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을 위한 휴경
1. 몸 돌보기
1.1. 나쁜 줄 아는 것을 몸에 들이지 않는다.
1.2. 근육에 고루 힘을 길러 허리를 고친다.
1.3. 자는 시간을 아까와하지 않는다.
1.4. 스켈링, 충치치료, 건강진단.
2. 마음 살지우기
2.1. 천천히 읽고 새기는 내 방식을 존중하되 꾸준하라.
2.2. 시를 꾸준히 읽고 적는다.
2.3. 매달 하루는 비우는 날로 지킨다.
2.4. 한달의 연속 휴가를 갖는다.
3. 관계 기르기
3.1. 마음을 다해 듣는다.
3.2. 상처 주게 될 것보다 기만하게 될 것을 경계한다.
3.3. 자칼로 만날 사람은 가능하면 만나지 않는다.
3.4. 15년짜리 계획을 수립한다.
4. 기능 높이기
4.1. 운전면허.
4.2. 활긋기와 비브라토 연습.
4.3. 기초 식사 자급
5. 일하기 (3월부터의 변화)
5.1. 낮시간은 주2일은 연구소/반올림, 주2일은 센터, 주1일은 책작업에 쓴다.
5.2. 매일 9 to 5를 원칙으로 하고, 야근은 주2회를 넘지 않는다.
벌써 2월이로구나...
1. 꼭 다시 보고 싶다. 이번에는 극장에서.
2. 그 귓것들. 도시였다면 아마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게 틀림없는 그이들. 하지만 그곳에서는 달랐다. 이들을 '어이그 이 귓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길에서 자고 개밥을 주워먹고 동네 점방 담벼락에 오줌을 싸도, '형님'이고 '삼춘'이었으므로.
3. 점방은 문을 닫았고, 소주 한병 마시려면 대형 마트에 가야 한다. 카지노를 짓는다. 그 귓것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1. 슬펐다. 동료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모습들도 슬펐지만,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일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이들의 눈빛이 더욱 슬펐다. 왜 죽여야 하는가, 그 질문은 영화 속 모든 이들의 표정 속에 계속 무겁게 맴돌았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일 때도 그러했다.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한다는 이유도,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내 목숨을 쉽게 내어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자기 변명도, 실은 그들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런 양자택일의 선택 말고는 없는, 그게 바로 지옥이고 전쟁이다.
2. 그런 그들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살인을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수혁의 행동으로 표상된,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라는 명분이 있는 순간들이 그러했다. '네가 우리 모두를 살렸어'라는 말 한마디로 일영은 자기 머리에 겨누었던 총구를 거뒀다. 그러나 그들 모두 지옥을 살았다. 최선의 선택, 최선의 명분, 그런 건 없다. 어찌해도 뭐라해도 그들은 지옥을 살았다. 누굴 살리기 위해서건, 누굴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3.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이 있다. 생각만 해도 몸이 아파온다.
4. 그런 지옥을 겪은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제대로 돌봄과 치유를 거친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걸까. 아닌 것 같다.
글렌이 열 네살 혹은 열 세살 때, 선생님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한다.
넌 밥 딜런이나 (또 한 명은 누구더라) ~~는 쫙 꿰고 있을 지 몰라도 9의 제곱근은 모르잖아. 학생으로서는 빵점이야. 오늘 학교를 떠나라. 졸업을 하려면 열 다섯살까진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뒷일은 내가 봐 줄테니 딱 일년동안 가서 거리공연을 해봐라. 일년 뒤에 내게 다시 와라. 그 일년 동안 아 정말 이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면 학교를 그만두고, 그게 아니라면 학교로 돌아와라.
그 말이 참말 기뻤다고, 그는 말했다. 어떤 기쁨이었을까. '어린 놈의 치기' 따위로 함부로 무시당하지 않고, 적어도 인생의 일년을 걸어보고 판단해봄직하다는 인정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그는 열 네살때부터 거리에서 노래를 하면서 살아왔다 한다.
선생은 저렇게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했을까. 글렌이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생의 말은 글렌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는 일년에 대해 자기도 함께 책임지겠다는 연대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냥 내버려두고 제 갈 길을 잘 가건 가다 엎어지건 지 팔자다, 이럴 수도 있는 일인 것을.
글렌 같은 재능이나 열정이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리 안타깝지 않지만, 그 선생이 지닌 무언가는, 퍽 탐난다.
1. 난생 처음 누려본 호사, 이른바 명절에 영화보기. 밥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결행하다. 잘했다. 원스와 원스 어게인(The swell season)을 연달아 상영한 영화관이나, 두 편을 연달아 보기로 한 나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2. 원스, 여전히 예쁜 영화.
3. 원스 어게인, 애잔하지만 슬프지는 않고, 마음에 잔물결이 계속 남는데 그게 딱 어떤 느낌인지 말하긴 어렵다. 때로는 그런 아리송한 게 진짜 관계와 삶의 현실이기도 하지.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어딘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다 잘 될거야' 따위의 격려나 응원보다는 씽긋 웃어주고 싶었고, 극장을 나서면서 맞는 바람 없는 찬 공기가 딱 영화의 느낌 그대로였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 속에 두 사람의 눈빛과 노래가 오래 남아 집에 오자마자 the swell season의 노래를 찾아 듣는 중. 이런 분위기에는 취한 것도 맑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정신 상태로 임하는 것이 관건. 하하하.
그가 물었다.
너, 바꿔야 한다며? 바꾸고 싶다며?
내가 대답했다.
응. 쉼표가 필요해. 지금도 좋지만 힘든 것도 사실이거든.
지난 밤, 아침 몇 시에 나가야 하는지, 그러려면 대체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알람을 맞추며 혼자 생각했다.
바꾸고 싶다며?
응. 근데 이렇게 솔직하고 편하고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술자리가 좋기는 해.
힘들다며?
응. 점점 몸이 힘들어지고는 있어.
오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한시간 내내 두 손을 깍지 낀 채 기절하듯 잠을 자다 깨어 생각했다.
바꾸고 싶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일단 좀 바꾸긴 해야겠어.
저녁밥을 먹고 다시 일을 하러 책상에 앉으며 블로그에 이 생각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말하지 말 것.
바꾸고도 싶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하지 말 것.
어떤 상황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으므로.
바꾸지 않아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고
바꾸어도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으므로.
순간 순간 내가 원하는 것에 충실한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 선택이 줄곧 내게 필요한 뭔가를 배제하고 있었다면 달리 생각해 볼 것.
잘 놀던 아이 시절과 젠 척 놀기도 하고 청교도식 자학이 병존하던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동시에 청교도 자학 시절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던 대학 6년, 세상과 만나는 다른 길을 열어두긴 했지만 주된 일상은 자격증에 바탕을 두고 살았던 5년, 그리고 상임활동가로 살던 7년... 다시 앞으로 5년 혹은 그 이상은 어떤 모양이 되려고 요런 생각이 드는 걸까. 이번 변화도 이전처럼,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걸까. 궁금하고나.
암튼 그래서 나는 예상치 못했던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고, 그 변화가 무엇일지 알 수 없는데도 뭔가를 준비하고 싶어하는 중이고, 설에 집에 내려가 뒷산에 수첩하나 들고 올라가서 뭘 바꾸고 싶은지 써볼 작정이다.

세계 최악의 기업을 뽑는 "공공의 눈" 후보 여섯 개 회사 중에 삼성이 하나로 올랐다.
26일까지 진행되는 온라인 투표에서 현재 도쿄전력과 1, 2위를 다투는 중.
인권과 환경에 미친 악영향에 순위를 매긴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도 삼성에 한표를 찍으시기를 권한다.
'최악', '최선' 이런 말들이 사회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사뭇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온라인 투표를 하러 간 김에 다른 후보사들의 면모도 들여다보고
이윤을 위해 어디까지 못되게 굴 수 있는지, 그런 짓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http://www.publiceye.ch/en/vote/samsung 에 들어가서 <VOTE NOW> 를 꾸욱 눌러주시라.
그리고 여기저기 입소문들도 많이 내 주시라.
휴가를 앞두고, 못된 것들이 못된 짓을 하는 바람에 골치를 푹푹 썩고 있다.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는 하다못해 밤에 잠들기 전만이라도 휴가 때 어떻게 쉴 건지 상상하며 즐겁게 잠들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낙엽보다도 덧없이 죽고 병들고 다치고
기업들의 반응은 여전히 후지고 후지고 후지고
함께 힘을 보태지 못해 미안한 투쟁 현장들은 숱한데 날은 추워지고 추워지고
내 관심사, 혹은 내 일상은
대통령이 영장류냐 설치류냐, 정당들의 헤쳐모여가 어찌 되었냐,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으니
내가 잘못된 것이냐 늬들이 잘못된 것이냐 싶고
욕해주고 싶은 것들에게 속시원히 욕을 못해주고
남이 욕하다가 뚜드려맞을세라 살피는 신세가 이런 날엔 유난히 한심하고.
즤들이 후진지 어쩐지 병식조차 없는 것들은 그냥 확 쥐어박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한 얘기 또하고 또 하는 것도 이런 날엔 유난히 지긋지긋하고
생각해보면,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뭘 또 신세 타령인가 싶고.
오늘도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을 하다보니 두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바라건대 저 초일류 기업님께서 제발 요 며칠만이라도 더이상 닭짓, 삽질 고만하셔서
부디 금요일 토요일 수원에서 하는 희망김장에는 하루라도 꼭 갈 수 있기를.
그 닭짓 삽질에 대응하느라
두 팔과 두 다리, 몸으로 힘을 보태고 나누는 귀한 기회를 빼앗기지 않길.
바라건대 내일 멀리까지 찾아가 얘기를 들려드릴 사람들 가운데
눈 반짝, 마음 활짝인 사람 하나라도 만나는 인연이 닿기를.
바라건대 휴가 전에 해두어야 한다고 다짐다짐했건만
실제 해낼 가능성이 20퍼센트 밑인 일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하고 마음 편해지길.
바라건대 오늘 밤 꿈 속에는
못된 놈, 못된 놈 편에 붙어먹는 놈, 붙어먹으면서도 아닌 줄 착각하는 놈,
지가 못된 걸 알면서도 뭐 어떠냐며 뻔뻔한 놈, 그런 놈들 좀 안나타나길.
이제 고만 자자. 옆구리가 사정없이 가렵구나. 날개가 돋으려나. 아, 그냥 피부병이로구나. 흑흑
매일노동뉴스 칼럼, 반론기고가 이어지고 있다.
권동희 노무사가 쓴 글은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이에 대한 김은아 소장의 반론은 기존 산보연의 논리와 맥을 같이한다. '네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는데, 왜 우리한테 야단이냐'라는. 강성규 산보연 원장이 산보연 월간지에 반올림을 겨냥해 썼던, '성동격서하지 말라'는 글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내가 쓴 재반론은 산보연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시비다.
직업병 산재인정은 줄지만 직업병은 줄어들지 않는 현실. 산재보험이 산재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산안공단과 연구원의 '과학'과 '전문지식'이 노동자 건강보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보상도 예방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 인간다운 삶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
이런 현실에 대해, 나는 적어도 산보연이라는 곳이,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라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년째 확인한 바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 산보연이 표명하고 있는 입장은 이러하다. 그렇게 현실과 자신의 지식기술을 분리해 '장기적으로' 노동자 건강에 이득이 된다고 믿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이 흐름이 어디로 이어질까. 기술관료들이 행정관료들 뒤에 숨고, 때로는 행정관료들의 방패가 되어주는 이 공생의 관계가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지는 명백하다.
[전문가 칼럼] 산업안전보건연구원과 역학조사가 문제다
권동희 / 공인노무사 (노동법률원·법률사무소 새날)
‘산재 판정기관은 근로복지공단이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맞지만 실질적으로는 맞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역학조사 때문이다. 안전보건공단 산하 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산보연)이 역학조사를 실시해 실질적인 직업병 인정 주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관련 ‘요양업무처리규정’ 제9조는 ‘업무상질병 여부에 대한 자문의뢰’라는 제목하에 "소속기관장은 근로자의 질병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면 산업안전·산업보건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 직업성폐질환연구소 등 업무상질병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관련기관이나 단체에 자문 또는 역학조사를 의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화학적·물리적 요인에 따른 직업성 암, 집단적으로 발병한 질병으로 질병의 발생 원인을 추정하기 곤란한 경우, 업무상질병의 인정기준이 마련돼 있지 아니하여 업무상재해 여부의 판단이 곤란한 경우’에 대해 일부 폐질환을 제외하고 근로복지공단은 산보연에 역학조사를 의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실제 사업장에 유해화학물질이 있는지, 노동자의 직업병이 발병될 가능성이 있는지 등 주로 ‘의학적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춰 산보연 직업병연구센터에서 역학조사를 수행하게 된다. 이후 역학조사평가위원회를 거쳐 업무상질병인지 여부를 판단하고, 판단 결과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송부한다. 이에 따라 질판위와 공단은 사실상 산보연의 역학조사 결과에 구속되고 이에 반하는 처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산보연의 모태는 지난 92년 개원한 산업보건연구원이며, 이 연구기관은 정부의 독자적 의지로 직업병 연구와 산재예방을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다. 88년 15세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 문제와 원진레이온 투쟁 등 직업병과 노동조건의 열악함이 알려져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정부가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설립된 측면이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산보연은 정부 공인기관으로 매년 ‘직업병진단사례집’ 발간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연구와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 역학조사를 담당하는 산보연이다. 왜냐하면 산보연의 역학조사가 항상 업무상재해 법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며, 법률 등의 한계를 지적하지 못하고 ‘과학’과 ‘전문가주의’로 당사자가 납득할 만한 충실한 조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삼성 백혈병사건에서 산보연이 실시한 두 번의 역학조사의 부실성이 행정법원에서 사실상 인정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이전 백혈병 사안에 있어 산보연은 업무기인성을 부정했지만 대법원(96누14883판결, 2008두3821 판결) 등에서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돼 이미 역학조사의 한계가 지적된 바 있다. 올해 초 서울고등법원에서 확정된 여수건설노조 비계공사건(2010누9183판결)에서도 ‘석면노출력은 인정되나 CT상 석면폐가 인정되지 않는다’라는 산보연의 역학조사에 따라 불승인됐으나, 이러한 산보연의 주장이 국제기준에 맞지 않다는 연구 및 논문 등의 감정회신에 근거해 업무상재해로 인정됐다.
문제는 산보연이 역학조사라는 핵심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는데 있다. ‘산보연은 역학조사만 담당하고 실제 산재 판정기관은 공단’이라는 논리는 책임 회피에 가깝다. 또 산보연은 역학조사에서 불승인된 사안이 왜 법원에서 인정되는지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부족하다. 산재인정법리가 ‘의학적 인과관계’가 아닌 ‘상당인과관계의 법리’라는 인식이 전제돼야 하고, 법원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안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또 요양업무처리규정상 산보연만이 ‘역학조사를 독점함’이 아니며, 실제 산재 신청 사건에서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역학조사를 한 사례가 있음을 참조해 재해 노동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타 기관에서도 이를 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어 산보연의 역학조사 내용이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한에서 역학조사보고서 전문을 발간하고, 이에 대해 관련 이해 당사자와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역학조사 과정과 심의평가 과정, 그리고 산보연 운영의 문제에서도 참여와 감시를 받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반론기고] 산보연의 역학조사는 '과학적 판단'이 준거
권동희 노무사 칼럼 ‘산보연과 역학조사가 문제다’를 읽고
김은아 /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직업병연구센터 소장
<매일노동뉴스> 지난 5일자 ‘산업안전보건연구원과 역학조사가 문제다’ 전문가칼럼을 보면 산보연 역학조사의 문제는 “역학조사가 항상 업무상 재해법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며, 법률 등의 한계를 지적하지 못하고 ‘과학’과 ‘전문가주의’로 당사자가 납득할 만한 충실한 조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다. 산보연의 역학조사는 재해법리가 아니라 과학에 근거하려고 노력한다. 산보연의 역학조사는 업무상 재해법리를 따져 업무상질병 보상기준에 해당하느냐 않느냐에 우리의 판단을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다발성골수종·피부경화증 등 법에 나열돼 있지 않은 질환도 과학적 근거가 충분한 경우 직업병이라고 판단해 왔다. ‘전문가주의’의 의미가, 산보연의 역학조사가 직업병과 작업환경분야 전문가들의 과학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뜻이라면 그 역시 옳다. 역학조사의 목적은 정확한 직업병 원인파악과 이에 근거한 예방이라고 할 때, 역학조사는 현존하는 사회법리에 구속되지 않고 변화 발전하는 과학성과 전문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전문가의 과학적 판단은 사회법리나 재해법리와 다를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달라야 한다. 직업병 진단을 위해서는 그 질병에 대한 직업성 원인이 알려져 있는지, 그것에 노동자가 노출됐는지, 그 노출이 질병이 생길 정도로 다량이었는지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전문가의 과학적 판단과 사회적 법적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칼럼에서 예로 제시한 비계공의 폐암과 반도체 백혈병 사례를 보자. 여수 산단 비계공의 20여년 전 석면 노출과 90년대 반도체 산업의 벤젠 노출에 대한 견해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다르다. 산보연이 ‘불변의 정답’을 주기는 어렵지만, 산보연의 임무는 과학을 기준으로 직업병일 가능성과 아닐 가능성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비계공은 전형적으로 석면노출이 많다고 알려진 공정은 아니며, 추정 석면노출량이 국제적인 석면폐암판단기준보다 낮았다. 소량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악성중피종과는 달리 폐암은 고농도 석면에 장기간 노출된 다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원에서는 이를 직업병이라며 사회법리로 판단했다. 과학적 근거가 좀 약하더라도 법기관이 약자편에 서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사회의 장점이다. 다만 그 판단은 법 전문가의 몫이지 과학연구기관 산보연의 몫은 아니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이 벤젠에 의해 발생하였을까라는 질문은 더 어렵다. 반도체 산업에서 암 증가 여부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사실 그 판단에 있어 더 중요했던 점은 반도체 제조공정이 백혈병을 유발할 정도로 다량의 유기용제가 휘발되는 환경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근무기간이 너무 짧거나 퇴직 후 한참 뒤 발생한 사례도 있었다. 또 전국의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백혈병이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현상이 없어 과거에 벤젠에 많이 노출됐다고 추정하기도 어려웠다. 이 경우 과학자는 사실을 나열하고, 계속 추적조사를 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재판부는 과학적 근거는 불충분해도 노동자가 직업병보상을 받도록 판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법리적 판단은 사회 운영에 있어 긍정적이며, 사회보장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그러한 구조도 필요하다. 그러나 산보연이 그렇게 판단한다면, 반도체공정이 백혈병유발 발암물질을 다량으로 쓰고, 노동자가 심각하게 노출돼왔다는 결론이 나와 신속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무엇이 원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단계에서 과학자는 그런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산보연이 역학조사라는 핵심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는데 있다’라는 비판은 산보연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보연의 책임과 의무는 법적 판단이나 보상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에 접근하고, 정답에 가장 가까운 원인을 제시하는 데 있다.
‘산재인정의 법리는 의학적 인과관계가 아닌 상당인과관계의 법리’라는 데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인과관계와 무관하게 노동자의 질병을 치료해 주자고 하지 않는 한 누군가는 과학적 인과관계의 검토 역할을 맡아야 한다. 법조인·의료인·연구자 등 직업병과 관련된 여러 주체들 중 하나로서 산보연의 역할은 가능한 넓고 깊게 과학적 검토를 하는 역할이 돼야 한다. 법리적 판단에 비전문가인 산보연이 ‘사회적 판단’을 하게 되면 한두 명의 노동자의 보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중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과학과 비과학의 판단이 불가능한 아마추어로 전락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연구자는 가장 과학적일 때, 가장 진보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반론기고]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사회적 판단’ 이 문제다
김은아 소장 칼럼 '산보연 역학조사는 과학적 판단이 준거'를 읽고
공유정옥 / 산업보건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난 8일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김은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 직업병연구센터 소장 글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산보연은 과학에 충실해야 하기에 사회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산보연에 직업병 산재보상 판정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 소장의 믿음과 달리 산보연은 이미 직업병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내려왔으며, ‘과학적 판단’ 또한 여러 단계의 사회적 판단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산보연이 역학조사를 둘러싼 문제제기에 대해 이 같이 답변해온 것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비판을 에둘러 가려는 임기응변이 아닌지 걱정이다. 김 소장이 예로 든 반도체 백혈병 역학조사와 산재인정 문제를 살펴보자.
김 소장은 "반도체산업에서 암 증가 여부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어느 산업이건 직업병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으로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는 연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적고 돈도 적다. 특히 반도체산업의 직업병 연구는 기업이 공정과정과 화학물질 정보 등을 영업비밀로 감추고 있어 연구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기가 극도로 어렵다. 그럼에도 일부 연구에서는 유방암·폐암·뇌암·조혈기암 등의 증가가 관찰됐다. 하지만 산보연은 암 위험이 적게 평가된 다른 연구들을 동등하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연구들은 대개 연구기간이 너무 짧거나 대상집단이 너무 적기 때문에 통계적 검증력을 명확히 얻을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또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일자 IBM이나 미국반도체산업협회가 연구비를 대서 시작된 연구도 있다. 이런 연구들의 한계를 감안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따라 ‘암 증가를 의심할 만한 연구들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라고도 할 수 있다. 둘 다 과학적 판단이자 사회적인 판단이다. 산보연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런 산보연의 사회적 판단이 계속되는 한 반도체 암 위험에 대한 과학적 입증은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불확실한' 채 남을 것이다.
최근 삼성반도체가 미국의 인바이런사를 고용해 백혈병 노동자들이 발암요인에 노출된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만들어낸 것을 보라. 앞으로 암 피해자들이 아무리 많이 생기고 암 발생 위험을 보여주는 연구가 많아져도 기업이 직업병 위험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연구를 또 만들어내면 산보연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또 산보연은 “반도체 제조공정이 백혈병을 유발할 정도로 다량의 유기용제가 휘발되는 환경이 아니다”고 했다. 이 ‘과학적 판단’의 근거는 피해 노동자들과 회사의 진술, 회사에서 제공한 작업환경 자료, 현장 직접 방문조사들이었다.
노동자들은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잦았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안전장치를 끈 채 일했다고 진술했고,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산보연은 양쪽 진술이 상충되니 잘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이 일하던 시점에서 몇 년이 지난 뒤 진행된 현장조사나 회사 측 자료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산보연은 “산보연 설립 이래 견지해온 역학조사의 원칙을 따라왔다”는 답으로 일관해왔다. 그밖에 산보연 자체적으로 수행한 반도체 노동자의 암 발생 위험 역학조사나 반도체 작업환경의 노출특성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도 과학적 비판들이 제기됐다. 특히 연구 자료와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수차례 이어졌다. 자료를 보지 않은 채 과학적 논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보연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판단했고, 그 결과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의 산재 불승인 근거로 쓰인 산보연 연구에 어떤 제한점이 있는지 그 누구도 제대로 과학적인 비판을 가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직업병 피해자들과 과학자들이 산보연에 제기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산보연의 역학조사가 사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과학적 비판이다. 또 이런 한계가 산재보험법의 법리를 거스르는 사회적 역효과를 낳고 있는 현실을 산보연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비판도 나온다. 적어도 김은아 소장은 역학조사가 사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과학적 비판에 대해서만큼은 성실히 답했어야 했다.
그리고 산보연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비판에 대해서는 산보연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주기를 바란다.산보연의 ‘과학적 판단’이 산재노동자 보호와 직업병 예방이라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면 산보연의 과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거꾸로 산보연의 과학적 판단이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낳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공적기구에서 일하며 사회적인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은 산보연 전문가들이라면 당연히 고민해야할 책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의 과학이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 사회적인 판단을 보류하거나 외면하는 과학자들은 인류 보편의 안녕을 위협하는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낳아왔다.
Chapter Two 계속
They were working: doing what they wanted to do. He was not working. He was being worked. (p49)
쉐벡이 Gimar에게 바람맞기 전의 일들을 다시 읽었다. 쉐벡은 조림 노역을 하는 캠프에서 쉐벳과 주먹다짐을 한다. 소년의 치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설정인지, 처음에는 쉐벳이라는 인물과의 에피소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되짚어 읽으니, 아, 르귄 할머니가 재미난 작전을 펼친 것 같다.
쉐벡처럼 리학을 공부하던 다른 친구들은 '중앙'에서 연구와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여기 훗날 우주 제일의 물리학자가 될 쉐벡은 나무를 심는 노역에 동원되어 와 있다. 육체노동은 늘 있었지만, 이처럼 하루 여덟시간씩 매일매일 몇달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경우는 없었다. 쉐벡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축에 끼었다. 그가 더 잘 하는 일, 더 하고 싶은 일, 물리학 공부가 있었다. 그는 일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일을 하지 않았다. 일에 쓰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쉐벳을 만들었나보다. 우연히 만들어진 이름(아나레스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컴퓨터가 무작위로 지어준다)이 비슷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쉐벳이라는 인물. 그는 사실 쉐벡 속에 있는 또 다른 쉐벡이었을지도 모르겠다.일상이 자신을 소외시킬 때 느끼는 자신에 대한 분노,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울 수 없는 현실에서 오는 좌절, 그걸 쉐벡과 쉐벳의 주먹다짐으로 표현한 건 아닐까. 아님 말구. ㅎ
마침내 쉐벡이 조림사업을 끝내고 지역 연구소로 돌아간다. 때는 열 여덟 살. '돌아간다'는 건 이 책에서 뿐 아니라 르귄의 소설 여러 곳에서 변주되는 중요한 테마다. 역시나 이 소설에서도 르귄은 공을 들여 '돌아감'을 이야기한다. 단순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He would always be one for whom the return was as important as the voyage out. To go was not enough for him, only half enough; he must come back. (p.54)
You shall not go down twice to the same river, nor can you go home again. (...) Yet from that acceptance of transience he evolved his vast theory, (...) You can go home again, the General Temporal Theory asserts, so long as you understand that home is a place where you have never been. (p.54~55)
그러고보니 이 소설의 마지막도 쉐벡이 아나레스로 돌아가는' 장면이었지. 작가의 일관성이랄까. ㅎㅎ
Chapter Two 장거리 전철 속에서 오랜만에 읽다.
Having`s wrong;sharing`s right. What more can you share than your whole self, your whole life, all the nights and all the days? (p.50)
쉐벡이 더스트 지역 조림 노역에 동원되어 일하던 열여덟 시절, 함께 일하던 Gimar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파트너가 있다며 거절하고 `평생 반려는 오도니안답지 않다`는 쉐벡의 설익은 항변에 이와 같이 담백하게 답한다. 이 말에 쉐벡은 자신이 아직 한번도 그런 관계에 이르지 못했다며 고개를 떨군다. 여기에 고개를 떨굴 사람 하나 추가다.
2장에는 잊을 수 없는 `감옥놀이`장면이 나온다. 감옥이라는 존재 자체부터 간수와 죄수의 관계까지,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인 아이들이 한 명의 죄수를 정하고 가두는 놀이를 한다. 놀이 전 아이들은 감옥이 어떤 것일지 서로 묻고 답하며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추론해간다. 아이들의 질문은 `거기서 종일 뭘 하냐`, `노역을 명령받는다고? 그 일이 하기 싫으면 어쩌냐`,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매를 맞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거 아니냐`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결국 `간수는 무기를 갖고있지만 나머지는 없기 때문에 복종한다`는 대답에 충격과 스릴을 느낀다.
쉐벡이 `부끄러움 그 이상`의 지독한 감정(아마도 죄책감)을 난생 처음 느끼고 친구들에게 '이제 풀어주자'라고 했을 때 친구들은 '이타적인체 하지 마'라고 비판한다. 그때 쉐벡은 말한다. 이타적으로 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거라고. '부끄러움 그 이상'의 지독한 감정을 느낀 자기 자신을 돌보기 위해, 늦게나마 자신이 제안한 계획을 철회하자고 말하는 쉐벡. 비록 애들의 놀이였고 성장 과정의 우여곡절 중 하나였지만, 난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내 유년기의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5학년 때였으니, 소설 속 열 한 살 열 두 살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였다. 쉐벡처럼 나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내가 제안해서 시작한 '놀이'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더랬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실패했다. 신나는 놀이에 앞장선 내가, 그 놀이는 잘못된 것이고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말할 순 없었다. 체면 같은 것이었을게다. 놀이를 주동해서 시작했다는 사실보다 도중에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을 배반하고 계속 이어갔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놀이를 이어간 과정에서 가장 외면당한 상처는 나 자신의 것이었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 것.
Chapter Two
"Nothing is yours. It is to use. It is to share. If you will not share it, you cannot use it." (p.27)
기저귀 찬 아가에게 따스한 햇볕을 독점하려 친구를 밀어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보육교사.
There was a singing in his ears which was not the orchestra but the noise that came when you kept yourself from crying. (p.30) ... If a book were written all in numbers, it would be true. It would be just. Nothing said in words ever came out quite even. Things in words got twisted and ran together, instead of staying straight and fitting together.(p.31)
외롭도다 쉐벡이여. 훌륭하도다 사춘기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작가여.
Chapter One
Like all walls it was ambiguous, two-faced. What was inside it and what was outside it depended upon which side of it you were on. (p.1)
Members of a community, not elements of a collectivity, they were not moved by mass feeling; there were as many emotions there as there were people. (p.4)
-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간략한 묘사 속에 늘 이런 구절들을 숨겨둔다. 르귄 할머니 존경합니다. 와락.
He was clearly aware of only one thing, his own total isolation. The world had fallen out from under him, and he was left alone. He had always feared that this would happen, more than he had ever feared death. To die is to lose the self and rejoin the rest. He had kept himself, and lost the rest. (p.6)
- 고독의 절정!
All the little things made sense; only the whole thing did not. (p.6)
- 이런 적절한 묘사같으니라구.
All through those hurried days, ever since Takver left, he had felt not that he was doing all the things he did, but that they were doing him. He had been in other people's hands. His own will had not acted. It had had no need to act. It was his own will that had started it all, that had created this moment and these walls about him now. (...) Before then, even; long before, in the Dust, in the years of famine and despair, when he had promised himself that he would never act again but by his own free choice. And following that promise he had brought himself here; to this moment without time, this place without an earth, this little room, this prison. (p.8)
- 아, 아까는 아직 고독의 절정이 아니었네요. 자기 의지로 선택한 길의 끝에 절대고독의 감옥에 갇히다. 양면성, 예측불가능성, 책임, 역사, 인생...
"You admit no religion outside the churches, just as you admit no morality outside the laws."
(...) "But the Modes are built of the natural capacities of the mind, you could not seriously believe that we had no religious capacity? That we could do physics while we were cut off from the profoundest relationship man has with the cosmos?" (p.15)
- 오오 쉐벡의 통찰력. 우주 전체와 한 인간 사이의 관계, 요건 어스시 마법의 철학이기도 하다. 특히 <머나먼 바닷가>에서 게드가 오리나무에 대해 왕자와 나눈 대화에서 달리 변주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뭐더라?
There were walls around all his thoughts, and he seemed utterly unaware of them, though he was perpetually hiding behind them. (p.16)
- 그니까, 내 안의 벽을 나도 보기 어렵다우.
This matter of superiority and inferiority must be a central one in Urrasti social life. If to respect himself Kimoe had to consider half of the human race as inferior to him, how then did women manage to respect themselves - did they consider men inferior? (p.18)
chapter 1 종료. 쉐벡이 우라스에 도착했다. "자, 이제 나를 갖고 뭘 하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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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힘든 계획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