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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그리고 인정하기

 

   책장에 있는『우리 안의 파시즘』을 꺼내들었다. 책의 첫 장에는 2002년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처음, 대학이라는 공간에 들어와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 스무 살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나 혹은 우리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는 '외부의 어떤 것'에 분노했다. 학교, 공권력, 자본주의...그러나 그 분노라는 것이 얼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성주의를 접하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폭력의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면서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던 웃기는 인간들에 대해 화를 내고, 내 자신이 ‘그’ 인간들과 닮은 구석은 추호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다르니까, 그들은 나와 다르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과 나 사이의 경계, 그 경계조차도 내 스스로가 그어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찬찬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을 괴롭힌다... 

  

  여성주의를 알게 되고, 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로 정체화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그 말을 나를 돌아보는 방법이기보다는, 남들을 재단하는 잣대로 사용해왔던 것 같다. 특히 ‘성폭력’이라는 의미도 그러했다. 나는 피해자가 될 수는 있어도 가해자가 될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이 있었고, 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는 ‘성폭력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내가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에 도덕적인 타격을 입고, 그로 인해 다시는 ‘여성주의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그런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내 잘못을 지적했을 때조차, 그 상황을 벗어나기 바빴던 것이다. 잘못, 이라는 것이 내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나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누구도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 있는 권력의 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느낀다. 내가 ‘여성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한다고 해서 가부장제라는 억압의 바깥에 위치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이것이 나라는 사람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나, 성찰하지 않음을 변명하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라는 위치가 어떤 면에서 분명히 권력을 갖고 있고, 그 권력과 타협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는 인간이라는 점부터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한 저항자, 혹은 완전한 피해자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부터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특히 이것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장 벗어나지 못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곳이 가장 느리게 변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 것에는 저항하는 인간이지만 어떤 것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어떤 것’ 조차도 내가 서있는 위치가 변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FM이니 사발식이니 하는 대학의 문화에 저항하는 ‘당돌한 후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역시도 학번문화와 ‘선배’라는 이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었다. 대학시절 4년 내내, 과에서 학회에서 세미나를 해왔지만, “하급생의 반발이나 문제제기는 그 하급생의 이론적 총명함을 판단하는 기준이거나 정해진 결론에 이르게 하는 도구였지, 진정으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권인숙,p.136)라는 말은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온다. 

  

  나를 성찰한다는 건, 일차적으로 사회구조와 관계의 망 속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배우는 학생이지만, 가르치는 강사이기도 하며, 또 나는 누군가의 후배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배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서 느끼는 ‘민감함’을 갖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해왔던 많은 말들과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과 실제로 이것을 돌아보고 ‘내 것’으로 인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큰 것 같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쉬워도, 내가 속한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고,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나를 떨어뜨려 보기는 더욱 어렵다. 보려고 하는 순간 잘못이 보일까 두렵고, 잘못을 보는 순간 비난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 비난이 자기 부정이 되어 고통으로 밀려들어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오류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기억이라는 것에는 함정이 있어서,

  그것은 처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가도  어느 사이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놀게 된다.”

  (문부식,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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