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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11
    일방적인 말하기는 대화가 아니다(12)
    은수
  2. 2007/02/09
    좌파, 페미니스트(18)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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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소 계획(4)
    은수
  5. 2007/02/01
    페미니즘의 도전(4)
    은수

일방적인 말하기는 대화가 아니다

 

'일방적인 말하기는 대화가 아니다'라는 일다 기사를 읽다보니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이 기사는 가족 혹은 어른에 대한 것이었지만.

난 내 말하기 방식이 점점 더 마음에 안든다.

내가 요즘 관계와 공존과 소통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래서 비폭력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말하기 방식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 내 글도 그런가?

기린언어란 나에게 꿈만 같다.

난 그야말로 육식세계의 강자같이 '군림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고치려하는데도 잘 되지 않는다.

듣는 방법도 익숙지 않다.

어느 순간 보면 꼭 이야기에서 '이기려고' 하는 인간처럼 덤벼든다.

오랫동안 가져온 습관을 어떻게 한번에 고치겠냐고

핑계를 대는 순간 정말 내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흑.

 

 



 

 

.....

이미 대화를 시도한다기보다 ‘말하는 사람만 대화라고 생각하는 일방적인 듣기’를 강요하는 것이며, 때문에 폭력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

일방적인 말하기 방식은 소통의 가능성을 막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정한 인간관계가 대화의 당연한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관계든 간에 상대방과 나의 입장을 확인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서로 간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일 것이다.

 

 

 

‘일방적인 말하기’는 대화가 아니다
http://www.ildaro.com/Scripts/news/index.php?menu=ART&sub=View&idx=2007020800003&art_menu=12&art_su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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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페미니스트

慢愚님의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에 관련된 글.

 

오랜만에 여유가 생겨 메인에 있는 글들을 읽어보던중,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어디서 많이 본 논리들이 등장하기 시작, 대충 감을 잡았다. 계속해서 댓글을 보다보니 좌파와 페미니스트에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상호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갑자기 글을 끄적대고 싶어졌다. 어찌 보면 현재의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좌파와 페미니스트란 '양극단'의 어떤 것이라는 분열적 상황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렇다. 김규항, 손석춘의 글로 일어난 이른바 '중산층 페미니즘' '부르주아 여성운동' 논란, 그리고 참세상 조주은의 ING 칼럼에서 "나는 좌파 페미니스트이다"라고 했을 때 달렸던 폭력적인 댓글들-(페미니스트가 언제 좌파였냐?)

 

아주 단순한 논리다.

페미니스트=부르주아, 중산층, 자유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 좌파와 관계없음, 오히려 적대적

좌파=운동권, 마초 남성들, 맑스주의, 혁명되면 다 된다-일상적 실천을 아주 깔봄. 페미니스트와 관계없음, 오히려 적대적

 

나는 영원히 적대적일 것만 같은 이 두 정체성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마치 내 신체가 절반으로 갈라져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종종 받는다. 절반은 좌파? 절반은 페미니스트? 물론 나는 이 두가지 정체성이 겹칠 수 없다거나-이미 진보넷 블로그에서만 봐도 수많은 정체성이 겹쳐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보이는 '현상'에 대한 내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나는 '운동권'과 '페미니스트' 진영을 조금씩은 경험했기 때문에 양쪽의 사람들과 얘기를 할 때마다 갑갑함을 느낀다. 

 

딱 까놓고 서로는 서로를 싫어한다. 하지만 내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운동권들이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하는 거하고, 페미니스트들이 운동권들을 싫어하는거 하고 동급으로 놓을 순 없어." 그래, 그건 사실이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보더라도, 여성운동가들이 독자적인 조직과 여성주의라는 사상을 필요로 했던 건, 좌파 운동 조직 내의 극심한 성차별주의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래놓고도 나가는 이들의 뒷통수에 '분리주의자' '계급의식이 없는' 이런 수식어들이 붙었던 역사가 있다. 지.금.도.

 

 

결국 이 모든 건 개념정의의 문제일텐데 좌파가 사회변화라는 '큰'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다면  당연히 페미니스트도 좌파고, 좌파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두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을까?

 

난 솔직히 먼저 변화해야 하는 건 '운동권' /'좌파'라고 본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별수 없는 꼴통페미라고 할건가?) 케케묵은 이론을 들고 2007년 한국 여성운동(도대체 실체가 뭔가?민족주의자를 같은 좌파로 묶으면 너네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을 bg니 어쩌고 하면서 비난하는 짓 따위는 그만두어야 한다. 엥겔스의 <기원>하나 딸랑 읽고 여성억압에 대한 해답지를 찾은 것만 같은 자만감은 버려야 한다. 성폭력 사건 앞에서 자본주의 근본모순 어쩌고 하는 짓 따위는 정말 그.만.두.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다면 marishin님의 말처럼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엔 운동권 남성들이 여성주의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내세우듯이 사상적/철학적 기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투쟁의 역사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들 자신이 변화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많은 학생출신들이 노동계급의 삶으로 채 들어가기도 전에 튕겨져나온 경험들이,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삶으로 받아들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주의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의 삶 구석구석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못 견디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착취를 이야기하면서도 부인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자신을 직면하기가, 직면하면 더이상 '좌파' 혹은 '진보적이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마치 어떤 이들이 "이제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들은  "여성주의는 우리와 사상적 기반이 달라,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의식이 없어." 라고 너무나도 당당하게 여성주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이렇게 냉소적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지만, 아직은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한다고 믿고 싶고, 서로의 변화 '가능성'과 소통 '가능성'을 기대하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디쯤엔가에 내가 위치하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내 스스로를 확인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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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보고 있어

당신의 고양이님의 [어떤 변명] 에 관련된 글.

navi님의 [그렇고 그런 얘기] 에 관련된 글.

트랙팩님의 [나에게 (진보)블로그란 ?] 에 관련된 글.

   

  실은 며칠전에 별 생각 없이 클릭, 클릭- 두번의 클릭을 통해 뜻하지 않게 아는 이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그래, 역시 이 바닥(?)은 좁았어. 나는 그 사람과 같은 field에 있다는 그 자체도, 그리고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미 내 블로그를 봤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지하게 싫었다. 네이버처럼 '서로 이웃' 제도라도 있어야 하는가, 아님 다시 미니홈피로 도망가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나에게 블로그는 어떤 공간일까.  요사이 안만나던 사람들을 평소보다 자주 만나면서, 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블로그를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상당한 압박을 느꼈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했던건 내 운동이 힘들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쩌면 조직적으로 풀수 없는 넋두리들을 하려고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용도로는 쓰지 않지만 그래도  누가(특히 나를 오프에서 아는 이들이) 볼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생각도 다양, 나이대도 다양, 성별도 다양한) 그 이들이 글을 쓰는 내내 유령처럼 내 모니터 옆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__- 그러면 navi님의 말처럼 자체검열을 시작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일까 저렇게 받아들일까 막 고민하다보면 결국 글은 다 찢겨져서, 내 글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은 과감히 접어두기로 했다. 다만 아는 이들은 '그냥' 보지 말고 덧글이라도 달아주던가 오프에서 만났을 때 생각이라도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같은 블로거들의 경우엔 대부분 내게 덧글을 달아준 이들의 블로그를 습관처럼 가보고 이름을 기억해두려 조금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해서 왕래가 잦아진 이들도 있다. 블로거들끼리 오프모임을 하면 재미있겠다 생각하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글은 글대로 읽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거름장치들이 있어서, 그들이 특정 성별, 특정 조직, 특정 운동을 하는 사람 일수도 있다면 내가 그들의 글을 '순수하게' 읽을 수 없을까봐 겁도 난다. (소심한 나는 다른 이들의 거름장치가 두려워, 내 신상정보-이를테면 내 소속,  '현재의' 성정체성 등등-가 드러나는 일들을 거의 쓰지 않으려 애쓰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글'과 실제 '캐릭터'가 매치가 안될까봐 겁도 난다. 확실히 온라인에서만 가질 수 있는 소통의 여유가 있다고나 할까. 암튼 얼마전에 어떤 블로거의 성별을 알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실은 내가 가정하고 있던 것과 달라서 상당히 놀랐다. 또 내 거름장치때문인건지 퍽퍽퍽 자학을 해보았지만, 그건 반대로 내가 글은 글로 받아들일 뿐 글쓰는 이들의 성별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일수도 있을거란 누군가의 말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글쓰기능력을 부러워하는 당고님의 블로그를 보다가 든 생각은 왜 연애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하는 점인데. 만약 여기가 네이버를 비롯한 다른 블로그거나 미니홈피라면 안그랬을텐데, 여기가 '진보'넷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문제 아닌가? 당고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연애이야기는 '시시껄렁'하다-정치 혹은 진보와 무관하다- 그래서,여기 있는 사람들(?) 혹은 누군가 내글을 보고 있을 사람들은 이해못할꺼야" 라고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던건 아닐런지. 이건 잠깐 다른 얘기지만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항상 '조직적 소통'을 강조하지만, 그 '조직적'인 대상에는 항상 연애는 빠지는 것 같다. 실은 연애 얘기해서 좋을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연애기간에는 모든 일들을 두배로 완벽하게 해야만 할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것도 연애때문' '저것도 연애때문'이라는 무수한 태클들이 날아올 껄. 암튼 굳이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연애든 무엇이든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역들을 피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부분들을 그저 소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정말 문제가 있다. 만약 연애가 사적인 문제일뿐이라면  블로그는 사적인 공간인가, 공적인 공간인가? 말도 안되는 질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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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소 계획

이번 주 일요일엔 대청소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어쩌면 토요일에 술을 거나하게 먹고 일요일 하루종일

방바닥에 붙어있을지도 모르겠단 불안감이 엄습 중...-_-;

 

자취를 한지는 올해로 5년이 다 되어가지만

혼자 산지는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룸메가 없이 혼자 사는 건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등등

그래서 '자기만의 방'이 있다는 안도감이 있지만.

가사노동에 한해서는 같이사는 사람 때문에라도

치워야'만'하는 일이 없다는게 문제다.

 

내가 나갈 때 어질러놓은 방 꼬라지를

집에 들어와서 불을 '탁' 켜는 순간 보면 한숨이 휴-나온다.

지금도 대략 그런 상태다.

문제가 뭘까? 며칠전에도 대충 치웠는데.

 

그러고보니 '책상'이 문제 같기도 하다.

일본가서 가져온 자료집이 아직까지 무진장 쌓여있으며

벌금으로 걷어놓은 100원짜리 동전들이 널부러져 있고

아무튼 더러움의 근원은 책상이라고 비난하려는 순간

돌아보니 침대도 엉망이긴 마찬가지다.

화장품이랑 디카가 왜 침대위에 있는건데 내가 못살아 아아-

게다가 베란다에 방치해둔 식물들이

무지하게 초췌한 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진짜 문제는 나다 싶다.

 

일주일 전인가 그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집에서 어머니에게 가사노동을 전담시키는건

파출부를 고용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이야

왜냐하면 어머니에겐 최소한의 비용조차 지불하지 않으니까

(완벽한 부불노동이다)"

라고 그의 가사노동 그리고 출가를 '종용'했는데(출가를 하면 어쩔 수 없이라도 하게 된다)

(근데, 파출부라는 말 쓰면서도 찝찝해서 찾아봤더니

보수를 받고 출퇴근을 하며 집안일을 하여 주는 '여자'로 되어 있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가사노동을 하기 싫어서 (나도 하는데 너도 해라)

혹은 누가-어머니 같은 존재가  대신해줬으면 좋겠다는 (난 엄마가 없단 말이야)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반성했다.

 

어쨌거나 가사노동은 정말 끝도 없어서

방을 치우고 나면 화장실이 더럽고, 화장실을 치우고 나면 베란다가 더럽고,

베란다를 치우고 나면 부엌이 더럽고, 부엌을 치우고 나면 현관이 더럽고,

이 좁은 집 현관을 치울 때쯤이면 다시 방이 더러워지는 악순환의 구조이다.

 

아무튼 반성의 마음을 진취적인 계획으로 변신시켜서

이번주 일요일엔 기어이 대청소를 하고 말겠다. 빠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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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읽었다.

근래에 책에 빠져들지 못하는 병이자 습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고쳤다.

심지어 나는 지하철역을 놓치기까지 했으니까. ^^;;

 

책을 읽으면서 난,

이 책의 저자 정희진(씨?선생님?언니?)에 대한 호칭이 변한 만큼

지난 6개월간 여성주의에 대한 내 감정, 인식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이건 잠깐 다른 얘기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건 

 호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지위 혹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반영하는 '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라는 것.)

아무튼 만약 내가 이 책을 6개월, 아니 1년전에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상반된(?)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전에 反여성주의자였거나

현재의 모든 가치관들이 그녀와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주의(자)에 대한 내 태도가 훨씬 '열려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 책이 대형서점에 갈때마다 여성학 코너의 베스트셀러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건

또 많은 블로거들의 글에서 종종 보다는 자주 회자되고 있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감수성'과 '언어화의 능력'을 그녀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그렇게 사사건건 모든 것들을 분석하며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친구의 말에서 (유일하게) 틀린 단어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분석이라는 것이 무언가 임의적인 공, 노력을 들여야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제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눈(여기서 눈은 신체기관이 아니라 혜안의 의미)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학습과 경험과 성찰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그런 '민감함의 촉수'를 가졌을 때 사사건건 문제가 되는 건 맞고,

민감함이 아픔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피곤한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평균 문장 길이가 1.5줄 안팎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학술적 글쓰기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여성주의 (서적)가 대중화되기 힘든건 지배적인 가치관과 권력 때문인 것이 크지만(90%는)

한편으로는 지적 유희라고 느껴질 정도의 현학적 글쓰기를 구사하는 학자들 때문이기도 하다고

난 생각한다. 모국어에게 타자화되는 듯한 그 느낌이란.

하지만 남을 비판하긴 쉬워도 정작 내가 글을 써보려고 하면 막막하다. 젠장.

 

 

그런데 그녀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여성주의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나이듦, 성폭력-피해자 중심주의와 성적 자기결정권, 성판매 여성, 인권, 가정폭력, 군사주의

라는 많은 이슈들 앞에서 그녀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과 빈곤한 물음능력을 비판한다.

메모해두고 싶은 구절들은 아주 많지만 나의 요즘 고민과 맞물리는 딱 한문장,

"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을 기록해두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겠지만 (내가 젤 늦은거 아냐?;;) 읽기를 권하고 싶다.

계몽이 아니라 논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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