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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 - La Rusaism

  • 등록일
    2008/02/29 13:46
  • 수정일
    2008/02/29 13:46

라루사이즘의 등장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토니 라루사 감독은 올 시즌에도 투수를 8번 타순에 기용할 뜻을 밝혔다.

 

"I've already answered this like 10 times," he said. "On-base percentage. That's the No. 1 priority. We're not going to have a guy that's going to steal bases like Rickey [Henderson] or Vince Coleman. ... The other thing is we're going to have the second leadoff as the ninth-place hitter, when we put the pitcher in the lineup."

 

실제로 그는 지난 시즌 막판 두달동안 투수를 8번 타순에 배치하며 더 많은 득점을 뽑아냈다. 이같은 결과가 반드시 투수타순의 이동에 따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투수가 9번 타순에 위치했던 106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34점 득점을 기록한 반면 8번 타순에 배치했을 때에는 4.64점을 득점한 것만은 사실이다.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기도 한 라루사 감독의 이같은 '모험'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요즈음에야 상식처럼 여겨지는 '1이닝 마무리 체제' 역시 그의 작품이다. 라루사는 오클랜드 감독 시절이던 1988년 훗날 'La Rusaism(라루사이즘)'으로 불리게 된  '1이닝 클로저 시스템'을 도입했다. 즉 불펜에서 가장 강한 투수를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의 9회에만 등판시켜 승리를 지키는 방식이다. 오늘날 야구의 상식처럼 통하는 '마무리투수'의 등장이었다.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은 데니스 에커슬리는 사이영상과 리그MVP를 석권했고,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다. '1이닝 클로저 시스템'은 전 구단으로 퍼져나갔고, 70년대(71-80)를 통틀어 17명에 불과했던 30세이브 이상 투수가 90년대(91-2000) 들어서는 133명으로 늘어났다. 70년대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5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투수도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는 좋은 친구이고, 또 하나는 좋은 구원투수진이다"

 

1950년대 뉴욕 양키스의 독주를 막은 유일한 팀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투수 발 레몬은 불펜(구원투수진)의 중요성을 이같이 표현했다.

이 말 속에 '라루사이즘'의 함정이 있다. '1이닝 클로저 시스템'이 잘 굴러가기 위해선 강력한 불펜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감독이라면, 7회 1점차로 앞선 수비상황에서 2-3루에 주자가 나가있을 경우, 어떤 투수를 투입할 것인가. 상식적으론 '가장 잘 던지는 구원투수'를 내보내야 하겠지만, 라루사이즘은 9회를 위해 불펜에서 가장 강한 투수 - 클로저를 아낀다. 대신 셋업맨이 투입된다.

실제로 '특급마무리 투수'가 있는 메이저리그 팀에는 예외없이 걸출한 셋업맨(중간계투)이 존재한다. 클로저에 앞서 나와 구장을 깨끗이 정리해주는 '마당쇠' 셋업맨 없이는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스톤 레드삭스의 젊은 클로저 조나단 파펠본 앞에는 '안보고 던지는 투수' 히데키 오카지마가 있었다. 

 

"일단 등판하면, 제가 누구인지 알아채기 전에 내려와야 하는게 제 일이죠"

 

워싱턴 내셔널스의 좌완 셋업맨 레이 킹이 자신의 역할을 두고 한 말이다.

투수의 분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과거 '선발보다 못던지는 투수'로 여겨졌던 클로저와 셋업맨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뤄지기 시작했고, 이들의 연봉 역시 큰 폭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클로저를 평가하는 '세이브' 기록과 함께 셋업맨을 평가하기 위한 'Hold'가 새롭게 추가됐다.

홀드는 [1]3점 이내로 앞선 상황에 등판헤서 최소 1이닝 이상을 던지며 리드를 지킨 경우 [2]점수차와 상관 없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 등판해 3이닝 이상을 던진 경우 [3]2점 이내로 앞선 상황에 등판해서 1아웃 이상을 잡아낸 경우에 각각 얻을 수 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승리의 순간, 혹은 그 뒤에도 조명을 받는 것은 언제나 선발투수이거나, 마지막 순간 공을 던진 클로저다. 때론 가장 결정적인 순간 등판해 한두타자를 승부하며 팀의 리드를 지켜낸 셋업맨은 평가절하된 적이 더 많았다.

모든게 '라루사의 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투수의 분업화와 이에 따른 경기의 질 향상, '능력이 떨어지는 투수'로 평가절하 됐던 중간계투의 자아실현과 신분상승(?)이 이뤄지기 까지는 그의 획기적인 실험이 일정정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라루사가 이제 새로운 실험에 나선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번 시즌에서 드러날 것이다. 개인적으론 라루사식의 '조용한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미국에서 가장 신사적인 팬이라는 세인트 루이스의 구장분위기가 늘 뭔가 심심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라루사 감독의 이 실험을 응원한다.

 

100년동안 9번 타순에 배치돼왔던 투수. 그냥 예전처럼 9번에 둔다면 성적이 안나와도 감독이 욕먹을 일이 없을 것을, 라루사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겠단다. 만일 8번 타순에 투수를 배치해 예전과 같은(혹은 그보다 나은) 승률을 기록하지 못할 경우, 대부분 보수적인 야구평론가들은 그의 실험을 '실패'로 단정하고 수많은 비판글로 공격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라루사 감독의 '과학적 상상력'(나는 감히 이렇게 부르고 싶다)'은 이 실험을 결행한다.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것이에요"

로자 룩셈브룩은 말했다.

 

 



클로저의 소양 중에 '강심장'을 뽑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팀이 근소하게 앞서거나, 위급한 상황에 투입되기 때문에 자신의 구질과 제구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철벽 마무리'로 활약했던 브래드 릿지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라이언 브라운에게 끝내기 3점 홈런을 맞은 뒤 인터뷰에서 "슬라이더는 제 필살기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슬라이더를 던질 겁니다. 제 슬라이더를 받아치다니, 제가 더 놀랬습니다"라고 답했다. 자신의 주무기에 대한 이정도의 자신감이 있어야만 클로저가 될 수 있나보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게 사람 일.

릿지는 2005년 46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42개의 세이브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보냈지만, 그해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강타자 알버트 푸홀스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함정에 빠지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팀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만, '푸홀스의 악몽'을 극복하지 못한 릿지는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다시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침몰당했고, 마무리로서의 자신감도 홈런볼과 함께 담장을 넘어갔다.

결국 2006년 32개의 세이브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2007년 급격한 난조를 보이다가 마무리와 중간계투를 오가며 19개의 세이브를 기록한 뒤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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