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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02
    친구 복영이와 민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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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1/29
    평화의 섬 제주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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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1/25
    주걱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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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1/24
    김장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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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11/23
    가슴 아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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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1/21
    수종사와 사랑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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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1/19
    절교한 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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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1/18
    한자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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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11/17
    백낙청의 "어깨에 힘 빼고 통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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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11/15
    대안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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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복영이와 민영이

김민기의 '친구'를 불러본지도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동아리 선후배 10여명이 함께 송년회를 했다.

당시 함께 '친구'를 부르던 벗들...

이제 다들 40대에 접어 든 이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친구가 살아 일렁거리고 있었다.

 

키타를 치며 '친구'를 줄곧 불러주던 동아리 동기 정외과 '복영'이는

80년대 후반 어느 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구류와 구속을 겪으면서 계속 쫓기는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어디론가로 계속 도망을 가는 중에 동사한 것이다.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한 줌의 재로 흩뿌려진 복영이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또 한 명 나의 사랑하는 85 후배는

아직도 정신적으로 80년대에 머물러 있고

이 대학 저 대학을 배회하고 다니며 80년대를 살아가고 있다.

송년회에도 온 이 후배는 80년대에 멈춘 사고체계로

아직 먼 허공을 응시하며 온 몸에 응고된 시대적 괴로움을 짊어지고 있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밥 먹고 술 마시며

토론하고 동아리방에서 거리에서 나를 북돋아주던 동기와 선후배들 

그 중에서도 이 둘은 나의 가슴 속 불꽃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이다.

누군들 진한 추억과 큰 슬픔이 없겠는가마는

찬란한 추억과 가슴 저린 슬픔으로 살아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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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 가다


아이들의 오랜 소원대로

2박2일로 평화의섬 제주에 현장체험학습을 가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말에 오르기도 겁나하다가 내리기 싫은 신나는 말타기

산굼부리에 가서 오름과 억새밭을 구경하고...

소인국에서 놀고...

잠수함 타고 바다속 구경..

귤밭에서 귤도 따고..

멋진 또는 익살스런 폼을 잡아보다...^^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는 제주에서 그냥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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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걱밥(?)


전기밥솥에서 밥을 푸는 데 묵직한 왕건이가 걸렸다.

허걱~ 밥 속에서 주걱이 나왔다.  -..-

아무리 정신없이 바쁘더라도 그렇지.....

아그들은 밥에서 플라스틱 삶은 냄새가 난다고한다 ...^^


그림의 소재와 익실스러운 풍경에 절로 웃음을 머금게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한뜸 한뜸 뜬 이는 누구일까?

이 작은 그림이 거실에 걸린 후 그림 앞을 지날 때면 살짝 웃음짓곤 한다.  ^^

10/31 평양순안공항을 떠나올 때 산 자수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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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김치

어제 퇴근하여 저녘을 먹은 후

외곽고속도로를 달려 부천에 있는 둘째 처형댁에 가서

김장김치 3통과 고구마 등등을 차로 실어왔다.

 

멀리 강화도에서 바다바람을 먹고 자란 배추로

강화의 작은 어머님댁에 가서 직접 담가 온 김장김치란다.

 

매번 쌀이며, 김치며, 밤이며...얻어만 먹고 사는

흙에서 멀어져 간 그야말로 소비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년 봄이 오면 다시

아그들과 자투리 주말농장이라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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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리더라도

가끔

가슴 아리더라도...

 

누군가 보물덩이들 먹어치우고

똥 좀 싸고 도망가더라도

분노할 일은 아니지.

 

어느 날 식구처럼 뒹굴던 사람이

누구처럼 똥만 남기고 떠나더라도 

매달리지는 말게나.

 

그 똥들 모아 밑거름으로 삼고

먹거리 만들고 삶 만들면

그만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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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와 사랑터울

안해의 생일 축하산행을 위해 느지막히 10시에 양평 운길산 수종사로 4명이 출발하다.

산 아래에 차를 세우고 1시간 반가량 가파른 길을 오르다.

 

수종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두물머리 풍경은 멋진 그림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정약용의 생가도 여기서 멀지 않으니 이곳에 들려 풍경을 감상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

 

525살 먹은 은행나무의 자태를 감상하고 어루만져보다.

두물머리에 소리없이 흐르는 한강을 옆에서 바라볼 때와 흐름을 멀리서 관조하는

시점의 차이를 생각하다.

 

수종사의 매력 중 하나는 두물머리가 바라보이는 통유리와 전통양식이 접목된 무료 찻집 삼정헌(三鼎軒)이다.  은은한 녹차향과 불교식 명상음악이 어우리지는 풍경이 그만이다...

 

차를 15분쯤 달려 서종면에 있는...백두대간을 함께하셨던 분이 운영하시는 사랑터울에 가서 늦은 점심을 푸짐하게 먹다.

 

손님이 우리 뿐이어서 한적한 풍경이 한가롭다...벽에는 신영복선생님이 써주신 한글 액자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가 잘 어울리는 집이다.

 

돼지 바베큐에 배를 채운 아그들은 널따란 잔디밭 정원 얼어붙은 연못의 얼음을 깨서 놀이에 빠져들다...

 

두물머리에 갈 때는 1시간쯤만에 도착했는 데...무려 3시간 걸려 집으로 돌아오다.  

멋진 풍경을 만난 값을 양평에서~북부간선도로~내부순환도로 막히는 도로에서 치루다.

 

 

 

***수종사[水鐘寺]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송촌리 운길산 중턱에 있는 절.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59년(세조 5)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현재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뒤 조선 말기에 고종이 풍계(楓溪 : 楓漢)에게 비용을 하사하여 중창하게 했고, 1939년에는 태욱(泰旭)이 중수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주지 장혜광(張慧光)이 대웅보전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나한전·약사전·경학원·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수종사부도내유물(보물 제259호)이 있고, 조선시대 금동불감(金銅佛龕)과 금동불·보살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수종사다보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있다.

 

-출처 :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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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교한 날...^^

절교한 날

                                                       지은이 : 김채송


절교하고 집으로 갈때
갈 수록 집은 더 멀어지고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나는 남산 위에있는
폭풍이 지난 후
앙상하게 열매가 다 떨어진 나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는 
열매를 다시 주워서 담기 위해
집게와 바구니를 들고 과수원을향해
달려갑니다,
따뜻한 바람을 안고 달려갑니다.


(열매는 친구를 표현한 것이고,
집게는 화해,
바구니는 우정,
과수원은 친구가(사과가)있으니까 학교이다.) < 친절하게 해설까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2005년 11월 18일

 

 

 

가재

 

                                                                      지은이 : 김채원

 

가재를 잡자!
조약돌 뒤집고, 없다.
큰바위를 뒤집고, 없다.
어디있는걸까?
여기있나?
저기있나?
가재야나와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2001년 8월 9일

 

 

도망꾼 잠자리

 

                                                         지은이 : 김채원


이리가서 휙
저리가서 휙
냇가가서 휙
잔디밭에서 휙

아무리 휘둘러도
잡히지 않는 잠자리
도망꾼 잠자리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2005년 8월 5일

 

 

 

할머니댁 가는 길

 

                                                                             지은이 : 김채원

 

할머니댁 가는 길
평택 지나고
호랑이 장가가고

할머니댁 가는 길
대전 지나고
주룩주룩 비오고

할머니댁 가는 길
광주 지나고
뜨겁고 화끈화끈

할머니댁 가는길
장흥 지나서
먹구름이 뭉게뭉게

드디어 안양
할머니댁도착
야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2005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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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의 악연

아이들의 학교에서는 특성화교육의 일환으로 전교생에게 한자를 가르친다.

매달 시험을 봐서 한자박사급까지 급수를 매기고 있다.

그런데 두 놈 다 한자와는 담을 쌓으려 한다.  매번 시험이 닥쳐서야 허둥지둥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는 모양인데 이번엔 둘 다 낙제를 했다.  ^^    재시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채원이는 얼치기 박사급인데 시험 볼 때를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한자를 왜 공부하냐고 불평하곤 한다.  채송이도 마찬가지로 한자하고는 못 친하다.  음과 뜻은 그렇다치고 특히 획순에 이르면 규칙이 있지만 예외적인 상황도 있어 난감한 모양이다.  하기사 내 수준도 읽는 것은 얼추 가능한 데 쓰기는 쉽지 않다.

 

초등학교의 시책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떠라가긴 하는 데 아이들의 불평이 사라질 날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자를 공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현실은 한자를 아예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과서나 소설 심지어 일상의 단어들에도 한자를 알게되면 뜻이 명료해지는 것 투성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로 나아갈수록.....


<2005/08/14 설악산 대청봉 부근 동해를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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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의 &quot;어깨에 힘 빼고 통일하자&quot;

오늘 아침 인문학자 백낙청 선생님과의 만남 그리고 질의응답이 있었다. 

일본 사회의 납치문제에 대한 반응에 대해 '안락에의 전체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미국의 9.11에 대한 반응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봤다.  또한 북한 또한 분단체제로 인해 인민이 바라는 정책을 실현할 능력에 제약이 오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주성 실현이 어렵다고 보았다.   남북모두 분단으로 인해 '불구국가'라는 표현을 썼다.  

 

아직은 내 스스로 탐구하고 배워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지만....."어깨의 힘을 빼고...오랜 분단으로 왜곡된 삶 속에서 그것이 분단으로 왜곡된 삶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망각의 타성을 깨고 밝은 눈과 맑은 마음을 찾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라는 데 대해 전적으로 공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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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축전 도라산강연회(2005. 9.11)

6.15시대의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1


경기도가 주최하는 세계평화축전의 폐막 강연을 맡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영광입니다. 특히 장소가 경의선의 남측 최북단 역인 도라산역인 점이 뜻깊습니다. 이런 뜻깊은 행사를 발상하고 기획하신 손학규 지사 등 경기도 여러분과 주관하는 수고를 감당하신 송태호 대표 등 경기문화재단 여러분께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은 9/11 테러의 4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날짜를 일요일로 잡다 보니 우연히 그리 된 것이겠지만, 도라산역이 상징하는 화해와 협력, 평화의 주제에 더욱 무게를 실어줍니다.


도라산역을 건설하는 일 자체가 6o15공동선언으로 가능해졌습니다. 6o15시대의 산물이자 그 상징 가운데 하나가 도라산역인 것입니다. 이런 장소에서 6o15시대를 다시 생각해보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갖는 그 의미를 살펴보는 일은 정말 보람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이 안겨주었던 애초의 감동은 한동안 적잖이 멀어진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의 대결적 정책과 일방주의가 강화된데다, 작년에는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고 남북간에 다른 악재들이 겹치면서 '6o15시대'라는 말을 실감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완연히 다릅니다. 특히 6o15 다섯 돌 기념 평양 축전과 광복 60주년을 맞은 서울 축전 행사는 오랜만의 대규모 민간 공동행사일 뿐 아니라 최초로 민o관이 함께한 축제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복원된 남북 당국자간의 일련의 접촉은 남측 특사와 북측 최고지도자의 면담, 북측 대표단의 남쪽 국립현충원 방문 같은 괄목할 사건을 낳았고, 정치o경제o군사와 인도주의 사업 등 여러 분야에서 굵직굵직한 성과를 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난 3월말에 남o북o해외의 민간 공동기구로 발족한 '6o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o북o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가 한 몫을 해낸 데 대해 저는 남측 상임대표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협조하고 함께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강연 내용은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이며 상임대표로서의 공식 발언이 아니라는 점도 아울러 밝혀두고자 합니다.



        2


6o15시대란 과연 어떤 시대일까요? 무엇이 6o15공동선언에 한 시대의 획을 그을 만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6o15와 더불어 시작된 시기는 정확히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인가요?


사실 6o15선언의 내용 자체는 일찍이 1972년에 통일의 원칙을 천명한 7o4공동선명만큼 명쾌하지 않고, 1991년에 조인되어 이듬해 발효한 기본합의서 즉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그러한 점들이 6o15가 지니는 획기적 의미의 요체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6o15선언의 남다른 의미로는 그것이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합의하고 서명한 문건이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남측의 경우 이 만남은 상당한 공론화의 과정 속에 진행되었으며, 여야간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민주화의 지속적 추진이라는 배경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72년의 밀사교환 당시는 물론, 91년의 기본합의서 체결이나 94년의 갑작스런 정상회담 합의 때보다 훨씬 든든한 현실적 기반이 전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6o15공동선언의 일견 모호하고 제한적인 내용이 바로 이러한 현실적 기반에 걸맞은 탁월한 성과라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선언문 제2항의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은 내용이 두리뭉실할뿐더러, 남북 각자가 이제까지 배격해온 상대방 제안에 끌려갔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를 남겼습니다. 실제로 우리 남쪽에서 그런 비난이 많았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한쪽만이 다른 한쪽을 끌고 가기로 했다면 합의가 가능했겠습니까. 저는 이 조항의 애매모호한 표현이야말로 6o15공동선언을 빛내는 대화와 타협의 정신, 실현가능한 방안을 찾아내는 실천적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믿습니다.


돌이켜보면 7o4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 즉 자주o평화o민족대단결은 모두가 타당한 것이지만, 통일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사람들마다 자신에게 불리한 통일이 될까 하는 불안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측에서는 통일방안으로 이미 '고려연방제'를 제의해둔 상태였고 1991년에 이 제안을 새롭게 제출합니다. 그런데 연방제로 가는 과정에서의 남북간 신뢰구축에 대한 현실적 방안이 부족했던 탓에 북측이 고려연방제를 제안했다는 사실 자체가 도리어 남측에서 모든 연방제 논의를 어렵게 만들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 90년대 초의 기본합의서는 연방제가 아닌 국가연합제에 실질적으로 기울어진 느낌이 많아 북측에 부담을 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합의서는 물론 7o4성명의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남과 북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여 연방제 통일로의 길도 열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이 그 해 가을(1991.9)에 실현된 상황에서 이러한 조항은,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일종의 연합관계를 추인하며 각종 부속문서를 통해 강조하는 의미가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대립각을 6o15공동선언은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두리뭉실한 표현으로 절묘하게 해소했습니다. 연합제와 연방제는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 무엇보다 연합제에서는 두 개의 중앙정부가 남아 있는 데 반해 연방제는 하나의 연방정부 아래 남북의 지방정부가 존재한다는 점이 다르겠지요 - 연방제의 수많은 형태 중에 '낮은 단계'에 속하는 것과 연합제가 똑같다는 게 아니라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했으니 이론상 나무랄 데 없는 명제입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그중 어느 하나를 지금 택한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는데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상대방의 굴복을 요구해서 화해와 협력을 막겠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제2항의 합의정신을 좀더 일반화해서 풀이한다면, 첫째 통일을 하기는 하되 너무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 어떤 형태의 통일인지를 미리 못박지 않고 지금 가능한 통일작업부터 진행한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합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신뢰구축 작업을 명기한 공동선언 제4항, 즉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는 조항이 비로소 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까닭은 첫째, 한반도에서의 신뢰구축은 통일을 하지 말자고 해도 불가능하고 덮어놓고 통일하자고 외쳐대도 어려워집니다. 통일을 안한다고 하는 순간 정권유지가 힘들어짐은 물론, 현실적으로도 남북한 모두의 장기적 문제에 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통일을 부르짖는다고 구체적인 방안이 안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데 대한 사람들의 불안이 커져서 오히려 통일사업에 역행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둘째로, 한반도의 분단현실은 세계 어느 곳에도 유례가 없는 그 나름의 특이한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한반도의 통일 또한 교과서에 없고 현대정치사에 선례도 없는 독특한 방식을 창안하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나가면서 그때그때 최대한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이 중요하지 기존 개념들 가운데서 이게 맞냐 저게 맞냐를 놓고 싸워대는 일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베트남식 무력통일도, 독일식의 급격한 일방적 합병도 아닌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표현도 곧잘 쓰이곤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의 종착점은 여전히 1945년 당시에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이루려다 못한 단일형 국민국가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0년 6월의 정상회담에서도 통일까지는 20~30년, 아니 40~50년이 걸릴 거라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물론 정확성을 기한 관측이라기보다 통일을 너무 서두르지 않는다는 역사적 합의의 연장선에서 나온 덕담 수준의 이야기였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을 문자 그대로 접수한다면 6o15시대는 2000년에 시작해서 길게는 2050년까지도 갈 수 있는 장구한 세월이 됩니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통일이 언제 될지, 과연 되기는 되는 건지, 실로 막막한 느낌을 주기에 알맞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통일에 대한 개념을 바꿀 것을 제창합니다. 단일형 국민국가로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남북간의 통합작업이 일차적인 완성에 이르렀음을 쌍방이 확인했을 때 '1단계 통일'이 이룩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통일이며 언제 통일할 거냐를 두고 다툴 것 없이 남북간의 교류와 실질적 통합을 다각적으로 진행해나가다가 어느 날 문득, '어 통일이 꽤 됐네, 우리 만나서 통일됐다고 선포해버리세'라고 합의하면 그게 우리식 통일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통일작업의 완성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통합의 과정은 한층 힘차게 진행될 것이며 무엇이 2단계, 3단계 통일에 해당할지도 그때 가서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허술한 것 같아도 한반도에서는 이런 '1단계 통일'만 이루어져도 그것은 남북민중의 실질적 화해와 접근에 근거한 것이기에 다음 단계들을 향한 불퇴전의 대세를 이루게 마련입니다. 이집트의 나쎄르와 리비아의 가다피가 한때 '통일아랍연합공화국'을 선포했다가 금세 흐지부지됐던 경우와 판이함은 물론, 남북 예멘의 당국자들이 '3당 합당'식의 담합통일을 선포했다가 결국은 내전을 거쳐서야 온전한 통일을 이룩한 전례와도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의 정치적o경제적 발전수준은 당국자들만의 담합에 의한 하향식 통일을 허용하지 않을뿐더러 남북이 모두 중무장한 상태에서 내전을 통한 뒷마무리라는 수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다소간에 두루뭉수리로 진행하다가 문득 통일이 되는 과정이야말로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한반도식 통일의 참뜻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런 통일은 결코 아득한 장래의 일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온 미래입니다. 6o15 이후 5년 동안에 허송세월이 적지 않았지만, 올해 6월 14일에서 8월 17일, 즉 평양축전이 시작해서 서울축전이 끝나기까지의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더구나 금주로 속개가 예정된 4차 6자회담이 성과있게 마무리된다면 변화의 물살은 더욱 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정녕 6o15시대는 통일시대의 들머리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3


이제 한반도의 이런 통일시대가 동북아 평화에 어떤 의미를 지닐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한반도는 동북아에서 가장 전쟁위험이 높은 지역으로 꼽힙니다. 따라서 이러한 곳에서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작업이 진전된다면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그만큼 더 안전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됨됨이를 보건대 설령 한반도가 좀더 안전해진다 해도 지구현실이 갑자기 평화로워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자칫하면 아직까지 비교적 안정된 지역인 동아시아마저 전세계적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북아 및 동아시아만이라도 이런 대세를 거슬러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선도지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동아시아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동북아의 그러한 역할을 위해 한반도의 어떤 통일과정이 가장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고자 합니다.


오늘날 남북의 대치상태는 동북아의 직접적인 불안요인임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제의 형성과 일본, 중국 등 이웃 강대국들의 건전한 발전에도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북의 핵무장과 미사일 문제, 납치 문제 등 북한으로부터의 온갖 현실적 또는 가공적 위협이 우경화와 군사력 강화의 빌미가 되고 있으며, 아시아의 이웃들을 외면하고 미일동맹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자해적(自害的) 노선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또 하나의 강국이 탄생할 경우, 설혹 통일 한반도가 자본주의 사회라 한들 일본사람들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을까요? 물론 오늘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북한과 북녘 사람들을 업신여기듯이 통일 한반도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군사력을 팽창시키며 미국에 더욱 의존하려는 충동은 오히려 커질 수도 있습니다. 오로지 남북 민중의 실질적 접근으로 '어물어물' 진행되는 통일, 남북간의 경계선뿐 아니라 동북아 여러 나라 사이 국경선도 점차 밀폐성이 덜해지는 한반도의 변혁작업만이 일본을 믿음직한 아시아의 이웃으로 끌어내는 결정적 동력이 될 것입니다.


중국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화주의 및 대국주의와 결합한 중국 민족주의의 범람을 우려합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은 결국 중국과 일본이 함께 나서지 않고는 불가능한데 양국은 오히려 대립의 날을 세워가는 양상입니다. 그나마 한국이 일정한 중재역할을 할 만한 처지지만, 남북대결 상황에서 언제든지 구사할 수 있는 '북한 카드'의 위력 앞에서 한국의 교섭력과 중재능력은 무력화되기 일쑤입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카드'는 물론 사라지지요. 그러나 소수민족문제 등 그나름의 약점을 안고 있는 중국이 한반도에 강력한 단일형 국민국가가 출현했을 때 과연 넉넉하고 건강한 신흥 대국의 몫을 해낼 여유를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점진적인 분단체제 극복작업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더욱 많은 일깨움을 얻고 지역협력에 더 성의있게 임하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통일과정이 일본과 중국에 대해 이 정도의 공헌만 하더라도 한반도가 새로운 인류문명의 전초기지로서 제 구실을 톡톡히 해낸 꼴이 될 것입니다. 물론 분단체제를 제대로 극복한 사회가 세계에 기여할 일은 이밖에도 많습니다만, 여기서는 여러분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고 넘어가렵니다.



        4


앞서 통일의 개념을 바꿀 것을 제창했습니다만, 통일작업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와 사업방식도 이제 변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몇가지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통일'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한반도식 통일'이 어느 날 문득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통찰하게 되면, 6o15시대는 곧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드디어 해체되는 시기이며 통일은 아득히 먼 일도 아니고 엄청나게 위협적인 사변도 아니라는 넉넉한 믿음이 생깁니다. 6o15 이전 시대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통일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투쟁이 불필요해진 상황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범한 대중들이 각자 처한 삶의 마당에서 '어깨에 힘 빼고' 통일의 길에 나서는 일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해졌다는 뜻이지요.


다른 한편, 통일이 당국자간의 합의보다 남북 사회의 실질적 접근과 동시적 변화에 좌우되는 상황은 수많은 개인의 짐을 그만큼 더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먼저, 오랜 분단으로 왜곡된 삶 속에서 그것이 분단으로 왜곡된 삶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망각의 타성을 깨고 밝은 눈과 맑은 마음을 찾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소수의 극렬 반통일세력뿐 아니라 '이 정도면 살 만해졌으니 그냥 이렇게 살지'라고 생각하며 분단체제에 안주하려는 상당수 사람들도, 분단체제를 허물기 위해 흘린 그 많은 땀과 피로 '이 정도 살 만'해진 현실에 무임승차하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이 정도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안정도 유지되기 어려움을 깨닫는 마음공부와 지식공부를 병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분단체제보다 나은 한반도 사회를 건설하려면 지금 이곳의 생활환경에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고 개혁할 것을 개혁하는 일상적인 연구와 실행도 필수적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남북의 교류와 통합 작업에 각자 힘 닿는 만큼 참여하는 민중대참여의 원칙이야말로 진정한 민족대단결을 구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참여는 다시 각자의 일상적 수행과 사업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입니다.


어렵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각자의 마음공부와 일상적 실천과 통일과업이 온통 하나가 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알찬 '흑자인생'이겠습니까. 제가 '어깨에 힘 빼고 통일하자'는 다소 경박하게 들릴 수 있는 표현을 내놓은 것도, 힘든 과업일수록 그 일머리를 알아서 즐겁게 해내자는 뜻입니다.


6o15시대 이땅의 현실을 곰곰히 살펴보건대, 한반도식 통일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매우 특이한 과정이며 바로 이 과정의 일차적 완성이 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성패는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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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교육(?)

아이들이 커가면서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겠지만 교육문제에 이르면

중장기적이고 총체적인 대안이 없이 접근하게 되면

나무를 보지 못하고 숲만 보거나,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리라는 생각.

 

개인과 가족이 노력해야 할 몫과

가치체계와 교육체계와 보상체계, 분배구조 등의 국가적인 문제 등과

국가 및 공교육의 책임과 공교육에 대한 불신 그리고 사교육 열풍에 이르기까지...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누군가는 대안을 마련하고 풀어야 할텐데...

 

얼마 전 채원이의 대안학교 진학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와 안해는 어쩌면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생각을 품고 사는 여전히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두 마리의 토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양성을 말함일텐데...아직은 공교육에서도 대안교육에서도 충족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적으로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고...또 공교육만으로도 대안교육만으로도 어렵고...늦은 밤까지 학원에 보내고도 싶지 않고...마냥 어중간하게 헤멜까봐 겁이 나더군.  

 

사회전체적으로 아이들의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가치체계와 이에 따른 분배구조 편입이 계속되고, 공교육 체계의 변화발전을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근간을 공교육이 담당해 나가지 못한다면...집에서 대화하고 토론하고 돌봐주고 가르쳐줄 능력이 없는 이른바 대다수 사람들의 선택은 결국 사교육에 기대거나 대안교육으로 빠져나가게 되지 않을까...결국 대안교육과 공교육 상호간의  열린 대화없이는 우리 교육의 앞날은 어렵지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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