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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4

 


7. 활동가들의 임무


가. 정체 속에 놓인 활동가들의 상태


 대중조직의 활동가들의 상태에 대한 지적들은 많다.

 활동가들이 이제는 노동운동에 대한 전망을 잃고 노조권력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지적들은 계속되어 왔다. 일상적인 실천은 없고 노조 선거 때만 되면 왕창 모이는 모습들을 수없이 지적한다.  이는 구조조정을 경과하면서 조합원들이 과거의 악몽을 안고 미래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실리를 쫒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조합원은 실리를 쫓고 활동가들은 권력을 쫓는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활동가들이 이미 확보한 노조 집행부라는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목표를 분명히 찾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장활동은 관성적인 작업장협상들에 얽매여 있고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전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다 보니 자꾸 노동조합 집행부와 지방자치제, 민주노동당과 같은 정치적 진출을 꿈꾸게 된다. 물론 이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전략과 목표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권력경쟁이 노조에서 지자체와 정당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선봉부대로서 운동을 열어 온 견인차들이 이제는 노조나 정당에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정쟁’을 일삼는 ‘그놈이 그놈’인 제도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나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활동가들은 운동을 열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동을 퇴보시키고 발전을 가로막는 대상이 될 것이다.


나. 활동가들의 발전과 재생산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


 활동가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고기는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활동가들은 대중없이는 활동가가 될 수 없다. 바로 이점에서 활동가들은 이제 신자유주의 공격과 후퇴속에 조합원들의 객관적인 상태와 심리적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이 조합원의 상태와 요구를 관성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기초하여 ‘노조상집간부되기’를 꿈꾼다면 대중과 더욱 분리될 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물이 말라버린 어항 속의 물고기와 같다. 이점에서 이제 활동가들은 작업장에 대한 구체적인 진단을 통해 문제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물론 활동가들이 조합원 속에서 다시 선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에 영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조합원들은 전망이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 실리에 집착하지만 그 저변에서는 상시적 구조조정 속에서 상시적 고용불안의 심리가 있다. 더 이상 현재의 노동조합의 실력으로는 미래의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노조를 도구적으로 활용할 뿐이다.

 활동가들이 구체적인 대안 제시 능력 없이 얼마나 자주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또 합치는 것인지는 대공장들의 현실에서 무수히 발견되고 있다. 이미 조합원들은 그러한 이합집산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조선거 등 활동가들의 권력싸움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이점에서 활동가들은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전반적인 내용의 정체 속에서 권력게임만 남게되자 현장조직원들의 상당수가 권력게임을 쫓는 무능한 정치적 활동만을 일삼고 있다.  관성적으로 되풀이되는 당위적 구호에 불과한 ‘투쟁성’은 결국 선명성 경쟁에 불과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 과연 나는 노동운동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가? ’

‘ 상시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에 대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

‘ 담합적 노사관계를 넘어설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 ’

‘ 확대되는 실리주의적 경향을 넘어서 나는 과연 작업장 혁신을 위한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는가?’  


 ‘고참활동가들의 위로부터의 권력게임, 아래로부터 확대 재생산되지 않는 활동가’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특히 단위노조 - 상급단체 - 지자체 - 국회의원으로까지 이제 가능한 현실의 권력게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왠만한 고참활동가들, 특히 노동조합의 임원 출신들은 누구나 ‘한 자리’ 노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참활동가들은 다시 현장에 돌아가서 예전에 그랬듯이 박박 기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는 퇴보다. 그것은 노동운동 전체의 운동역량의 손실이다. 전진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어떤 전진적인 배치가 가능한 것인가? 바로 단위노조에서 임단협교섭을 하는 수준의 활동을 넘어서 한 단계 높은 산업적 의제를 다루는 위치, 지역사회의 의제들을 다루는 지역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여야 한다.

 차곡차곡 실력을 쌓지 않고 국회의원이 된들 기껏 조합활동밖에 않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국회에 앉아서 어떻게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의 문제들을 가지고 실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 국민들의 진보정당에 대한 상당한 기대는 단지 기대에 불과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노동당 의원도도 결국은 똑같은 기존 국회의원과 같이 평가될 것이다. 

 고참활동가들이 허황된 ‘국회의원되기’와 같은 야망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적절한 전진배치는 곧 후배 활동가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면서 또한 보다 폭넓은 활동으로 인도할 것이다.

 

 신참활동가들의 재생산은 결코 낡은 사상학습으로만 이뤄질 수 없다. 이미 현장의 노동자들은 전투에 투입된 야전병 들이다. 따라서 야전 속에서 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야전의 전투들 속에서 배우는 것이 뭔가? 권력게임들, 정치적인 행동들만 가득하다.

 구체적인 의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이 탄생한다. 결코 집행부 흡집내기나 대의원대회에 대한 대응방침을 논의하고 발언하는 것을 통해서 재생산 될 수 없다.

 제대로 된 야전의 전투과정에서 새롭게 기초소양교육의 필요성이 탄생하며 그 필요성을 느낄 때 노동운동에 대한 기본학습도 의미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다. 활동가 조직의 발전 방향 


 첫째로 활동가 조직들의 재편을 더 이상 ‘자신들만의 잔치’로 반복해선 안된다.

 유수한 대공장들을 보라. 현장조직이라고 하기에는 말도 안되는 수많은 조직들이 이름을 내걸고 ‘현장제조직’ 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과거의 ‘민주파’는 수많은 이합집산을 통해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제는 현장조직들이 난무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현실을 근거로 ‘민주파 재결집’을 내세운다. 근본적인 혁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재편을 외친들 뻔하다. 이제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된다.


 둘째로 파벌이 아닌 의제를 중심으로 한 소통의 장이 필요하다.

 전략적 전망의 부재 속에서 기존의 조직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을 한들 결국은 그게 그거다. 현장에 있을 때는 거침없이 집행부를 비판하다가 막상 집행부가 되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현장조직이 집행부를 하면 ‘껀수를 찾아서 씹어댄다’. 작업장내에서 복잡한 현장조직들의 이해관계는 의견일치를 어렵게 한다.

 이제 이런 식의 파벌을 중심으로 한 조직활동은 과감히 혁파되어야 한다. 이제는 수많은 작업장의 의제들을 중심으로 열린 의사소통의 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가장 구체적이고 정확한 대안을 만들어 내는 활동가와 조직만이 인정되는 체제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점에서 현장조직은 ‘무슨파’ 인가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 혁신을 둘러싼 논의와 실천으로 집중되어야 하고 재편되어야 한다.

 

 셋째로는 산업적,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선봉대로서 기업을 뛰어 넘는 재편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대공장의 활동가 조직이 개별 노사관계 속에서 적절히 사측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단합적 노사관계’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를 장악하려는 행위는 결국은 아무리 전투적인 구호를 내건다 해도 그것은 구호에 불과하고 이미 정착된 구조속에서 조합원의 실리챙기기를 통해 인기를 얻고자 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제 활동가조직은 스스로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적 대안을 제출하고 그에 기초하여 산업적, 전국적 차원으로 먼저 자신을 해소 재편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제발 반복되는 ‘정파만들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중심으로 ‘실천단위’로 자신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8. 현 단계 한국노동운동의 발전 전략으로서 ‘사회적 노동운동’


가. ‘사회적 노동운동’은 현 단계 노동운동의 발전 전략이다.


 현 단계에서 노동운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모든 위의 내용을 담아 ‘사회적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회적 노동운동’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다. 어떤 실천을 하는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노동운동’이 ‘사회적 조합주의’와 혼동된다고 한다. 또 반대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운동의 큰 흐름은 소련 등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도 있었지만 망했다. 유럽의 사민주의도 있지만 우경화 되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주의’를 아무리 외친들 의미가 없다. 또한 그것은 천재가 나타나서 갑자기 멋지게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본주의가 있는 곳에 계급이 있고, 계급이 있는 곳에 수탈이 있으며, 수탈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상과 관념이 아니라 현재의 노동운동을 진단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적 노동운동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아주 단순화 시켜서 전망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산력의 유지여부와 노동운동의 발전 여부에 따라서 크게는 네 가지의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첫째로 미국류의 사회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고착화)

 우선 한국이 세계화, 중국의 등장 등 변화하는 세계자본주의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에 노동운동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 정규직의 일부가 이권을 중심으로 간다면 우리는 아마도 미국 류의 사회가 될 것이다.  

 작업장에는 고령화된 정규직이 수명의 비정규직위에 관리자처럼 군림하고, 전체노동자로 보면 잘 나가는 대기업의 노동자들은 중소하청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들 위에 새로운 계층으로 자리잡아 상층의 노동자가 기득권을 가진 지배세력과 함께 하층노동자를 수탈하는 사회다.

 

 둘째로는 노동계급의 통제권이 전 사회로 확장되는 사회

 한국이 생산력을 유지하면서 또한 노동자계급이 분화를 극복, 노동자계급을 강력히 단결시킨다면 자본에 대한 강력한 통제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곧 노동자계급이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가지고 국가까지 좌우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공장의 노동자들이 자신만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중소하청노동자완 튼튼한 연대를 이루고 그 힘으로서 국민적인 동의를 얻어 간다면 우리는 유럽의 좌파가 한참 잘나가던 시절의 복지국가를 넘어서 역사적으로 더 진전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는 노동계급이 주도권을 상실한 우익 파시즘적의 사회이다.

 생산력이 유지되지 못한 채 휘청거리고 국민의 다수가 주변부 층으로 밀려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노동계급 또한 스스로 계급으로 단결하지 못한 채 정규직의 대기업 노동자들은 자신만을 위해 지배계급과 타협하고 수많은 주변부 노동자들이 사회적 불만을 토론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경우에 한국 사회는 우익 파시즘적인 국가가 될 것이다.

 한때 한국보다 훨씬 잘 나가던 아르헨티나 등의 남미의 국가들과 비슷한 상태로 빠지는 것이며 왜곡된 중동지역의 국가들, 끝없는 내전 속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 


 넷째로는 강력한 사회적 불만을 노동계급이 조직함으로서 새로운 사회로 나가는 것이다.

 신자유의의 세계화 속에서 한국경제가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처참하게 유린된다고 해도 만약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단결시키고 끊임없이 연대를 확대해 나간다면 사회적 불만을 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더 이상 한국사회를 지탱할 수 없는 지배계급에 맞선 불만은 조직된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며 이 투쟁은 사회변혁을 선도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단순히 전망 할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복잡한 동북아시아의 정세, 남북관계의 영향 등 매우 복잡한 변수가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경우와 관련해서 볼 때 노동자계급이 한국 사회의 경제를 좌우할 힘이 없기 때문에 만대로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다만 노동자 계급은 적어도 스스로 노동운동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과연 스스로 노동자의 분할을 넘어서 자신을 계급으로 단결시킬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분할되는 상태를 넘어서지 못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정규직 대공장이 앞장서서 연대를 실천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직적 발전을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둘째와 넷째의 길을 갈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이 네 가지 길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순간에 이른 것이 아니다. 조만간 이러한 선택에 다가설 것이며 바로 이점에서 현재의 노동운동은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런 현 단계에서의 노동운동의 발전전략으로 ‘사회적 노동운동’을 제출한다. 

 

나. 계급해체에 맞서 계급단결(계급형성)을 최우선에 두는 전략이다.


 일반적으로 얘기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다. 시장이 결정하는 사회는 경쟁을 법칙으로 하며 경쟁은 철저히 분열을 생명으로 한다. 이 분열은 노동자들을 산업, 기업, 고용형태로 갈갈이 찢어 놓는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시장’에 맞서는 투쟁이고 ‘분열’에 맞서는 투쟁이다.  

 외적의 침입은 내부를 단결시킨다. 전선이 분명하게 되기 때문에 내부의 작은 갈등은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우면 전쟁을 한다. 내부문제를 해소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강제적으로 단결시키는 정략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다. 외적이 침입하면 내부가 단결해서 싸워야 하는데 외적이 공격할수록 내부는 분열되는 상황인 것이다. 자본의 공격이 강할수록 내부가 단결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되고 있다.

 자본은 비정규직을 만들어 내놓고 ‘정규직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을 주자’ ‘정규직 때문에 비정규직이 피해를 본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병법에 나오는 대로 ‘적을 서로 싸우게 하여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분할전술인 셈이다.

 문제는 자본의 공격이 거셀수록, 그리하여 정규직의 고용이 불안할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만의 고용안정을 위하여 비정규직을 인정하고 향후에 자신들의 방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자신의 고용이 불안할수록 당장에 실리를 챙긴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규직 대공장에 대한 집중적인 여론공격이 진행되고 노동자 내부의 격차는 증가한다.

 여기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정규직의 임금이 많지 않다는 식의 수세적인 대응으로는 돌파하기 어렵다. 공세적으로 사회전체의 빈부격차를 제기하고 사회보장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동자 내부의 연대정신에 기초한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사회적 의제로 나가야 하는 것이고 또한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막기 위한 ‘노동자 내부평등’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곧 노동자의 분할을 막고 계급적으로 단결함으로서 해체되려는 다시 계급으로 만드는 것(계급형성)이다.


다. 작업장 혁신과 산업․사회적 의제를 중심요구로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하는 노선이다.


 앞의 글에서 왜 작업장 혁신이 중요한가를 얘기했다. 특히 계급분할의 불씨는 정규직 내부의 불평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이 ‘담합적 노사관계’의 틀 안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업장’ 이라는 노동자의 삶의 터전에 대한 혁신이 중요하다.

 내부의 혁신과 함께 산업적 연대, 사회적 연대를 위하여 그에 해당하는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함으로서 노동자들이 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여 나가야 한다. 이는 곧 노동자계급의 개입과 통제권이 작업장, 산업, 사회전체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 우경적 투항과 좌경적 소아병에 맞서 노동운동의 혁신을 추구하는 노선이다 . 

 

 노동운동을 단순히 정파적 파벌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의 혁신은 이룰 수 없다. 소위 그간 노동운동과정에서 NL과 PD의 대립이라든지, 우파에 맞선 범좌파의 결집이라는 사고방식은 매우 뿌리가 깊은 사고법이다.

 이러한 양진영으로의 구분은 두 패로 내부를 갈라놓고 ‘내 눈의 대들보는 못보고 상대진영의 티클만 보인다’는 격언이 지적하는 사고방식을 만연시킨다. 이는 곧 상대의 모든 것은 비판의 대상이고 내편의 모든 것은 무조건 옹호하는 행태를 통해서 혁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노동운동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미 양 진영으로 구분해서는 해석되지 않는 현실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총의 4기 선거는 이런 낡은 사고방식을 더 강화시키고 있다. 이는 심지어 민주노동당내의 내부투쟁으로 훨씬 확대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글을 마치며


 노동운동의 전략을 체계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면 매우 광범위한 조사와 객관적 기초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이론적인 근거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한 실천가로서 당면한 노동운동, 특히 오랜 노동조합운동의 시대를 거친 상황인 만큼 노동조합운동의 현실에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민주노조운동의 핵심역할을 담당해왔고 아직은 조직력이 비교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금속의 자동차활동가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기 때문에 자동차산업의 사례들을 비중에 놓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변혁운동의 이론서가 아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동북아 정세 등등 의 논의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최근의 상황에서 수많은 정세분석보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역공세의 결과 처한 노동운동 내부의 상태를 냉정히 평가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과 운동은 결코 활동가들의 관념에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자 대중의 사고와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만 전진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아쉬운 내용은 상시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문제들에 대한 대응이다. 글로벌 경쟁체제는 과거 국가-재벌 중심의 한국사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세계적인 상황 → 국가,재벌 → 한국노동자>라는 구조 즉,  세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던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세계적 상황(초국적 자본운동) → 노동자>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중간의 톱니바퀴가 빠지고 국제적 자본운동이라는 톱니바퀴에 바로 한국의 민중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공동화니 자유무역협정이니 하는 수많은 의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한 점이다. 신자유주의, 유연생산체제 아래에서 일반적 노동자는 더 이상 대량생산체제의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비정규직이 일반적인 노동자이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고 기업에 대한 귀속력도 없다. 노동자계급의 가장 말단에 위치하면서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모두 떠 안고 있기에 비정규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이야  말로 모든 구조를 보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조직화 방식은 애초에 존재방식이 다른 정규직의 노동조합 따라하기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이점에서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요컨대 한국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관점에서 완전히 재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아직까지 한국노동운동의 움직일 수 있는 조직된 세력으로서 정규직 노동운동의 혁신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운동을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움직이는 타켓, 국제적 수준에서 급격한 변동들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 타켓을 쏘아 떨어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함께 움직이면서 조준하는 것이다. 목표물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 목표물이 정지해 있는 것과 같은 조건에서 조준함으로서 명중시킬 수 있다.

 핵심은 변화다. 운동은 곧 변화다. 전진하고자 한다면 변해야 한다. 낡은 사고와 행동 속에서는 결코 전진하지 못한다. 다만 구태를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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