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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관련

 


- 현 단계 노동운동의 발전전략 -

사회적 노동운동을 위하여








2004년 6월

1. 노동운동은 어디에 와 있는가?


가. 주도권확장 국면에서 부딪친 암초


 87년 민주노조운동의 본격적인 출발 이후 노동계급은 험난한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95년 말 민주노총의 결성은 민주노조운동이 실질적으로 시민권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비록 노동조합이라는 일면적인 조직형태에 의존하였지만 노조를 거점으로 하여 계급적 요구를 표현하고 관철시켜 왔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조를 통해 ‘굴종의 사슬을 끊고’ 인간선언을 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노동계급의 주도권 하에 바꾸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에서 본다면 비합법 혁명운동이 실패하고 노조라는 일면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온 상태를 넘어서 사회적인 대안을 가지고 사회자체를 바꾸는 과제로 나아갈 것을 요청 받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존재를 인정받자 마자 노동계급은 새로운 암초를 만나게 된다.

 96년부터 시작된 정리해고의 도입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국제경쟁력’ 논리속에서 한국에도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세계화의 폭력적인 관철과정으로서 경제위기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아주 작은 출발에 불과하였다.  아시아의 금융위기속에서 한국 또한 외환위기와 함께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들어섰으며 그것은 곧 자본의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역공세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이 이제 갓 인간선언을 하고 ‘조합주의적 국면’을 활짝 열고 새로운 장으로서 사회적인 주도계급으로 발전하기 위한 ‘헤게모니적 국면’을 열어야 할 시기에 채 꽃을 피우지 못하고 공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의 역공세는 노동자들의 뿌리를 흔들어 노동계급의 해체를 겨냥하여 노동자를 중층화, 분열시키고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계급의 분열을 막아내고 사회적 주도계급으로서 자신을 확대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아직 노동운동은 좌표를 분명히 세워나가지 못하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 바로 현재의 노동운동의 상황이다.

 

나. 노동운동의 변화를 위한 두 가지 시도와 실패


 노동운동은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노동운동의 변화는 시도되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민주노총의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의 활동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전략위원회의 구상이 제출되었으나 지역별 순회토론 등을 거치면서 그것은 한갓 ‘구상’을 넘지 못하고 좌초 소멸되고 만 것이다.

 두 번째의 시도는 ‘산별운동’이다.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라는 양날개를 향한 노력이 구조조정시대의 대안으로 제출되었다.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고 산별노조는 보건의료나 금속노조의 건설로 나타났다.

 산별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대안으로서 민주노총 또한 산별시대를 꿈꾼다. 그러나 산별운동은 전진보다는 정체상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성패를 논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2012년 집권을 꿈꿀 만큼 민주노동당은 희망이 부풀어 10명의 국회의원으로 메스컴을 장식하고 있지만 아직 누군가의 표현처럼 이제 민주노동당은 ‘장롱면허’가 아니라 본격적인 ‘실전운전’을 시작하였으며 이 초보운전자가 얼마나 교통사고를 낼 것인지는 아직 시험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다. 노동운동의 발전을 둘러싼 두 가지 경향 - ‘국민주의’와 ‘계급주의’


 위 두 가지의 노력은 노동운동내부의 견해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의 확립으로 나아가기 보다 이견들을 더욱 더 확실히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노동운동에 늘 나타나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은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주장은 한편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적 운동을 넘어서 사회적인 주도계급으로 나서기 위하여 국민속으로 헤게모니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주장은 격렬한 구조조정의 시기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계급적 관점이 불확실함을 증명하면서 좌초된다.

 국민파로 분류된 ‘배석범 민주노총 직대체제’는 정리해고를 합의함으로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결정타를 입게된다. 또한 현대자동차의 6대 집행부가 내세운 ‘국민주의’적 편향은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진행된 구조조정기에 격렬한 노자대립의 상황에서는 관념적이고 계급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국민의 눈치보기’로 비판되었다. 노동자들은 국민의 눈치를 볼 여유가 없이 정리해고라는 격렬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현대자동차에서 98년 정리해고는 바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계급주의’의 한계와 균열이다.

 노동운동의 좌파활동가들은 구조조정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을 중심으로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합의에 강력한 행동으로 비판하였으며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에 맞서 계급적 원칙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전선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사퇴한 민주노총 지도부를 대신한 단병호 직무대행의 파업철회, 우여곡절을 통해 등장한 이갑용 집행부의 한계와 노사정위 참여 등으로 무너진 전체 전선 속에서 이제 전투는 각 개별사업장의 투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된다. 만도기계, 현대자동차, 발전투쟁 등 수많은 투쟁을 경과하면서 강력한 투쟁을 통한 돌파를 주장한 좌파들의 경우도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거나 한계를 드러냈다.         

 이 구조조정기의 투쟁을 거치면서 좌파내부 또한 분명하게 분화된다. 대체로 원칙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려는 경향과 구조조정투쟁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우회로를 찾게 되는 경향의 등장이 그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회적 경향은 산별노조를 강력한 대안으로 제출, 2000년 이후 힘을 발휘하여 왔으나 금속노조의 정체 등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있다. 원칙적인 태도을 가진 경향은 이렇다할 대중적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힘이 약화된다.


  2004년 노동운동은 표면만 본다면 이제 민주노총의 4기 집행부체제가 등장하면서 계급주의적인 노선보다는 타협적인 노선들이 강화될 것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집행부의 등장은 과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부활과 승리라는 측면보다는 계급노선의 실패의 측면이 훨씬 크다. 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의 실패와 정규직 대공장 노조들의 실리적인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은 정규직의 실리주의를 배경으로 민주노총의 우경화 가속화가 결합되고 여기에 노무현정권의 로드맵이 힘을 발휘한다면 장기적인 체제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일면적인 지적이다. 이런 평가에 기초하여 소위 좌-우 대결로만 인식한다면 민주노총의 우경화에 맞선 범좌파단결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계급주의를 표방한 범좌파 연합이 기존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채 지도력을 상실했다는 측면을 잊어선 안된다. 이를 잊고서 다시 낡은 사고법에 기초하여 대안을 세우려 한다면 그 결과는 ‘권력쟁패’만이 남을 것이다.

 4기 민주노총 지도부의 경우 분명한 전략적 대안을 제출하기보다는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적 상태에서 우경화 가능성과 동시에 과거 노조운동의 낡은 틀을 해체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흔들리는 노동운동의 자화상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아직 본격적인 형태로 대안적 방향이 제출되는 상황은 아니다. 아직 체계화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흐름들이 감지된다.


가. 이미 생명을 다했으나 아직 청산되지 못한 ‘깃발론’


 “ 과거에는 깃발을 들고 ‘따르라’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조합원들의 분노가 있었기에 투쟁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2004년 5월에 만난 현대중공업의 한 활동가의 고백이다. 분명 이런 식의 깃발론으로는 현재의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낡은 깃발론은 청산되고 있는가?

 2004년 열사정국에서도 이런 류의 모습이 여전히 드러난 것이 아닐까? 애초에 두산이든 한진이든 혹은 세원이든 사업장들의 투쟁은 조합원들의 다수를 결집시키지 못한 한계가 드러났다. 열사들은 이 한계를 안고 보다 강력한 선도투쟁으로 몸을 던지면서 조합원들을 결집시킨 측면이 있다. 더욱이 열사들의 죽음 앞에 민주노총의 경우 총파업의 선언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선도적인 투쟁의 선언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대중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2003년 11월9일의 강력한 가두시위 또한 노동계급의 분노를 담은 것이라고 하지만 대중적인 투쟁의 확산의 계기 보다는 선도투적인 성격을 넘지 못하였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총의 선거에서는 ‘문제는 힘이다. 힘있는 민주노총건설’이라는 주장은 낡은 투쟁노선의 반복으로 비춰지고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는 4기 집행부가 탄생하였다.

 아직 깃발론은 제대로 극복되지 못한 것이다.

 구조조정투쟁의 결과 현장의 정서는 투쟁에 대한 전망을 잃고 실리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어보았자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이런 류의 투쟁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관성적인 동원투쟁은 간부들의 자족적인 투쟁으로서 뭔가를 했다는 면죄부를 주는 의미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현장의 조합원들의 투쟁을 촉진하거나 대중투쟁의 확산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투쟁은 전혀 아니다.    


 나. 현실영합으로서 ‘담합적 노사관계’

 

 ‘구조조정의 악몽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는 조합원의 경향’ 즉 실리주의가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은 이제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의 분석도 매우 안이한 것이고 또한 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조합원들의 경향만을 지적하는 수준에서는 포괄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조합원들의 이런 경향은 확장되어 새로운 사슬고리를 만들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사슬고리속에서 조합원들의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다.

 그 사슬고리는 ‘조합원들의 실리적 경향 + 회사의 지불능력 + 관리되는 활동가조직 + 노조의 적절한 실리충족에 기초한 지위유지’가 결합되어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체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고착화 가능성도 엿보이게 한다. 대기업의 지불능력에 기초하여 조합원들은 현금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노조는 적절히 실리를 안겨다 줌으로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함으로서 일종의 노사간 담합구조가 형성되어 나가고 있다. 몇 몇 대공장들의 상황은 이런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KT, 지하철, 현중, 대우조선 등)

  활동가조직들은 이런 경향에 맞서서 일부 저항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활동가조직의 이런 저항도 사실은 노조권력을 둘러싼 정쟁으로 낙인찍힌다.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 조직 또한 담합적인 노사관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그놈이 그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상당수의 활동가조직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사측과 관계하고 있으며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사측으로부터 일정한 편의를 제공받기까지 한다.

 ‘담합적 노사관계’는 철저히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기업에서 나눈다. 아쉬울 것이 없는 대공장의 성(城)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대공장의 노조는 상급단체에 대하여 어떤 아쉬움도 갖지 않으며 언제든지 탈퇴를 협박한다. 

 이런 경향들은 심지어 전국적 차원의 위험스런 구상으로까지 발전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일부 대공장에서 소위 ‘전국차원의 제4 세력의 구축’을 위한 행보들이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이런 취약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노정관계 등 사회적 논의구조는 아마도 유럽식의 사민주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그야말로 포섭된 노동자들의 정부에 빌붙기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

 또한 담합적 관계는 이미 중층화된 노동자들의 분할을 고착화 할 것이다.

 “ 조합원들이 생각하는 미래요?  아마도 고령화되어 나이가 들면 젊은 비정규직을 몇 명 관리하는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지요”

 모 자동차공장의 대의원이 고령화되는 정규직의 미래에 관하여 조합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무엇인가를 묻자 내놓은 답이다. 결국 정규직의 경우 비정규직의 관리자로서 자기전망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전망이 성공할 것인가는 별도로 따져야 할 것이지만 대공장의 ‘담합관계’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 무기력한 ‘초심론’


 노동운동이 우려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활동가들의 도덕성을 문제시하면서 활동가나 노조의 ‘윤리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운동의 타락을 경고하는 사람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담고 있는 애틋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활동가들이나 노동조합의 잘못된 관행이나 이미 몇 개의 노조에서 발생한 비리들은 철저히 규명되고 또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혹은 당위적인 선언만으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노동운동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이 없다면 무기력한 주장에 그칠 뿐이다. 

 

라. 희망처럼 떠오른 ‘정치시대론’의 함정.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크게 고무된 분위기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분명 이는 상당한 진척이고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 민주노동당의 미래에 대하여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미 출발에서부터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함정이 도사린다.

 

 첫째로 이미 실패한 역사가 재발될 가능성이다.

 ‘노조시대에서 정당시대로’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자칫 낡은 사회주의운동의 이론을 그대로 반복 할 수 있다. 경제의 상위개념으로서 정치를 말하고 경제주의를 지적하면서 정당을 통한 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국가를 장악하여 사회전체를 재편한다’는 국가주의적인 관념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작업장투쟁이나 현장조직력문제는 경제주의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경쟁적으로 민주노동당내에서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만이 전개되고 현장은 더욱 방치,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권력경쟁에 곧바로 염증을 느끼는 상황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제와 정치에 대한 낡은 이분법은 버려야 한다. 작업장의 문제, 조합원의 정서 문제는 단순히 하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이다.

 

 둘째로 허약한 계급적 기반의 문제다.

 앞서 밝힌 바 실리주의가 확대되고 이것이 ‘담합적 노사관계’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왜곡된 노정간 타협체제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설 자리는 너무도 뻔한 것이다.  그것은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이 ‘제 3의길’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옮겨간 것 보다 훨씬 못한 수준에서 제도화와 자본주의로의 자발적인 포섭으로 나갈 가능성을 보여 준다.

 

 셋째, ‘밀어내기’에서 ‘길들이기’로 전환한 보수집단의 전략

 ‘초보운전자’ 민주노동당에 대한 선생은 누구일까? 애초에 보수집단은 진보집단의 등장을 막고 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밀어내기를 해 왔다. 반공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가지고 밀어내기를 해 왔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운동권 문화를 버리고 이제 이 사회의 책임 있는 주류중의 한 부분으로서 민주노동당도 문제제기만 하지말고 책임을 져라. 밥 얻어먹던 관성을 버리고 이제는 밥값을 내라’는 요지의 조선일보 사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좌파밀어내기’에서 ‘좌파길들이기’로 전환한 보수집단은 끊임없이 ‘초보운전자’ 민주노동당을 훈련시키려 할 것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일관성을 견지할 수 있는가하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적 능력의 문제이다. 과연 약화된 노동계급이 보수집단의 길들이기를 물리치고 민주노동당을 자신의 계급적 부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다.


라. 대안부재의 무기력 속에 탄생하는 ‘외적 충격론’


 “ 대공장의 현장 상태를 바꾸는 게 가능하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외적 충격속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한 대공장노조의 활동가의 얘기다. 그가 말하는 외적 충격이란 뭘까? 아주 극단적인 것이다.

 “ 현재의 노무현 정권 마져도 외국언론이 보기에는 좌파정권이며 김대중 이후 보수집단은 노무현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에 충격을 먹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를 뒤집고자 할 것이다. 한때 문제가 된 이화여대의 김용서라는 꼴통 보수논객은 지금은 좌파가 국가를 장악한 혁명적 상황이라면서 군부의 쿠테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보수집단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 재탈환을 하고자 하며 만약 경제가 어려워지고 혼란이 발생한다면 이 틈을 타서 치열한 권력쟁패에 나설 것이며 이 과정에서 희생양은 노동조합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반공을 중심으로 공안정국을 만들어 왔다면 이제는 노조를 희생양으로 하여 우익파시즘이 등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조가 완전히 박살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겠냐”

 정말 극단적인 판단이다. 물론 극단적인 이 시나리오의 현실화 가능성도 문제지만 더 문제인 것은 대안을 찾지 못해서 극단적인 ‘외적 충격’을 말하는 이 활동가의 극단적인 비관주의다.

 물론 이런 극단주의가 아닐지라도 현재 ‘외적 충격론’은 이미 실행 중에 있다. ‘노동운동 이대로는 안된다’며 공격을 퍼붓고 ‘대공장 고임금론’을 들먹이고 ‘대공장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에게 주자’는 식의 공격들이 그것이다.


  마. 제로섬게임으로서 노동운동 ‘내부권력경쟁’의 격화


 미래가 불투명한 조합원들이 실리를 중심으로 모인다면 활동가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모이는가? 현재의 일반적인 답은 ‘노조권력’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운동의 미래를 향한 전략적 대안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남은 것은 계파간의 치열한 노조권력 경쟁이다. 2004년 민주노총의 선거도 과거의 어떤 선거보다 파벌을 분명히 하는 선거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영역에서의 권력경쟁의 장이 새로 열려 권력게임은 더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권력경쟁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경쟁이 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퇴보시키는 제로섬 게임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각 종의 선거에서 대공장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앞다투어 대공장 모시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담합적 노사관계’의 경향이 강화되는 대공장노조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기보다는 오히려 득표를 위하여 ‘대공장노조 모시기’ 경쟁은 대공장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이를 용인함으로서 나쁜 경향을 확대하고 있다. 

 매우 예민한 문제이지만 박일수 열사투쟁과정에서 현대중공업노조의 징계문제와 기아차의 해외연수관련 문서위조를 둘러싼 처리과정에서도 이런 위험한 경향들이 증대되고 있다.

 조직간의 노조권력을 둘러싼 경쟁은 노동운동에 대한 이렇다할 지도노선과 주체를 세우지 못하는 낡은 계파들의 소멸을 예고하는 최후의 모습으로 평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낡은 정파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도노선과 대안세력이 출현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정파라고 하더라도 현재 노동운동의 상황에서 모두 발가벗고 서 있다는 것이다. 

 


3. 작업장혁신을 위하여


가. 그림자현상과 작업장 혁신


 왜 작업장 혁신을 제기하는 것인가?

 단순하게 말한다면 계급해체와 계급내의 계층화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노동운동의 발상의 전환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작업장 혁신을 제기한다.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이다. 정규직 노조의 이권화와 주변부 노동자로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투쟁이 분리되어 있고 이 현상에 기초하여 자본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분할통치를 한다.

 좀더 좁혀보면 정규직 대공장과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의 격차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산업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산업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더 좁힌다면 정규직 내부의 불평등 구조 또한 매우 심각하다. 가장 손쉽게 확인되는 것은 수당을 둘러싸고 힘든 작업과 쉬운 작업자 사이에 불평등에 대한 불만들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평등의 원리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공장간에도 물량을 둘러싼 경쟁들이 발생한다. 정규직 작업장내에서의 불만들의 처리는 일정한 원리에 근거하여 해결되기보다는 ‘목소리 큰 현장조직이나 활동가의 편의 봐주기 차원에서 해결된다’는 지적마저 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상황을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 광원(빛) 앞에 물체를 두고 비추면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림자가 커지는 현상에 비교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가족관계에서의 가부장성, 정규직내의 위계적 사고방식,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이라는 점점 커지는 간극을 발견한 다.

 


 물론 모든 문제를 다 작업장 내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작업장 혁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세력화나 계급운동을 말하는 것은 관념적 당위로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임금따먹기, 실리주의적 사고방식들을 낳은 작업장의 기반들을 근본적으로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 작업장에 대한 도구주의적 사고들


 우선 작업장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특히 작업장에 대하여 기존의 입장들은 도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첫째, 자본의 입장에서 본 작업장은 이윤창출의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핵심적인 개념은 ‘생산성’이다. 산업안전 등은 보조적 개념에 불과하다. 자본이 시행하는 모든 작업장운동의 핵심은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력이며 이를 위하여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둘째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도구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뿌리박혀 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은 ‘돈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에 불과하다. 이런 의식 속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생겨난다. 즉 한편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인 잔업특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쉬고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작업장 기피현상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노동시간단축’이라는 요구와 ‘자발적 특근의 증대요구’라는 모순된 현실에서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잔업특근 없는 ‘수요가정의 날’을 실시하고 특근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강제하려 하지만 조합원들의 반발로 인하여 잔업특근을 인정한다. 이 문제를 과연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당위로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런 접근은 해결의 실마리가 아니라 오히려 딜레마를 더 가중 시켜 왔다는 점이 증명되고 있다.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미래가 불투명한 조건에서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잔업특근의 증가요구’가 급증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활동가들이 잔업특근을 하는 것은 문제다” “잔업특근에 합의해 주는 대의원들은 맛이 간 놈들이다” 는 평가는 대책 없는 당위에 불과하며 현실은 이 당위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에 기초하여 전략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대책은 없다. 당위를 주장하면 오히려 조합원들로부터 배척 당할 것이며 조합원들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자발적 노동력 동원을 통해 자본에 속박 당하게 된다.


세 번째는 운동적 도구주의다.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작업장은 조직력이 만들어지는 원천이다. 수많은 현장활동가들이 ‘현장조직력 강화’를 외치고 심지어는 ‘현장권력쟁취’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무엇이 현장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현장의 조직력을 약화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속에서 대안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현장을 ‘운동이라는 목적’에 근거하여 수단으로 보는 경향들이 많다.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기술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현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조집행부나 대의원에 당선되기 위하여 현장활동을 하는 순간, 작업장 자체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은 사라지고 기술적으로 현장조합원을 만나서 조직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열심히 조합원의 경조사에 쫓아다니고 술자리를 통해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현장은 점점 활동가와 간부들에 의하여 도구화되고 그럴수록 조합원들은 간부들과 괴리되고 왜곡된 활동가와 조합원의 관계가 만연해 진 결과 대리주의적인 정치가 정착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모든 도구주의적 관점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 극복함으로서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다. 새로운 개념으로서 작업장


 그렇다면 작업장에 대하여 새롭게 정리되어야 할 관점은 무엇인가?


 첫째로는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보아야 한다.

 작업장을 협소한 경제활동의 공간, 즉 단순한 노동과정으로서 보는 것을 벗어 던져야 한다.  통상적으로 노동자들의 전 생애를 통틀어 볼 때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작업장이다. 1년 8,760시간 중 2002년을 기준으로 볼 때에 현대차의 노동자들은 순 노동시간이 2,700시간이 넘는다. 여기에 순 작업시간을 제외한 작업 준비 및 휴게시간을 포함한다면 3,000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보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인생의 1/3이상을 공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하루 평균 7시간으로 잡을 경우 년 2,555시간을 자는 셈이다. 실제 활동하는 시간은 6,205시간이고 이중에 3,000시간 이상을 작업장에서 보내는 셈이니 취업 전과 취업 후를 제외한 인생의 절반이상을 작업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가장 자주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어 가는 곳 또한 작업장이다. 혈연과 지연 같은 주어진 인간관계와 학연과 같은 과거의 인간관계의 경우 성장기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는 인간관계이지만 실제 그 만남의 빈도 수 등을 고려할 때에 작업장에서 맺는 인간관계와 비교도 안되는 비중이다.

 여기서 맺는 인간관계란 단순한 인적 접촉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얻는 정보, 형성되는 정서, 가치관 등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이 작업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업장에서 불만족스럽다는 것은 곧 인생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업장은 곧 노동자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둘째로는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훈련과 재생산의 핵심적 공간이다.

 일단은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장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노동계급의 의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작업장에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응력을 갖춰야 한다.

 ‘주면 주는 데로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는 작업장에서 인생을 보내는 노동자들은 결코 세계의 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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