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03/16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3/16
    찜찜한 자유(?)...(9)
    곰탱이
  2. 2007/03/16
    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4.
    곰탱이
  3. 2007/03/16
    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3.
    곰탱이

찜찜한 자유(?)...

내일이면 우리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에서 독립한다.

이번 주에 방을 알아보고 그제 계약을 했다.

그리고 독립하겠다고 우리 어머님께 말씀 드린 것은 오늘 아침에서였다.

그런데 어머님의 반응이 의외로 담담하시더라.

내 예상대로라면 <왜 편한 집을 놔두고 나가서 사서 고생하려 하느냐!>,

<월세면 그 월세가 얼마나 아까운지 아느냐!>, <남의 집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너처럼 게으른 녀석이 집 나가면 몸이나 망치지 않겠느냐!> 등등 시시콜콜하게

뭐라 말씀하셨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냐, 좀 있다 나가면 돈 마련해서 전세라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이 말씀이 전부였다.

그러시곤 돌아누우셔서 짐짓 잠을 청하시는 듯하시는 거다.

많이 서운하셨던 것 가타는 생각이 들더라.

평생 도움 안 되는 남편, 자식 새끼 뼈빠지게 뒷바라지했더니

그렇게 지 갈길 가겠다고 하니...

이젠 혼자구나라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닌지...

학교 오면서 마음이 참 아프고 안 좋았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께서 내가 태어날 때쯤 나셨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 어머니 나이(68세)쯤 되신 어떤 어머니라도 마찬가지일 게다.)  

우리 어머니 젊으셨을 때(처녀였을 때) 인근 동네에서 소문난 글쟁이였단다.

동네 여인들의 제문은 어머니께서 도맡아 쓰셨다고 한다.

그 제문이 하도 구구절절하여 그 제문을 읽으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처녀 때 쓰신 제문 우리 큰 외숙모님께서 아직도 가지고 계시면서 울적할 때 커내서 읽어보신단다.

하긴 얼마 전에 핸폰 문자 보내는 법 가르쳐 주었더랬다.

그 이후에 가끔씩 문자를 보내시는데, 그 내용이 참 내 마음을 울렸더랬다.

 

<아들아오늘은어찌지냈느냐밤이깊어지니니가보고싶구나일찍왔으면좋겠구나엄마가>

 

뭐 이런 내용들이었다(물론 철자법도 틀린 글이긴 했지만 말이다).

언젠가 어머니께 살아오신 내용을 글로 쓰실 생각이 없으시냐고 여쭤 봤더니

그냥 웃으시기만 하더라.

 

<이 나이 들어서 글은 무신...>

 

참 쓸쓸한 웃음이었더랬다.

그때 공책, 펜 사 드리고 글을 쓰도록 하셨으면 살아오시면서 쌓인 한이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많이 들기도 한다.

오늘 드어가서 다시 권유해 보아야겠다.

(만일 글을 쓰시면 어머님께 동의를 구해서 블로그에 올려볼까나^^...)

 

 이렇게 우리 어머니가 보인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집을 나오려 하니 참 착잡하다.

이제 조금씩 서로 간에 물길이 트려고 할 때...

 

우리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한 건 전적으로 내 여친 때문이다.

내 여친께 참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다.

여친이 맛있는 거 사 줄 때 꼬옥 어머니가 생각나고,

그래서 안 먹고 어머님 갖다 드리곤 했는데...

이젠 가져다 드리기 쉽지 않게 됐다.

이젠 집에 별로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집을 나오는 거니까...

 

하여간 한켠 마음이 먹먹하고 아프고 답답하다.

 

오늘 집에 들어갈 때 우리 어머니 좋아하시는 초밥 사 가지고 들어가야겠다.

 

자꾸 눈물 나려 한다.

 

살면서 울 엄니께 많이도 참 못되게 굴었다.  

 

후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4.

 

물론 이미 추상 노동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한 모순적인 것의 양립(추상노동과 구체노동-옮긴이)이 발견된다.(주2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 제1판에서 맑스는 여전히 가능한 한 추상노동을 단순하고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노동과 동일시한다.(주26-)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가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지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Ⅱ.2/109; 13/17) 게다가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노동들 그 자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를 띠는 단순한 노동, 요컨대 질적으로 동일하며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추상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추상이다.(……) 보편적 인간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평균노동 속에 존재하며 인간 근육, 신경, 두뇌 등의 특정한 생산적 지출이다.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적응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순한 노동이다…… 이 단순한 노동은 사람들이 모든 통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한 한 모든 노동을 형성한다.”(Ⅱ.2/110; 13/18)


맑스는 여기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추상들을 서로 동일시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좀더 기계화된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추상으로서 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추상, 특수한 성질을 지닌 노동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대체, 따라서 특정한 한 종류의 노동지출과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 노동”, 즉 특정한 종류의 노동지출이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노동.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결코 추상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실체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본』 제1판에서도,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도 동시에 단순한 평균노동으로 측정된다(Ⅱ.5/19f). “추상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고찰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Ⅱ.5/31). 그러고 나서 우선 제2판에서 단순노동과 추상노동이 엄밀하게 구분되었고 처음부터 가치실체로서의 추상 노동으로 시작하였다.(주27-) 물론 두 개의 첫 소절에서 추상 노동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주의적인” 것을 많이 연상하게 한다. 생산적 활동의 특정한 성격이 추상되고 난 후에 그 추상 안에 오로지 생산적 활동이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지출”(Ⅱ.5/24; 23/58)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후에, 맑스는 (제1판과 대비되어 새롭게 파악된)두 번째 소절의 끝에서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또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속성 안에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Ⅱ.6/79; 23/61)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치 “추상 노동”이 노동의 자연적 속성에 해당하고, 노동의 가장 보편적인 생리학적 규정들, 즉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품 생산에서만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규정들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추상성이 결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속성이라는 사실, 즉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질적인) 상이함에 대한 추상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자본』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주29-) 

이러한 것은 나에게 물론 하나의 정식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맑스는 자신의 담론을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으로 자신의 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서 맑스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주30-) 여기에서 우선 고전 정치경제학이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를 구별했지만 상품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추상 노동의 생리학적 파악은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 없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수행되지 못한 구별이 보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구별을 통하여서는 노동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주31-) 추상 노동이 사실상 노동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규정으로 파악될 때에 비로소 고전 정치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3.

 

추상 노동


맑스는 상품교환 분석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으로 나아간다:


“비로소 상품 교환 속에서 노동생산물은 그 생산물의 감각적이고 다양한 사용대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동등한 가치대상성을 가지게 된다. (……) 이러한 순간에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은 사실상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적 노동은 한편으로 특정한 유용 노동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총노동의 지절로서, 즉 사회적인 노동 분업의 자연적인 시스템의 지절로서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특수하고 유용한 사적 노동이 각각의 다른 유용한 방식의 사적 노동과 교환될 수 있고 따라서 그 노동들이 동등해지는 한에서, 사적 노동은 바로 그 사적 노동의 생산자의 다양한 욕구만을 충족시킨다.” (Ⅱ.6/104; 23/87, Herv. v. mir)


노동이 분업화된 모든 사회에서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개인의 노동은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부분이며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서 이러한 사회적 성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개별적인 사적 노동이 다른 사적 노동과 동등한 것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사적 노동은 서로가 동등하게 상품 생산에 대해 더 넓어진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따라서 상품생산에 대해서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사실이 통용된다;


“서로 독립적인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인간 노동이라는 동등성 속에 있으며 또한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Ⅱ.6/105; 23/88, Herv. v. mir)


맑스가 첫 번째 인용문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gleiche Geltung)이 무엇으로 실현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이 사적 노동을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좀더 확대된 물음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이러한 동등성이 모든 사적 노동을 서로 동등하게 하면서도 독립적으로 만들지만 그 사적 노동들에 귀속해 있는 하나의 속성에 기인하는가 또는 사적 노동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 문제인가? 가치 분석과 상품의 물신적 특성에 관한 절의 문맥 속에서 맑스는 명백하게 두 가지 가능한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 교환에서 사적 노동들의 동등성은 결코 개별적인 사적 노동들에 곧바로 귀속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다른 사적 노동들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다. 또한 자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 동등성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사람들은 추상적 노동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날카롭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전체 하늘 아래서의 모든(toto coelo) 서로 다른 노동의 동등성은 그 노동들의 현실적인 비동등성(Ungleichheit)을 추상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노동들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서,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Ⅱ.6/104; 23/87f)


이런 한에서 추상적인 노동은 교환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규정이 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보충판……(Ergänzungen……)에서 맑스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글을 다음에 나오는(Ⅱ.7/55와 비교해 보면, 역시 프랑스 번역판에도 포함되어 있는) 글을 부가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교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서로 다른 구체적인 사적 노동을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물로 환원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노동의 생산물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교환을 통해서만 완수된다.” (Ⅱ.6/41)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추상”이 교환 행위자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하다 :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행할 뿐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지적인 추상과정이 문제가 아니다; 추상은 오히려 교환 행위자들의 교환행위를 통해서 수행된다.(주24-)         

맑스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교역의 관점(그리고 추상의 공정)에 기초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서도 답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적 장과 결별하게 된다. 따라서 맑스는 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한에서, 고전경제학 어디에서도 만들지 못한 노동 내에서의 차이가 “정치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Ⅱ.5/22; 23/56)이라는 사실을 정당하게 주장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