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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여러 가지 기대 속에 영화 <색, 계>를 보게 되었다. 제일 처음 줄거리를 보고서는 한국영화 <쉬리>를 막 떠올렸는데, 암울한 시대 배경에 미인계 작전이 눈물 짜는 사랑이 되는 ‘뻔한’ 스토리가 아닐까, 거기다가 ‘무삭제’ 개봉에 양조위 불알 얘기에..어찌나 광고를 하던지(^^), 보기 전에 참 많은 ‘선입견’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의 느낌은, 첫 번째로 뻔한 예상들을 ‘깨는’ 영화라는 것, 두 번째로는 그래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고민지점들을 많이 남겨준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그러니까 결국 남자가 이긴 거잖아”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제목 <색, 계>의 ‘색’이 만약 어떤 식의 (경)‘계’를 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면, 결국 이 색계는 양조위가 아니라 탕웨이를 흔드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이 영화가 탕웨이의 색, 계로 읽혔던 것이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영화 초반 홍콩에서의 탕웨이(왕치아즈)는 내내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었다. 노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겠다던 여자애들에게 “(그런 부르주아적 연극이 아니라) 애국적 저항연극을 해야 된다. 연기는 투쟁의 일환이다”라고 말하던 그 남자애는 물론이고, 그렇게 어설프게 설득되는 과정. 그리고 “남자라면 죽은 오빠를 대신해 싸웠을텐데, 중국을 구하자!!”라고 외치던 왕치아즈의 대사며 연기는 완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어설픈 아마츄어 킬러들의 ‘살인’ 장면만큼이나, 그 장면에 아연실색하며 도망간 왕치아즈는 마치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에 반해, 이 영화에서 막부인은 왕치아즈가 수행하고 연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잘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점이 참 흥미로웠다. 원래의 탕웨이인 왕치아즈의 모습을 관객인 우리들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원래’가 무엇인지, 무엇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의도인지 자연스러움인지 경계는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그 과정은 ‘낭만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몸적 경험’, 사도마조히즘적 섹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다이아 장면이 나왔을 때 관객들이 웃은 것1)은 왜일까? 순수하고 로맨틱한 낭만적 사랑과는 배치된다고 생각되는 격렬하고 거친 섹스 이후에, “내가 지켜줄게”와 함께 제공되는 사랑의 상징, ‘다이아몬드 반지’라니, 뭔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비록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일이라 해도 고도의 문명의 양식을 창조한다고 듣고, 역사를 변화시킨다고” 숭고한 그 무엇으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비넬리가 지적하듯이 이런 사랑과 “다른 종류의 감정적 애착-욕망, 욕정, 사회적 책무들과의 사이의 선은 매우 희미하다”.2) 이 영화 안에서는 양조위는 탕웨이를 사랑한 것인가? 욕망한 것인가? 탕웨이는 양조위의 어떤 면에 길들여진 것인가? 그 길들여짐은 사랑과는 다른가?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불분명한 사랑, 욕망, 욕정, 길들여짐, 친밀성 사이에서 ‘몸적 경험’들이 매개가 되고, 그것이 탕웨이라는 한 여자를 변형시키는 기제가 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사실 평일 낮에 백화점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본 덕인지, 내 주변에는 30대부터 60대까지 중 ․ 장년층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아파트 촌 근처의 멀티플렉스 극장에는 평일 첫 회 관객이 150~200명에 이를 정도로 여성관객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3) 여러 기사에서 말하듯이 단지 ‘야하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 ‘야함’이 중년 여성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부들이 즐겨보는 아침 프로그램 ‘위기의 부부4)’ 편에도 매일 나오는 얘기지만, “우리 부부는 사랑이 없어”라는 언설 속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가장 큰 내용들은 ‘섹스’인 경우가 많다. 옥소리 ․ 박철 부부의 이혼공방에서 “지난 11년 동안 부부관계 10번도 안 해”5)라는 것이 큰 논란이 되었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섹스리스 부부는 곧 사랑 없는 부부로 이해가 된다.  우리 사회가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끊임없이 유통시키고 재생산하는 구조이지만,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그 사랑이라고 믿는 것들에서 육체, 몸적 친밀성에 의해 구성되는 부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이미 ‘나의 순결성을 지켜 주는 꽃미남 왕자님’이 허구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은 분명 다른 어떤 것일테다.


  물론 이들의 s-m 섹스 관계를 보면서 참 많은 고민이 들었다. 특히 가장 처음에 섹스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강간’ 혹은 ‘성폭력’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학(남성)과 피학(여성)의 구도,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들에 대한 불쾌감과 거부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내 안에서 작동하는 도덕주의적 잣대 때문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양조위가 이 연기를 콘티없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6), 양조위가 ‘이 대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몰입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항일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언제 자신을 노릴지 모르는 인간들에게 늘 신경을 쓰고 있는 이 대장에게 섹스는 폭력과 고문, 불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노골적인’ 폭력 앞에서 이것 때문에 너무 불쾌하거나 영화가 싫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이 밥 먹다 말고, 자기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뒤에서 섹스를 하는 장면과 유사하면서도 그 느낌이 달랐다. 최근에 본 성적 급진주의 논의의 영향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 유명한 클립체위 아니면 탕웨이가 양조위의 눈을 가리고 섹스를 하는 장면 때문인지, 이 장면도 하나의 s-m 퍼포먼스, 게임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영화에서 ‘창녀’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두 군데가 있는데, 첫 번째는 ‘처녀’였던 탕웨이에게 함께 저항극단을 했던 친구들이 우리 중 여자랑 자본 남자는 하나뿐이라며 권하던 장면이다. 여기에 탕웨이는 “창녀랑?”이라고 불쾌해하며 되묻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조계지의 술집에 찾아가는 장면인데, 방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술취한 일본군들이 붙잡게 되고, 이 술집의 여주인은 탕웨이에게 사과하며 “우리 아이(게이샤)로 착각하셨나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양조위를 만나는데, 이 양조위에게 탕웨이는 당신이 왜 여기로 부른지 알고 있다며 “당신의 창녀가 돼 달란거죠.”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양조위는 “창녀가 되는 법을 알기는 해?”라고 대답한다.  감독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난 참 이 장면들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의 ‘섹스 연습’ 앞에서 “창녀랑?”, 그 대사를 듣는 느낌은 참 역설적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한다는 점에서 창녀와 그녀 사이의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목적을 위해 ‘연습하는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일본군들이 지나가던 탕웨이를 게이샤로 착각하고 붙잡았던 장면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창녀를 언급하던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의 사이에, 몸적 경험을 매개로 변화를 겪는 탕웨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포비넬리가 말하듯이 “친밀성의 진실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신호는 우리가 변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일어남(happening)은 우리를 만든다.7)"는 사실, 버틀러가 섹슈얼리티란 나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나의 ‘몸’이 관계를 통해 부대끼고 그 자체가 나, 우리의 변형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러나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이 모든 관계들이 매우 ‘불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치아즈에서 막부인으로의 변화가 분명하게 그어진 선을 넘은 듯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파이 임무에서 사랑으로 완벽한 전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 탕웨이는 양조위를 살려준 대가로 자신이 죽게 되지만, 내가 보기에 그를 살려준 이유도 옷깃에 붙어있던 약으로 자살하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분명치 않다. 순정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붙잡혀간 동료들과의 의리를 위해서인가. 내 생각에는 한 마디로 답할 수 없는 그 모호한 지점이 6캐럿 다이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구태의연한 멜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같다. s-m 섹스, 사랑, 친밀성, 애국, 스파이, 동지, 의리,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기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진부한 ‘사랑’ 얘기나, 격렬한 ‘섹스’ 영화, 어느 하나의 카테고리로는 완전히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이 깨는 영화, 색, 계의 매력이 아닐까...



1) “6캐럿 다이아몬드 시퀀스에서 영화는 거의 코미디 수준으로 떨어진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두번 보았는데 일반 관객 시사회에서 이 부분은 커다란 폭소를 유발시켰다.”, 김소영, “‘색’은 ‘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씨네 21』 2007.11.15일자.


2) Povinelli(2006), The empire of love, p,178


3)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에 따르면 21일부터 집계한 ‘색, 계’의 관객 중 30, 40대의 비율은 57%로 지난주 박스오피스 1위인 ‘세븐 데이즈’의 39%에 비해 월등히 높다. 또 여성 관객의 비율도 62%로 ‘세븐 데이즈’의 54%, ‘식객’의 53%보다 높다.” 채지영, “ ‘옴 파탈’ 량차오웨이 덕에? ‘색, 계’ 100만명 돌파”,『동아일보』, 2007.11.27일자.


4) <생방송 오늘의 아침>이라는 프로의 ‘위기의 부부’ 고정 코너.


5) '디워 광풍'부터 '옥소리의 색,계'까지…2007 연예계 10대뉴스. 『마이데일리』.2007.12.03일자.


6) 김명신, “‘색, 계’ 왕조위-탕웨이, ‘충격의 정사신은 왕조위의 즉흥연기?’”,『한국경제』, 2007.12.07일자


7) Povinelli(2006), The empire of love,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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