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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7/27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은수
  2. 2009/07/17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와서(13)
    은수
  3. 2009/07/12
    평소와 다름없이 노는 날
    은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미쓰 홍당무에 이어 여성감독의 영화에서 다시보는 공효진은 멋지다.

뭐랄까, 참하게 입어도 삐딱하고 삐딱하게 입어도 묻어나는.. 진실성이 느껴지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핵심이자 반전사항을 중간쯤부터 눈치챈 이후, 후반부에 가서야 급속도로 건너뛰며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꽤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된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주는 인상은 알모도바르의 귀향, 같은 느낌이다. 일전에도 포스팅을 한적이 있지만 결국은 여자들의 우정, 관계들이 모계를 중심으로 둘러싸지게 되는 방식인데,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라는 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결국은 트랜스젠더 아버지를 통해 모계-모성으로 통합된다. 영화에서 여러대에 걸쳐 등장하는 아버지 없는 자식들은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비난을 받지만, 다시 이것을 엄마, 이모라는 존재가 다시 메꿔주는 형식이다. 언니와 동생의 관계는 갈등적이지만 결국은 서로가 가진 상처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그래도 자매'이다.

 

미쓰 홍당무도 그랬지만 이건 분명 여성감독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언제나 남자를 둘러싸고 적이 되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불편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쉽게 '여자'라는 관계로 우정이 되고 갈등이 풀어지는 전개들을 불편해할테다. 물론 나는 그 두가지가 동급의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 여성을 어떻게 풀어내고 넘어서는지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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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와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왔다. 진보넷 어느 블로그에선가 광고 포스터를 보고 갈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어떤 조직도 단체도 걸치지 않은 그냥 개인인 내가 꼭 가야될 당위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으나 '피해자 지지'라는 특정 글귀가 마음에 남아 결국 가게 된 것이다.

 

어젯밤 집에 돌아와 지지모임에 대해 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 글로 인해 이 모임에 대한 오해 혹은 편견이 생기거나 하면 어떡하나...글 쓰기도 전에 고민병이 도져 결국 노트북을 덮었지만,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던 내 의견을 블로그에서 말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면서.

 

단적으로 내가 느꼈던 점을 말하자면, 피해자 지지모임은 성폭력 사건 대책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물론 피해자를 지지하는 (운동)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고,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조직하고 민주노총과 전교조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피해자의 고립을 방지하고 연대를 표명하는 방법의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런 방식의 운동을 하는 것을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재심위에 제출한 피해자의 글을 보면서 나의,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떠올리며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그로부터 고립된 그녀가 싸우고 있는 거대한 조직의 '반복적인' 논리들에 어떻게 함께 대응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집단적인 경험으로 나누고 피해자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서로가 치유하고 치유받는 과정이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폭력상담소의 한 선생님이 말했던 것처럼 (잘 해결하라, 똑바라고 하라고 촉구해서) 조직에 다시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기를, 나 또한 바랬던 것이다. 비록 노동조합의 일정을 따라가고 중집회의에 가고 피켓팅을 하는 운동의 방법은 성폭력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는 매뉴얼이라할지라도, 그런 방식의 운동만로는 크게 바뀌지 않을거라는 마음과 그것이 피해자를 지지하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도 갖고 있다. 

 

그러면 어쩌자는거냐 물을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할수 있는 글쓰기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어제 모임에 왔던 한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다. 전교조가 어려운 시기에 한 개인이 조직을 해치고 있다는 논리에 맞서기 위해, 현시국,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 대해서 분명히 반대한다는 연대입장을 밝혀두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런식의 대응이 오히려 연대를 해치는 행동이며 우리가 더 잘싸우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잘 해결해야 한다는 설득의 논리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조직 우선의 사고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이든 다른 사건이든 그로 인해 조직이 망하면 어떤가? 연대를 해치면 안되는가? 썩어문드러진 조직 속에서 개인이 당장 숨도 못쉬겠다는데..죽겠다는데. 조직이 망해도 아무리 탄압상태라고 해도 문제제기 하는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조직이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 일로 망할 조직이라면 진작에 망해없어지는게 낫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조직을 위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연대를 위한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다.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손잡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분리획책에 놀아나지 않고 노동자가 하나되어야 우리는 자본이란 거대 괴물에 더욱 잘 싸울 수 있다. 등등등)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여전히 개인은 조직을 위한 존재이고, 개인들의 문제제기는  '건강한', '더 잘 싸울 수 있는' 조직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최종목적은 우리가 '진정한 동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들이 조직보위논리를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간부들에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설득논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절대로 이번 문제를 촉발시킨 핵심중의 하나인 '조직우선주의'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조직보호 논리로 내부 개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조직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고민해야 한다" 고 충고한 검찰의 이야기를 제발 우습게 알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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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이 노는 날

이번주까지만 놀아야지. 그 이번주는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오늘도 비가 온다. 쏟아지는 비 덕에 오늘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 좋다고 자체판결을 내렸다. 오늘은 어제 못본 무한도전을 보고 밀린 찬란한 유산을 보고...그리고 영화를 두개정도 본 다음에...책을 보고..1박 2일을 보고 나면 다시 또 하루가 갈 것이다. 예전에 잠시 같이 살았던 후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언니는 언제 공부해요?" 그렇다. 실은 나는 공부를 잘 안한다. 그래도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 외적인 것으로 보내는 (게다가 현재로서는 다른 '일'은 전혀 않는 full time)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TV를 보고 인터넷 기사를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논다. 내가 생산성을 추구하고 무지 효율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요즘 돌이켜생각해보면 원래부터 안 그랬던 것도 같다. 착각이었나?

 

다만 그 취미들조차 익숙한 바운더리를 못 벗어난다는 점은 분명하다. 드디어 도서관에 예치금을 내고 책을 빌려봤는데 첫 책이 목수정씨 책이었다. 작년에 사볼까 하면서도 끝내 안사봤는데 이제서야 읽었다. 책도 타이밍이 있는것 같다. 적어도 책으로 파악한 그녀는 사상, 가치보다..아니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멋있는 여자다. 그녀처럼 나도 장래희망의 리스트가 (마음 속으로는) 여러개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현실가능한 것,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으로 가지치고 축소시키며 끝내 이거 아니면 할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한 우물을 파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그리하여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전 인류가 주입시켜온 생각"에 동의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녀가 분노했던 많은 것들에 나또한 분노하고 반대했던 인간이었으나, 그녀와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무엇을 반대해서, 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어서, 할 때 그것이 내 가치가 될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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