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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우건설 집회에 갔다가 노학연의 '활동가' 2호를 받았다. 받고서 읽다가 어머니에 대한 호칭 문제에 대한 단락을 보고 전에 했던 고민(트랙백-[왜 꼭 "어머님" 일까?] 에 관련된 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게시판에도 남기고 블로그에도 남기고.
활동가 2호 잘 받았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할 것이 많겠지만, 저는 대우건설 투쟁글에서 '왜 대우건설 여성노동자들은 어머니가 아닌 동지인가'라는 단락에 대한 생각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이 단락의 내용을 제가 요약해보자면 "나이 많은 여성노동자를 어머니로만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이는 보호해주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같습니다. (제 독해가 잘못된 것이라면 지적해주세요.) 그런데 이 논리에는 상당한 비약이 있고, 사실 정확하게 어머니와 보호라는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성이라서 보호를 해야한다는 것인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보호를 해야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라는 정의 자체에 보호해주어야된다는 관념이 있는건지....말이죠.
제 생각으론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 특히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 속에서만 사고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여성은 개인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활동적인 것이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가족관계)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합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로부터, 커서는 남편으로부터, 나이가 들어서는 아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죠. 그렇지 않은 여성들-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않거나, 돌봄 노동을 하지 않으면- '가족을 내팽겨치는 비정한' 혹은 '사회성이 결여되었거나 심한 경우 정신세계에 이상이 있다'고 비난을 받게 되고요. 어느 책에선가 '어머니'는 곧 아버지의 '아내'이기 때문에 어머니 개념과 아내 개념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나이가 든 여성들은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엄마'일꺼라고 당연하게 간주됩니다. 그녀가 실제로 결혼을 했는지 아이를 낳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거죠. 나이가 든 여성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줌마' '어머니'라고 뭉뚱그려부르는 걸 보면, 나이 든 여자가 '아이를 낳지 않고' '남자와 함께 하지 않은 채' 혼자 살아간다는 것을, 또 그것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일런지도 모르죠.
만약 결혼을 통해 가족관계를 꾸린 여성들이 다른 식의 정체성을 갖고(예를 들어 노동자) 활동하더라도, 사람들은 가족과 가족과의 관계는 그녀에게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반드시 병행해야만 하는 '의무'로 생각합니다.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한/아이를 가진 여성활동가들은 회의를 할때마다(회의는 보통 저녁시간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하죠) 곤욕스럽다고 하더군요. 가사노동과 양육을 위해 집으로 일찍 돌아가면 "활동가로서의 자세가 투철하지 않다"고 비난받고, 밤샘회의를 하면 "집과 아이를 내팽겨쳐두는 여자"로 비난받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같은 연령대의 남성노동자들에게는 최우선적인 것이 '활동'이고 그가 가사노동이나 양육을 병행하지 않더라도 비난 받을 일은 결코 없죠. 그래서 저는 '어머니'라는 호칭 뿐만이 아니라 '아줌마', '아가씨'(아가씨의 대립항은 아줌마죠)라는 호칭들, 유독 여성노동자들에게만 붙는 '아줌마' 조합원, '어머니들'...을 문제삼아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의 사고는 글쓴 동지가 서술해놓은 것처럼 당사자 여성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여성들 스스로가 주체화되는 것을 막습니다. 그녀들의 노동을 '생계에 절박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들의 투쟁'만'이 조합주의적이고, 미숙한 것처럼 말이죠. 특히 (나이와 관계없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남성 간부(혹은 지도부)들의 태도가 대리주의적인 경향을 띄는 건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덧붙여, 왜 대우건설 여성 노동자들은 '어머니'가 아닌 '동지'인가
대우건설 조합원 가운데 나이가 많으신 여성 동지들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여성조합원 동지들을 보고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의 여성 동지들이기는 하지만, 나이 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단순히 '어머니'로만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여성 조합원 동지들을 투쟁에 함께 하는 동등한 동지가 아닌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 조합원들을 투쟁의 주체가 아닌 보조적인 역할로 한정짓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고민한다면 '여성 동지들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닌, 여성 동지들이 주체적으로 함께 활동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요컨대 황석영의 <심청>에 대한 주류 남성 비평가들의 시선을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체현한 근대적 주체이자, 동시에 강제된 근대화의 권력과 욕망을 초월한 탈근대적 주체의 재현으로 읽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심청의 서사는 여성의 몸으로 쓴 동아시아 '여성사'이자 타자와의 연대와 약자에 대한 보살핌으로 동아시아 근대의 바깥을 사유하는 '여성적 세계'의 구현으로 환유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을 타락한 성적 존재와 구원의 모성적 존재로 이분화 시키는 방식은 기왕의 남성의 시선 속에서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 여성을 재현하는 틀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성녀(性女+聖女)로서 심청은 기존 황석영 소설에 드러난 여성의 이미지의 연상선 위에 있기도 하다. (주-<아우를 위하여> 여교생, <삼포가는 길>의 술집 작부 미자, <장길산>의 묘옥, <무기의 그늘>의 오혜정, <오래된 정원>의 한윤희 등의 이미지가 '심청'이라는 이미지로 집적, 총화되고 있다. -오태호 "서사의 진화, 작가의 시선과 평론가의 응시가 밎어낸 풍경") 즉 부조리한 모순으로 점철된 소외의 비극적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창녀'의 이미지와 불안한 미래의 희망과 구원의 여성상으로서 등장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동시에 전유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과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누이'들의 모습이다. 더욱이 매춘부의 현실이 승화되어 신격화된 모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는 기제이며, 동아시아 근대의 가능성을 모성성의 원리로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 일 수있다.
...심청은 힘없고 가난한 조선의 고난과 불행을 상징하는 딸의 기표는 되었을지언정 고향의 가족이나 민족을 기의하는 여성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주-민족주의 담론에서 민족을 기의하는 여성의 순결은 중요한 도덕적 전제가 된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민족의 식민지적 고난과 불행을 설명하기 위해 동우너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순결과 모성을 짓밟히고 여성적 도덕성이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이들이 자신을 동일시할 공간, 즉 돌아가고 싶은 고향, 국가, 민족, 가족에 관한 현실로부터 외면당했다.-김은실 "민족담론과 여성")
....'어여쁘고 순결하고 효심 깊은' 심청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고 부정될수록 역설적으로 '매춘의 오디세이아'라는 새로운 심청의 서사는 더욱 진실성을 획득해가는 기제가 된다. 그것은 심청에 대한 '기원적 기억'을 복구하고 심청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보다 자극시킨다. 또한 그것은 '동아시아 근대화'에 앞에서 무기력했던 '실패'한 아버지, 오빠들의 역사적 회복과 재기의 열망과도 맞닿아있다.
...'심청'은 이미 동아시아 여성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전략화되고 있다. 헐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공리, 장쯔이 주연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영화로 구별지으면서 영화 <심청>은 "조선의 한 여성이 아시아 각국의 매춘부로 떠도는 여성 수난사를 통해 서구화로 왜곡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은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시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서구의 시각에서 판타지화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편견 없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본 이야기"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위험하게도 서구 중심 문명론에 대항하는 동질한 역사를 가진 지역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다. 동아시아 국가, 민족, 인종, 성, 계급 빚어내는 비균질적인 차이들과 다성적인 목소리와 서사들은 배제되고 '범 아시아를 묶어내는' 상상의 공동체를 꿈꾼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를 시장으로 한 문화 자본들의 결합이다. "범 태평양 영화(pan pacific movie)"를 꿈꾸는 <심청>은 과연 아시아/여성의 타자화, 성적 대상화의 역사와 서사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 것인가. 심청 뿐 아니라 2007년 이후 한국 영화 작품 목록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황진이, 리심, 명성홯후 등 역사 속 여성들, 그들의 호출이 어쩐지 심상치 않다.
출처: 노지은, "심청: '동아시아 근대' 서사의 창출과 여성의 재현-황석영 소설 <심청>"
글을 보면서, "아 그래 이거였어"...그런 생각이 들었드랬다. 뭔가 언어화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글로 바라봤을 때의 쾌감과 감사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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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신대로 유독 여성노동자들에게만 붙이는 호칭들... 은연 중에 (때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화를 막는 중요한 남성정치양식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아주 만연돼 있는데... 문제제기와 정리 적극 공감동의 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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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의 남성 노동자,활동가를 '아버지', 때때로 '아저씨', '삼촌(엉클)' 라고 부른 것이 이상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어머니'란 이름은 사회적 지위, 혹은 '가족내에서의 관계'를 표현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학무모 모임때 학교에 간 일이 있었는데, 교사가 저를 '아버님'이라 불러서 이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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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스// 은연 중에, 때로는 매우 의도적으로...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love_orgasms// '엉클'이라고도 부르는가요?;; 암튼 남성활동가들에게 개인적인 관계에서 '아버지''아저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있는지 몰라도, 결코 공식적인 석상 예를 들어 집회발언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아저씨 조합원"이니 "아저씨들"이라는 말을 적어도 저는 집회판에서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론 그런 자리는 '공'적 영역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족관계('사'적영역)를 연상시키는 언어를 쓰지 않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여성에게 있어서는 '공'적 영역에서도 '사'적 영역의 이미지가 연상되고 또 그에 따른 역할들이 부여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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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지막 부분 동의해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있어서 여성노동자들이 주체로 서지 못하는 모습이 결코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잘은 모르겠지만 KTX나 새마을의 투쟁들에서 KTX나 새마을 동지들보다 오히려 철도노조의 남성활동가들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것 역시 KTX동지들이나 새마을 동지들이 모두 혹은 대부분 "여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대우투쟁에서 '남성조합원'이라는 말과 '어머님들'이라는 말이 공존하는 것에서 보이듯이 여성은 투쟁의 공간에서 조차도 남성, 혹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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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깽// 저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것인데, 참 어려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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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시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여성활동가에게는 역시 나이를 불문하고 활동의 자유가 심하게 제약받고 있는 것 같아요. '왜 너는 여자애가'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어머니의 돌봄을 함께 수행해야 하는 딸이 되고 부모의 돌봄 안에서 잘 살아가야 하는 딸이 되고- (아들에게는 이런 요구가 덜한데 말이죠.)결론은 '가족'이 맘에 안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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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실은 이거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날 사무실 가서 밥 얻어먹는데 좀 그렇더라고요...물론 성진 때도 많이 얻어먹었지만 주로 식당에서 얻어먹었잖아요- 내가 넘 예민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밥을 다 퍼주고 드시는 동지 모습이, 꼭 '엄마' 이미지와 겹치더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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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뒤늦은 공감 댓글입니다.(보시기나 하시려나?) 대우건설투쟁이 끝나고 4년이나 지나서도 이 글에 또 공감하게 되네요.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남성 조합원/간부들이 대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는 부분말입니다.특히 고령의 학교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일 경우에는 학생들이 대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느낀건데, 고령의 여성노동자-학생의 관계는 어머니-자식(앞에서 선도적으로 싸우는??)의 이미지와 겹친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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