싶은걸 한참 참았다.

이모들과 헤어지고 멀리 지하철을 타러 가서

며칠만에야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왠지 담배는 쓰고 맛이 없었다.

 

삼촌이 눈을 떴으면 좋겠다. 빨리.

 

#

머리가 복잡한데, 할 일이 쌓여있다.

왜 이런거지?-_-;; 왜 난 일을 제때제때 안 해놨을까-_-;; 한숨부터 나온다.

 

 

#

암튼 오늘은 인천인권영화제 정기 상영회 날.

<대추리에 살다> 상영한다.

7시 반, 영화공간 주안(주안역 8번 출구에서 직진).

푸우푸우-

GV사회를 맡았다. 잘해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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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

우왕ㅋ

오랜만에 진보넷에 들어왔더니 뭔가 많이 바뀌었다-_-;;

기념으로 일기 좀 써볼까 ㅋ

 

#

인턴쉽 신청을 하느라 학교에 다녀왔다.

교수님께 지금 하는 일이 어떤 것들이고, 얼마나 했고, 얼마나 할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하고 승낙받았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인권영화제에서 한 일과 관련한 짧은 보고서를 내야한다.

그리고 기말에는 단순한 느낌모음이 아닌, 이 일, 이 활동이 일반화 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는

리포트를 요구하셨다.

 

느티에서 담배를 태우며,

역시 학교는 날 옥죄어..........

라고 생각했다.

 

#

전미네에서 메일이 왔다.

부산에 간다.

 

#

영화는 이리 흐르고 저리 부딪히고 잠깐 멈추기도 하고 훅 나가기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 더이상은 의미없는 이야기, 재미없는 이야기를 만들면 어떡하지?

라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물론,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고, 또 다른 의미의 조급함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

지금 만들고 있는 다큐멘터리, 인천 인권영화제, 그리고 전미네까지.

(뭐 그것 말고도 기타등등..)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그래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스스로 아무 의미들도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두고 있었다.

고 느껴졌다.

 

'활동' 혹은 '운동' 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전의 나의 행동들은,

어떤 사건들, 혹은 사람들이 너무나 따갑도록 나에게 스며들어와서,

마음을 던지고 상처를 받고 부딪히면서도,

온 몸을 움추리고서라도 뚜벅뚜벅 열심히 걸어왔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돌아보면 나는 한숨도 안나올만큼 왕바보였던 적도 많고,

너무나 어리석었던 적도 많았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완전히 그렇진 않았겠지만 대체적으로는....;)

 

그 쓰라림, 그 따가움들, 그 고독과 괴로움들은

내가 그만큼 마음을 다했기 때문이었다고,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참 지나고 난 뒤에 어이없이 눈물을 팡팡 쏟기도 하고,

영양가가 있든 없든, 말이 입안에서 뱅글거릴 새 없이 터져나오기도 했던 것이라고.

 

그런데 올해는 무슨 마가 꼈던걸까.

나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무엇이든 내가 온 마음을 다 쏟아도 모자란 일일텐데도,

아무것도 마음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것 같다.

물론 올해 만나는 것들이 유난히 낯선 것들이 많아서, 경계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이상 상처받지 않으려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계속, 제3자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타인을 타인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되었다.

그것이 지금은 좀 쓰라리다.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이,

지금 나에게 더 쓰라린 것은

마음은 마음대로 흐르게 하고, 서로는 서로에게 흐르게 해야한다는 마음이 들어서일게다.

나름의 반성이랄까.

이미 내 마음에는 대운하가 만들어져 있었엉 엉엉ㅠ_ㅠ

이명박을 욕할게 아니야 엉엉, 아니 그래도 다른 차원에서 욕은 좀 하겠지만-_-;;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특정한 관계/상황에서 괴롭거나 짜증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결국 나의 문제다.

나의 상태의 문제.

 

그리고....

지금 한번, 반성한다고 해서,

한꺼번에 무언가가 확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단순하고 뭉뚱그려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의 조건에서 발을 딧고 고민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의 어른이 되려면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 처음을 밟고 있어서 뱅글뱅글 어지럽고 울렁증이 오는,

자꾸만 넘어지고 걷는 것 조차 서투른 상태.

그런 상태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무엇이든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이 핵심이라는 건, 버릴 수 없다.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괴롭고 부끄럽다.

아마도 살면서 계속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그 깨달음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나는 너무나 좁은 마음을 갖고 있다.

더 많이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물론 늘 욕망하는 것이긴 하지만;;;)

마음을 다 하면 무엇이든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계속 가지고 있고,

점차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해보면 나는 주변에 참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내가 꼿꼿이 잘 서 있을 수 있다면,

아니,

내가 소리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때려주거나, 붙잡아주거나, 다독여 줄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다.

내가 잘 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무려 때려줄 사람도 좀 많은 듯.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다.

나는 언제나 나의 편견과 마주치게 되겠지만,

편견을 깨닫는 순간을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고,

내가 온갖가지 편견에 둘러쌓여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편견을 깨달았다고 말을 하면

나를 떠나지 않고, 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것을 믿는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다.

 

 

 

음..

솔직히 말하면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공개로 할까 비공개로 할까 계속 고민중-_-;;

왠지 아는 사람은 다 볼 것 같은 진보넷 불로그에다가

이런 부끄러운 짓거리를 공개한다는 것이-_-;; 게다가 실명거론하며...;

아직도 좀 껄끄럽기는 하다;;;

 

음..

그래도,

말을 시작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말한다는 것은 말의 시작임과 동시에 마음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을 해 놓으면,

내가 나태해지려고 할 때 더 많이 부끄러워져서

안그럴려고 하지 않을까...? 뭐-_-;; 반대로 아예 마음을 닫고 막가버리거나 할 수도 있지만;;;

음...... 그러면 역시 와서 때려줄 사람이 있겠지-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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