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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17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와서(13)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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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주의)적 글쓰기..(6)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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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 자격(12)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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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8/01
    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6)
    은수
  9. 2007/07/30
    어떤 궁금증(10)
    은수
  10. 2007/07/09
    불가(능)한 상상(10)
    은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와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왔다. 진보넷 어느 블로그에선가 광고 포스터를 보고 갈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어떤 조직도 단체도 걸치지 않은 그냥 개인인 내가 꼭 가야될 당위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으나 '피해자 지지'라는 특정 글귀가 마음에 남아 결국 가게 된 것이다.

 

어젯밤 집에 돌아와 지지모임에 대해 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 글로 인해 이 모임에 대한 오해 혹은 편견이 생기거나 하면 어떡하나...글 쓰기도 전에 고민병이 도져 결국 노트북을 덮었지만,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던 내 의견을 블로그에서 말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면서.

 

단적으로 내가 느꼈던 점을 말하자면, 피해자 지지모임은 성폭력 사건 대책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물론 피해자를 지지하는 (운동)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고,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조직하고 민주노총과 전교조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피해자의 고립을 방지하고 연대를 표명하는 방법의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런 방식의 운동을 하는 것을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재심위에 제출한 피해자의 글을 보면서 나의,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떠올리며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그로부터 고립된 그녀가 싸우고 있는 거대한 조직의 '반복적인' 논리들에 어떻게 함께 대응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집단적인 경험으로 나누고 피해자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서로가 치유하고 치유받는 과정이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폭력상담소의 한 선생님이 말했던 것처럼 (잘 해결하라, 똑바라고 하라고 촉구해서) 조직에 다시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기를, 나 또한 바랬던 것이다. 비록 노동조합의 일정을 따라가고 중집회의에 가고 피켓팅을 하는 운동의 방법은 성폭력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는 매뉴얼이라할지라도, 그런 방식의 운동만로는 크게 바뀌지 않을거라는 마음과 그것이 피해자를 지지하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도 갖고 있다. 

 

그러면 어쩌자는거냐 물을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할수 있는 글쓰기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어제 모임에 왔던 한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다. 전교조가 어려운 시기에 한 개인이 조직을 해치고 있다는 논리에 맞서기 위해, 현시국,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 대해서 분명히 반대한다는 연대입장을 밝혀두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런식의 대응이 오히려 연대를 해치는 행동이며 우리가 더 잘싸우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잘 해결해야 한다는 설득의 논리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조직 우선의 사고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이든 다른 사건이든 그로 인해 조직이 망하면 어떤가? 연대를 해치면 안되는가? 썩어문드러진 조직 속에서 개인이 당장 숨도 못쉬겠다는데..죽겠다는데. 조직이 망해도 아무리 탄압상태라고 해도 문제제기 하는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조직이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 일로 망할 조직이라면 진작에 망해없어지는게 낫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조직을 위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연대를 위한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다.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손잡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분리획책에 놀아나지 않고 노동자가 하나되어야 우리는 자본이란 거대 괴물에 더욱 잘 싸울 수 있다. 등등등)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여전히 개인은 조직을 위한 존재이고, 개인들의 문제제기는  '건강한', '더 잘 싸울 수 있는' 조직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최종목적은 우리가 '진정한 동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들이 조직보위논리를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간부들에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설득논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절대로 이번 문제를 촉발시킨 핵심중의 하나인 '조직우선주의'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조직보호 논리로 내부 개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조직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고민해야 한다" 고 충고한 검찰의 이야기를 제발 우습게 알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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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적 글쓰기..

내 글쓰기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댓글들을 보면서 생각하고..

여성(주의)적 글쓰기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해답과 결론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 상당히 다른 인식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적인 글쓰기를 누군가는 '여성스러운'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혹은 여성적인 글쓰기가 '인품이 훌륭한' 글쓰기라고 인식되는 경향도 있는 듯..

 

 

그냥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내가 여성적인 글쓰기를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했을 때의 의미는..

교육받아 오면서, 또 대학 이후에 운동을 하면서 만들어진 내 글쓰기 방식이..

한마디로 대자보, 성명서, 기사용 같다는 거였다..

어떤 팩트에 대해 의견을 내는거..(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논리, 이성, 합리적임을 추구하고, 결론과 대안을 제시해야만 인정받는 글쓰기..

감정이라고는 유일하게 공적인 감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분' 만이 용납되었고

연민, 안타까움, 슬픔, 기쁨, 외로움 같은 감정들은 

냉철한 판단에 걸림돌이 되는, 가지쳐야 되는, 것들로 생각했던 글쓰기 말이다..

그러다..언젠가..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은..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비슷하게도 다시 학교에 들어와서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진 친구들의 글을 보았을때,

블로그에서 다른 이들의 글을 보았을 때..받은 느낌도 유사했다.

그에 비하면 내 글은 차갑고 무미건조한 느낌이었달까..그런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글쓰기가 단순히 개개인의 인품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적'인 언어체계,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시작했다.

여성적인 글쓰기..여성주의적인 글쓰기..라는게 단일하고도 합의된 개념인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하는 비판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어렴풋이 경험적으로 알 것 같았다.

보편적임, 시민됨, 인간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했던 여자들이 쓰는 글쓰기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간주되지 못했던 여자들의 글쓰기란..

남성 중심적인 상징질서와 언어체계에 익숙하지 못했던 여자들의 글쓰기란..

이 사회에서 봤을 때는 (치유하는 글쓰기, 라는 책에서 보았던) '미친년 글쓰기'에 가까운 것이다.

중얼거림, 알 수 없음, 논리적이지도 않고, 어쩌면  쏟아버리는 광기어린, 분노, 감정들이 뒤섞인

머리보다는 몸적인 언어들, '두 입술'로 말하는, 그 자체로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글쓰기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듯이

미친년 글쓰기가 용납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왜 자꾸 말이 바뀌냐, 앞뒤가 맞지 않다, '사실'이 무엇이냐고

따져묻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하지만 그것이 폭력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기억, 사실, 감정은 바뀌는 건데..

어찌 되었든..그에 비하면 아직도 내 글쓰기는...'남성적/공적인 글쓰기'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꽤나 논리적으로 쓰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늘 글을 쓰고도 개운하지 못한 이유...

진정으로 내 자신을 위한 것인지,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인지 헷갈리는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익숙하지 못해서인지..이미 습이 생겨버려서인지..

아니면 쏟아놓을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글을 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 친절함을 요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글쓴이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감정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보기를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단지 거칠다고..정제되지 않은 말들이라고 비난하는건...지나치게 가혹한 것 같다..

마초적인 공격성 댓글이 달리면, 여성적인 글쓰기로 확인된다는

어느 블로거의 말은 씁쓸하지만...가장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점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고...내 글이 공격적이라는 건...비난이나 분노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보다 머리로 이해하는 건 아닌지, 무작정 비판의 날을 들이대려 한건 아니었나..생각이 들어서..

 

글쓰기는 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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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과 도덕성

 

 

혹자는 이번 사태를 두고

민주노총이 갈데까지 갔다, 쪽팔린다고 얘기한다.

좀 더 고상하게 얘기하면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도덕적 해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을 접하는 이런 식의 도덕성 담론에

나는 사실 불편함을 느낀다.

 

조직의 도덕적인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대표적인 예시로 '돈문제와 여자문제'를 함께 얘기하는 류의 인간들.

성폭력을 여자문제로 치환하는 작자들에 대한 분노는 치우고서라도

강승규와 김상완 사건을 모두 '도덕성'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총연맹은 지도부 총사퇴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사건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그를 도려내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슨 목적으로, 무슨 내용 하에 이루어지느냐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혹자가 말하듯 이 사건은 어디까지 '부도덕한 개인'의 문제인데

왜 지도부 전체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사건이 진정으로 '조직적인' 문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민주노총이 정말 '창피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총사퇴는 해당 사건을 시급히 마무리하려는 면피용이 될 수도 있다.

왜 사퇴하는가?

어느 부도덕한 인간이 간부였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과오에 조직의 대표자가

사퇴하는 것이라면 사퇴는 책임이란

우리 애 잘못은 애비인 내가 책임지겠소, 하는 또다른 가부장적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명서에 나온 이번 사건의 전말은 처음부터 조직적인 문제였다.

남성 위원장을 여성 조합원의 집에 은닉했다는 그 사실 자체부터

피해자에게 은닉죄를 모두 전가하려고 했고,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단 무마해보고자 상부에 보고조차 않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조직 외부의 지인에게 도움을 청할수밖에 없었다는

이 사건의 전말 자체가 모두 엄청나게 조직적인 문제이다.

80만 조합원이 있다고 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인권보다는 자본과 보수언론에 역공을 당할 '빌미'로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한 어떤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사무총장이 개인적으로 피해자를 만났을 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민주노총의 조직문화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 이 사건이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 진보운동의 도덕성 문제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김상완 같은 작자가 민주노조 운동의 도덕성을 갑자기 땅에 떨어지게 했다거나,

요즘 활동가들의 도덕적인 기강이 해이해져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는 식의 얘기들.

솔직히 말해서 현장에서 술먹고 단란주점 가고, "여자끼고 노는 건"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이런 사건이 발발했을 때만 운운하는 도덕성은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고 '운동의 도덕적인 기강'과 '활동가의 도덕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일견 나아보이지만, 사실은 마찬가지로 위험한 사고방식일 수 있다. 

도덕성이라는 건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합의된 일련의 윤리적 가치를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도덕성이라는 건 기존의 것, 매우 보수적인 선/악 가치판단에 가깝다.

보수적인 기독교와 레닌같은 (금욕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양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여성주의를 보수적이며 남성중심적인 도덕적 가치에서 성적 급진주의라고 비난하고,

성과 관련된 일련의 사안들에서 공통적으로 도덕적인 금지주의 입장을 가진다.)

 

도덕성은 지켜져야할 가치가 아니라, 논쟁되고 논쟁되어져야 하는 가치여야한다.

그리고 성폭력은 도덕성이 아닌 피해자의 인권과 권력관계,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노동운동과 조직문화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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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소녀를 지키는 예비군오빠들?

촛불문화제가 거리시위로 이어진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다.

거리시위에 참여하면서 좀 희한하다 생각한 광경이 있다.

 

그건 바로 예비군복을 입은 젊은 남성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

 

 

처음에는 다음 아고라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서일거라고, 아주아주아주 좋게 순진하게

생각해보려고도 했음.

(흥, 하지만 "선영아 모여라" 피켓 들고 있는 여성들도 있는걸!)

 

하지만 이들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듯함.

 

TV를 보는데 이런 멘트가 나왔다.

"청소년 보호를 위한 자경대를 조직하고"...
멘트:  예비군복장 시민 " 우리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복을 입었다"

 이들의 실체는 바로....자경대??? 란다.

자경대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스스로 경계하여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건지.

 

촛불집회가 '소녀'로 상징화 되면서

군복 입은 오빠들이 어린 소녀들을 지키는.

이 그림 번뜩.

 

너무나 젠더화된 이 그림.

 

그런데 이 기사제목들 좀 보세요.

 

 

'촛불' 지키러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80530121909784&cp=ohmynews

 

촛불시위대 보호하는 예비군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39899

 

시민 도우미, 예비군 '촛불 보디가드'

거리 시위, 시민보호 앞장서, 시민들 "사랑해요 예비군"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892

 

[사진]촛불집회에 나타난 형님부대(사진화보)

 

 

 

 

 

우아...

이를 어쩌면 좋나. 정말 골치가 아프다.

 

 

얘네들은 사수대보다도 훨씬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자신들의 남성성을 드러내고

우리를 보호하겠다 한다.

 

 

어제는 닭장차 앞을 얼쩡거리는데

왠 아저씨가 와서는

"여자들은 채증당하면 위험하니까 닭장차 앞으로도 오면 안된다"고 말한다.

 

꽃가마라도 타고 촛불시위 나갈가보다 콱!

 

뭔가 효과적이고 재기발랄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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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자격

글을 쓰고 있는 게 있는데,

쓰다보니 이 대목이 참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여성학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으며 여성학을 공부할만한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할만한 이상적인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결론은 정해져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기엔 부족한 인간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라 말할 자격이 없다."

와 같이 자신을 질책하고

중도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포기한다.

 

도대체 그 자격이란게 뭘까?

<페미 자격증>이라도 줘야 되는 것인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는 페미니스트 될 자격이 없다"니.

 

많은 사람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기를 두려워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꼴통 페미년'에 대한 무시무시한 낙인과 배제 때문이겠지만.

분명히 어떤 부분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하는 자기 선언에

엄청난 책임감과 중압감이 따르기 때문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이런 것 같다.

페미니스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철한 페미니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는 일상이 전쟁이다. 검열, 검열, 자기검열 사소한 행동하나부터 페미니즘적인가를 검열한다.

이 때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는 정말 실체가 없다.

그러나 이것과는 상관 없이,

하나라도 잘못된 것이 발각된다면,

넌 out ! 자격박탈!

페미니스트가 아닌게야.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의 삶은 진짜 팍팍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삶을 정말 불행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지나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상/ 규범에 스스로의 존재/행위를 일치시키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가능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페미니스트는 온몸으로 페미니즘을 입증하기를 요구받을까?

내가 페미니스트 대표도 아닌데, 왜 내가 잘못하면 페미니즘이 원래 잘못된 것마냥 비난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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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야 들리는 것

작년 봄이었나,

어느 워크샵에서 모둠 프로그램을 하면서

질문 중의 하나가 있었다.

 

"지구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듣고 말해보세요"

 

다른 많은 질문들에는 답을 했지만

이 마지막 질문에 나는

"평소에 지구와 자연에 대해 잘 몰라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요."

라고 성의없게 답해버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잘 모른다"는 말은 종종  "관심 없다"는 말을 면피하기 위해 쓰인다.

예를 들면, "난 여성문제를 잘 몰라" 뒤에 숨겨진 말,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중요하다 생각하지도 않아. 그건 내 문제가 아니거든.)

 

....

 

지난 토요일에, 충남 보령에 있는 작은 섬 녹도에 다녀왔다.

 

한명의 자원봉사자가 되기까지, 많은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오고 간 것 같다.

어떤 힘이 나를 움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두 분이 목숨을 잃고 또 한분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 때문인지

그저 실제로 어떠한가 보려는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바닷가에서 자라 바다가 좋아서 그랬는지 알수 없지만.

 

한 군데에 앉아 돌을 닦는데, 친구와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돌은 무생물이라지만, 검은 기름 속에...돌들은 숨을 쉴수가 없었고 죽어있었다.

미안해......정말 미안해...

이렇게 마음을 다해 내가 대신 사과할테니, 돌들이 내 마음을 들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앉았던 그 한 곳조차 제대로 닦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또 올께..."

 

 

주저했던 이유.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실들을, 나만 안다고 생각하는 건 참 오만한 일인 것 같다.

사고를 낸 당사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데,

그저 국민들에게 호소해서 해결하려는 정부와 기업에 분노하는 것,

새벽에 대천항을 출발하는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혹은 덮어주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그렇게도 아파하는 바다 앞에서 나의 오만함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아름다운 섬, 녹도.

방제작업이 계속 있었던 덕분에 겉보기에는 그래도 깨끗한..

 

 

하지만, 가까이에 가보면...정말로 끔찍하다.. 

내가 있었던 곳...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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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그리고 인정하기

 

   책장에 있는『우리 안의 파시즘』을 꺼내들었다. 책의 첫 장에는 2002년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처음, 대학이라는 공간에 들어와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 스무 살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나 혹은 우리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는 '외부의 어떤 것'에 분노했다. 학교, 공권력, 자본주의...그러나 그 분노라는 것이 얼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성주의를 접하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폭력의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면서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던 웃기는 인간들에 대해 화를 내고, 내 자신이 ‘그’ 인간들과 닮은 구석은 추호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다르니까, 그들은 나와 다르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과 나 사이의 경계, 그 경계조차도 내 스스로가 그어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찬찬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을 괴롭힌다... 

  

  여성주의를 알게 되고, 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로 정체화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그 말을 나를 돌아보는 방법이기보다는, 남들을 재단하는 잣대로 사용해왔던 것 같다. 특히 ‘성폭력’이라는 의미도 그러했다. 나는 피해자가 될 수는 있어도 가해자가 될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이 있었고, 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는 ‘성폭력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내가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에 도덕적인 타격을 입고, 그로 인해 다시는 ‘여성주의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그런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내 잘못을 지적했을 때조차, 그 상황을 벗어나기 바빴던 것이다. 잘못, 이라는 것이 내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나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누구도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 있는 권력의 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느낀다. 내가 ‘여성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한다고 해서 가부장제라는 억압의 바깥에 위치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이것이 나라는 사람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나, 성찰하지 않음을 변명하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라는 위치가 어떤 면에서 분명히 권력을 갖고 있고, 그 권력과 타협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는 인간이라는 점부터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한 저항자, 혹은 완전한 피해자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부터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특히 이것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장 벗어나지 못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곳이 가장 느리게 변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 것에는 저항하는 인간이지만 어떤 것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어떤 것’ 조차도 내가 서있는 위치가 변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FM이니 사발식이니 하는 대학의 문화에 저항하는 ‘당돌한 후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역시도 학번문화와 ‘선배’라는 이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었다. 대학시절 4년 내내, 과에서 학회에서 세미나를 해왔지만, “하급생의 반발이나 문제제기는 그 하급생의 이론적 총명함을 판단하는 기준이거나 정해진 결론에 이르게 하는 도구였지, 진정으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권인숙,p.136)라는 말은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온다. 

  

  나를 성찰한다는 건, 일차적으로 사회구조와 관계의 망 속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배우는 학생이지만, 가르치는 강사이기도 하며, 또 나는 누군가의 후배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배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서 느끼는 ‘민감함’을 갖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해왔던 많은 말들과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과 실제로 이것을 돌아보고 ‘내 것’으로 인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큰 것 같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쉬워도, 내가 속한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고,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나를 떨어뜨려 보기는 더욱 어렵다. 보려고 하는 순간 잘못이 보일까 두렵고, 잘못을 보는 순간 비난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 비난이 자기 부정이 되어 고통으로 밀려들어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오류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기억이라는 것에는 함정이 있어서,

  그것은 처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가도  어느 사이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놀게 된다.”

  (문부식,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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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당신의 고양이님의 [여기까지 읽고 나서] 에 관련된 글.

 

 

 

실은 마음이 쭉-불편했다.

navi가 '잘못'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부터.

나비 당고 돕헤드의 글을 읽고 덧글을 읽고

마음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온다.

 

 

아-, 이건 아닌데, 내 글은 어떤 의미였나.

어디에서부터 말해야할까.

아주 많이 썼던 말들 중의 하나였던 '여성주의적이다' '반여성적이다'와 같은 말들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은 여성주의적이고, 저러한 것은 반여성적이며 성폭력이다, 라는 규정이

점점 더 체크리스트가 들어있는 매뉴얼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라는 걸 설명할 때마다

"이건 성폭력이야? 이렇게 하면? 남자가 하면 그렇고 여자가 하면 아니고? 넌 기분나빠? 난 아닌데"

말도 안되는 예시를 끝없이 들어가며 닥달해대는 이들의 속내를 알기에 짜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경험의 한 '단면'이 모든 성폭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연우의 글에 나온 것처럼  "내 경험을 우선시하고 강요하는 것이" 될까봐 말이다.

내 경험과 네 경험은 다를 수있고, 그게 자연스럽다.

모 힙합가수의 콘서트 장에서 그남들이 우스갯소리로 "땀 많이흘렸어요? 아래까지 다 젖었나?"

했을때 난 그 자리에서 희롱당한 것 같아 기분 더러워졌지만

함께 있던 내 친구는 완전 좋다고 소리지르면서 방방 뛰어댔다.

그 애가 '여성주의적'이지 않아서, 혹은 '여성주의 의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꼴통페미'여서, 너무 많이 '예민하고' '민감해서'가 아니라

우린 어릴때부터 다른 경험과 환경 속에서, 다르게 자라왔기 때문에

다르게 느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여자들'에게 억압적이라는 그 '보편성'에 기대어서만이, 그래서 '反여성적'이라는 말을 써야만이

그나마 나의 불편함을 얘기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다.

그 맥락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니 너무도 절실하게 이해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그 불편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마치 성폭력,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것마냥 생각하는 그 과정에서

또 누군가의 '다른' 경험들은, 목소리들은 삭제되었으니까.

 

제일 처음 돕헤드의 '사과문'과 반성,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나는 왜 자신의 글에 대한 설명이 없을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가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 이름 붙인 이유와 맥락이 정말로 궁금했다.

그는 창피하다고 했다. 하지만, 왜? 왜?

그는 반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대체 무엇을?

그런 이야기들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피해'에 대해 '사과한다'고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고, 동시에 불편했다.

거한이 말했다시피

아무도 그에게 '가해자'라고 하거나, '우리 모두에게 사과하라'고 하거나

'활동중지를 하라' '블로그를 떠나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성에 타격을 입을까 두려워'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말이 나오자 동시에 그렇게 끝내버리는건,

제일 처음 문제제기 한 사람에게도, 그 글을 보았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돕헤드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많은 이들도 그랬지만, 나 역시도 그런 식의 종결을 바라지 않았기에 글을 썼다.

정말로 무언가 얘기를 한 연후에, '반성'이라는 단어를 써도 늦지는 않을거라고 

그래서 그런 글을 썼다.

그런데 내 글이 이 일을 수수방관하며 지켜보다가 훈수나 두는 것처럼 비춰졌을까

아니면 처음에 문제제기한 이들을 탓한 것처럼 읽혀진건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던 와중에 돕헤드가 새로 쓴 글, '민중은 여성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실망스러웠고,화도 난다.

나, 혹은 다른 이들이 궁금했던 건,

"돕헤드는 어떤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인가?"가 아니다.

내가 돕헤드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하다고 썼던건

그가 어떠한 생각 속에서, 어떠한 맥락 속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였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자, 라는 것만으로 글을 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해, 불편함을 제기한 이들에 대해, 자신의 글에 대해 침묵한채

자신의 세계관이 어떠하고,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이 어떠한가만을 길게 쓰고 있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의 언행을 곧 페미니즘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때때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불쾌감이 되고 성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건 -주의자,-이스트는 그래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그럴리 없다는,

그 완전무결한 관념부터 벗어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화가나 버렸다. 자전거에 비유하는 그 대목에서.

돕헤드가 만약 정말로 남성집단이라는 괴물, 남성성이라는 동일체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말했어야 되지 않나.

자신의 욕망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소유하려는 다른 남성들의 욕망과 어떻게 다른지,

여성인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그런 이름을 붙이고 자위 혹은 여자애인과의 섹스를 상상하는 욕망과는 어떻게 같을 수(아니면 다를 수) 있는지 말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나 돕헤드는

"나는 민중이고, 여성이며 이 차별과 억압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라고

선언하듯 말하고 있었다.

왜 돕헤드는 민중을 게이가 아닌, 장애인이 아닌, 흑인이 아닌, 비정규직이 아닌 여성이라 생각했을까.

그가 생각하는 민중이, 그가 생각하는 여성(성)이 무엇이길래. 여성이라는 젠더는 어찌하여 획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차를 모는 운전자들을 개별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어찌하여 민중은, 여성이라고 명명했던 것일까?

나는 자전거 운전자라는 약자, 소수자, 억압받는 자들의 영상들이 '여성'이라는 단일한 집단으로 투영되는 것이 싫다.

그래서 나는 민중은 여성이어서는 안된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성,이 그렇게 투명한 주체로 존재하는 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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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궁금증

당신의 고양이님의 [어떻게 그는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나?] 에 관련된 글.

돕헤드님의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에 관련된 글.

 

오랜만에 컴터를 켜고, 블로그에 들러서, 뒤늦게 글을 확인했다.

뭔가...'개운하지 않은' 감정이 남아, 포스팅을 해본다.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글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돕헤드는 무엇을 '성폭력 가해'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여기에는 어떤 비꼼도 개인적인 원한도 없다.

그냥 정말 궁금하다.

 

나는 원문을 읽지 못했다.

당고의 글에서 그 내용의 일부로 보이는 글을 발견했을 뿐이다.

 

내가 본 그 글에선,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자신의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클리토리스 자전거를 타며 짜릿함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궁금하다.

"저는 지금 너무나 창피하고,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런 무감각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자신에 대해 매우 화가 납니다."라고 말하는 돕헤드가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기를 소유하려거나 또는 그것을 도구화하거나 또는 대상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저는 자신합니다."라고 말할때

진짜 속내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내가 느끼기엔, 돕헤드가 사과한 이유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많은 분들께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몹시 불편했으며, 강하게 분노했고, 어이없고, 많은 짜증을 느꼈고, 성폭력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돕헤드가 

자전거에 이름을 붙일때, 짜릿함을 느낄 때, 그것을 글로 쓸때

어떤 맥락이었는지, 어떤 이유였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좀 더 세세하게 알고 싶었다.

모호하고도 어려운 '-되기'라는 단어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탈때 짜릿함을 느낀다면

그 감정과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돕헤드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이 또다른 '가해'가 될까봐,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는 것이 '2차 가해'가 될까?

 

그 '불편함'을 기준으로 볼때, 나는 여자이지만, 그 글이 그리 불쾌하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른 불편함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여자'가 잠재적 피해자처럼, 억압받는 자인것 마냥 여겨지는게 싫었을뿐이다.

나는 사실 에로틱이라는 단어에도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클리토리스는 에로틱한 부위가 아닌가? 물론 내 감정은 하나의 의견일뿐이다. 

생물학적 남성은 그 부위를 에로틱하게 느끼면 안되는가?

그 감정을 비판받아야되는건가, 아니면 그것을 소유물 자전거에 빗대서 비판받아야 되는 건가,

아니면 공개적인 블로그에서 말해서 비판받아야 되는건가.

 

 

그래서 나 역시도 '성폭력이다/아니다'라는 규정보다는, 아니 규정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100% 순결할 수 없으며,

때때로 공모하고 협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성찰과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는  '불편함'이라는 단어 이외에 언어화할 수 없는 답답함을 지닌 이들의

풀어놓기,가 중요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또,

돕헤드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심리도 궁금하다.

특히 그가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남성'이라고 말해지는 이라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성폭력이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다층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면

그 맥락 중의 하나는 그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상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역시 문제제기한 이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야기 구조 속에서 '성폭력'이라는 규정이 생기면서

따라붙는 효과들이다.

(개인적으로, 당고 글은 "이 행위에 여성주의적인 명명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맥락이 있는가?"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규정함으로써 가져오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그것은 대부분 남성/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대립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해자의 사과문 혹은 징계-퇴출.

이것은 '그나마' 잘 해결되는 케이스로 여겨진다.

 

나 역시도 나의 경험들을 되돌아보면서, 후회가 남았다.

당시에는 분노, 좌절, 이런 감정들에 휩싸여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내가 못했던 걸 다른 이들에게 요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는 없었을까.

불편함, 이 누군가를 낙인찍는 기준이 아니라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 '반성'이라는 단어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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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상상

 

..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살아가고 세상의 일부인 자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현실 속 철의 노동자들은 단명하게 될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24시간 활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흔들리지 않고 투쟁하는 자'로서만 규정지으며 이상화하지말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며 성찰할 때이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남성활동가들은 정세분석과 투쟁방침을 말할때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번의 성관계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고 무지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어떠한 조직도 공개토론회 또는 교육의 장에서 섬세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피임지식 따위를 주제로 교육하고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사에는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갈등, 모순된 욕구와 정체성이 배제되어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계층상승욕구, 생존전략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욕망,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연애에 대한 욕망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투사로서의 정체성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와 그 기록에는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일상의 욕망과 저항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위의 구절들은 조주은의 책,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중에서 따온 것이다.

 

며칠전에, 정확하게는 지난 토요일에, 아이공에서 하는 섹슈얼 파티에 다녀왔다.

린다 벤글리스와 바바라 해머의 작품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음담여설'이란 이름에서처럼, 본격적인 화두는 자기 욕망, sex..그런 것들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홍대거리에서나 마주친다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

그 중에 한 분이 홈에버 파업현장에 갔다오신 분이었는데 그 곳의 긴장감 돌고, 팍팍한 분위기와 달리, 이 곳의 편안하고도 '촉촉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날의 그런 끈적끈적하고도 야시시하면서 촉촉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제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런 고민이 들었다.

왜, 파업현장에서는 '촉촉한' 얘기들을 해서는 안되는 걸까.

노동조합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면 안되는건가.

물론 나도 파업현장이라는게 특히 점거투쟁의 경우,

언제 용역깡패들이, 혹은 공권력이 투입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점거투쟁을 하면서 지난 번 내가 홈에버에 갔을 때도,

집회 이외의 시간들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교육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 한꼭지도,

관계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욕망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을까.

 

그건 불가능한 상상인가.

아니면 해서는 안될(불가), 상상인가.

 

홈에버만 하더라도 점거농성중인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불편한 잠자리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일 것이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공권력이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뒤척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어떤 여성노동자는 남편이 애들을 밥 먹여서 제때 학교에 보내고 있는지 걱정으로 몸을 뒤척일 것이고

어떤 여성노동자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집안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을 거라고 한숨쉬며 몸을 뒤척일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여성노동자는 sex를 못한지가 벌써 며칠째야, 하면서 끓어오르는 자위욕구를 애써 참으며 몸을 뒤척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상들이 가능,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어떤 상상들은 정당한 것으로, 어떤 상상들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일까.

 

어떤 운동도 개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결코 '확대'할 수 없다.

운동이 희생이 아닌 이상,

누구나 특정한 자기의 욕망을 운동을 통해 실현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자기 만족감을 얻는다. 

 

더군다나 그것이 성적욕망이라해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분명히 그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 각자에게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들,

그와 같은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들이 모인 노동조합과 그녀들이 싸우는 투쟁안에서

그녀들이 원하는 것, 혹은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은 이야기될 수 없는 걸까.

왜 그 모든 것들은 항상 '계급의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혀버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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