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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

 

따뜻함


언젠가 한 농부가 시골에서 어쩌다 도시를 가면 서울 생활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코 따뜻함을 느낄 수 없다고 한겨레신문에서 밝혔다. 이 ‘따뜻함’이란 한마디로 내 시골에서의 경험을 요약할 수 있겠다. 작년 5월 초에 시골로 이사 온 후로 오늘까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들어오시오! 한잔하시오! 주스 잡수시요! 식사 좀 하시오! 이야기 좀 합시다!’ 등등의 말로 따듯한 환영을 표시한다. 자주 식사 초대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면 최고 좋은 자리에 앉게 되고 부끄러울 정도로 비싸고 싱싱하며 맛있게 준비한 좋은 음식을 먹게 된다. 다른 손님이 오면 식사하는 도중이라도-우체국 아저씨나 이웃, 심지어 여호와 증인이나 그냥 길을 묻는 사람까지-모두 다 초대받은 손님과 똑같이 대접한다. ‘식사하셨냐, 어서 오시라’ 등등으로 따뜻한 권유를 받게 된다. 대부분 이렇게 초대받은 사람들도 식사를 사양하지만 여기에는 진심이 살아있다. 가짜는 하나도 없다.


시골에서는 식사를 준비할 때는 뜻밖에 들른 손님을 위하여 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준비를 더 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몇 사람이 들어와도 먹을 여유가 항상 있는 것 같다. 구약성서의 엘리야가 과부의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했던 기적이 생각난다.


내 모국인 미국의 풍습은 좀 다르다. 특별한 초대가 없는데 식사 때 찾아가면 큰 실례라고 생각한다. 약속한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문을 두드리거나 벨도 누르지 않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시골로 이사 와서 이 누구나를 위해 기다리는 식탁을 보고는 굉장히 놀랐고 인간끼리의 따뜻함이 무엇인지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 요즘은 영성 지도자들과 심리학자들이 올바른 대인관계에 대하여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시골집에서 식사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들르기만 하면 주인이 팔을 붙잡고 놀다가란 초대를 억지로 받는 광경을 보면서 대인관계의 기본 요소를 배울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무엇보다도 나눔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말을 나눌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는 음식까지 나누려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회학자들이 원주민에 대해서 연구하고 글을 쓰는데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옛날 사람들은 공동체 정신 곧 나누는 정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옛날 사람들의 시대란 개성과 경쟁, 이기심, 사유 재산과 욕심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이전 시기를 말한다. 콜럼버스가 미국에서 만났던 인디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침략하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여러 가지 귀중한 선물을 주며 환영했다. 영국 청교도들도 뉴잉글랜드 지방의 인디언들에게서 대우를 받고 인디언들 덕분에 살게 되었으며, 그들한테서 받은 식량으로 신대륙 이주 후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낼 수 있었다.


현대에 와서 우리 모두는 이른바 발전이라는 미명과 광고 덕분에 인간 본성의 중요한 한 요소인 공동과 나눔의 정신에서 얼마나 멀어져 버렸는가? 나는 서양 사람으로서 자꾸 초대받는 것이 매우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분석해 보면 부담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독립하려는 이른바 복잡하게 안 하려는 마음, 남을 괴롭히지 않으려는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 나는 혼자 살 수 있고 한마디로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 이기주의자가 되고 지나치게 개성을 중요시하는 데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에서 고생하는 아주머니들을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초대를 거부하면 더욱더 그들을 괴롭히는 것 같다. 식사나 대접을 거부하면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대접하는 사람과 시간을 나누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따뜻함을 받아 안으면 참으로 인간끼리 늘 깊은 사랑을 나누고 은혜를 입게 된다. 시골의 따뜻함은 하느님의 사랑의 반영이고 자연스럽게 성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


더 넓게 생각해 보면 시골 사람들이 시간 여유, 관대함, 너그러움, 재물을 나누는 정신은 진심으로 인간다운 삶의 한 기본 적인 요소다. 아니 최고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산업혁명, 과학적 발전, 기계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 시골의 따뜻함을 많이 잃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돈 버는 데 바빠서 이웃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식사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나누는 것도 없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인간성이 사라지는 까닭에 모든 다른 문제, 곧 핵무기, 군비, 공해, 고문, 군부독재, 산업화, 퇴폐문화, 불평등한 경제 등이 따라오는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마음을 나누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아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을 영원의 선물로 받았는데 따뜻함을 주는 나눔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으면 이 선물을 남요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는 시간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같이 먹고 놀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한다. 1857년 영국 타임스지에는 서인도 자메이카 섬에 사는 한 영국인 대지주의 분노가 보도되었다. 그의 소작인들(해방된 흑인으로 원래 노예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노는 것과 한가함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며 주인의 욕심을 비웃고 자기들의 ‘게으름’이나 따뜻함 때문에 주인이 당할 파산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제도가 복원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이 인간 본성인 따뜻함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실하기 전에 시골 사람들의 따뜻함을 다시 찾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성을 최고로 귀중하고 값진 것으로 느끼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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