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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키퍼 제도

요즈음 글쓰기 위해

1920-30년대 사회주의와 붉은 연애에 대한 자료들을 뒤적이는 중.

 

 

예전에 경성 트로이카를 보면서 궁금했었는데

언제 한번 '하우스 키퍼' 제도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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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니아식 사랑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조차 '물 한잔 마시는 것처럼 성을 가볍게 여긴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하우스 키퍼'제도와 겹치면서 일제가 당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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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키퍼란 일본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던 공산당이 권력과 감시의 눈을 피하고 속이기 위해서 여성당원으로 하여금 아지트를 관리하게 한 제도 혹은 풍습을 가리킨다. 통상 당 상층 간부에게 젊은 여성당원이 짝지워진다. 그녀는 레포(운동원)나 아지트 유지, 문서의 관리 등을 맡고 세간에서 격리된 생활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당에의 '충성심'을 악용하여 '성적 봉사'까지 강요받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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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금이나 이경선 그리고 박진홍 같은 여성들은 1930년대 초 학생운동을 거쳐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당 재건 운동에 투신하고 일제 말까지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데 이순금과 박진홍은 이재유를 사이에 둔 삼각 관계로 저널리즘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하 운동에 몸담고 있던 이들 여성활동가들의 사상이나 내면의 성장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은 직접글을 쓰지 않았다. 운동선상의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운동을 하면서 글도 쓴데 반해, 여성들은 '하우스 키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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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검거를 피해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재유는 1933년 이순금과 동거하다가 1934년 1월 이순금이 체호된 후 1934년 8월부터는 박진홍과 검거하면서 일제의 검거를 피했다. 박진홍이 검거된 뒤에 이재유는 유순희와도 동거했다고 한다. 박진홍은 1935년 1월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이재유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아기를 출산한 뒤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이런 박진홍의 특별한 처지에 대해 당시 신문은 선정적인 투로 보도했다. 이순금과 박진홍은 감옥에서 마주쳤고 이재유와의 관계 때문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재유가 1936년 12월 체포된 후, 일제의 조사를 받으면서 대중들의 신망을 잃을것을 두려워하여 이순금이나 박진홍과의 연애관계를 부인하자 '연적'관계였던 두 여성은 이재유의 반여성적 태도에 대해서는 함께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이순금은 1937년 5월에 박진홍은 7월에 석방되어 나온 뒤, 이재유와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이순금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박진홍도 이재유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 이순금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순금의 결혼 지참금을 운동 자금으로 쓸 수 있다는 것, 두 가지 이유로 박진홍은 적극적으로 이순금의 중매에 나섰고 이순금이 약혼까지 했으나 모두 다시 검거되고 만다.

 

-이상경(2004) "1930년대의 신여성과 여성작가의 계보연구"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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