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2/19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2/19
    생명과 평화운동을 위한 제안
    노동목사
  2. 2005/02/19
    민중과 생명 : oikozoe [oikozoe@kornet.net]
    노동목사

생명과 평화운동을 위한 제안

 생명과 평화운동을 위한 제안

                              김용복(한국생명학연구원장)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생명이 파괴되고 죽어가는 일이 더욱 더 많아지고 있으며 더욱 더 심해지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을 희생시키는 빈곤과 폭력과 전쟁과 생명파괴의 세력이 인류 역사 그 어느 때 보다 심각하게 생명과 평화질서를 위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속에서 생명은 신음하고 있다.


우주의 생명은 신음하고 있다.


그대는 생명의 신음소리를 듣고있는가?


1. 굶주림은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굶주린 어린이들이 아우성을 치고 신음하면서 죽어가고 있다.


로마정상회담에서 시장은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하였다. 시장은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여 기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도 세계의 기아의 문제는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대륙에서도 죽음의 신음소리가,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절규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진다.



 

북한의 어린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남녘에까지 들리고 있지 않은가?


1989년 이래 동구국가들로 받던 원조도 끊어지고 미국의 경제적 봉쇄로 세계와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남북한 경제협력이 속도를 내지 못하여 북한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은 자원이 부족할 뿐 아니라 미국, 일본과 같은 강대국의 침공위협에 대비하여 막대한 군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2. 오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지배질서는 냉전체제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전멸전과 총력전을 실시하고 있다. 전멸전(Omni-cidal Warfare)이란 모든 생명을 전멸할 수 있는 무기와 군사전략을 사용하는 전쟁을 의미한다. 총력전이란 군사적 전쟁 뿐만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적 차원까지 총체적으로 전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전쟁은 인간생명 뿐 아니라 자연의 생명까지도 전멸할 수 있는 전쟁이다.


코소보의 전장터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전장터에서, 그리고 이라크 전쟁터에서 무수한 어린이들과 여성들의 통곡과 신음이 들려오지 않는가? 미국이 선포한 테러에 대한 전쟁(War on Terror)은 총력전으로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 테러 전쟁은 새로운 군사주의를 일으켜 인권을 침해하고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파괴한다. 미국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반 테러 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남북이 냉전체제의 유산으로 군사적 대립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죽임과 죽음의 대결이다. 우리는 우리 삼천리 강산에 이 무서운 전쟁의 불씨와 탄약고를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지배를 위하여 군사경쟁과 군비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살상과 희생은 동북아에서도 전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곳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훨씬 더 파괴적이고 잔학한 전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대량의 살상무기를 동원, 배치하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도 군비경쟁, 군사대립을 강화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수백만의 인명과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이 파괴될 것이다.


3. 오늘 지구화과정 또는 세계화과정이 조성한 시장경제질서는 초국적 기업과 같은 거대한 경제 권세 즉 자본이 무한한 생산을 도모하고 있으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하고 작동하고 있다. 이 지구시장은 투기적 금융투자를 통하여 국가경제를 재정위기에 빠트리고 인민을 가난하게 하며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이 지구시장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식량을 상품화하고 의료를 상품화하며 문화를 상품화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생물학적 과학기술을 통하여 생명산업을 일으키고 식량생산 증가를 위한 유전자조작을 감행하고 있으며 유전자조작을 통하여 인간의 의료와 건강을 시장적 서비스로 교화하고 있다. 이것은 지구시장이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왜곡하고 결국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유전자 공학을 통하여 식량을 증산하여 기아문제를 해결하고 의료기술을 발전시켜 인간을 치유한다고 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이윤극대화의 논리에 의하여 좌우된다. 따라서 생명이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산업발전 즉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자원이 무차별적으로 탈취되어 자원의 고갈이라는 상황과 생태계의 훼손과 오염에 도달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농산품생산과정에서 토양은 살충제, 제초제 등에 의하여 오염되었고, 유전자공학적 조작에 의하여 생물학적 오염도 심각한 상황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생명체가 파괴되고 왜곡되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지구시장은 생산과 분배를 고도의 과학기술주의적 체제로 형성하고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도외시 할 뿐 아니라 자연을 객관화, 대상화하여 생태계를 탈취하고 파괴하고 오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구시장이 전개시키는 산업사회는 자연자원을 고갈시키고 있으며,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생명공학으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기술질서는 자연과 생명을 정복한다.


과다소유를 통하여 자본을 극대화하고, 과소비를 조장하는 소비주의를 조장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시장화하여 이윤을 극대화한다. 이런 시장질서는 무한경쟁질서이며 이것은 사회적으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질서를 낳는다.


최근 동북아의 경제권은 지구시장의 자본체제에 의하여 포위되고 침투되고 지배되어 가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세계시장체제에 통합되고 있다. 한반도도 이 지구시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적 경제적 희생을 감당하여 왔다. 북한도 이 소용돌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의 경제적 경쟁은 치열하다. 따라서 그 경제적 희생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동북아시아의 생명의 희생은 단순한 빈곤과 기아 뿐 아니라 자본의 횡포와 빈부격차의 구조와 근원의 권세들에 의한 지배에 의한 것이다.


4.. 지구시장의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심화하고, 가속화하고 치열하게 한다. 이 지구시장에서 계급과 계급의 갈등, 여성과 남성의 갈등, 인종간의 갈등, 국가 간의 경쟁과 이해관계의 갈등 등이 심화되어 국가사회 내외로 심각한 폭력적 사태가 조성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정의가 붕괴되고 사회경제적인 약자, 신체적이고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약자는 그 생명의 억압과 위협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과 모순이 심화되고 사회관계가 폭력화되는 상황에서는 생명의 기본조건인 협동과 공생과 화평이 붕괴된다.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 폭력의 악순환은 우리 교육체제에서는 경쟁적 시장적 교육으로 나타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의 상실과 연속되는 사회적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한국사회에 사회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어 가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5. 생명문화의 파괴는 심각하다. 생명은 문화적, 정신적, 감성적 실체이다. 생명공동체에는 언어가 있고 표현이 있고 배움이 있다. 생명은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고 의사소통하고, 지혜를 축적하고 배운다. 생명은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생명은 슬퍼 울고 신음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생명은 시적이다. 생명은 기계가 아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다. 생명은 단백질이 아니다. 생명은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지구시장은 생명이 가진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감성의 세계를 잠식하고 “식민지화”한다. 시장이 광고나 선전을 통하여 소비주의문화를 주입하고 생명문화의 정체성을 허물고 있다. 생명은 진리의 세계, 가치의 세계, 미의 세계를 가꾸고 있는 데 이를 파괴하고 왜곡하고 흐리게 한다.


우리는 생명의 지혜를 담고 있는 우리민족문화의 정체성과 가치, 우리문화의 맛과 멋, 냄새와 향취를 상실하여 가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의 의식과 감성의 세계는 시장의 선전과 소비문화의 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다. 문화의 창조를 위한 문화적 주체로서의 정신적 예지와 감성적 예민함은 질식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6. 오늘 현대문명과 지구화는 종교적 신앙의 세계를 미신으로, 전 근대적으로, 애매모호한 세계로 치부해버렸다. 생명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차원을 없애 버린 것이다.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를 만들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기성종교들은 위협을 느끼고 근본주의적 경향을 띄우고 각기 종교집단들의 생존을 위하여 권력을 쌓고 기존의 정치세력과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면서 생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전쟁과 분쟁이 종교적 성격을 띄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의 전쟁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분쟁 등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의 양상을 띄기도 한다.


생명은 종교적 신비, 초월적 차원을 가지고 있어 생명의 원동력을 형성하여 주는 데 이를 파괴하여 버리거나 왜곡하여 버리고 있다. 특히 종교신앙이 권력과 금권과 제휴하여 이데올로기가 되면 이는 생명의 근본이 되기보다는 생명을 파괴하는 독이 된다. 우리 한국에서도 세속적 태도가 종교신앙을 경시하는 가하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들이 금권과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고, 종교적 집단이기주의와 배타주의의 올무에 매여있기도 하다.


7. 인간이 그 생명의 파괴로 말미암아 신음할 뿐 아니라 인간은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악역을 담당하여 왔다. 인간중심주의적인 금권과 권력은 우리 지역, 우리 나라, 우리 대륙, 우리 지구, 우리 우주에 있는 많은 살아있는 생명들을 대상화하고 탈취하고 억압하며 파괴하고 있다. 이 생명들이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통곡과 신음이 들리지 않는가? 벌목되는 나무들, 화학비료와 약품에 희생되는 식물들, 인위적인 조작과 통제의 과학실험의 대상이 되는 미생물들, 무차별 살상되는 동물들.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는가? 이 생명들은 인간생명의 친구들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데 인간이 적대시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생명관과 그 내면에 깔려 있고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금권의 탐욕과 권력의 횡포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은 파괴되어 가고 있다. 생명의 많은 종들은 멸망하고 있어 생명의 다양성이 붕괴되고 생명공동체가 파괴되며, 생명들의 내면세포와 유전자까지도 통제되고 조작되고 있다.


우리 남한은 지난 40년 동안 초급속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생명계가 많이 훼손되었다. 이제는 우리 생명의 둥지가 파괴되어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불감증까지 심각한 증세로 나타나고 있다. 새만금개발과 부안핵페기장 문제가 단적으로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의 토양은 이미 화학비료와 농약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의 산업은 생명산업으로 질주한다고 한다. 아직 생명윤리법안도 입법되지 않았고 입법된다고 해도 생명불감증에 걸린 시장과 정치권은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지 못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생명권도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공해산업을 수출하면서 생명권을 훼손하여 왔다. 이제는 중국산업화가 급진전되면서 동북아시아의 생태생명권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동북아시아에 전쟁이 일어나고 핵폭탄이 터질 경우 그것은 동북아 생명의 전멸상황을 가져 올 것이다.


생명과 평화질서의 비전


1. 우리 민족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생명의 동산으로 선물 받았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생명역사 과정에서 많은 생명의 지혜를 축적하여 왔다. 생명의 종교 문화 사상 전통을 일구자. 이 생명의 지혜는 우리 지역공동체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혜가 완전히 잊혀지고 파괴되기 전에 재 발굴하고 가꾸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생명의 비전을 가꾸어가자. 우리는 전통적으로 신선도/서방정토/청학동/輔國安民과 廣濟蒼生/생명의 정원과 같은 생명공동체의 비번을 향유하여 왔다. 이것이 삼천리금수강산을 생명의 동산으로 가꾸어 온 지혜들이다.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지자는 말이다.


우리는 서구의 생명사상과 근대과학과 생명과학을 변혁하고 융합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생명파괴의 근대적 인식론과 시장주의적 횡포를 극복하며 신자유쥬주의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이 풍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기업의 자유 뿐 만아니라 생명의 주체성, 생명의 상생과 공생성의 철학과 사상을 구축하여야 할것이다.


2. 이러한 생명관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생명의 정치경제를 지구시장의 대안으로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의 정치경제는 생명의 주체를 확고히 하는 지역공동체의 사회경제건설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지역의 생명경제는 상생적이며 공생적인 경세제민으로서 모든 생명이 주체로 참여하는 경제이다. 우리 민족사에서도 정약용 선생의 여전제(呂田制)라든지, 두레라든지 하는 민중경제적 지혜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세계적으로 생명경제의 지혜는 풍요롭게 발굴되고 창조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리하여 민이 중심이 되고 지역생명공동체가 주축이 되는 태평성대의 생명경제를 이룩하여야 할 것이다.


3. 오늘 현대국가는 자유주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고 신자유주의의 세계경제질서는 국민의 주권을 약화 내지는 와해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생명권(生命權)을 위한 정치체제를 창출하여야 한다. 인권과, 사회경제권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생명안전권을 포괄하는 생명권정치를 장려하여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주권을 위하여 지구적 생명권 헌장을 제정하고, 헌법에 생명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며 모든 하위의 법과 지방자치의 조례를 생명권에 기초하여 새로 만들고 개정하여야 한다. 이는 세계시장의 금권과 제국의 세력과 정치권력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와 제도를 제어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런 생명권정치는 지역생명공동체에서 출발하고 지역생명공동체에서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참여적이고 연대적인 생명권정치는 지역민주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하고 이것은 국가적 차원, 동북아의 차원으로 연대적 확산과 결합이 필요하다. 생명권을 위한 지역생명공동체간의 연대정치는 모든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는 연대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4. 전쟁은 가장 파격적으로 평화를 파괴하고 생명을 죽인다. 생명운동은 전쟁을 근절하여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군사체제는 생명의 공동안보체제로 전환되어야 하며 모든 군대는 평화군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단순한 군축, 단순한 전쟁근절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더 나아가서 모든 군사 과학기술체제를 해체하여야 한다. 모든 지정학적 사회적 안보 안전체는 국가사회의 안보에서 인간안보, 생명안보체제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상생 공생의 원리에 근거하여 “적대의 논리(Logic of Enmity)를 사랑의 지혜로 교체해야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평화를 만드는 자, 원수를 사랑하는 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제국의 평화(Pax Romana)가 아니다. 미국의 군사적 헤제모니는 지구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사랑과 정의를 기초로 하는 평화가 생명보전의 근원이 되어야한다.


5. 우리는 생명공동체를 위하여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사회정책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계급 간의 사회관계를 정의롭게 하며, 성적 차별을 위한 가부장제의 철폐, 인종과 문화적 차별을 철폐하는 인종, 문화다원주의 등 기존 사회정책운동을 하여 왔다. 이제는 생명의 상생과 공생을 핵심으로 하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사회정책실현운동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생명사회정책도 지역생명공동체가 주체가 되고 이 지역생명공동체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이고 자율적어야 한다. 국기기관이나 국제적 연대는 이 지역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부가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정의는 평화를 지향하고 협동과 선린우애의 생명사랑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평화는 생명의 기본조건이며 정의와 사람을 바탕으로 한다. 평화운동 없이 생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 생명운동은 곧 평화(Shalom:온전한 생명과 삶)운동인 것이다.


사랑이 생명운동의 기반인 것은 생명은 서로 사랑하면서 공생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서 정의를 기둥으로 하면서 평화의 집과 살림살이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6. 생명은 주체다. 생명은 스스로 태어나고 생명은 스스로 자란다. 생명은 스스로 양육하고 스스로 배우고 교육하며 생명은 지역을 고향으로 삼고 정체성을 구축하며 살림살이를 한다. 생명은 둥지와 복음자리를 고향에 둔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운동은 생명의식화, 생명감성화를 위한 문화운동, 문화창조운동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탐욕과 권력으로부터 해방될 뿐아니라 감성의 식민지화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새로운 차원의 문화운동이 요청된다. 생명존중과 생명감성과 생명의 신비를 체득하는 문화적 창조운동이 필요하다. 생명의 주체성을 체득하고 생명의 창조성을 배우며 생명의 고통과 신음에 예민한 감성적 영적 감성을 개발하여야 한다.


7. 생명은 우주적이다. 지역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우주적 공생체이며 인간생명은 모든 생명체와 상생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자연을 개관하는 이원론적인 인식론(Homo Sapiens)을 극복하고 자연을 수단으로만 보는 자연관(Homo Faber)를 극복하고 인간은 자연 안에 있고 자연은 인간 안에 있다는 상생의 도를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생명을 위한 사역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상생의 도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진화론을 극복하고 사회진화론 즉 상생속에서 생명이 진화한다는 새 생명과학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영적인 생명체로 보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나 각 대륙의 원주민들은 우주생명의 영적 차원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살아왔다.


8. 생명과 평화에 대한 신앙과 사상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종교신앙에서 찾게 된다. 우리는 기존 종교의 반생명적 껍데기를 벗기고 생명의 원동력을 회복하고 생명의 지혜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아시아의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원래적으로 생명종교이다. 불교는 탐욕에서 해방되는 생명을, 힌두교는 영원히 순화하는 생명의 원리를, 회회교는 생명의 근원을 정의와 사랑에서, 도교는 생명의 道와 氣에서, 유교는 仁義의 실현인 태평성대에서, 동학은 광제창생의 인내천론에서 그 생명사상과 생명신앙의 기원과 열매를 찾고 있다.


맺는 말


기독교는 하나님을 우주생명 창조주로 믿고 이 생명을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으며 성령을 생명의 원동력으로 믿으면서 생명의 영원함과 풍성함을 추구한다. 기도교신앙은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계약을 맺고 모든 생명들을 생명의 주체로 동역자로 세움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이 생명과 생명의 정원을 가꾸는 생명의 사역자로 세우셨다. 그래서 생명운동은 기독교복음의 핵심이며 그 열매이다. 기독교신앙공동체는 생명운동체이며 교회는 생명목회, 생명디아코니아, 생명선교를 전개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생명종교로서 기독교 자체를 개혁할 뿐 아니라 생명운동의 현장에서 생명운동의 주인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운동과 신앙적 차원에서, 사상적 차원에서, 문화적 차원이서, 정치경제적, 지정학적 차원에서 연대하고 협동하여야 한다. 생명운동은 상생적이고 공생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주의 생명이며 우주의 평화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중과 생명 : oikozoe [oikozoe@kornet.net]

민중과 생명      - 김용복 -

 

韓國生命學硏究院

 

<머리말>

 

민중신학은 성경과 민중학을 연계하면서 민중의 생명을 일으켜세우는 기독적 학문이라고 규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과 생명신학을 연계하려고 한다. 동시에 민중신학을 민중학과 연계하듯이 생명신학을 생명학과 연계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민중신학과 생명신학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일은 약간의 진척을 있었지만[1]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민중학과 생명학의 연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민중과 생명을 연계하여야 하는 가? 지금까지 민중신학은 생명의 문제가 민중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민중신학이 민중의 사회전기 또는 민중의 사회경제적 차원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민중의 생명과 민중의 공생성(Conviviality)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생태학이나 생명공학이 민중의 문제를 초점으로 다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생태학적 문제나 생명공학의 문제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민중신학은 생태학과 생명공학의 문제에 대하여 유기적인 접근을 시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과 생명의 유기적인 연계성을 신학적으로 논하고 이를 민중학적, 생명학적 차원에서 총체적인 접근을 제시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은 역사뿐 만 아니라 우주(거시/미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민중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한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명제이다. 민중은 사회적 역사적 실체일 뿐 아니라 생명적 우주적 실체이다. 생명이 우주적 실체라면 민중은 곧 생명이고 생명의 핵심적 실체이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과 생명을 공히 그리고 연계적으로 논하기 위하여 시공(지정학)의 개념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것은 宇宙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근대적인 문리학의 개념만이 아니다. 이 개념은 집 즉 생명의 거처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희랍어로는 OIKOS를 말한다. 1) 이 집은 코스모스(Universe)를 의미한다. 이 집은 천지삼라만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2) 이 집은 또한 지구라는 지정학적 거처를 말한다. 지구위의 모든 생물이 거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는 이 집을 天下라고 불렀다.  3) 그리고 그다음의 집의 형태는 민족적 차원의 정치경제이다. 4) 이 집의 기초로서 지역마을의 거처를 들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 생명공동체의 기반으로서 가족공동체의 공간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5) 생명개체의 창원에서 말한다면 몸이 곧 집일 것이다. 생명은 이런 다차원의 집에서 起居(Dwell)한다.

 

위의 지정학적 구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않고 서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위 지정학적 구도의 우주적 지평과 지구적 지평, 사회경제적 지평과 지역적 지평은 서로 융합되여 있다. 생명은 바로 이 지정학적 융합 속에 존재하고 그 織組 속에서 산다. 생명은 몸이라는 집, 가정이라는 집, 지역공동체외 민족공동체라는 집, 지구와 우주라는 집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구도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조합된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의 문명에서는 太極의 우주론이 지정학적 구도를 결정하였고 그리스문명에서는 희랍철학이 그 지정학적 구도를 결정하였다. 시대적으로는 농경사회에서는 지역적 자연의 지정학이 지배적이었고 산업사회에서는 현대과학적 지정학이 지배적이었으며 오늘은 <가상세계Virtual World>의 지정학이 지배적일 전망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지구화의 과정이 전개되어 그 정점에 달하고 있다. 우리는 민중과 생명문제를 취급할 때 이런 지정학적인 조합과 구도를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성경적으로 민중과 생명을 연계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지정학과 민중-생명.

 

민중은 땅의 사람들이다. 민중은 땅을 일구어 생명의 정원을 가꾼다. 성경의 창조론은 민중론이다. 창조론은 창세기, 시편, 이사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등에서 확연히 들어 나지만 성경전체를 통하여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선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는 <노동하는 인간> 즉 땅을 가꾸는 인간의 창조가 그 절정을 이루고 있음과 동시에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인간생명을 창조하는 가정을 이루고 생명의 정원을 이루어 가꾸어 나가고 경영하는 것이 창조이야기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창조론의 지정학적 배경은 우주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바벨론 제국과 같은 제국적 궤도를 의미한다. 이를 테면 창세기의 창조론은 바벨론 제국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바벨론 제국은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는 <흑암과 혼돈>세력으로 표상되어 있다. 동시에 인간이 노동의 고역을 하게 된 근원적 요인은 인간이 이세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민중과 생명은 바벨론 제국이라는 공동의 지정학적 위치에 공히 처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제국 아래에서 민중의 생명과 삶은 생명의 지정학적 정치경제(OIKONOMIA)에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을 가질 수 있다. 민중은 생명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으며 생명은 민중적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으로 민중을 통하여 생명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명>이 생명에 대한 이해의 근원적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문제를 민중의 생명과 삶을 떠나서 취급한다고 했을 때 생명의 정치경제적 성격을 다룰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바벨론제국의 지배에서 민중을 탈출시키는 출애급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요 동시에 생명을 파괴하는 <흑암과 혼돈의 질서>를 극복하고 <생명의 정원>으로서의 창조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다. 민중의 해방과 생명의 보전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중심에 공히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 그럼으로 생명은 민중적이고 민중은 생명적이다. 민중적 시각 없이 생명은 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생명의 지평을 떠나서 민중[2]을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계약(Covenant with All Living Things)을 맺으셨다[3] 이 계약은 홍수로 인한 재해에 의하여 생명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루어 졌다. 말하자면 치수문명과 연관되어서 이루어 진 계약관계이다. 노아의 홍수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이는 인위적인 요인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표현하여 준다.  홍수를 다스리기 위하여 인간은 바벨탐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적 문명(Despotic Civilization)을 일으켰다. 우선은 홍수를 제압하려는 토목기술을 발전시켰고 민중을 수단화하고 억압하는 노예제도를 만들었으며 신격화된 절대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한 전체주의 체제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홍수에 대비한 인간의 잔존이 명분이었다. 우리는 이것은 잔존 이데올로기(Survival Ideology)라고 부르겠다. 인간의 잔존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이든지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잔존을 위하여 생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치수문명에서의 자연정복의 모티브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의 신은 민중의 이름으로 그 전제체제를 비판하고 생명을 정의(Covenant)의 법 아래에서 영원히 보전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생명과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계약과 이 계약을 토대로 한 하나님의 생명의 지정학(Geo-politics of Life)은 바벨탑의 지정학과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잔존이데올로기가 민중을 억압하는 체제로 전개됨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계약은 민중해방의 계약임을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지정학은 생명과 민중을 공히 축복하고 해방하는 지평인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출애급의 지정학에서도 여실히 들어 난다. 출애급기의 계약법은 안식년의 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곧 안식일의 계명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도 생명의 창조 즉 생명의 지정학과 노예의 해방 즉 민중의 해방은 밀접히 연관된다.[4] 이 출애급의 지정학에서 우리는 출애급의 재앙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히브리노예를 억압하는 대가로서 갖가지 생명파괴의 재앙이 도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재앙은생명의 질서 창조의질서를 파괴하는 질서 이다. 결국 에집트문명의 지정학은 피라 밑으로 대표되는 치수를 위한 토목기슬을 발전시키고 방대한 노예제도를 이룩하며 바로(Pharaoh)체제라는 절대전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생명지정학은 출애급사건으로 전개되는 데 이는 사회적 안식뿐 아니라 생명의 안식으로 연결된다.

 

희년의 지정학

레위기 25: 땅의 안식

샤론의 지정학: 이사야 11장과 60

메시아의 지정학

결론: 카이로스의 지정학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나님의 무소부재

 

2. 민중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민중과 성령의 결합은 민중과 생명의 결합이다.

민중을 위한 말씀(/정의)은 창조의 법이다.

3. 민중의 주체성과 생명의 주체성은 공히 이해된다.

모든 생물의 공생 (conviviality)적 주체의 차원안에 민중공동체적 차원 (동활체=Koinonia)이 연계통합되어 있다. 생명의 주체성은 민중의 주체성의 연속이다.

만물(생명)의 신음과 민중의 신음은 공히 죽임의 세력 때문이다.

공생의 도와 적자생존의 역리가 공존/모순관계에 있다. 이것은 생명계 전체에 공존과 잔존의 질서가 삼투되어 있음을 한다.

4. 우주적 메시아는 민중의 메시아이며 동시에 민중의 메시아이다.

4.1. 창조의 이야기와 신천신지의 이야기의 지정학적 동시성을 논한다. 이 지정학은 생명의 동산과 새 생명의 동산을 위치한다.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과 22.

4.2. 도교/유교적 동양적 우주관과 힌두교적 우주관은 생명의 우주적 유기성을 주창하고 있다.

 

5. 민중의 개념의 총합성은 생명의 총합성과 같다.

 

0. 지정학 민중과 생명체는 처참하다: 히로시마원자탄의 예

1.정치경제: 잔존의 질서/ 산업화와 시장화

2.식품계 : 기아/식품오염

3.의료계 :의료의 시장화/유전자 공학상품

4.사회계: 초국적 기업체의 신 다윈주의/무한경쟁적 적자생존론

5. 정치계: 지구제국주의억압

6.문화계 : 문화의 상품화와 정체성의 위기, 가치관의 와해, 미적 감성의 혼선과 피폐

7.종교계 : 종교적 근본주의:달릿의 메타포어

8.생태계 : 생태계의 파괴와 공해

 

 

6. 생명의 축제 (요한계시록21장 처음)

 

생명의 영이 가득찬다.

생명의 빛은 죽음의 그림자를 거둔다. 이것이 생명의 지정학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삶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

생명의 꽃이 핀다.

생명은 우주의 샬롬 위에 번성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참여한다.

생명의 정치경제는 정의롭고 풍요롭다.

생명의 축제는 삼라만상이 참여한다.

----------------------------------------------------------------------------

 

[1] 서남동등 여러 민중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취급하였다. 해방신학에서도 생태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Eco-feminism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신학들이나 신학자들 학자들은 억압을 극복하는 문제와 생명문제를 연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2] 여기서 우리는 한국말로 생명과 삶이 구분되어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생명은 삶을 사는 실체임으로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영어로 LIFE는 양자를 공히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과 삶을 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창세기 9 11-12.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계약

 

[4] 출애급기 21 1-11, 20 11절의 안식년의 법과 안식일의 법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