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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일, 의료급여제도가 바뀐 이후

 

2007년 7월 1일, 의료급여제도가 바뀐 이후

2007년 7월 1일은 나라를 들썩이게 할 중요한 제도가 처음 시행되는 날이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비정규직법이 처음 시행되는 날이었지요. 비정규직법은 제정 단계부터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 시행부터 이랜드 사태로 대표되는 해고 및 용역업체로의 업무 이관 등 얼룩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7월 1일에는 비정규직법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빈곤층과 의료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바로 개정 의료급여제도였습니다. 바뀐 제도의 내용은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외래진료에 대한 본인 일부부담제도 실시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방문시 : 본인부담 없음  

1차 의료기관 방문시 : 1,000원(의원)  

2차 의료기관 방문시 : 1,500원(병원, 종합병원)  

3차 의료기관 방문시 : 2,000원(대학병원 등)  

약국 처방전 : 처방전당 500원(단, 보건소, 보건지소 등에서 발급한 처방전에 대해서는 본인부담 없음)  

 

 

 

CT, MRI, PET 등을 입원하지 않고 외래에서 시행했을 때는 급여비용의 5%를 본인이 부담  

 

 

 

2> 건강생활유지비 지원 :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 1인당 1개월에 6,000원씩 건강보험공단의 가상계좌에 적립하여, 의료기관 방문시 사용하도록 함. 쓰고 남은 돈은 매년 혹은 분기별로 정산하여 지급함.  

 

 

 

3> 선택 병의원제 도입 : 질환별로 급여일수 상한을 초과한 의료급여 환자는 지정된 한 개의 의원(특별한 경우에만 2차, 3차 의료기관 선택 가능)에서만 급여항목에 대한 본인부담이 없음. 대상자의 경우에는 건강생활유지비가 지원되지 않으며, 선택 병의원 이외의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본인 일부부담을 해야 함.  

 

 

 

4> 파스 등 진통소염 외용제 제한 : 경구 투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처방, 조제받은 경우에는 환자가 전액 본인 부담을 해야 함.  

 

 

개인적으로는 올해 5월부터 천안시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는 보건소에서 의료급여제도가 바뀌면서 겪게 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 풍경 1  

 

칠순이 조금 넘으신 할머니가 약을 타러 보건소에 오셨습니다. 고혈압과 당뇨가 있으셔서 계속 보건소에 다니시면서 약을 드시고 계시고, 무릎 퇴행성관절염이 심하지만 먹는 약은 속이 좋지 않아 잘 드시지 못해 파스 붙이면서 하루하루 겨우 버티면서 사시는 할머니입니다. 보건소에 방문하시는 전형적인 노인 환자분이시죠. 지금까지는 두 달에 한 번씩 오셔서 복용할 고혈압약과 당뇨약, 그리고 무릎 관절에 붙일 파스 20장 정도를 타가시고 계셨습니다. 제가 진료를 보던 그 날도 똑같은 이유로 보건소에 찾아오셨습니다. 약을 꾸준히 드시면서 다행히 고혈압과 당뇨는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파스’였습니다. 이 할머니가 자식들이 건강보험료 꼬박꼬박 내면서 그럭저럭 여유롭게 지내시는 할머니였다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국가에서 생활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의료비 지원을 해주는 의료급여 1종 환자였습니다. 의료급여 제도가 바뀌면서 의료급여에게 파스를 처방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파스에 대해서 의료급여에서 지원이 되었는데, 제도가 바뀐 후로는 파스는 환자가 100% 본인 돈을 다 내서 사야 합니다. 할머니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드렸지만, 할머니는 파스 없으면 너무 아파서 활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면서 이번 한 번만 공짜로 받게 해달라고 눈물까지 글썽이시며 막무가내로 애원하십니다. 파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러시나 생각하실지 모르시지만 차비 1,000원이 아쉬워서 아픈 다리를 겨우 끌고서 산 넘어 1시간을 넘게 걸어오시는 할머니의 상황을 아신다면 그런 생각은 사라질 것입니다.  

 

# 풍경 2  

 

7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보건소에는 환자가 조금 늘었습니다. 기존에 보건소에 다니시던 분들이야 계속 다니시는 것이고, 새로 늘어난 환자는 다른 의원이나 병원을 다니시다가 옮기신 분들입니다. 7월 1일을 기점으로 이분들이 보건소로 옮긴 이유는 명백하게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의원에서 처방전 받으면 1,500원, 병원에서 처방전 받으면 2,000원, 대학병원에서 처방전 받으면 2,500원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한 푼이 아쉬운 분들이 의료기관을 보건소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람직한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원급에서 옮기신 분들이야 의원이나 보건소나 진료의 질적 수준도 비슷하고, 환자분들의 질환도 보건소에서 진료하기에 적당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병원급 및 대학병원급 의료기관에서 옮기신 분들을 보면, 이 환자들을 보건소에서 받아주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고민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상당수의 환자분들이 많은 질환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합병증이 생기지 않는지 혹은 이미 있는 합병증이 더 진행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경우입니다. 지금까지 처방받은 약이라면서 처방전을 들고 방문하시는 환자분들을 보면 질병이 5-6개는 기본이고, 약은 먹으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를 정도로 10여개 이상씩 복용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건소에서 진료를 하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환자분에게 설명을 해서, 본인 일부부담을 하시더라도 다니시던 병원에 계속 다니시도록 권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부담 때문에 그렇게 못하겠다고 환자분들이 보건소에서 약을 처방해 달라고 우기시면 참 난감합니다. 이 환자분들을 보건소에서 진료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일입니까?  

 

의료급여제도의 변화를 보면서  

 

바뀐 의료급여제도의 핵심은 의료급여 1종 환자에게도 본인부담을 하게 만들고, 급여일수가 많은 환자들의 경우 한 개의 병의원만 이용하도록 하여, 의료급여 환자들의 의료 이용을 줄이고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도를 만든 일등공신은 작년 추석 무렵 ‘의료급여 제도혁신에 대한 국민보고서’라는 글을 썼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입니다. 보고서의 내용은 주로 의료급여환자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의료급여 비용이 상승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 언급한 제도 개선 내용이 이번 의료급여제도 변화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유시민 전 장관이 이야기한 것처럼 도덕적 해이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 도덕적 해이는 인간 사는 세상 어디든 있기 마련입니다(다만, 유시민 전 장관이 이야기했던 의료급여 환자의 도덕적 해이가 잘못된 통계에 기반해서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은 한 번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군요). 도덕적 해이를 막아서 재정을 아끼고, 그 돈으로 의료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를 막겠다고 모든 의료급여 환자들의 진료권을 제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요? 이건 마치 학교 다닐 때 반에 잘못한 아이 한 명 있다고 같은 반 아이들을 다 벌주는 것처럼 비합리적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제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면 전체 의료급여 환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 아니라, 진짜 악의적으로 도덕적 해이를 일삼는 사람들을 찾아내 통제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의료급여 환자들 상당수는 돈 천원이 아쉬운 사람들입니다. 그 돈 천원 때문에 건강을 돌보지 못하는 사회는 슬픈 사회입니다. 복지를 우선으로 하겠다던 참여정부가 이렇게 슬픈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지금까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의사협회와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성명서까지 내면서 새 의료급여제도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이 제도의 시행을 전면 재검토하기를 바랍니다  

 

(노동과 건강 여름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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