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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노동안전

  • 등록일
    2008/12/18 10:50
  • 수정일
    2010/09/13 12:35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는 지난 12월9일 발표를 통해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경기 도중 부러진 야구방망이에 따른 선수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노사가 합의한 조치는 모두 9개로, 리그 사무국(사용자)와 선수노조(노동자)로 꾸려진 ‘안전보건자문위원회(Safety and Health Advisory Committee)'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안전보건자문위원회는 경기중 야구방망이 파손에 따른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단풍나무 및 자작나무 재질 배트의 적정 나뭇결 각도 기준 준수 △배트 손잡이 부분의 잉크표시 △배트 손잡이 부분의 나뭇결 경사각 점검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인공마감(페인트칠 등) 금지 의무화 △모든 배트에 일련번호 부여 및 제조업체 생산기록 보관 △리그사무국의 배트제조업체 생산공정 감시권한 부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생산공정 마무리 단계의 야구방망이. 과거에는 주로 물푸레나무가 사용됐으나, 요즈음에는 단풍나무 배트가 가장 애용된다. 이밖에 자작나무, 대나무 재질도 생산된다.

 

안전보건자문위원회는 노사 동수(각 8명)으로 구성됐으며, 노사는 8명 범위에서 관련 전문가 등을 참여시킬 수 있다. 선수노조에서는 전문가 이외에 존 벅(캔사스시티), 아론 하일만(뉴욕 매츠) 등 현역선수도 위원회에 참가했다.

위원회는 2008년 7월~9월 사이에 메이저리그 경기 도중 부러진 배트 2,232개를 모두 수거해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2,232개의 파손 배트 중 756개가 ‘두 동강’ 정도가 아닌 ‘산산이 부서진 경우’에 해당했다. 위원회는 이 756개의 배트를 조사한 결과 두 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배트의 나뭇결 각도’가 파손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과, 단풍나무 배트가 파손될 가능성이 물푸레나무 배트보다 세 배나 더 높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아울러 ‘배트 나뭇결의 경사각’에 문제가 있는 단풍나무 배트는 같은 결함을 가진 물푸레나무 배트보다 파손가능성이 네 배나 높게 나왔다.

 

[사진] 단풍나무 배트의 전형적인 파손사례. 마치 창처럼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날아간다.

 

배트파손 사고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높아진 것은 올해부터였다.
특히 이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사건은 지난 4월26일 벌어진 LA다저스와 콜로라도 록키스의 경기였다. 콜로라도의 강타자 토드 헬튼의 방망이가 부러지며, 수잔 로즈라는 관중을 강타한 것이다. 수잔은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고 구단에 보상을 요구했지만, 구단은 난색을 표하며 갈등이 일기도 했다. 이외에도 주루코치와 주심 등이 부러진 단풍나무 배트에 맞아 부상을 입는 일이 속출하며 ‘규제방안’에 대한 논의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진] 관중석으로 튄 배트 파편에 놀라는 관중들(오른쪽)과 날아든 배트 파편에 부상을 입은 심판(왼쪽). 그나마 빗맞았기 때문에 이정도의 부상에 머물렀을 뿐, 정통으로 날아들 경우에는 생명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위원회의 권고안에서 알 수 있듯이, 배트파손 사고의 위험성을 가중시킨 것은 ‘단풍나무 배트’다. 메이저리그가 규정하고 있는 야구방망이 관련 내용은 ‘둥근 모양에 하나의 나무재질로 만들어져야 하며, 굵기와 길이 규격을 준수할 것’만을 규정하고 있다. 홈런이 연봉과 직결되는 야구환경이 조성되며 선수들은 ‘더 많은 홈런’을 뽑아내기 위해 배트와 공이 닿는 지점(헤드)이 더 굵은 배트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게 규정’을 준수해야 했기 때문에 손잡이 부분을 더 얇게 하는 우회로를 찾아냈고, 기존에 널리 쓰이던 물푸레나무 배트 손잡이로는 굵어진 헤드부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바로 ‘단풍나무 배트’다.

 

배트 제조업자 샘 홀먼이 ‘단풍나무의 단단한 재질’에 착안해 생산하기 시작한 단풍나무 배트는 ‘역대 최다홈런 기록 보유자’ 베리 본즈가 1999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본즈가 새로운 배트와 함께 더 빠른 속도로 홈런을 양산하기 시작하자 단풍나무 배트도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지금은 전체 선수의 60% 이상이 단풍나무 배트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단풍나무 배트의 보급이 늘어날수록, 그 부작용도 함께 커졌다. 기존 물푸레나무의 경우 배트가 부러지더라도 그저 ‘두 동강’나는 수준이었던 반면, 단풍나무 배트는 날카로운 결이 살아있는 여러 조각의 파편이 창처럼 날아간다. 손잡이가 얇아져 부러지는 빈도도 높아졌다. 빙글빙글 돌며 멀리 날아가던 단풍나무 배트 파편이 그라운드에 다트처럼 박혀있는 장면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러진 배트가 선수와 심판, 관중 모두에게 ‘살인무기’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선수들 사이의 ‘자율규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기록’이 곧 ‘연봉’을 좌우하는 구조에서 ‘더 많은 장타의 유혹’은 떨쳐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리그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함께 위원회를 꾸려 연구작업에 돌입, 이같은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위 9가지 기준은 2009년 시즌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사진] 그라운드에 다트처럼 박혀있는 단풍나무 배트 조각. 바닥이 아닌 사람을 향해 박혔을 경우 어떻겠는가.

 

이 소식을 접하면서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더 많은 홈런과 장타’가 ‘더 많은 관중과 수익’을 보장하는 야구경기에서, 그 수익의 수혜자들이 규제방안 논의에 착수하고 합의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물론 단풍나무 배트를 추방하지 않는 이상 유사한 사고는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이번 위원회의 권고가 만족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야구선수의 ‘건강권’을 개인의 보양식품에 의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면 부러울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산업안전 관련법과 제도가 기업의 수익성 논리에 갇혀 있는 것과도 유비된다.

 

두 번째 놀란 점은, 어쩌면 리그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사안을 결정하기 위한 위원회가 노사 동수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그만큼 리그 사무국이 (좋던 싫던) 선수노조를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체결하는 단체협약에는 최저연봉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선수협의회’를 구성했다는 것 만으로 계약해지를 단행했던(그것도 보도자료까지 뿌려가며) 한국야구위원회는 이런 소식을 접하며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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