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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8
    폭행
    공돌
  2. 2007/02/20
    공짜 지식
    공돌
  3. 200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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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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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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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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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2/03
    내부책임론
    공돌

폭행

최근에 나를 건드리면 안되는데...

 

결국 후배의 아구창을 날렸다. 주먹이 아직도 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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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지식

돈으로 환산하기가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지식'이라는 재화이다. 공짜는 누구든 마다할 사람이 없다. 근데 지식을 공짜로 나눠준다. 요건 좀 애매하다. 가져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근데 좋은 지식, 필요한 지식을 공짜로 나눠준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것도 대학에서 그러한 지식을 공짜로 나눠주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도강(盜講)이 아닌 합법적으로 공유된 지식을 얻어갈 뿐이다. 그것도 신분, 성별, 경제적 자력과 무관하게 말이다. 그 순간 그것은 공공재다.

 

이런 공공재는 마트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상품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왜? 마트에서 나눠주는 사은품은 어떤 물건을 사게하기 위해서나 다시 그 마트를 이용해 달라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므로 공공재의 성격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물론 사은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트에서 제공받는 물품을 공공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다.

 

지식은 원래 그 자체가 공공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를 특정한 누군가가 전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가령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할 수 있는 것도 지식의 공공재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제외하고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래서 서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책은 완전한 공공재는 아니다.

 

공공놀이터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책의 소유도 책 자체는 구입한 사람의 소유가 될 지언정 그 내용, 특히 문장, 그림 등은 책을 구입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지적재산권을 언급할 필요가 없이 종이와 인쇄비용을 구입하는 사람이 부담하여 그 사람의 생각을 거의 노력없이 얻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지식이 공공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종이와 인쇄비용을 구입하기 어려운 이에게 그러한 지식의 공유를 위해 금전적 댓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열어 놓는다면 그것은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참세상에서도 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자신의 지식을 무료로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의 기사를 읽으면 그러한 공공재라는 설명에는 의심이 간다. 그러나 공공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료가 되어야 하는데 무료라는 기본 요건을 충족하니깐 공공재에 가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위에서 언급한 '마트'처럼 무료제공의 지식이 미끼라고 판명나면 공공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단 무료라는 점, 다른 조건을 걸지 않았다는 점,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공공재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근데 의심은 잘 사그러지지 않지만.....좋은 일이기는 하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91218.html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대학이 같은 돈벌이를 목표로 한다고 해도 구사하는 테크닉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대학은 학문적 열등감, 간판결핍증을 이용하여 오히려 '고위과정', ;지도자과정'이니 하면 돈벌이에 더욱 혈안이 되다는 점, 그게 큰 차이다.

 

내용도 없는데다가 뭔가 '수료'나 나이롱뽕으로 '학위'를 받기 위해 용쓰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오늘의 우리의 대학이 문제다. 건물벽을 대리석으로 칠갑을 한다고 대학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맨발의 기봉이도 알진데, 거의 3-4백만원 되는, 그것보다 더 비싼 등록금을, 고위과정 이수비를 요구하는 한국의 대학이 너무 밉다.

 

구청에서는 요가, 풍물, 서예, 컴퓨터, 자격증 등의 공공재 지식을  제공하면 그것보다 나은 지적 공공재도 제공되어야 한다. 그것을 대학말고 누가 할 것인가. 저의가 뭐래도 시도는 해봐야 할 듯하다. 대학들이여, 공짜로 좀 제공해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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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1579.html

 

과연 해고사유가 될까, 안될까.

 

"파인즈는 멋진 연인으로 나는 잘못하다 해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1144.html

 

그러나 그 이전의 기사를 읽어보면 더욱 가당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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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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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음에 대해 몇 번의 코멘트를 남겨놓은 적이 있다.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다. 그러나 그이의 죽음은 사실 죽임에 가깝다.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을 티비 토론에, 신문방송에 올려 두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누구는 노동자의 죽음과 견주면서 그이들의 죽음에 호들갑을 떤다고 한탄을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모르는 것은 아니나,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이 외로워서, 그들이 현실에서 어떠한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쓰러질 때 죽음으로 내몬 상황과 그것을 방치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우리 자신은 아무런 책임과 죄책감이 없는지 생각해보라.

적어도 연예인이라고 하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할 수 있어야 그들도 우리의 죽음,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다. 그래야 노동자의 죽음을 진정한 열사의 반열에 올려둘 수 있다.

하나만 옳다고 생각치 말고, 다른 죽음도, 오히려 정반대의 죽음도 생각하자. 그 죽음에 대한 슬픔을 같이 해야 어떠한 운동도 인간으로 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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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카잘스

파블로 카잘스(Pablo Carlos Salvador Casals y Defillo).

 

오래도 살면서 숱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80세에 20대의 젊은 처자를 만난 사건이나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에 항의하며 첼로 활을 10여년이나 꺾은 일 등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계와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은 항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 첼로의 성자로 군림하면서 빛나는 음악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의 탁월한 실력도아니고 음악가로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사회의식, 저항의식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서 배울 점은 열정이다.

 

95세인 카잘스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6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카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 연주 실력이 아직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에 희열을 느끼는 일은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가 가동하고 소모하며 다시 재생산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칠 때마다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친구는 바로 자신이다. 그 자신이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위로할 때 가장 큰 힘을 얻는다.

 

오늘은 카잘스, 이 양반 덕에 자극을 받는다.

ps. 카잘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일화에 대해서는 바람구두의 문화망명지를 참조.

http://windshoes.new21.org/classic-casal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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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

지미 핸드릭스의 말이 생각난다.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 쪽이 내 심장과 가까우니까.

Let's shake left hands because they're nearer to my heart.

 

교감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타인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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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2

고상한 놈 보다 고상한 척 하는 놈이 더욱 꼴사납다. 요즘 그런 놈들이 넘쳐난다.

 

본질은 노동자이나 하는 짓이 사장인 듯 거만떠는 놈들도 봐주기가 역겨울 따름이다.

 

게다가 사장이라는 놈도 웃기다.

직원들 놀러가는데 안끼워주면 삐지는 골빈 새끼....한심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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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이 정해져 있으면 좋으련만.

보고 싶지 않은 놈이 있으나 계속 봐야 하는 상황은 꽤나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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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책임론

"그 문제는 사실 너나 그 사람이나 모두에게 문제가 있어. 무엇보다 니가 처음부터 그런 문제에 대해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으면, 아예 그런 행동을 안했다면, 그런 말을 안했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 아냐."

 

 

"니가 잘했다면" "내가 잘했더라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내부책임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초부터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어떤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예를 들어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치자.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헤어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를 지켜보던 친구가 니가 예전부터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다면, 니가 미리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나고, 잘 챙겨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은 사실 절반의 반도 맞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 계기와 이유가 문제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녀로부터 발생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정확인 이유를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친 사람을 추스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미리 그렇게 했더라면 등의 방법은 사태를 해결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대응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자기에게 원인을 찾으며, 모든 문제를 자기가 잘하게 되면 자연스레 일이 깔끔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관계 속에서 생긴 문제는 자기 하나 잘 한다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자기 책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태도는 진정한 원인을 찾지도, 그 문제로 인해 감정상한 사람에게 어떠한 치료책도 되지 못한다.

 

위에서 가정한 예, 숱하게 봤고 나도 그런 일을 당해봤다. 물론 시간이 약이다. 시간만큼 제대로 된 치료책도 없다. 어떤 치료제도 시간이라는 치료제에 버금가지도 못한다. 가만히 있어도 낫는 병을 가지고 이거 저거 오만가지 약을 쓰고 나서 마치 그런 약들이 효과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만 범할 뿐이다.

 

어떤 문제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문제를 풀기보다는 그 문제에서 자신을 끄집어 내어 자신을 관찰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면 상처받은 감정을 치료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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