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미누”의 강제송환반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17년 세월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2009/10/09 21:42

 

 http://blog.naver.com/yeopa/30071269183

 

[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미누”의 강제송환반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17년 세월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아래 글은 현재 노동대학 20기 학우인 신순영님의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졸업논문“이주노동자의 사회적 배제와 적응에 관한 생애사 연구 : 장기체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중 미누님의 생애와 관련된 글입니다.

 

 

네팔, 미누씨의 살아온 이야기와 생각들.

 

미누씨는 1972년 네팔의 버히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 주둔군 캠프 안에서 일하는 약사셨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는데, 큰 어머님이 계시고 그 쪽에 누나가 둘 그리고 어머니 아래서 형과 미누씨가 자랐다. 원래 인도인이었던 아버지가 네팔에 근무 때문에 오셨다가 어머니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함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용병으로 취업하는 네팔 사회에서 아버지는 군인은 머리 없는 사람들이나 가는 데라며 공부를 강조하셨고,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형 대신 미누씨에 대한 기대가 각별해 많은 돈을 들여 컴퓨터 학원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으셨다. 어머니는 평소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밥을 다 드실 정도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분이셨는데, 큰 어머님에 대한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사인 같은 큰 명절 때는 항상 큰 어머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게 하고 누나들을 챙기도록 아들들에게 당부를 하셨다.

 

어렸을 때는 주로 포카라에서 주로 성장했고 대학 때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가난하고 취업도 쉽지 않은 네팔에서 이주는 젊은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꿈꿀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고, 특히 유명한 관광지인 포카라에서 자란 미누씨는 어려서부터 외국인들과 부대끼는 게 낯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통과의례처럼 이주노동을 계획하면서 유럽보다는 인종 차별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아시아를 택했고, 당시 88 서울올림픽 소식과 함께 우연히 신문에 실린 남산타워의 사진을 보고 한국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1992년 2월 22일에 도착한 한국은, 네팔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추워서 밖에서도 에어컨을 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도착하자마자 이태원의 일자리 브로커를 찾아갔고, 여관 방바닥에서 잠을 청하며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무시 당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한국에서의 첫 날 밤을 보냈다.

 

대부분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는 데 비해 미누씨는 특이하게 식당이 첫 직장이 되었다. 레스토랑 일자리가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그곳에서 일하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빨리 한국말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자청해 의정부의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설거지와 주방 보조일을 주로 하면서 나름대로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며 식당일을 배우게 되었지만, 사장이 바뀌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그만 두면서 미누씨 역시 그곳을 나왔다.

 

동료를 따라 다시 취직한 곳은 의정부의 나이트클럽이었는데, 그곳에서도 금세 사람들과 친해지고 사장의 신뢰를 얻었고, 한국말도 많이 늘어 잘 할 수 있게 됐다. 또 한국 노래를 배워 부르곤 하면서 의정부에서는 한국 노래 잘 부르는 네팔 이주노동자로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노래를 하고 싶은 욕심과 주말마다 친구들을 만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군포의 밸브 만드는 공장이었다. 쇠로 된 밸브를 코팅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광물질이나 유해물질을 다루는 일이었고 그 일은 이주노동자들에게만 할당되었는데 당시에는 별로 힘들지 않아 좋아했지만, 나중에야 그게 꽤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 공장은 얼마 있어 당진으로 이사를 가고, 그 다음에는 구로공단 독산동의 봉제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구로공단의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봉제공장 일을 배우다가 동대문 봉제공장에서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아예 옷을 직접 만들고 돈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동대문쪽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동대문에서 일을 하면서는 처음에는 월급쟁이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보조로 그리고 나중에는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고, 한국인 동료와 일대일로 장 당 얼마씩 가격을 계산해서 나눠 갖는 식으로 5년가량 일하면서 봉제쪽 일은 미싱과 시다를 다 할 줄 알게 되었다.

 

스스로가 말하는 미누씨는 한 번 마음을 먹고 일을 시작하면 무섭도록 집중하는 성격이어서, 일을 배우는 시기에는 완전히 손에 익을 정도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엄청 노력을 했다. 일을 하나 맡게 되면 똑같은 작업복을 일주일 내내 입고 모자랑 마스크 쓰고서 사람들이 기계냐고 할 정도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고 작고 좁은 공장에 날리는 먼지 때문에 눈썹까지 다 하얗게 될 정도로 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일하던 중에 외환위기가 왔고 미누씨가 일하던 공장도 어려워져서 가족처럼 일하던 공장을 먼저 그만두고 나왔다. 당시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온통 회사가 부도나고 사람들이 자살하고 노숙인이 되고 그런 이야기들을 전하기에 바빴고, 한국 사람들이 다들 고통을 겪고 있는데 자신이 출근하고 일하는 게 어쩐지 눈치 보이고 미안하고 죄책감도 느껴져서 사장이 말리는 데도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2000년부터는 직접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공평하게 일하고 나누면서 일했고, 직접 경영을 하면서부터는 노동자로 일할 때 미처 몰랐던 어려움도 알게 되었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한편 이따금 이주노동자 단체들에서 하는 행사가 있을 때 초대 받아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마침 팀으로 공연하던 네팔 친구들이 외환위기 때문에 돌아가고 혼자 남은 친구가 있어 그때부터 함께 노래하게 됐다. 이후에 한 상담소에서 명절 때 텔레비전에서 하는 외국인 노래자랑에 출전해보겠냐고 권유해서 신청하고 나갔다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미등록 상태여서 조금 걱정을 했는데 방송국에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게 되어 쑥스러웠다.

 

처음에는 그렇게 노래하는 일 외에 다른 활동이나 단체와의 연계가 전혀 없었는데, 조금씩 알려지게 되고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면서 다양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당시에는 운동을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이 전혀 없었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면서 미누씨는 언젠가부터 우리를 이웃으로 여겨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이 시작되었을 때, 미누씨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불법체류자를 신고하라는 안내방송 같은 것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전에도 이따금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았었지만, 그 방송을 들은 이후로 미누씨는 스스로 농성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성공회성당 농성에 합류하여 농성단의 일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도 낯설기만 했고 이주노동자라는 말도 강제추방이라는 말도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어려운 한국의 투쟁가 대신 부를 쉬운 노래가 필요해 구호를 모아 노래를 만들다가 밴드(Stop Crack Down, 스탑크랙다운)까지 결성하게 되었다.

 

85일 간의 농성이 끝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고 외부인 취급하면서 섞이기 싫어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답답하기도 했고, 농성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상황들도 알게 되면서 사회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시 분위기 상 언제 공장으로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었고, 그 즈음부터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후 서울 용산의 <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에서 몇 개월 간 일을 했고 그러면서 단체들의 어려움과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 같은 걸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공부가 됐다. 물론 단체는 돈이 없지만 진심을 담아 활동하는 게 좋았고 또 그렇게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와 이주노동계의 흐름 같은 것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단체에서 몇 개월 간 활동하던 중에,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거기에 합류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MWTV(이주노동자의방송) 일과 농성장에서 결성한 밴드 활동 등을 병행하며, 온전히 이주노동자 활동가로서 사회운동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개인 생활이 거의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 고향과 집에 대한 그리움이나 혼자라는 외로움을 묻어버리고 오히려 덤덤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지는 대신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훨씬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살면서 이따금 연애를 하기도 하고 오래 만났던 애인도 있었지만, 주로 혼자서 생활하고 바쁜 활동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던 미누씨는 이제 가족의 느낌이라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네팔로 돌아간다면,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가족이라면 주로 어떤 말들을 하고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 이따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게다가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럼에도 네팔로 갈 수 없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면 그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가족이란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아지고 외로움과 슬픔이 먼저 밀려오고, 고아가 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가족이란 것이 미누씨 스스로에게 새로운 개념, 새로운 분야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초에 네팔에서 한국으로 올 때 미누씨의 계획은 딱 3년만 돈을 벌고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사실 애초의 그 계획은, 이주노동의 삶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했던 상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많은 것들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생활하면서 들어가는 비용 같은 것 역시 전혀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이 돈을 벌기만 하고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한국사람 못지않게 소비할 수밖에 없다.

 

미누씨의 형은 영국 용병으로 미누씨보다 먼저 홍콩으로 떠났었다. 어렸을 때는 많은 네팔 사람들이 영국 용병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고, 특히 돈을 벌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사실이 비극적으로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정적으로 영국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정부의 여러 가지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형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생각할 때 오히려 그런 형의 선택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누씨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비록 아직 한국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지만, 사회운동을 시작하고 만나는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는 일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문화라는 구호가 범람하는 지금도 그 다문화라는 것에 이주노동자가 포함되는지 의문스럽고, 백만 이주민 시대라고 말할 때 설마 이주노동자도 이주민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지 의문스럽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이제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준비 역시 한국 사회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미누씨 자신처럼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책임감으로 활동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물론 만족스러운 활동에 비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빈 부분이 많지만, 그런 빈자리 역시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활동을 통해 채워나가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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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22:21 2009/10/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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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가 잡혀갔데...

내 오래된 친구이자

동지이자 친형이기도 하는

미누형이 잡혀갔다고 하네..

 

미누가 잡혀갔데...

표적 단속이라네..

도대체 미누가 한국에 어떻게 살았기에?

어떤짓을 하기에?

그들이 미누를

그리 미워할 수 있는건가?

 

지난 99년도

한 무대에서 우리 만났네...

노래 참 잘 부르는 친구

인상이 참 좋은 친구

잘 웃고 얘기 잘 하는 친구

이제 10년 째 함께

우린 같은 길을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깝게 걸어왔는데...

 

미누가 노래 부를때

이주민들 춤을 추네

한국인들도 춤을 추네

이주민들과 한국인들

서로 손을 잡았네

서로 사이에 벽이 없어지네

 

미누가 촬영을 할 때

이주민들의 아품

이주민들의 기대

이주민들의 삶

이주민들의 희망

미누의 카매라 속에 담겨져 있네

미누의 눈물 속에 담겨져 있네

 

한 때 미누가 내게 이렇게 말 했었지

어느날 내가 이땅을 떠나려고 생각을 한적있어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비꾸,다라카, 안드레이 등

강제추방 공포에 자살한 이주민들이

나타났고 나를 부탁하는 눈빛으로

보고있어... 울고있어...

그래서 나는 내몸 내생각

모두를 이들을 위해 받춰야해

살아야해..책임맡아해..

내스스로가 책임 있다고 생각을 하면

책임 있는 일이 된다고 하네..

 

미누가 원하는 것은

이주민들의 인간다운 삶

안전한 노동환경

희망찬 한국생활

평등한 대우

그래서

미누는 노래를 부른다

영상을 만든다

 

미누가 보고싶은 것은

단일 민족을

다문화 시대로

단일 민족을

넓은 세상으로

단일 민족을

세계화 시대로

 

하지만

이제 한국은

이주민들의 희망을 만드는

한국인들의 행복을 만드는

다문화 시대를 이끌은

아름다운 한국을 보고싶은

미누가 필요 없다네

이것이 바로

미누라는 사람이

필요없다는것 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의 희망

한국인들의 넒은 세상

아름다운 한국을 꿈꾸는 마음

모두 모두

필요 없다는 의미 하네

 

미누에게

비자가 없어서 쫓아내는게 아니라

한국한테

미래를 볼줄 아는 생각이 없는것이다..

 

미누가 한국에 있어서

한국한테 좋은 일만 가득찬데

비자라는 도장 하나가

뭐가 중요하다고

 

대한민국

아직 멀었다...

육체적 발전이 앞서가도

정신적 발전이 후퇴하고 있네

 

걱정이다

이제

이땅에

희망이란게 있을까?

인권이란게 보일까?

 

대답해라 ...자신이 있다면...

 

(2009년 10월 8일에

집앞에서 표적단속된

한국생활17년

차별없는 한국

탄압이 없는 한국

제2의 고향 한국을

떠난 미누형 에게)

동생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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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00:41 2009/10/0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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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13:27 2009/08/2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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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지~~

(우리 버마인들은 김대중 대통령님을 DJ지라고 부른다.

DJ는 김대중 이고

“지”는 버마어로 “크다”라는 뜻이다.

한국에 큰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도 큰DJ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부르게 되면 DJ와 우리들 사이는 매끄럽고 친하다는 표현이 된다.

아래 글은 우리를 이미 떠난 DJ지에게 하지 못했던 얘기들이다.)

 

DJ지~~

이미 떠나셨네요 ...

지금은 많이 편하시죠?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떠나셨지만

이제 부터는 편히 쉬셔야 합니다.

잔인한 독재를 이겨서 DJ지가 사랑하는

한국을 평화롭게 만들셨지만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

죽음을 DJ지도 이기지 못했네요..

몰론 저희들도 이 지구에 사는 모두 생물들도...

근데 DJ지~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서

아닌 너무 참지 못해서 이 말을 하게 돼서

편히 쉬시는 DJ지에게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

DJ지~~

한국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히 버마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큰 사랑과 큰 지지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버마 민주화운동을 한국에서 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 민주화지도자 DJ지가 계셔서 입니다.

우리에게 

버마에게

온 세계 지구인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DJ지가 우리들의 희망

그리고 버마의 희망

또한 세계평화의 희망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DJ지가 우리를 떠난 후

우리의 희망도 우리를 떠나려하는

모습들이 하나 둘씩 보여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버마민주화운동가들에게

이제 한국 땅 에서 버마민주화를 위해

활동 할 수 있을까가 너무 걱정 쓰럽습니다.

며칠 전 우리를 난민불허 한 법무부를 법원에 소송했는데

우리가 패소했다는 소식과 법원 판결문을 받았습니다.

민주화가 쟁취한 나라의 법원

판결엔 그 토록 DJ지가 아껴주셨던 우리를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민주화 운동이나  조직단체를 만든다고“ 나와 있네요..

정말 놀랐습니다...

정말 억을 합니다...

 

DJ지~

우리는

한국에 살고 싶은 이유로 민주화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처럼 살고 싶어서 민주화를 한다는 것을

그들이 왜 안보일까요??

자유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를

그 정도의 시아로

본다는 자체가 우리의 의지, 우리의 희망, 버마의 미래까지

무시하는 의미하고 다르게 없다고 느끼네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난민, 이주민들의 권리가 아주 열악한데

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지 이해가 안되네요..

 

DJ지~

 DJ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

전날 새벽까지 피켓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회원들과 함께

시청광장으로 가서 영결식에 참여했습니다.

햇빛이 넘 뜨겁지만

저희들은 

“DJ지~ 우리 버마를 위해 큰 지지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국 내 민주화운동가들에게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복을 빌며 애도를 합니다.”

라는 피켓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DJ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DJ지를 너무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DJ지~

너무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덕수공 앞에 수백 명의 전경들이 까려있었는데

저희랑 같이 참여한 한 중학생이 자기가 직접 만든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의 햇빛입니다.”라는 피켓을

길거리에 지나간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행동을 맘에 든 지난간 아저씨가 아이스크림과 과자들을

사 주쎴 더라고요..

나머진 회원들은 덕수공 앞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었고

저는 그 중학생의 행동을 맘에 들어서 사진 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앉아있는 전경들이 갑자기 일어나 우리 앞에서 막았습니다.

어린 중학생 한명과 40명 전경들의 대치하는 장면....

이해가 안되지만 전경들에게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봤습니다.

야간 불법시위라고 하네요....

“불법시위”???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님이 햇빛이라고 표현하는

중학생의 행동이 불법시위라고 하네요...


...축구 이겨서 아시아의 영웅이 되어 기뻐서

대한민국이라고 밤새 외쳤던 그 2002년도 월드컵때 함성들 ...

..대한민국 평화의 아버지 김대중 이라고 표현하는 행동..

이런 행동들은 밤에도 낮에도 해도 해도 좋은 일만 남는데..

그리고 그런 행동을 스스로 나와서 하는 어린 중학생한테

어른들께서 지지와 박수를 보내줘야 하는데

그 대신 방패로 위협을 주려는

현제 한국의 상황을

DJ지가 못보고 가신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DJ지의 마지막 말씀인 “화합과 통합”은 바로

중학생의 사랑과 이해 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이 들네요..

 

떠나신 DJ지~~

사랑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버마민주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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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5 01:19 2009/08/25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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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8888 버마 민중항쟁 21주년 기념
 



 

기자회견, 집회,행사,캠페인 일정들
 



 

일정-(1)
오전 11시~12시
미얀마 대사관앞 기자회견 및 집회
서울 한남동 단국대학교 앞으로 오전10시 45분 까지 모여요.
미얀마 대사관 앞으로 11시까지 행진해서 기자회견, 집회 할 예정 입니다.
 

연락처-010 7155 6581 소모뚜(버마행동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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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2)
 

버마 8888민중항쟁 & 버마아이들을 위한 모금 캠페인 초대장
 

언제, 어디서, 누가?
- 8월8일 오후 (2시부터 4시)
- 명동 예술극장 앞
- 이우고등학교 학생들, 꼬 마웅저(버마 아이들 교육 지원하는 모임),이우엠네스티(김지원, 이도경, 김윤희, 오주원, 허준영), 안정민(이우학교 교사), 버마 민주화 운동가들,
 

어떻게?
 

- 메솟의 난민촌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 국경 지역의 버마 학교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에 대해 그린그림 전시
 

- 버마와 관련된 사진 인화해서 전시
- 간단한 버마 노래 공연
- 나도 한마디! 소감 말하기
- 8888민중항쟁에 대해서 알리는 전시물 전시
- 버마 내 정치범 석방 서명행사
 

오는 8월8일 토요일은 1988년 8월8일에 있었던 버마 8888민중항쟁 21주년 기념일입니다. 이를 알리고 더불어 버마 어린이들의 그림 전시를 하려고 합니다. 잠깐이라도 들러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연락처--마웅저(010-9160-9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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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3)
같은 날 오후 4시~8시
부천외국인 노동자센터 회관에서 기념행사 합니다.
연락처- 얀 나이툰 (011 9723 4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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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21:54 2009/08/06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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