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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궁금증

당신의 고양이님의 [어떻게 그는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나?] 에 관련된 글.

돕헤드님의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에 관련된 글.

 

오랜만에 컴터를 켜고, 블로그에 들러서, 뒤늦게 글을 확인했다.

뭔가...'개운하지 않은' 감정이 남아, 포스팅을 해본다.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글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돕헤드는 무엇을 '성폭력 가해'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여기에는 어떤 비꼼도 개인적인 원한도 없다.

그냥 정말 궁금하다.

 

나는 원문을 읽지 못했다.

당고의 글에서 그 내용의 일부로 보이는 글을 발견했을 뿐이다.

 

내가 본 그 글에선,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자신의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클리토리스 자전거를 타며 짜릿함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궁금하다.

"저는 지금 너무나 창피하고,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런 무감각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자신에 대해 매우 화가 납니다."라고 말하는 돕헤드가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기를 소유하려거나 또는 그것을 도구화하거나 또는 대상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저는 자신합니다."라고 말할때

진짜 속내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내가 느끼기엔, 돕헤드가 사과한 이유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많은 분들께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몹시 불편했으며, 강하게 분노했고, 어이없고, 많은 짜증을 느꼈고, 성폭력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돕헤드가 

자전거에 이름을 붙일때, 짜릿함을 느낄 때, 그것을 글로 쓸때

어떤 맥락이었는지, 어떤 이유였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좀 더 세세하게 알고 싶었다.

모호하고도 어려운 '-되기'라는 단어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탈때 짜릿함을 느낀다면

그 감정과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돕헤드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이 또다른 '가해'가 될까봐,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는 것이 '2차 가해'가 될까?

 

그 '불편함'을 기준으로 볼때, 나는 여자이지만, 그 글이 그리 불쾌하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른 불편함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여자'가 잠재적 피해자처럼, 억압받는 자인것 마냥 여겨지는게 싫었을뿐이다.

나는 사실 에로틱이라는 단어에도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클리토리스는 에로틱한 부위가 아닌가? 물론 내 감정은 하나의 의견일뿐이다. 

생물학적 남성은 그 부위를 에로틱하게 느끼면 안되는가?

그 감정을 비판받아야되는건가, 아니면 그것을 소유물 자전거에 빗대서 비판받아야 되는 건가,

아니면 공개적인 블로그에서 말해서 비판받아야 되는건가.

 

 

그래서 나 역시도 '성폭력이다/아니다'라는 규정보다는, 아니 규정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100% 순결할 수 없으며,

때때로 공모하고 협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성찰과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는  '불편함'이라는 단어 이외에 언어화할 수 없는 답답함을 지닌 이들의

풀어놓기,가 중요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또,

돕헤드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심리도 궁금하다.

특히 그가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남성'이라고 말해지는 이라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성폭력이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다층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면

그 맥락 중의 하나는 그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상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역시 문제제기한 이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야기 구조 속에서 '성폭력'이라는 규정이 생기면서

따라붙는 효과들이다.

(개인적으로, 당고 글은 "이 행위에 여성주의적인 명명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맥락이 있는가?"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규정함으로써 가져오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그것은 대부분 남성/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대립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해자의 사과문 혹은 징계-퇴출.

이것은 '그나마' 잘 해결되는 케이스로 여겨진다.

 

나 역시도 나의 경험들을 되돌아보면서, 후회가 남았다.

당시에는 분노, 좌절, 이런 감정들에 휩싸여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내가 못했던 걸 다른 이들에게 요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는 없었을까.

불편함, 이 누군가를 낙인찍는 기준이 아니라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 '반성'이라는 단어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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