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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읽었다.

근래에 책에 빠져들지 못하는 병이자 습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고쳤다.

심지어 나는 지하철역을 놓치기까지 했으니까. ^^;;

 

책을 읽으면서 난,

이 책의 저자 정희진(씨?선생님?언니?)에 대한 호칭이 변한 만큼

지난 6개월간 여성주의에 대한 내 감정, 인식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이건 잠깐 다른 얘기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건 

 호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지위 혹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반영하는 '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라는 것.)

아무튼 만약 내가 이 책을 6개월, 아니 1년전에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상반된(?)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전에 反여성주의자였거나

현재의 모든 가치관들이 그녀와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주의(자)에 대한 내 태도가 훨씬 '열려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 책이 대형서점에 갈때마다 여성학 코너의 베스트셀러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건

또 많은 블로거들의 글에서 종종 보다는 자주 회자되고 있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감수성'과 '언어화의 능력'을 그녀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그렇게 사사건건 모든 것들을 분석하며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친구의 말에서 (유일하게) 틀린 단어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분석이라는 것이 무언가 임의적인 공, 노력을 들여야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제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눈(여기서 눈은 신체기관이 아니라 혜안의 의미)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학습과 경험과 성찰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그런 '민감함의 촉수'를 가졌을 때 사사건건 문제가 되는 건 맞고,

민감함이 아픔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피곤한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평균 문장 길이가 1.5줄 안팎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학술적 글쓰기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여성주의 (서적)가 대중화되기 힘든건 지배적인 가치관과 권력 때문인 것이 크지만(90%는)

한편으로는 지적 유희라고 느껴질 정도의 현학적 글쓰기를 구사하는 학자들 때문이기도 하다고

난 생각한다. 모국어에게 타자화되는 듯한 그 느낌이란.

하지만 남을 비판하긴 쉬워도 정작 내가 글을 써보려고 하면 막막하다. 젠장.

 

 

그런데 그녀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여성주의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나이듦, 성폭력-피해자 중심주의와 성적 자기결정권, 성판매 여성, 인권, 가정폭력, 군사주의

라는 많은 이슈들 앞에서 그녀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과 빈곤한 물음능력을 비판한다.

메모해두고 싶은 구절들은 아주 많지만 나의 요즘 고민과 맞물리는 딱 한문장,

"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을 기록해두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겠지만 (내가 젤 늦은거 아냐?;;) 읽기를 권하고 싶다.

계몽이 아니라 논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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