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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살아가고 세상의 일부인 자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현실 속 철의 노동자들은 단명하게 될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24시간 활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흔들리지 않고 투쟁하는 자'로서만 규정지으며 이상화하지말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며 성찰할 때이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남성활동가들은 정세분석과 투쟁방침을 말할때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번의 성관계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고 무지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어떠한 조직도 공개토론회 또는 교육의 장에서 섬세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피임지식 따위를 주제로 교육하고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사에는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갈등, 모순된 욕구와 정체성이 배제되어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계층상승욕구, 생존전략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욕망,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연애에 대한 욕망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투사로서의 정체성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와 그 기록에는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일상의 욕망과 저항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위의 구절들은 조주은의 책,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중에서 따온 것이다.
며칠전에, 정확하게는 지난 토요일에, 아이공에서 하는 섹슈얼 파티에 다녀왔다.
린다 벤글리스와 바바라 해머의 작품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음담여설'이란 이름에서처럼, 본격적인 화두는 자기 욕망, sex..그런 것들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홍대거리에서나 마주친다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
그 중에 한 분이 홈에버 파업현장에 갔다오신 분이었는데 그 곳의 긴장감 돌고, 팍팍한 분위기와 달리, 이 곳의 편안하고도 '촉촉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날의 그런 끈적끈적하고도 야시시하면서 촉촉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제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런 고민이 들었다.
왜, 파업현장에서는 '촉촉한' 얘기들을 해서는 안되는 걸까.
노동조합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면 안되는건가.
물론 나도 파업현장이라는게 특히 점거투쟁의 경우,
언제 용역깡패들이, 혹은 공권력이 투입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점거투쟁을 하면서 지난 번 내가 홈에버에 갔을 때도,
집회 이외의 시간들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교육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 한꼭지도,
관계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욕망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을까.
그건 불가능한 상상인가.
아니면 해서는 안될(불가), 상상인가.
홈에버만 하더라도 점거농성중인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불편한 잠자리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일 것이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공권력이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뒤척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어떤 여성노동자는 남편이 애들을 밥 먹여서 제때 학교에 보내고 있는지 걱정으로 몸을 뒤척일 것이고
어떤 여성노동자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집안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을 거라고 한숨쉬며 몸을 뒤척일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여성노동자는 sex를 못한지가 벌써 며칠째야, 하면서 끓어오르는 자위욕구를 애써 참으며 몸을 뒤척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상들이 가능,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어떤 상상들은 정당한 것으로, 어떤 상상들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일까.
어떤 운동도 개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결코 '확대'할 수 없다.
운동이 희생이 아닌 이상,
누구나 특정한 자기의 욕망을 운동을 통해 실현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자기 만족감을 얻는다.
더군다나 그것이 성적욕망이라해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분명히 그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 각자에게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들,
그와 같은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들이 모인 노동조합과 그녀들이 싸우는 투쟁안에서
그녀들이 원하는 것, 혹은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은 이야기될 수 없는 걸까.
왜 그 모든 것들은 항상 '계급의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혀버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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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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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저도 있었는데.재미있어요.넷에서는 아는 블로거, 오프에서는 낯선 사이...! 알았으면 더 방가방가 했을텐데.... ㅋ/ 계급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성은 배제가 되어있다는 생각을 많이해요. 아마도 그날 공통된 지점이 없었던 것은 우리가 여성임에도 여성의 성에 관해 음지화되어 있는 이 상태!, 남성의 또 다른 전유물로만 인식되는 여성의 성이 여성의 것으로 주체화되지 않은 환경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다양할 수 있고, 서로 느끼는 지점도 다르고, 서로 쑥스러워하고, 관계의 지점에서 느꼈던 폭력성까지도 음지화되어 개인의 것으로 삭여야하는 이 사회. 여남의 관계에서 항상 감정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많이 봐왔고, 그것이 또 여성의 몫으로만 떨어지는 것도 많이 봐왔어요. 근데 중요한 것은 서로 만나고 사랑하고, 그래서 섹스하고 하는 그 과정이 친밀감, 공유감, 안정감, 애정 등의 교감들 때문에 만나는 거 아닌가 생각도 해봐요. 그래서 꼭 이런 부분들을 나눠야하는 사람이 많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100명의 다자적 친구와 한명의 진솔한 친구를 택하라면 서슴없이 한명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진솔한 친구를 택할 거기 때문에, 관계성에서 다자적/비독점이라는 말은 진보계 남성들이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도 들어요.(그걸 받아드리지 않으면, 구식인 거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섹스를 했을시 책임에 관한 부분. 여성은 남성과 섹스를 하고 난 후 남성과는 다르게 몸에 대한 책임이 따르죠. 이 책임에 관한 부분을 나누고 싶지 않은 지점에서 비독점/다자연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하는 의문...| 여성은 또 다시 몸에 대한 책임으로 감정노동을 하게 되고, 그것이 그냥 여성이기때문에 느껴야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죠. 그리고 그 책임을 함께 나누고자 했을 때 왠지 쿨해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선때문에 그 지점도 제대로 얘기하지도 못한다고 봐요. 남성들은 비독점다자연애를 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 너무 많이 봐왔고, 그것을 떳떳하게 공개하고, 이애하고는 작업 애인, 이 애하고는 지식을 나누는 애인, 이 애하고는 친구처럼 고민을 하는 애인, 이 애하고는 섹스를 하는 애인처럼 분류를 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남성도 봤어요. 사실 불쾌했죠. 비독점다자연애라는 게 절대 쿨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남성들이 만들어낸 현대의 또 다른 허상이자, 욕망, 할렘같은 느낌이랄까요. 여성동성애자 사이에서도 처음엔 서로 쿨하게 터치하지말고 사귀자하지만, 관계지향성, 육체적인 욕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밀감과 유대감이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가 되는 거 많이 봐왔어요. 애인이 있을 때는 애인한테 집중해주는 거. 그게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봐요. 사회에서 얘기하는 것을 꺼꾸로 뒤집어서 생각할 때 항상 마음의 언저리에 있던 응어리들이 없어지는 걸 느껴요... | 오히려 여성주의판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보다 남성과 함께 일하는 여성노동자, 여성운동가분들이 성의 개방, 해방성에 대한 지점에서 비독점다자연애라는 또다른 진보적 발언?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봐온 거 같아요. 진짜 마음이 가는대로, 진보적인 운동판이든 사회적 인식의 틀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선택하든 지금 현재 내 마음이 가장 옳다고 느끼는 것! 이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부가 정보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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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한잔"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 엄청나게 고민되게하는 글... 이건 공부도 필요하겠지만, 나의 "성애"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가야겠군요.부가 정보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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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반란// ㅎㅎ 그러게요 그날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며^^;; 관계에 있어서 다자적/비독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식'이라고 1:1의 관계를 '진보'라고 이분법적으로 보고 후자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또다른 폭력이죠. 실제로 진보진영의 특수성 때문에, 그런 류의 성폭력 사건들이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프리섹스, 자유연애, 비독점다자연애...각각의 정의들이 다르겠지만, 그것들이 기존의 관계에 어떠한 균열도 가져오지 못한채 남성중심적으로 전유된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결과는 다 똑같을 거라고 봐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독점 다자연애라는 말 자체를 그저 프리섹스주의의 또다른 판본으로,'책임지지 않음'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건, 또다른 오류가 아닐까 생각해요. 비독점 다자연애의 핵심은 그것이 '쿨'하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1:1 관계의 배타성에 대한 성찰로부터 나온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애인이 있을 때 애인에게 집중해주는거"에서 저는 그 '집중'이 무엇인가라는 점을 되질문하고 싶어요. 만약,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한다면 그/녀는 애인에게 '집중'하지 않는 것인가?...1:1 관계를 유지했을 때만이 친밀성과 공유감 안정감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가정 역시, 관계를 또다르게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죠. 그래서 저 역시도 현재 내 마음이 가장 옳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게 무엇이든 한편으로는 또다른 얘기들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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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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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 레닌..물한잔...그릇...-_- 생각할수록 OTL..항상 생각하지만 여성주의는 자기 성찰과 자기 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힘든...부가 정보
케산/세르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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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반란//저는 비독점 다자연애를 '겉으로는' 주되게 남성들이 많이 주장한다는 점은 맞다고 생각해요.남성들이 그럴수 있는 건 아무래도 여성에 비해 그러한 관계에서 떨어지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육체적 부담에서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겠죠.
이런 불균형탓에 많은 비독점 다자연애 관계가 한쪽에 상처를 주고 끝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저는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비독점 다자연애를 우리가 가져야할 하나의 성애적 비전의 하나로 대접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비독점 다자연애 또한 현실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독립적으로 그 반대의 연애형태-서로를 속박하는 일대일 형태의 연애-가 보여주는 폐해와 체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나온 진지한 고민의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저는 광범위한 형태에서의 연애를 논할 때 섹스를 "친밀감, 공유감, 안정감, 애정 등의 교감들"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에 그다지 많은 지지를 보내지 않습니다. (이런 구분은 이미 상당한 결론적 함의를 가지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욕망을 의도치 않게 또다시 제한할 소지가 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애하고는 작업 애인, 이 애하고는 지식을 나누는 애인, 이 애하고는 친구처럼 고민을 하는 애인, 이 애하고는 섹스를 하는 애인처럼 분류를 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남성"이 존재의 반란님은 "불쾌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런 연애행태를 남성에 국한시키며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기 발목을 자기가 묶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 주위에는 실제로 정확히 이런 다양한 욕구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은폐된" 여성들이 있거든요.
당연히 남성들한테는 물론이고 같은 여성들로부터도 이런 여성은 "나쁜 년"이라고 욕을 먹고 있지요.
여성들도 존재의 반란님이 불쾌해하신 것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적지 않은 숨겨진 여성 욕망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전제해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여성들을 성애적 표현의 다양함이라는 전제에서 존중해야하며 도덕적으로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쁜 년"이라는 낙인을 남성이든 여성이든 찍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의도치 않게 스테레오 타입을 부여하게 되면 여성의 성애적 표현을 의도하지 않게 한쪽으로 몰아가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요?
많은 여성들이 자꾸만 "관계의 연애 정치학"을 연애의 기본으로 삼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그동안 남성과의 "현실속에서의" 연애에서 나오는 나름의 반성적 평가일텐데 한편으론 이해가 가면서도 여전히 방어적 심리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군요.
그것이 전반적으로 항상 올바른 성애의 모습이라고 일반화할 수도 없는데도요.
(사실 이런 평가에 따라 이전과는 판이하게 보수적인 성애관념으로 후퇴한 여성들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물론 저 또한 "현실의" 비독점 다자연애의 모습에 항상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은 아닙니다.
저 또한 비독점 다자연애를 두 번(두 번 모두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경험했기 때문에 실제의 문제로 다가오는 경우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관계의 실패에서 오는 경험을 거울의 반사면처럼 반영해 순전히 "관계의 연애정치학"을 일종의 신성의 전당에 올려놓고 특권화된 위치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찬가지로 그러한 틀을 벗어나 있는,혹은 벗어나려하는 욕망하는 사람들(거의 대부분 고스란히 여성들이 피해를 볼겁니다)이 자기 자신을 또다시 단속하게 되는 역효과가 난다고 생각하거든요.
(더 나쁘게는 성적 보수주의와 아슬아슬한 갈림길에 들어서게 되구요)
결론적으로 저는 존재의 반란님이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존재의 반란님이 덧글에서 달아주신 부분들에 대해 대부분 지지를 보낼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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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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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집중해주기. 人(사람인)間(사이간)이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아요.. 불교에서는 인간의 관계성(삶)이 고통과 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떠나 道를 닦기도 하구요. 어린아이, 식물, 동물, 자연이라는 생태계.. 모두 애정이라는 에너지, 행복이라는 에너지로 성장한다고 보아요. 인간도 자연이기 때문에 아마도 애정,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먹고살겠죠. 저는 이 느낌이 좋구요. 집중과 집착은 다르잖아요. 관계를 통해 내가 행복을 느끼는지, 내가 행복한 만큼 그 관계에 있는 사람도 행복한지... 나는 행복한데 상대방은 어떤지.... 그 지점을 살펴보는 것도 관계에 대한 서로의 행복을 위한 배려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모두 행복을 꿈꾸고 사랑이 가득함을 꿈꾸고... 중요한 것은 자기가 행복한지 아닌지... 이걸 성찰하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은수님께서 말씀하신, 1;1 관계에서의 성찰에서 온 비독점다자연애라는 것. 저는 너무너무! 동감!!합니다. 그러나 이 성찰, 이 깨달음을 느끼고 통감해서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도 고민이 되요. 세상을 바라보는 그릇이 다양한 만남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한사람 한사람을 만날 때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주고, 사랑해주고, 느끼게 해주고... 이게 짜릿한 행복의 맛이 아닐까~~~~!!! 하는! 그러한 그릇이 될만큼.. 과연 내 그릇과 성찰의 깨달음은 그 경지에 도달했을까. 비독점다자연애라는 언어의 심연에는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음, 자비가 내재된 긍정적인 다자적 연애심리 등이 포함될 거 같아서요. 그렇지 않을 경우, 이기적인 욕망으로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에 칼날을 휘날리는 무기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이 비독점다자연애라는 말 쓰는 거 절대 용납 안됨~! 이런 사람! 만나면, 심장에 회뜨듯 칼질을 해놔서 마음 상처 중태!됨.
연애라는 것이 물질처럼 독점, 비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감정의 관계이기 때문에 쉽게 독점한다, 비독점한다는 용어가 가능할까. 매번 그렇지는 않겠죠. 은수님처럼 약속을 수반한 경우, 저는 가능하다고도 보아요!.. 좋죠~! 서로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있는 상태가 전제되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그냥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 이거 힘들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 것을 氣, 마음수양, 테라피, 정신과치료(사실 마음치료가 더 맞지 않나), 명상과 같은 마음을 치료하고,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주인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수양법들이 나오기도 하구요.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한 자비'에서 시작된 세상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에, 나 아닌 또 다른 한사람을 사랑하고 애정을 느끼는 것 역시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관계의 지점을 만들어가야되는 거 아닐까... 성찰의 언어로 쓰이는 비독점다자연애.. 괜히 사람들 상처주는 말, 폭력적으로 남용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_+---;;(항상 좋은 건 성찰없이 남용이 되니까..)/조심스러운 건, 애정이 식었는데 관계를 지속하는 것. 정때문에!라는 말! 그 애인과의 관계가 행복도 주지 않고, 웃음도 주지 않고, 애정도 없는데 1:1 관계를 한다는 것! 고민해봐야할 문제...
욕망. 근데 개인적인것. 비독점다자연애를 하면, 외로움이 달래지나? 저는 짧은 만남이라도 그 기간동안 집중해서 만나고, 서로 애정이 식으면 서로 합의하에 헤어지고.., 이게 좋던데. 그러한 사랑을 동시에 많은 사람한테 주는 것은 지금 제 개인의 역량에서 절대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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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세르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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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어떠한 조직도 공개토론회 또는 교육의 장에서 섬세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피임지식 따위를 주제로 교육하고 토론하지 않는다."에 초공감."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에도 한 표.
"집회 이외의 시간들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교육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 한꼭지도, 관계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욕망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을까"에도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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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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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세르쥬//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의도치 않게 스테레오 타입을 부여하게 되는" 그 지점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존재의 반란// 분명히 개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이라도 '친밀한 관계''따뜻함'을 보편적인 가치로 놓는 것 위험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그것을 연애관계에서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죠. 모든 사람들이 외로워서 비독점 다자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 관계에서만 만족을 얻지 못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긴 싫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성적만족이라는 부분이 정신적인교감보다 더 클 수도 있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의 수양은 상당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연애를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말이죠...우선 나부터 흠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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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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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 친밀함, 따뜻함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들이에염~! 보편적으로 보지 않아요, 제가 보는 제 세계관인거니까. 남이 나를 미워하는 느낌이 드는 것보다 남이 나를 사랑하고 좋아해주고 있다는 느낌.. 내가 남을 미워하는 느낌보다 내가 남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 그냥 좋잖아요. /오해의 소지-'비독점다자연애를 하면, 외로움이 달래지나' 경험없는 개인의 호기심~!입니당~! 이분법적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단지, 비독점다자연애를 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겠다.. 란 요지. 글구 지금의 제 역량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거랍니당~! 은수님의 글에 덧글을 많이 다는 거 보면, 제 관심분야와 은수님의 관심분야가 비슷?? 반가워염~!!! ㅎ_ㅎ부가 정보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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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반란// 이것 역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연애와 외로움은 별개의 문제인것 같아요...늘 외로움이란 나에게 부착되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내가 어딜가든, 무엇을 하든, 늘 따라다니는.존재의 반란님은 누구일까? ^-^ 궁금하네요 그리고 저도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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