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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상상

 

..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살아가고 세상의 일부인 자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현실 속 철의 노동자들은 단명하게 될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24시간 활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흔들리지 않고 투쟁하는 자'로서만 규정지으며 이상화하지말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며 성찰할 때이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남성활동가들은 정세분석과 투쟁방침을 말할때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번의 성관계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고 무지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어떠한 조직도 공개토론회 또는 교육의 장에서 섬세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피임지식 따위를 주제로 교육하고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사에는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갈등, 모순된 욕구와 정체성이 배제되어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계층상승욕구, 생존전략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욕망,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연애에 대한 욕망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투사로서의 정체성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와 그 기록에는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일상의 욕망과 저항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위의 구절들은 조주은의 책,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중에서 따온 것이다.

 

며칠전에, 정확하게는 지난 토요일에, 아이공에서 하는 섹슈얼 파티에 다녀왔다.

린다 벤글리스와 바바라 해머의 작품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음담여설'이란 이름에서처럼, 본격적인 화두는 자기 욕망, sex..그런 것들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홍대거리에서나 마주친다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

그 중에 한 분이 홈에버 파업현장에 갔다오신 분이었는데 그 곳의 긴장감 돌고, 팍팍한 분위기와 달리, 이 곳의 편안하고도 '촉촉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날의 그런 끈적끈적하고도 야시시하면서 촉촉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제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런 고민이 들었다.

왜, 파업현장에서는 '촉촉한' 얘기들을 해서는 안되는 걸까.

노동조합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면 안되는건가.

물론 나도 파업현장이라는게 특히 점거투쟁의 경우,

언제 용역깡패들이, 혹은 공권력이 투입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점거투쟁을 하면서 지난 번 내가 홈에버에 갔을 때도,

집회 이외의 시간들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교육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 한꼭지도,

관계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욕망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을까.

 

그건 불가능한 상상인가.

아니면 해서는 안될(불가), 상상인가.

 

홈에버만 하더라도 점거농성중인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불편한 잠자리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일 것이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공권력이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뒤척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어떤 여성노동자는 남편이 애들을 밥 먹여서 제때 학교에 보내고 있는지 걱정으로 몸을 뒤척일 것이고

어떤 여성노동자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집안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을 거라고 한숨쉬며 몸을 뒤척일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여성노동자는 sex를 못한지가 벌써 며칠째야, 하면서 끓어오르는 자위욕구를 애써 참으며 몸을 뒤척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상들이 가능,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어떤 상상들은 정당한 것으로, 어떤 상상들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일까.

 

어떤 운동도 개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결코 '확대'할 수 없다.

운동이 희생이 아닌 이상,

누구나 특정한 자기의 욕망을 운동을 통해 실현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자기 만족감을 얻는다. 

 

더군다나 그것이 성적욕망이라해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분명히 그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 각자에게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들,

그와 같은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들이 모인 노동조합과 그녀들이 싸우는 투쟁안에서

그녀들이 원하는 것, 혹은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은 이야기될 수 없는 걸까.

왜 그 모든 것들은 항상 '계급의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혀버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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