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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은 이렇게 해라 2009/06/15
  2. 이주노동자영화제 기금마련을 위한 강산에 후원 공연 2009/06/13
  3. 나의 사랑, 나의 한국 2009/05/29
  4. 용감한 자살 2009/05/25
  5. 노전대통령과 나 (1) 2009/05/23
말은 이렇게 해라


 말은 이렇게 해라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말을 하는데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평생 5백만 마디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원석도 갈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듯 말도 갈고 닦고 다듬으면 보석처럼 빛나는 예술이 된다.

 

 

 

01.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라.

그 곳에서는 히트곡이 여기서는 소음이 된다.


02.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말에도 온도가 있으니 썰렁한 말 대신 화끈 한 말을 써라.


03.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열 올리지 말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라.


04.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지 말라.

체로 거르듯 곱게 말해도 불량률 은 생기게 마련이다.


05. 상대방을 보며 말하라.

눈이 맞아야 마음도 맞게 된다.


06. 풍부한 예화를 들어가며 말하라.

예화는 말의 맛을 내는 훌륭한 천연 조미료이다.


07. 한 번 한 말을 두 번 다시 하지를 말라.

듣는 사람을 지겹게 하려면 그렇게 하라.


08. 일관성 있게 말하라.

믿음을 잃으면 진실도 거짓이 되어 버린 다.


09. 말을 독점 말고 상대방에게도 기회를 주어라.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류다.


10.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라.

말을 자꾸 가로채면 돈 빼앗긴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11.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대방의 의견도 옳다고 받아들여라.


12.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죽는 소리를 하면 천하장사도 살아남지 못한다.


13. 상대방이 말할 때는 열심히 경청하라.

지방방송은 자신의 무식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14. 불평불만을 입에서 꺼내지 말라.

불평불만은 불운의 동업자다.


15. 재판관이 아니라면 시시비비를 가리려 말라.

옳고 그름은 시간이 판결한다.

 

16.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표정으로도 말을 하라.


17. 조리 있게 말하라.

전개가 잘못되면 동쪽이 서쪽 된다.


18. 결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감싸주는 것이 덕망 있는 사람의 태도다.


19. 편집하며 말하라.

분위기에 맞게 넣고 빼면 차원 높은 예술이 된다.


20. 미운 사람에게는 각별히 대하여라.

각별하게 대해주면 적군도 아군이 된다.

 

 

21.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 자신의 가슴에 명중된다.


22. 재미있게 말하라.

사람들이 돈 내고 극장가는 것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23. 누구에게나 선한 말로 기분 좋게 해주어라.

그래야 좋은 기의 파장이 주위를 둘러싼다.


24.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

듣고 싶어 하는 얘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25. 말에도 맛이 있다.

입맛 떨어지는 말을 하지 말고 감칠 맛 나는 말을 하라.


26.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말하라.

속으로 웅얼거리면 염불하는지 욕 하는지 남들은 모른다.


27.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말라.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


28.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라.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면 올바른 말이 나오게 된다.


29. 부정적인 말은 하지도 듣지도 전하지도 말라.

부정적인 말은 부정 타는 말이다.


30.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열 번 이라도 물어라.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니다 .  

 

 

 

 

31. 밝은 음색을 만들어 말하라.

듣기 좋은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32. 상대방을 높여서 말하라.

말의 예절은 몸으로 하는 예절보다 윗자리에 있다.


33. 칭찬 감사 사랑의 말을 많이 사용하라.

그렇게 하면 사람이 따른다.


34. 공통 화제를 선택하라.

화제가 잘못되면 남의 다리를 긁는 셈이 된다.


35.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라.


36. 대상에 맞는 말을 하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좋아 하는 말도 다르게 마련이다.


37.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말에는 지우개가 없으니 조심해서 말하라.


39. 품위 있는 말을 사용하라.

자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낸다.


40. 자만 교만 거만은 적을 만드는 언어다.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말하라.  

 

 

41.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말라.

그것은 임종할 때 쓰는 말이다.


42. 표정을 지으며 온 몸으로 말하라.

드라마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43. 활기 있게 말하라.

생동감은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원동력이다.


44. 솔직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하라.

그것이 승리자의 길이다.


45.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라.


46. 실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변명이 나쁘다.

실언을 했을 때는 곧바로 사과하라.


47. 말에는 메아리의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말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다.


48. 말이 씨가 된다.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


49. 말하는 방법을 전문가에게 배워라.

스스로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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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00:36 2009/06/1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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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영화제 기금마련을 위한 강산에 후원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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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3 01:07 2009/06/13 01:07

나의 사랑, 나의 한국

-스톱크랙다운밴드를 통해 본 이주노동자 이야기


최지수(서울,취재2기)


스톱크랙다운 밴드를 아십니까?


 4 월 26일. 자그마한 호프 집 ‘슘’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비가 쏟아지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모인 이들은 서로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이들은 모두 MWTV에서 주최한 이주 노동자 후원의 밤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피부색, 말투는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가족을 만난 것처럼 얼싸안거나 환한 얼굴로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마다 고단한 일주일을 마감하는 토요일임에도 모인 사람들은 지친 기색 없이 즐겁기만 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 밴드입니다.”

 유 창한 한국말의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 시간 술과 음식으로 회포를 풀던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영 의사를 밝혔다.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기대는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울렸다. 지금껏 자리를 지키던 이들은 모두 기립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진정 흥을 낼 수 있는 무대가 펼쳐졌다. 절박한 이들을 음악으로 보듬은 건 스톱크랙다운밴드의 몫이자 역할이었다. 노래가 시작 되었다. 그것은 네팔 어도, 영어도 아닌 한국어로 된 노래였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국의 언어가 들리지 않아도 스톱크랙다운밴드면 모두가 즐거운듯 했다. 좁은 공간은 금세 열기로 가득 찼고, 이주노동자의 밤은 지금까지의 서러움을 알기라도 하는 듯 화려한 시간으로 물들었다. 오직 열정 뿐 인 밤이었다.

 <이주노동자의 밤>

 

  스 톱크랙다운밴드는 각각 네팔, 미얀마, 인도네시아, 한국 출신의 기타, 보컬, 드럼, 베이스, 키보드로 이루어진 다국적 이주노동자밴드다. 최초 이주노동자 밴드였던 유레카 밴드의 소모뚜와 강라이와 미누의 미누가 합쳐 만든 밴드로서 꾸준한 앨범발표와 공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언더 뿐 아니라 메이저에서도 음악성을 인정받아 행사와 콘서트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입니다.”

 무대에 있을 때만큼은 노동의 고통도 힘겨움도 잠시 잊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그들, 유명세만큼이나 다양한 사건들도 많았지만 그 전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이기에 음악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자꾸만 무대가 줄어들어요. 현실적 어려움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설 곳이 점점 없어지고 당연히 저희도 한가해지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공장 사장님들이 단체 활동 싫어한다고 많이  탈퇴 하더라구요.“

 스 톱크랙다운밴드에서 기타를 맡고 있는 소모뚜가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리 권리와 인권이 있어도 결국 남의 집 살이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누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는 음악가이기 전에 작은 소화기 공장의 노동자였고, 체류자였기에 진실을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꾸준히 활동 중인 스톱크랙다운밴드>

 

 4 월 27일, 종각역 앞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인정 관련으로 최저 임금법 통과 농성회가 열렸다. 누구보다 3D업종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은 각종 위험과 재난에 노출 된 상태에서도 최저 임금법에 훨씬 못 미치는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단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처사들이 타당하게 이루어졌다. 누구보다 세계화에 발맞추자는 우리로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좀 지나면 더 좋아 지겠죠.”

 소모뚜는 기타를 챙겨 쓸쓸히 연습실을 나섰다. 이제 가리봉에 자리 잡은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내일 8시까지 출근하려면 괜히 마음이 바빴다. 한국의 삶이 나아지리란 기대, 일말의 희망도 빡빡한 시간 안에서 꿈꾸기엔 벅찼다.

 이주 14년 째, 한국은 여전히 냉담했지만 소모뚜는 정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지켜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갈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최저 임금법 농성회, 종각역에 모인 이주 노동자들>

소모뚜의 일상

 아 침 7시, 소모뚜의 하루는 바쁘게 시작 된다. 집 근처에 있는 공장까지 8시 안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동안 미뤄 두었던 작업 때문에 늦게 끝나는 날이었다. 월 11만원,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던 소모뚜는 한쪽 구석으로 이불을 걷어 놓고 두 세 벌 안되는 옷을 뒤적였다. 어떤 식이든 절약해야 생활 유지가 가능하다던 그의 월급은 딱 최저 임금 수준.

 “이번 공장에서 일한지는 4년째예요. 여기 사장님이 좋아서 무리한 잔업은 잘 안 시키죠. 지난번 8년 일한 공장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매일 피곤했어요.”

  오래 일할 수 있는 비결을 묻는 말에 조금의 차별을 감수 하면 된다고 덧붙였지만, 그의 표정은 짐짓 밝았다. 잦은 상처에 마음조차 굳은살이 되어 단단해져 버린 것일까? 소모뚜는 그래도 일 할 공간이 있어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힘찬 하루를 시작하는 출발을 알렸다.  

<출근 중인 소모뚜, 공장 들어 가기 전>

  가산 디지털 단지 내 자리한 스탠다드 엔지니어링, 소모뚜는 이 곳에서 소화기 압력계 제조하는 일을 한다.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 없어 수월하게 일 하게 된 공장, 꽤 오랫동안 식구로 있어서인지 처음에 편견을 가지던 공장 사람들도 이제는 동생처럼 대해 준단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소 모뚜의 비자는 망명, 체류는 합법이지만 노동은 불법이었다. 그의 나라가 안정 될 때까지 한국에서 신분을 보호 해주겠다는 망명 각서는 그에게 있어서 선악과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인데, 그것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해 모순적 문제점을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일 하지 않으면 밥 먹고 살 수 없는데 한국 법은 좀 이상하죠?”

 애 매하게 웃던 그의 얼굴은 곧 굳어버렸다. 웃으면서 말하기에 자신의 처지는 한국의 법만큼이나 모순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체류 허가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소모뚜의 고향, 즉 미얀마가 안정 될 때까지 무기한의 체류를 허가 한다는, 그렇지만 체류 기간 내 노동은 허가 외  항목이었기에 그의 처지 또한 안전한 건 아니었다. 소모뚜의 억지웃음은 그만큼 힘겨운 사항을 대변하는 듯 우울했다. 그래서 그런지 불법 체류자 단속이 올 때면 간이 콩알만 해 지는 건 둘째 치더라도 공장 사장님부터 걱정이라는 것이다.

 “제가 목 잡혀서 끌려가는 건 상관없는데 사장님한테 많이 미안하죠. 괜히 일 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떼 쓴 건 저니까요.”

 그는 결국 씁쓸한 얼굴로 공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저녁처럼 홀연한 발걸음 뒤로는 어두운 삶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일 을 하다 보면 어느 새 하루가 다 간다. 완연히 땅거미가 지고서야 소모뚜는 집으로 돌아온다. 대문도 없는 현관문에 달랑 하나 걸려 있는 자물쇠를 풀고 나면 좁고 어두운 그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3평 남짓한 월 11만원 짜리 방, 부엌도 욕실도 없지만 그래도 집이 최고라는 소모뚜는 대충 세수를 마친 뒤 컴퓨터 앞에 앉기 바빴다. 그동안 미뤄 온 작곡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음악을 대 할 때면 번쩍 정신이 든다던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소모뚜는 다른 때보다 열심히 몰두 했다.

 <소모뚜의 집>

 

 

하 루 중 자는 시간이 제일 좋다던 소모뚜의 이불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바닥에 깔렸다. 비닐로 막아 둔 창문 너머 희끄무레하게 달이 걸리고 나서야 그는 노곤한 몸을 이불 속에 누였다. 정신 없이란 표현이 딱 어울렸다. 소모뚜는 피곤에 절인 파김치처럼 잠든다. 불규칙하게 내 쉬는 숨은 집, 공장, 일, 공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구성 된 그의 일상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살아가기   

 

 “채불 임금과 산업 재해에 관해 실질적으로 일 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은 보상 받기가 힘듭니다. 바꾸자는 목소리는 커져 가는데 정작 바뀌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소 모뚜는 현 이주노동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에 대해 이 두 가지를 꼽았다. 실로 이주노동자 단체 모임에 가면 사고를 당한 이들이 꽤 많고, 그들은 무지하고 순박해 보상은  커녕 당연히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줄 안다고 했다. 옆에서 지켜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국은 선진국인데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오겠다고 택한 이유도 같은 아시아권이라서가 아니라 잘 사는 나라라는 느낌이 강해서 인데, 이 나라 사람이 아니면 소용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더 불어 그는 불법 체류자 단속 중 끌려가지 않게 위해 옥상에서 뛰어 내린다거나 차도로 뛰어들어 사고가 나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사상자들을 보면 자신도 고국으로 돌아가 버릴까 고민하기도 한다고. 동료의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 하고도 남아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잘 살고 싶다는 굳은 심지만 아니라면 벌써 몇 번이고 숨 가빴을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채 불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은 몇 달이고 밀리기 일쑤, 그러나 일부 업주들은 미안한 기색하나 없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두, 세달 치 월급을 받지 못하고 해고당하는 경우도 허다한 건 한국인들이 모르는 그들의 일상적 현실이었다. 소모뚜는 막 한국에 들어 왔을 10여년 전,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는 듯 굳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에 정 들었어요.”


  비 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그를 다시 만났다. 다른 때보다 들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내일 있을 공연 때문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며, 연습 때문에 휴가 허락 까지 받았다는 것. 오랜만의 주말 휴가라 그런지 소모뚜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날씨만 아니라면 팔짝팔짝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이는 그에게 행복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나라 같은데, 한국은 내가 자기 나라 사람 같지 않나 봐요. 나는 정말 한국이 좋은데…”

 말 끝을 흐리는 그에게 아니라는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구름처럼 흐릿한 미소도 잠시, 그는 빠르게 지하철에 올랐다. 목적지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 여성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행진 행사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서는 무대로 더욱 흥분된다는 그는 도착하자마자 멤버들과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거의 2~3주 만에 얼굴을 본다던 멤버들은 반가운 기색을 숨길 수 없을 만큼 역력했다. 열광적인 무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스톱크랙다운밴드, 그리고 소모뚜. 보기만 해도 끈끈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준비 됐습니까!”

 보 컬 담당 미누가 목소리를 높이자 주변은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운동에 앞서 공연을 즐기려던 참가자들은 앞 다투어 대답하며 스톱크랙다운밴드의 무대를 환호했다. 타이틀 월급날과 박노해 시인의 시를 가사로 쓴 손무덤, 2곡을 부른 그들의 무대는 대낮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공연 중인 스톱크랙다운밴드>

 

 

 소 모뚜는 무대 소감을 묻는 말에 막무가내로 좋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활짝 웃는 모습에서 이주노동자로서 힘겨운 삶을 영위해가는 단면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직 관객을 위해서 노래하고 기타를 친다던 그는 한국에서 한국 사람을 위해 노래하는 음악인일 뿐이었다.

 5 시, 공연을 마친 그는 멤버들과 아쉬운 인사를 하고 쓸쓸히 전철에 올랐다. 가산디지털단지 까지 저녁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즐거운 주말이 끝나가는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그의 어깨는 유난히 무겁고 쓸쓸해 보였다. 내일이면 다시 이주노동자의 하루를 시작해야 하기에 더욱 그런 지도 몰랐다.

 “ 하루 빨리 저희도 살기 좋아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정부도 점차 변하고 있어요. 변하는 김에 더욱 빨리 변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아시아 화합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사업이나 국립전당사업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정부가 아시아에 두는 관심의 첫 걸음 같은 거요. 훌륭하게 완성 돼서 저희 스톱크랙다운밴드도 무대에 설 수 있길 바랍니다.”

 소 망을 묻는 말에 소모뚜는 그다운 소박함이 묻어나는 대답을 했다. 그의 바람대로 한국 정부도 이주노동자 인권에 점차 귀 기울이고, 교류 사업 확대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스톱크랙다운밴드의 무대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소모뚜의 얼굴에 진정한 웃음이 번지는 날이 머지 않았으면하고 희망하면서 말이다. <취재 기간 4월 22일부터 5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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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1:26 2009/05/29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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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끌어가는 수레에 한 사업가와 노예가 함께 타며 밀림을 건어  이동 하고 있다.
그 때 수 많은 여우들이 나타나 그들을 물어 먹으러 힘껏 따라 온다.

말에게 최고의 속도로  뛰게 하면 살아 남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인과 노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인간이라는 먹이를 놓치지않으러고
있는 힘을 다 써서 뒤 따라오고 있는 여우들...

밀림에는 살고자 하는 사람들과 먹이를위해 노력하는 여우들의 모습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성장 하러 하는 새싹들의 꿈을 깨지게 하고 있다.

이 때 노예가 갑자기 달리고 있는 수레에서 뒤 따라 오고있는
여우들 사이로 뛰어 내렸다.

여우들이 자기를 뜯어 먹고 있는 시간에 자신의 주인이 더 멀리 도망갈 수 있게
아니면
주인에게 최고의 선물로 자기의 삶을 희생 해주는 뜻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않다.
진정한 영웅은 남을위해 희생을 하는 것에 느리지않다.
진정한 영웅은 세상을 위해 용감한 자살을 해도 후회 하지않다.

이런 영웅은 살아 있지않아도 수 많은 사람들의 심장에
그의 모습이
영원히 새겨져 있다.
영원히 지워지지않는다.

한 인생에
탄생이란 책의 첫 페이지 이며
죽음은  막지막 페이지 뿐이라 그리 대단하지않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그책 속의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책을 어떤 내용으로 채워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그 길을 따라 갈건가요?

영웅으로?
아닌 무엇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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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5 00:53 2009/05/25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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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문자가 들어와서 보더니 노무현전 대통령이 사망하셨다고 하네..
너무 놀랬고 그것도 자살인지 아닌지 아무도 아직 모른다고 하고...
누구든 이렇게 세상을 떠나든 어떻게 해서 떠나든 정말 안되는 일이다.

나는 지난 2003년 여름때 청와대로 가본 적있고 노전대통령도 만나적있었다.
그때 MBC방송 느낌표 프로그램에 "국민이 가장 만나고 싶은사람" 조사에 1위가
노전대통령이기 때문에 느낌표 전체 참여자 모두가 대통령 만나러 청와대로 가는 것이다.

나는 느낌표 프로의 아시아! 아시아!프로그램 출연자로서 가게됐다.

청와대안에 노전대통령,영부인,박수훙,윤정수 등 개그맨들,한국인들,이주노동자들과 자기네 사장님들,이주민 센터 한국인 활동가 대표들 등이 거의 하루 종일 이야기 나누고 팔시름 하고 재미 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마지막에 나는 대통령과 악수도 했었다.그 때 대통령이 우리에게 "외국인 노동자들도 오셨네요~이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저녁에 청와대 앞 에서 기념 사진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아직도 내 방 벽에 붙여 있다. 대통령과의 만남이 처음 이고 그것도 우리나라 대통령도 아니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뭐 아직도 국민이 보고싶은 대통령보다
국민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으로 50년째 1위다.

한나라의 아버지가 됐었고 지도자가 됐었던 분이 이렇게 된것..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워낙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현실이라는 것을 믿어 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든지 해어질 수 있다.
그것도
살아 있으면서 함께 있지 못해 해어진 것이나
죽었으기 때문에 해어진 것이다.
정말 고통 쓰럽다.

또한
사랑하지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고통이다.

한숨을 쉬고 이런 기도를 하게되네요..

"노전대통령님~
 저를 기억 하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버마에도 국민이 가장 보고싶은 노대통령 같은 분이 정권을 하고 있었음 좋겠다 라고
노대통령과 악수 했을때 속으로 기도했던 한 버마이주노동자 입니다.

2003년도에 만난 그 추억이 몆주전 TV에서 노전대통령을 자주 보게되어
다시 떠오르고 있는데 오늘 갑자 쓰럽게 이런 마음 아픈 소식을 듣게 되어
정말 슬픕니다.

요즘 이주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이 한달에 최소 한번씩 들게 되어 무척 맘 아프고 있는데
노대통령에서 사망을 하셨으니 정말 마음이 아품으로만 가득차고 있네요.

이미 떠나신 대통령님~
잘 가시고
더이상 이런 아품이 없는 세상에 살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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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3 11:17 2009/05/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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