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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부담스러웠던 글

  • 등록일
    2007/08/01 16:31
  • 수정일
    2007/08/01 16:31
내가 쓴 [내가 불편했던 것]에 관련된 글.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당신의 고양이님의 [여기까지 읽고 나서] 에 관련된 글. 나비님의 [다시, 몇가지...] 에 관련된 글. 은수님의 [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에 관련된 글. 두시간 정도 글 쓴 거 날렸다. 매우 허탈하다. 그치만 다시 쓴다. 피시방비 지금 매우매우 아깝다.


1. 다시 내 글부터... [내가 불편했던 것]이라는 글을 쓰고 나서, 나는 다른 블로거들이 내 글에 공감을 표시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공감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내가 이 문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비가 느끼는 화, 짜증... 이런 것이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같은 것이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했고, 나는 이것에 대해서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하고난 후에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같다, 다르다의 이분법으로 이 이야기를 매듭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공포감에 빠지지도 않았고, 화가난 것도 아니었고, 성적수치심을 느낀 것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편한 것 이상 다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 불편한 지점들은 앞의 글에서 설명했으니, 그건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나는 내가 불편한 지점을 표현했고, 내가 불편했던 지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돕에게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요구했다. 이것은 사실 내가 어느정도 평가를 할 수도 있으나, 나는 '-되기'운동을 주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에, 돕의 고민을 듣고난 후에 내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내가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은 운동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게, 자칫 잘못하면, 주체적으로 고민하려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되지 않는게 아닐까하여 일단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많은 블로거들이 내 글에 대하여 공감을 표시한 것이 내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왜?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하여 느낀 불편함들이 내가 느낀 것하고 다들 같아서 공감하는 것인지 또다시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들 같아서 공감한 거라면, 뭐 상관없는데,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생각에는 내 글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것보다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느낀 불편함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왜 그러지 않았냐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공감을 받으면서도 나름대로 불편했던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2. 나는 무엇인가? 돕의 [민중은 여성이다]라는 글을 보면서 나는 이제서야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되묻고 싶다. "클리토리스와 자전거를 일대일대응의 관계로 묶던 돕은 무엇인가?" 자신을 성폭력 가해자라고 인정해버리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왜 또다시 민중과 여성을 일대일대응의 관계로 묶고, 자신을 민중의 의미를 부여한 여성, 또는 여성의 의미를 부여한 민중으로 선언해야 하는가? 그것이 클리토리스와 자전거를 묶어버린 것에 대하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 것인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돕의 지향점이 아니다. 현재의 돕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글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 부분은 생략한 채, 자신의 지향점만을 밝히고 있다. 돕이 아직 쓰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고 했기 때문에, 기다려보겠다. 다음의 글에서는, 아니 그 다음의 글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고찰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쓸 말이 많을텐데, 그 많은 내용 중에 하필 자신의 지향점을 선언하는 글, 마치 자신이 여성주의자라서 그랬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글을 가장 먼저 썼다는 사실에 대한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갔다고 판단하고 있다. 3.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의 의미 나는 얼마전에 어떤 사람하고의 관계에서 내가 인식한 것이 성폭력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먼저 사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반응은 그때의 나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왜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게 더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그때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은 '성폭력'이라는 말이 가지는 자의적인 의미만을 봤을 뿐,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그러므로, 내가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을 피해자로 동시에 규정하는 것이 되는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하여 성폭력으로 규정한 사람은 돕 자신이었다. 돕의 생각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렇게 되면서 돕은 자신을 스스로 가해자로 규정했지만, 동시에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 또는 돕의 최초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피해자로 규정되었다. 이것이 성폭력으로 규정된 것의 의미이다. 나는 여기서 성폭력이냐 아니냐를 논할 의지는 없다. (누군가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하면서 논하려고 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지만.) 중요한 것은, 성폭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한 비판의 합리성의 여부를 고민해야 할 것이 가해의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가해의 여부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가해의 의도가 있었느냐를 논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돕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돕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돕이 가장 우선적으로 쓴 글이 자신이 여성이 되려는 사람이라고 하는 글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일단은 가해의 의도가 없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몇몇 블로거들이 제기한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부터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우리가 돕을 가해자로 몰아세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돕이 어떤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우리의 비판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가해자의 견해보다 우선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돌아왔고, 이것이 바로,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해서 비판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돕의 사과문을 보고 느낀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랬으니까... 나의 이 글도 그렇고, 나비당고의 글도 그렇고, 그 비판의 합리성을 가지고 따졌으면 좋겠다. 합리적이지 않으면 어떤 부분이 합리적이지 않은지 지적하면 된다. 대신 돕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해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돕의 상황을 판단해서 비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돕의 상황을 판단하라고 할라면, 돕이 여태까지 여성주의와 어떻게 관계맺어왔는가를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 돕이 그렇게 관계맺어온 맥락에서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는가의 인식의 과정을 평가해야 한다. 지금까지 돕은 자신이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시점에서 돕의 상황을 판단해서 그 글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가? 본인한테 평가하라고 요구했는데도, 본인이 아직까지 하지 않았다. 나는 돕 자신이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하기 전에는 돕의 주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돕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미안한 일이지만 무시해야겠다. 나는 그저 내 맘대로 추측할 것이다. 나는 돕의 문제의 글 자체에 대해서 비판을 하려고 한다. 그런 글이 나오게 된 원인에 대해서 확인하고, 객관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돕의 글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는 논의 과정에서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겠지만, 그건 이 문제에서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식한 사람이 존재할 경우 그 사람과의 소통과정에서 다시 논의해야 하는 것이지, 돕이 혼자서 성폭력이라고 선언한다고 성폭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성폭력이라고 선언해버린 것이 돕의 최초의 글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를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4. '여성되기'의 총체적 한계인가?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은 결국 이 단락에 있다. 나는 '여성되기'에 대하여 돌아보고 싶다. 나는 '여성되기'를 주체적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 돕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돕이 먼저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희망했지만, 돕은 자신이 '여성되기'를 실천하려는 사람이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언급이 없었다. 일단 나는 "여성되기가 실현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솔직히 잘 모르겠고, 그 질문 자체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누군가가 여기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입장이 있다면, 글을 써주는 것도 좋을 듯.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세 개의 질문을 던지겠다. "클리토리스-자전거의 대응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성선언이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을 보장하는가?" "이번 일은, '여성되기'의 총체적 한계를 보여준 것인가?" 첫번째 질문 "클리토리스-자전거의 대응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돕의 의도를 추정해야 할 것 같다. 돕이 썼던 글을 토대로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건데, (어느 정도는 추측이라는 말이다.) ☞돕은 '여성되기'를 실천하려는 사람이다. 돕은 스스로 여성임을 선언하고, 자신이 여성이 되려는 문제의식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자동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그러면서도 보행자에게는 언제나 잠재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자전거의 사회적 위치와 비슷하다고 판단했다. 돕은 그래서 자신의 자전거를 자신의 여성성을 상징하게 되는 (자신의) 클리토리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크게 간과하고 있는 판단이 있다. '클리토리스'와 '자전거'는 둘다 일반명사다. 이 두가지를 대응시키는 것이 돕에게는 자신의 것에 대한 판단일 뿐이었겠지만, 그 대응이 공개된 순간 많은 수의 클리토리스와 많은 수의 자전거의 대응으로 판단의 범위가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돕은 (자신의) 자전거를 (자신의 상상속) 클리토리스로 인식하려고 했지만, 돕의 최초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돕의) 자전거에 대응시킨 것으로 인식했다. 이게 사람에 따라 다른, 단순한 인식의 차이일까? '클리토리스'와 '자전거'를 대응시키는 것은 둘다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대응관계는 한쪽이 다른쪽에 일방적으로 이입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돕의 글에서는 이런 지점에 대한 판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즉, 클리토리스와 자전거의 대응관계에 대한 중대한 오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두번째 질문 "여성선언이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을 보장하는가?" 돕은 자신을 여성이라고 선언했다. 이것 역시 '돕'과 '여성'의 대응관계를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첫번째 질문에 대한 해석과 다르게, '돕'이 고유명사다. 이렇게 되면, 돕이 자신을 여성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그렇게 여기는 게 옳은지 그른 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 다만, 돕이 자신을 여성이라고 선언하게 되면, 남는 문제가 하나 있다. '여성'은 한편으로는 매우 추상적인 의미의 언어지만, 또한편으로는 매우 구체적인 특징을 가진 사람들, 또는 그 집단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성'은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집단이다. 이 질문에서 '사회적 정체성'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이 돕에게서 같은 여성이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또, 그 동질감이 자신이 여성임을 선언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여성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느냐는 내가 여성이 아니므로, 판단하지 않겠다. 다만, 동질감이 자신이 여성임을 선언함으로써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 선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번째 질문 "이번 일은, '여성되기'의 총체적 한계를 보여준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번 일이 '여성되기'의 총체적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평가의 지점이 있을 수 있지만, 총체적인 한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돕의 블로그를 통해서, 대안생리대 제작운동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통해서 돕이 하려는 '여성되기'에 대해서 조금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대안생리대 제작운동에 대해서 전혀 같이 하지 않고 있었고, 그에 비해, 돕은 그것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블로그를 통해서 보기에는 그랬다.) 나는 그 운동이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생리에 대해서 감추려고만 드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깨뜨리는데에 기여할 것이고, 또 여성만의 문제로 치부되던 생리를 남성이 같이 고민하려던 그 진정성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었고, 솔직히 지금까지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여성과의 소통, 공감, 그리고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지 않았다. 용기가 없었던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돕이 하던 그 운동이 '여성되기'의 차원의 실천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번 일이 다른 건 몰라도 대안생리대 제작운동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돕의 글이 문제가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방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성되기'라는 것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취지가 자신이 여성임을/여성주의자임을 '선언'하는 것보다 여성과의 '소통', '공감', '연대'를 위한 길을 찾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게 나에게도 돕에게도 또 다른 어떤 남성들에게도 여성주의를 고민하는 방식으로서 더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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