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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정세글 - 강내희

 

변혁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정세분석1)

                                                            강내희           


1. 2007년 대선 이후의 정세


지난 10년간 정권을 잡아온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 몰락하고 (신)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명박의 승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증, 사회양극화의 심화, 민생경제의 파탄 등을 빚어낸 노무현 정권이 심판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이는 개혁적 자유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은 노무현 정권이 시행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울분이 표출된 결과일 것이다. 노 정권의 실정에 대한 민중의 심판이 (신)보수적 자유주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지만, 최근 국내 정치세력들의 지형을 놓고 보면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대선 전까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에 대한 대안, 무엇보다 진보적, 변혁적, 좌파적 정치세력의 구심점이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민생파탄, 사회적 양극화, 비정규직 급증 등은 신자유주의가 자아낸 폐해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권만이 아니라 보수 세력 전반이 떠안아야 할 책임인데도 진보적 대안이 부재했던 탓에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이명박에 대한 민중적 지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지난 대선을 통해 범 보수=자유주의 진영 내부에는 대대적인 세력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 진영은 크게 보면 개혁적 성향과 보수적 성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지난 10년간 정권을 장악해온 개혁적 자유주의는 대선에서 패배했고, 2008년 4월에 실시될 총선에서도 참패가 예상되는 반면 보수적 자유주의가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부상했다.2) 세력 교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수구보수’ 박근혜와 ‘실용보수/신보수’ 이명박의 경쟁에서, 대선에서는 박근혜의 패배가 가져온 빈틈을 이용해서 다시 등장한 ‘정통보수’ 이회창과 이명박의 경쟁에서 후자가 승리함으로써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세력 교체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보수 진영 내부에서는 ‘실용보수’, ‘신보수’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하겠는데, 넓게 보면 자유주의 진영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의 전반적 후퇴 속에 보수적, 특히 신보수적 자유주의가 전면에 나서는 구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신)보수적 자유주의의 승리는 어떤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일단 근본적인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정권이 개혁적 자유주의에서 보수적 자유주의로 입장 선회가 이루어진 점만 본다면 이런 전망이 가능하다고 본다. 두 자유주의 세력 간의 근본적 차이는―양자의 차이를 강조하며 전자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보내며 지난 10년 넘게 국내 사회운동 흐름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시민운동 진영의 지배적 관점과는 달리―사실상 없었다. 두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서로 적대적이었으나 1997년 IMF 위기 이후 부쩍 강화되었고 그동안 한국 사회의 근간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을 적극 지지한 점에서는 ‘초록이 동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동일한 세력 내부에 일어난 것일지라도 이번의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권력 이동이 눈여겨봐야 할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만들어낸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신)보수적 자유주의의 승리는 우선 그동안 ‘민주개혁’을 외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온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 내부에 커다란 동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은 지난 대선에서 보수적 자유주의와의 경쟁에서 자신이 밀렸다고 보고 통합신당의 경우 과거 한나라당 소속인 손학규를 당 대표로 선출한 데서 드러나듯이 더 많은 우경화-보수화의 길을 걷는 모습이다. 물론 이런 모습은 한국 자유주의 진영의 양대 경향들 간에는 차이가 거의 소멸하고 있음을, 또는 양자의 차이가 원래 그리 크지 않았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하나의 자유주의에서 다른 하나의 자유주의로의 권력 이동이 국내 정치지형에 가져온 파장은 진보진영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개혁적 자유주의의 몰락은 그동안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해온 정치세력의 몰락도 동반했다. 민노당과 한국사회당이 지난 대선에서 각각 3.01퍼센트, 0.07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한 것이다. 12월 19일의 대선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민노당 내부, 안팎에서 당내 최대 정파인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에 종북주의 논쟁이 일고, 이 과정에서 당의 혁신, 제2창당, 신당 건설 등을 둘러싼 다양하고 첨예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동안 합법정당 운동을 해온 진보정치 세력의 패배가 가져온 충격의 파장이다. 이런 점은 한편으로는 민노당의 그간 정치적 행태가 근본적 위기를 맞았다는 점과 이제 진보정당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지난 대선의 특징 하나는 기권율이 크게 증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나라당, 통합신당 등 자유주의적 제도권 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민노당 중심의 진보정치에 대한 불신도 동시에 크게 증대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민노당은 당원들까지도 기권율이 높았고, 자당 후보에 대한 투표율도 낮아서 진보정치에서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열망이 저변에 누적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2. 이명박 시대의 전망


이명박 정권은 자유주의 세력 가운데서도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며,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 가운데서도 실용노선 또는 신보수의 길을 걷는 세력이 창출한 정권이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권은 1997년 이후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추진되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 강력하고 노골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은 ‘경제 살리기’ 약속을 통해 대선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점은 이명박이 회생시키고자 하는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 그것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라는 사실이다. 이명박 식 ‘경제 살리기’의 목적과 성격은 17대 대통령직 인수위가 밝힌 차기 정부 구성 방향과 정책 방향을 통해 이미 드러났다. 인수위는 규제가 심한 정부부처일수록 공무원 감원을 더 많이 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각종 규제 완화가 기업, 특히 대기업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는 조치임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총액출자제도, 금산분리, 수도권 개발 등 그간 있었던 기업 활동 규제는 사회적 총자본의 이익과 기업운영의 투명성 제고, 국토의 균현적 발전 등을 위해 대기업 활동에 가했던 일정한 규제들이다. 이명박 인수위는 경제 성장 즉 자본 축적을 위해 투자 활성화 등을 추진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들 규제를 전면 완화하거나 제거할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이전 정권이 보여준 친독점자본적 정책을 더욱 노골화, 전면화할 것이라는 분명한 신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경제 살리기가 과연 효과를 볼는지는 의문이다.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규제보다는 적합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투자 부분이 적다는 데 있다. 산업부분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기업자금을 금융부문, 투기부문 등에 투자하도록 길을 터면 일시적으로는 금융자본 운동의 활성화 등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현재 미국의 경우가 보여주다시피 거대한 금융공황을 만들어내고 이는 다시 산업공황을 더 한층 파국적인 것으로 만들 공산이 크다. 나아가 과잉축적 시기 기업의 공격적인 산업투자는 (IMF위기 발생 2-3년 전의 경우가 보여준 대로) 곧바로 산업공황, 과잉생산위기를 촉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식 ‘경제 살리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 사회적 공공성의 극단적 파괴가 예상된다. 이명박 시대에는 공기업의 민영화가 다시 본격화할 것이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노무현 정권에서는 일시 중단된 상태였다. 물론 이것은 노 정권이 민영화에 반대하여 생긴 현상인 것은 아니다.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의 정규직화를 거부하며 수익사업에 전념하여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공기업으로 남아 있는 경우에도 민영화라는 형식을 띠지는 않았어도 이미 광범위하게 민간 기업을 본 딴 운영체계를 수용해온 터이다. 민영화 없는 민영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시대에는 공공부문 전반에서 더욱 강력한 민영화 드라이브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 의료, 물=에너지, 주거 등 사회적 공공성을 구성하는 주요 공공 분야에서 더 강화된 시장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이명박 인수위가 규제가 심한 정부부처의 인원을 더 감축하겠다고 밝힌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명박 시대에는 국가독점을 대신하는 민간독점이 강화되고, 노동유연화를 위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빈발하고, 사회적 공공성이 극단적으로 파괴될 것임을, 이 결과 필연적으로 대중의 삶이 더욱 피폐해질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공공부문에 대한 사적 자본의 더 전면적인 침투가 허용되면 사회적 자원의 불균등 배분이 극대화되고, 대중의 삶에 불리한 소득재분배가 촉진될 것이다. 하지만 규제의 완화나 해제를 통한 경제 살리기는 사회적 자원의 파괴를 낳으면서 실제로는 사회적 비용을 추가로 증대시킬 수밖에 없다.

이명박 시대에는 금융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명박 인수위는 금산분리 정책의 완화를 차기 정부의 입장으로 내놓았다. 이는 금융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미국에서 발생한 ‘비우량신용대출’ 부실 사태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위기를 맞은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이제는 다보스포럼에서도 자본의 금융화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3)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하면 예상되는 금융공황 발생 시 금융소득자 층이 일차적 희생자들이 될 것이다.

이명박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신자유주의적 개발정책을 강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국토는 노무현 정권의 ‘국토균형발전’ 정책에 의해 그러잖아도 각 지방 자치체의 무분별한 개발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평생 ‘개발업자’로 살아온 이명박의 당선은 개발 드라이브를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이명박 식 개발은 과거 박정희 식의 개발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개발이 국가 재정에 의해 주도되는 발전주의적 성격이었다면, 이명박 식의 개발은 민자 유치 중심으로, 기업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전환될 공산이 크다. 이런 점은 이미 첨예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경부운하에 대해 이명박이 민간자본으로 건설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민자 개발은 국가 주도의 개발보다 더 큰 문제들을 야기할 것으로 전망된다. 민자로 개발한다는 것은 기업 이윤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회적 부담의 증대를 전제하는 개방 방침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심각한 생태환경 파괴가 우려된다는 데 있다.

이명박 정권의 경제 살리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의 지속과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2월 말에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2007년 4월에 타결된 한미FTA 비준 안을 통과시키기로 한나라당과 통합신당 사이에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한미FTA의 발동은 1997년 IMF 위기를 계기로 한 층 더 강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새로운 강화를 의미한다. 이번의 자유무역협정은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적 사회운영을 해온 미국과 체결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사회 제도의 국내 도입을 의미하며, 한국사회의 미국화를 의미한다. 문제는 이 미국화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있다. 지금 미국은 이미 파산상태로 들어가 있을뿐더러 자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명박 정권이 한미FTA 비준을 통해 한국경제가 미국경제로 더 깊이 편입하여 미국식 신자유주의체제를 전면화하려는 것은 국내외의 독점자본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함 이외에는 목적이 없다. 그러나 이 조치는 국내 중소자본, 영세자본의 더 한 층의 몰락을 초래하며 한국 민중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릴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경제 살리기’는 새로운 인구정책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의 경제정책은 친 기업, 친 재벌, 친 자본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설령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그 효과로 예컨대 일자리가 확대되더라도 비정규직의 한 층 더 높은 양산과 전면화를 동반하게 된다. 이미 심각해진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명품시장이 확대된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을 계속해도 빈곤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갈수록 많은 대중이 더욱 궁핍한 삶을 영위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동 운동, 기층민중 운동의 활성화는 필연적이다. 운동의 증대와 급진화가 예상될 경우 정권 초기에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포퓰리즘적 정책의 자원은 곧 바닥을 드러내고, ‘엄정한 법 집행’을 내세우며 운동에 대한 억압적 정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공황의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에서의 민중 탄압은 이전보다 한 층 더 강화된 파시즘적이고 공안적인 형태를 띨 공산이 높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이 추진해온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적 정책을 끝장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비탈길에서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는 격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를 통해 돌파하려는 자살 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미국발 세계공황이 금융적 축적의 위기를 몰고 오고 있고, 이 위기는 미국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한국과 중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세계적 대공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공황은 애초 미국헤게모니 하에서 조직된 전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자본의 과잉축적이 가져온 장기적인 구조적 불황기의 최종국면에서 나타나는 파국적인 과잉생산위기가 될 것이다.

이 와중에 이명박 정권이 경제 살리기를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 금산분리 완화를 통한 투자활성화 정책, 경부운하 건설 등의 개발 정책 등을 펴려는 것은 공황 출현을 부채질하는 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의 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 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임기 내에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지닌 제 모순들의 거대한 폭발이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현재 국민의 기대가 높을수록 모순의 폭발이 가져올 파장은 더 클 것이다. 높은 기대는 오래지 않아, 아마 2년 이내에, 거대한 실망과 분노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정치적 지형이 극도의 불안정에 빠질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높아가는 불만과 거세지는 저항을 제도정치권으로 흡수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지는 조건 속에서 저항의 증대와 억압의 강화(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전면화), 즉 거대한 사회적 적대가 형성될 것으로 판단된다.



3. 진보정치 운동의 새로운 지형


17대 대선의 결과로 한국의 정치지형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이명박 정권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화에 따른 사회적 제 모순의 폭발과 첨예한 사회적 적대의 형성이 예상되는 가운데, 진보운동에도 새로운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운동은 민족해방(NL) 대 민중민주(PD) 노선의 경쟁 속에 NL파의 패권이 관철되는 구도 속에 놓여 있었다. 현재 민주노총, 전공 등 주요 대중조직, 민주노동당, 한국진보연대를 주도하는 것은 민족주의 진영이다. 민족주의, 또는 자주파의 패권이 정점을 형성한 것은 대선 직전이었고, 이 정세가 민노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민주노동당의 참패는 NL파의 패권 구도에 파열구를 내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민노당의 지도부가 비상대책위 체제로 바뀐 것은 NL파가 대선 후보 경선에서 거의 절대적 결정권을 행사한 것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NL파를 강타함으로써 그 세력을 일단 약화시켰기 때문이다.4) 이에 따라 민노당의 현재 당권은 비상대책위를 구성한 PD 계열의 ‘평등파’가 잡고 있고 평등파의 일부는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지난 선거에서 민노당과 비슷하게 참패한 한국사회당과 지금 막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녹색당과 공동으로 당을 만들지 못하면 총선에서의 선거연대를 기대하며 진보신당을 구성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진보운동 내부에서 지금 한창 혁신과 재구성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 하겠다.

그러나 과연 이런 흐름이 한국의 진보운동에서 새로운 위력적인 흐름을 만들어낼는지는 미지수이다. NL과의 분명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 않지만 현재 민노당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혁신이나 제2창당, 또는 신당을 건설하려고 나선 세력을 보면 대체로 PD 계열, 평등파이지만 이들의 입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민주의 성격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적은 현재 비대위를 구성하며 민노당에 남아 있는 평등파 세력에게 더 적합한 것이겠지만 민노당의 대선 패배를 계기로 민노당에서 나와 지금 신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평등파 세력도 사민주의 성격의 강령을 채택한 당에 오래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쉽게 비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현재까지 진보정당 운동을 전개해온 세력 대부분이 충분한 변혁적인 자세로 당 건설 운동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과연 사민주의적 입장을 통해 오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포획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신자유주의 시기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사민주의는 비판적 세력으로서의 역할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파괴되고 있는 사회적 공공성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사민주의가 후퇴한 것이 신자유주의의 상승기였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극복보다는 일정한 통제를 통해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그 정치적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사민주의가 약속하는, 그리고 한때 스스로 일정하게 구현했다고 본 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무너졌으며, 세계적으로 사민주의를 내세우는 정당들은 더 이상 오늘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민주의는 자신을 새로운 진보의 대안으로 내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정황은 지금까지 언급한 진보정당 운동의 흐름을 넘어서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한국의 진보운동에 전반적인 혁신과 재구성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이 혁신과 재구성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것은 진보운동의 급진화이고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분명한 좌파적 전망을 지닌 운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주의적 변혁 운동은 사실 음지에서 이루어졌던 편이다. 국내 진보세력 가운데 사민주의와는 구분되는 사회주의 노선은 대체로 민노당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좌파 세력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생태운동, 문화운동 등 사회운동 곳곳에서, 비정규직 투쟁, 평택미군기지반대투쟁, 한미FTA저지 투쟁 등 한국에서 계속 제기되는 현안들에 대해 어려운 개입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 세력은 아직 정치세력으로서 통합된 전선을 형성한 적이 없으며, 사회주의를 정확하게 표방한 정당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적도 없었다. 물론 노동자의힘이나 사회주의노동자연합과 같은 정치조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들 조직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공개적인 정당운동을 추진한 것이 아니다.

2008년 초 현재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국면에서 이제 좌파 세력은 새로운 정당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2008년 1월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은 새로운 희망의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모처럼 맞은 기회이다. 이 기회는 우선 현 단계 한국사회의 진보적 과제는 ‘민주개혁’에 있음을 주장하며 가까이로는 지난 10년간 정권을 장악해왔고, 좀 더 멀리는 지난 20년 넘게 진보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의 붕괴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개혁적 자유주의는 특히 지난 10년 정권을 잡아오면서 민주개혁의 대의에 동의하는 시민운동 진영의 ‘비판적 지지’ 등에 의해 한국사회의 진보를 박정희 시대 이후 정권을 장악해온 보수우파 세력과의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보수우파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 왔다. 이 개혁적 자유주의는 자신이 펼친 신자유주의 정책의 희생자가 된 민중의 분노에 의해 심판을 받아 이제는 거의 지리멸렬해졌다. 진보진영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의 파탄으로 인해 자신과 경쟁할 세력의 약화에서 나온다.

둘째, 진보진영의 기회는 민노당의 패배를 계기로 온 측면도 있다. 그동안 민노당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과 경합하면서 후자를 ‘개혁세력’으로 보게 하고 자신을 진보진영의 대표로 만들어왔으나 진보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따른 행보로 인해 대선에서 참패함으로써 진보진영의 대표를 자임하는 데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민노당 내부에 NL파의 헤게모니가 구축되어 끊임없이 제기되는 진보적 의제들을 민족주의 노선으로 축소시킨 데 따른 결과이다.

국내 좌파 세력은 개혁적 자유주의의 몰락, 그에 동반된 민족주의+사민주의 세력의 패퇴를 통해 열린 새로운 정치적 국면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이 국면에 좌파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현재의 국면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국면은 장기적 구조에 해당하기보다는 단기 지속할 분기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기점인 만큼 그것은 한국 좌파세력의 중장기적 모습을 결정지을 공산이 크다. 어떻게 이 국면을 맞이하고 보내느냐에 따라서 좌파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을 수도, 그동안의 관성처럼 모처럼 찾아온 희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여기서 ‘희망’은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좌파세력이 변혁적 진보정당, 다시 말해 자본주의 극복을 자신의 분명한 목표로 삼는 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좌파세력은 정당을 만들만큼 힘을 가진 적이 없다. 국내 정치지형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것이다. 특히 지난 10여년 좌파는 자신의 입지가 극도로 위축되는 것을 경험했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세력, 현재의 상태로서의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대안적 사회를 위한 코뮌주의를 실천하려는 좌파가 힘을 발휘하려면 정치지형의 일정한 파열이 발생해야 하나 그동안 이 지형은 견고한 구조적 한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좁게는 민노당으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사민주의가 한국정치의 민주적 대안임을 참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구조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를 재생산하고, 그로부터의 이탈을, 그것의 변혁을 꾀하려는 사회적 흐름을 변수 아닌 변수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기간 좌파는 자유주의 세력과 그 종속 세력인 민족주의 및 사민주의 세력이 대안적 정치지형을 장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어려웠다. 지난 대선에서 좌파들이 아무런 선거 전략을 세울 수 없었던 것도 한국정치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만큼 힘을 갖지 못한 탓이다.

대선 이후 좌파가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좌파는 솔직해야 한다. 지금의 희망은 자신의 능력으로 획득한 성과가 아니다. 자유주의 세력의 몰락, 그에 동반한 민족주의+사민주의 세력의 몰락에 뒤따라 그저 얻은 선물이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부지리에 해당한다. 지금 좌파 가운데 현 국면을 희망의 그것으로 보면서도 그 속에 선뜻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스스로 그 희망을 쟁취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좌파가 희망을 갖지 말 일은 아닐 터이다. 아니 오히려 현재 국면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세적 국면은 구조의 견고함을 드러낼 수도, 탈구조화의 징후를 보일 수도 있다. 지금은 (맑스의 말을 맥락을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견고한 것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시점이다. 좌파는 이에 따라 자신의 입지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비록 자유주의 세력과 민족주의+사민주의 세력의 붕괴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국면을 놓칠 수 없다. 이번 기회를 놓쳐버리면 언제 다시 좌파에게 비슷한 기회가 올는지 모를 일이다.

세력들의 관계는 구조화되어 있으면 좀체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정치세력 판도는 너무나 뻔했다. 정치 구도의 예측가능성도 너무 높았다. 그러나 대선을 거치며 기존의 세력 구도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와해는 향후 정치지형의 예측불가능성을 높인다. 이 예측불가능성이야말로 변화, 자본주의 구조의 변혁을 추구하는 좌파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고 기회이다.

물론 판도 전체가 깨진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헤게모니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의 당선은 정치권력의 이동 아닌 이동, 즉 하나의 자유주의에서 또 하나의 자유주의로의 이동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만으로도 한국 범 진보세력의 구도는 격변이 일어난 듯하고, 진보와 개혁을 내세우며 좌파들을 뒷전으로 밀어 넣은 제 세력은 와해의 위기를 맞은 듯하다. 통합신당, 민노당은 이제 다시 세력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출범은 이전의 정권들이 시행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할 것이고 이로 인해 사회적 배제를 당하는 인구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지난 10년 같은 자유주의이면서도 개혁을 자칭하는 세력에 의해 관리되어 왔으나 이들이 지난 대선에서 정치적 심판을 받아 패배함으로써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의 관리 체계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개혁적 자유주의가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그리고 이 세력의 2중대 역할밖에는 하지 못해 민족주의+사민주의 세력이 덩달아 패배한 것은 일단 남한 민중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이 반대가 왜 더 강한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는지는 좌파가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를 의미한다.

좌파에게 현 국면이 희망인 것은 개혁적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의 전면적 위기 속에 보수적 자유주의가 집권하면서 좌와 우가 과거 어느 때보다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는, 좌파가 우파에 맞서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대안으로 떠오를 구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능성은 어느 틈엔가 불가능성으로 바뀔 수도 있고, 희망도 아지랑이로 사라질 수 있다.

지금 한국 정치는 혼돈에 빠진 상태이다. 보수적 자유주의 또는 보수우파 세력은 현재 이명박+박근혜와 이회창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한나라당에서 박근혜가 뛰쳐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고, 개혁적 자유주의는 통합신당과 창조한국당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동안 민노당에서 한솥밥을 먹던 민족주의와 사민주의도 분리 직전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정치적 분열의 시대이다. 정치세력들이 이런 이합집산을 보이는 것은 사회 제 세력의 정치적 관계를 규정하는 구조가 더 이상 이전의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구조의 변동, 그것은 새로운 구조로의 전환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역사의 분기점이 생긴다는 말이다. 분기점에 가까워지면 구조 속에서 서로 대립하던 극들이 비평행 상태에 이르게 되고, 구조 전체는 극들 간의 긴장에 따른 동요를 겪게 된다.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순간에는 “개인과 집단의 행위는 자동 예측이 불가능해지고, 결정성이 뒷전으로 물러난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 선택, 결정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분기점이 분기점인 것은 그 지점에서 운동의 요인들이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서로 교점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운동의 새로운 벡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요인들의 교점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점, 그것은 “혁명의 시대, 또는 다른 극적인 역사적 변화의 시기이다.” 앞에서 “2008년 1월 현재 한국의 좌파 세력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예측 불가능성의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고 느낀 때문이다.

희망은 분수처럼 솟구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포말(泡沫)이다. 구조가 변동의 분기점에 이르면 그 다음에 어떤 형태의 구조가 만들어질는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다만 변화를 유발하려면 구조를 동요시키는, 그리하여 구조가 더 이상 재생산되지 않고 변화를 향한 분기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역사적 구조의 변화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주체들의 능동적 행위이다. 오늘의 지배적 구조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좌파의 의지, 선택, 실천, 참여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이런 행위로 구조 변동의 방향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변동이 일어나는 시점에 변화를 촉발하는 행동들이 집적되면 주체들의 행위에도 변화가 발생하는 법이다. 사회적 구조가 평행상태에 있을 때에는 사회적 주체들의 행위는 늘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만 구조가 변동을 겪는 순간 그 행위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지극히 보수적이던 개인이 갑자기 진보적 행위의 주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지금 한국사회에 일어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에 없던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세력의 판도가 새롭게 짜이고 있다는 것, 보수진영 안에서도, 진보진영 안에서도, 자유주의 세력 내부에서도, 민족주의와 사민주의의 연대 틀 안에서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구조적 변동이 시작되는 조짐인지도 모른다.

좌파는 이 조짐을 기회로 포착해야 한다. 모처럼 찾아온 이 기회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는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지금 좌파가 할 일은 역사의 흐름이 구조적 평행상태에서 비평행의 분기점에 도달하도록 구조를 동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의 분기점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어떤 행동을 하느냐,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서 좌파는 역사의 새로운 벡터를 만들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정치적 구도, 구조가 재생산되는 흐름의 지속 저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다.


4. 변혁적 진보정당의 건설


오늘 좌파에게 주어진 과제, 좌파가 취해야 할 행위는 무엇인가? 나는 한국 좌파의 당면 과제는 변혁적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본다. 정당 건설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나 많다. 좌파가 역사의 주체로 서려면 대중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대중과 만난 적이 없다. 좌파가 결집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고, 뒷목에만 앉아 있었기 때문이고, 특히 정당 형태로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변혁적 진보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정당 건설에 나서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혁적 정당을 건설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정당 건설은 많은 에너지,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힘의 결집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정당 건설을 위한 범 좌파 또는 범 진보 세력의 연대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민노당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대선에서의 패배 원인을 민족주의 세력의 종북주의에서 찾으며 당의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제2 창당파 또는 민노당 밖에서 새로운 당을 만들고자 하는 신당파, 지난 대선에서 민노당 못지않게 죽을 쑨 사회당, 그 밖의 많은 다양한 정파와 세력을 포함하는, 범진보 범좌파 세력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좌파들 간의 연대가 필요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연대의 방식이다. 일각에서는 좌파는 수가 적기 때문에 세를 불리기 위해 연대를 하자고 한다. 좌파가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가 언제 다수였던 적이 있던가. 좌파는 숫자라기보다는 입장이다. 이론적, 정치적 입장은 정확함, 분명함, 열정, 용기 등에 의해 가늠되는 것이지 숫자 크기에 의해 가늠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좌파는 블랙홀 같아야 한다. 블랙홀은 커서 우주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좌파도 블랙홀 같은 흡수력을 가지려면 크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연대를 하더라도 새로운 연대가 필요하다. 좌파 간의 연대가 그것이다. 좌우 합작이 아니라 좌-좌 연대이다. 좌우 합작의 통상적인 모습은 진보진영에서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민족주의의 연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연대와 합작의 결과가 무엇인지 민노당의 실패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좌우로 가는 것이 아닌 좌파들을 가로지르는 좌-좌 연대이다. 좌파는 이 새로운 연대를 통해 변혁적 진보정당을 만들어내야 한다.

통상 변혁 정당은 맑스주의 지식인과 선진노동자의 결합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 지식인과 노동자의 결합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필요조건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좌파가 만들어야 할 정당은 변혁적 계급정당이어야 할 것이지만 성차와 성애, 인종/민족, 생태, 인권, 평화 문제를 다루는 운동들의 변혁적인 분파와도 함께할 수 있는 포용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변혁정당 건설 운동이 지향할 좌-좌 연대가 좌파적 정치조직들의 연대와 함께 사회운동 내부의 다양한 좌파들과의 연대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좌-좌 연대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10년 좌파 정치조직들이 연대를 모색했으면서도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증거이다. 게다가 지금 요구되는 좌-좌 연대는 정치조직들 외부에 있는 운동단체들―그 일부는 정당운동에 대해 적잖은 회의를 지닌―과 나아가서 다양한 성향을 지닌 개인들까지 포괄할 필요가 있다. 변혁 정당 건설에 대해 기대가 많은 만큼 의문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하겠다.

그래도 지금은 정당 건설에 대한 의문이나 회의보다는 기대가 더 크게 지배하는 국면으로 보인다. 물론 그동안 서로 다른 입장들, 행태들 때문에 쌓인 불만, 불신을 없던 것처럼 털어 버릴 수는 없다. 좌파운동 내부에는 계급문제, 성문제, 생태문제 등을 놓고 적잖은 갈등이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당 건설 과정에서, 강령의 채택 과정에서 토론을 통해 제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 과정을 얼마나 민주적으로 전개하느냐가 여전히 문제로 남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당 건설 과정의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변혁 정당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좌파는 역사상 처음으로 변혁적 진보정당 건설의 기회를 맞았다. 그동안 좌파의 정치적 활동에 장애로 작용하던 구조가 처음으로 허물어지는 징조가 나타났다. 오래 지속되지 않을 절호의 이 기회를 구조 변동의 분기점 형성 국면으로 만들어야 한다. 희망의 이 국면을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좌파적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새로운 벡터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혁적 진보정당의 건설! 그것이 지금 좌파에게 주어진 정세적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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