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8/05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22
    바르게 살까?(5)
    kirehiais
  2. 2008/05/15
    '스승의 날'에 부쳐(1)
    kirehiais
  3. 2008/05/14
    2.0세대와 386세대(4)
    kirehiais
  4. 2008/05/13
    계획
    kirehiais

바르게 살까?

 

작년에 기획했던 '미니' 다큐 '바르게 살까?'

기획만 하고 제대로 구성을 하지 못해 본촬영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올해 다시한번 시도해볼려고 한다.

이번에는 학교 사람들과 같이...ㅎㅎ

 

또 엎어지면 어떡하지...ㅎㅎ

 

 

바르게 살까?

 

 

연출자는 우연히 바르게 살자라는 돌을 발견하고는 적잖이 놀란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그런 구호는 독재정권시대에나 나올법한 구호라고 여기기 때문이며, 지금 같은 시대에는 너무 어울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런 구호가 적힌돌을 만들어 세운다면 그 것을 보는 시민들이 바르게 살겠다라는 생각을 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저 돌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가 너무 가당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저돌 세우는 것을 허가해준 관공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서 허가를 내주었는지, 그리고 비용은 어떤식으로 마련된 것인지 궁금증이 발동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 설마 저 돌을 보고서 마음속 깊이 잠자고 있었던 '바름'의 신이 깨어나지는 않겠지? 하지만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법. 연출자는 바르게 살자라는 돌을 보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바르게 살자라는 돌을 만들고 도시 곳곳에 세운 바르게 살기 운동 협의회를 찾아가 만든 이유를 들으려고 한다. 놀랍게도 그네들은 앞으로 더 많은 돌을 전국 곳곳에 세우길 계획하고 있다.

 

대체 저런구호가 적힌 돌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체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기에는 너무 유치하기 짝이없다.

 

 

그렇게 연출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돌을 보고 흥미로워 하고 심지어 바르게 살아야겠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는 글들을 인터넷 블로그에서 보게 된다.

 

 

 

 

 
바르게살자.
돌덩이에 새긴 글자
내 가슴속에 다시 새기자.
 
세상이 아무리 드럽고 치사해도.
나라도 바로살자.
 
나부터 바로살면.
너가 바로살고.
너가 바로살면.
너희가 바로살고.
너희가 바로살면
세상이 바로산다.
 
 

[출처] 바르게살자|작성자 XX

 

'구호주의'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우리 주변을 떠돌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내가 이 것을 구시대적인 '구호주의'의 악습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그 것을 보고 감명받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해서 연출자는 이것이 그냥 스쳐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호를 통한 소통의 방식을 아직도 채택하고 있는 단체의 사고방식과 그 돌덩이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소통의 형태와 방법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상한'척하는 돌덩이 하나가 떡하니 거리의 한곳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고상'하기는 커녕 웃기고 씁쓸해지는 것은 지금 우리사회의 혼재되어 있는 다양하고 혼탁한 가치관들 때문은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승의 날'에 부쳐

 

 

언젠가 부터 5월은 '따뜻한' 달이 됐다. 기온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따뜻'해졌다.

 

굳이 누군가가 정한 날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저항감은 차치하자.

 

그게 ‘국가’면 어떻고 ‘근대’면 어떤가 감사한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스승의 날'을 맞이한 오늘의 나의 기분은 찹작하다.

 

'스스로 존재한 날' 때의 기분과는 다른 그런 것?

 

나에게 '스승'이 있는가라는 정말 피곤한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

 

이런 기분을 달래기 위해 국어사전에서 '스승'을 찾아보았다.

 

 

 

"스승 -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

 

오! 이런 세상에, 뭐 어느 정도 이런 느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활자를 마주하니 이 놀랍도록 '경건'한 뜻 앞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에게 '스승'은 존재 하지 않는다.

 

내친김에 '선생'도 검색해 보았다.

 

선생 [先生] [명사]

1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2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3 성(姓)이나 직함 따위에 붙여 남을 높여 이르는 말.

4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남자 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

6 <역사>조선 시대에, 성균관에 둔 교무 직원.

7 <역사>각 관아의 전임 관원을 이르던 말.

- 네이버 국어사전

 

그렇다 나에게 선생님은 참 많이 계신다.

 

 

'선생'과 '스승'의 차이는 무엇일까? 의미만을 놓고 보자면 인도하는 자와 인도하지 않는 자 이다.

 

그렇다면 ‘스승의 날’은 ‘가르치며 인도하는 자’의 날일 텐데…….

 

애석하게도 지금 나의 주변에 ‘가르치는 자’는 있을지언정 ‘가르치며 인도하는 자’는 없다.

 

스승이 ‘계몽주의’의 산물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의 태도가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이런 ‘스승’에 대한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내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을 뿐이다.

 

대학원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상하게 ‘정교수’로 부임하여 꼬박꼬박 월급을 타고 계시는 ‘분’들 보다 매주 학교에 찾아와서 ‘시간강사’ 노릇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더 열성적이고 진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물론 모든 ‘정교수’가 그러하고 모든 ‘시간강사’가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에 와서 유난히 이런 비합리적인 ‘사념’에 시달리곤 한다.

 

삐딱선을 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오늘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스승의 날’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합동 절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나는 그렇게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절’(하물며 설날 때는 ‘돈’이라도 받을 심산으로)이 형태와 의식만 바뀐 채 그대로 반복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바란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스승’을 만날 수 있기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세대와 386세대

 

 

‘어느새 어영부영 살아오게 돼버린 나의 머릿속에는 잡다한 개념들과 황망한 이상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소위 20대를 마무리하는 29살이 된 나에게 지난 20대를 돌이켜보는 일은 마치 소독차 연기 속에서 뭣도 모르고 좋아하다, 멀어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허망하다.

 

 

누군가는 취직하고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나의 친구들의 삶이 어떻든 간에 그(녀)들은 아직 살아있다.

 

아니 그렇지 않고 20대가 언론들의 글 노리개 감으로나마 산화되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것은 전적으로 미디어의 책임이지 20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탓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유독 세대담론이 많다. 멀게는 X세대에서부터 지금의 2.0세대 그리고 그 ‘잘난’ 386세대 등등 까지…….

 

 

누구하나 규정을 바라지도 않고 규정의 필요성이 제기 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 싶어 안달 난 혹은 마치 세대 담론이 그럴싸한 사회과학적 용어라도 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조합논리를 내세우며 세대론을 제시하는 ‘과학자’들과 비평가들을 마주하게 될 때 본의 아니게 나는 어느 세대에 속하는 지 자문하게 된다.

 

 

88만원 세대 그 것이 나를 규정하는 ‘사회과학’적 ‘용어’다. 아니 ‘88만원을 벌지도 못하면서 매달 88만원에 가까운 돈을 써야하는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놀라운 기사를 접해야 했다. 한겨레 2008년 5월 14일자 8,9면에 걸친 기사

 

‘2.0 세대’ 386부모 ‘뜨거운 피’ 물려받았다

 

자유분방하게 크며 사회비판 의식 배워 송경화 기자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10대들의 ‘배후’는 누굴까? 전문가들은 이들 10대의 부모인 이른바 ‘386 세대’를 지목한다.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친 부모의 사회비판적 ‘유전자’가 자녀들한테 자연스럽게 전이됐다는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386 세대의 부모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자녀들에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라’고 가르치진 않는다”며 “386부모 아래서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사회비판의식을 의식·무의식적으로 학습했던 10대들이 지금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0일 중3 딸과 함께 서울 청계광장 촛불집회에 참가한 김상철(42)씨는 “현장이야 말로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해 참가했다”며 “현장에서 현실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아이와 함께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2004년에도 가족과 함께 탄핵반대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김지인(18·진명여고3)양은 “집안 분위기가 엄숙하지 않아 어떤 문제든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며 “아버지에게 ‘청계광장에서 자유발언을 했다’ 말했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 아버지가 먼저 관심을 가져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20대에게 10대들의 이런 ‘당돌함’은 낯설다. 취업준비생 안경원(26)씨는 “우리 때는 (부모들한테) 의견을 말해면 ‘버릇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렇게 몇 번의 좌절을 겪으면 스스로 체념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은수(27)씨도 “집에서 부모님과 깊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었고 지금도 어색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386 세대인 40대의 진보적 성향이 보수성향의 20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자녀인 10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격세유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지난해 17대 대선의 투표 성향을 보면, 20대는 당시 이명박 후보에 42.5%, 이회창 후보에게 15.7%의 표를 던졌다. 이명박 후보 지지율에선 30대(40.4%)를 앞섰고, 이회창 후보 지지율에서는 어떤 연령대보다 가장 높게 나타났다. 김 교수는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대와 달리 지금의 10대들은 경제적 결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파심에 적기는 하지만) 현재 정부의 무능한 협상을 반대하는 집회의 의미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심지어 이들의 ‘배후’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있다고 한들 그 것이 이 집회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기사에서 인용되는 소위 전문가들의 논리가 무척 터무니없음에 놀랄 따름이다.

나는 솔직히 10대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런 배후를 알아야 하는 사회적인 요구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 ‘배후’가 있다면 그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이고 비인권적인 교육과 저 무능한 정치집단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남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격세유전’을 거치면서 형성되는 ‘진화론’적인 ‘배후’가 아니다.

 

 

기사 제목만 보고 차마 민망해서 제대로 글을 읽기도 힘들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볼수록 실로 ‘진보’ 일간지 기자가 쓴 기사가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

 

 

386세대의 개념적 정의가 무엇인가?

 

 

'386' 세 숫자에는 각각의 뜻이 들어 있어, '3'은 1990년대 당시 30대를, '8'은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닌 1980년대 학번을, '6'은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즉,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90년대에 30대였던 세대가 바로 386세대이다.

 

두산백과사전

 

 

당당히 백과사전에도 기재된 386세대의 개념적 정의는 익히 알다시피 이렇다.

일부 ‘학출’ 정치인들과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세대들을 일컫는 데 주로 ‘쓰이’는 말이다.

 

단순히 말해서 대단히 협소한 정의이다.

 

 

정말 멍청하게 물어보자면 소위 386세대 부모님을 두지 않은 10대의 학생들 혹은 학생이 아닌 청소녀(년)들이 이글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염두 해 두지 않았는가?

 

 

만약 이 기사의 의도가 부모님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학생’들을 북돋아 주는 거라면, 그래서 지난 노무현 정권 때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던 386세대들의 그 ‘뜨거운 피’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라면, 그래서 ‘보수’ 성향의 20대들의 잠자고 있는 ‘진보성’을 일깨우는 것이라면, (이 기사는) 유감스럽게도 지난 수년간 ‘운동권’이 탈피하지 못했던 ‘자위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가던 진보진영의 반성논의는 이제 사라지고 10대들의 자발적인 집회참여가 다 386부모를 뒀기 때문이라는 ‘멘델의 유전법칙’같은 논리가 등장 하는 것을 보면 그 간 진보진영이 엄청난 ‘피해의식’을 겪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20대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서 어떤 대안적 분석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20대들 중에서도 386세대 부모를 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네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저주스런 딱지를 안겨주고서는 ‘격세유전’에 따라 2.0세대와 386세대 간의 화합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기만적인 행태 속에서 ‘진보’ 일간지가 해야 할 일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계획

계획을 잡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일이든 할 수 없는 일이든 일단 적고 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엇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무엇이 할 수 없는 일인지 시작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계획을 잡을 때는 오로지 자신의 이성에 의지 하게 된다.

 

 

계획을 잡는 다는 것은 위선적인 자위 행위이다. 마치 자위를 혐오하면서 자위행위에 물드는 것처럼, 해야 되고 할 수 있다는 충동적인 이성의 재현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계획도 실천되고 실현되지 않는다.

 

 

그 것이 실천되고 있고 실현되고 있다고 느낄 때 계획의 위선적인 ‘스티그마’는 빛을 발한다. 그 어떤 것도 실천되고 있지 않으며 실현되고 있지 않음을 ‘위선의 스티그마’는 알고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계획을 잡는다. 단순히 시간표를 짜는 행위에서부터 ‘고귀’한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것에 이르기 까지 우리들은 계획을 잡고 그 계획에 따라 현실에서 자신의 행동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들은 계획을 잡는다.

 

 

‘계획을 잡는 것’은 가장 극명한 형태의 사회화, 그것의 첫 발걸음이다. 시간의 순서를 믿고 대화의 가치를 존중하며, 3차원의 공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모든 문명들의 기능의 사용을 전제로 하며, 어떠한 우연성도 배제하고 ‘정상적’인 흐름을 따라간다.

 

 

계획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총체이며 발현이고 재현이다.

 

 

계획은 그 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계속 만들어 나가면 나갈수록 자신(그들)의 삶은 억압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제 계획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돼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