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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름다운 고통 2010/06/10
  2. 버마의 문화 이야기 2010/06/10
  3. 이주의 탄생 2010/06/10
  4. 밍글라바 코리아~ 2010/05/03
  5. 한국놈 한국인 한국분 2010/05/03

아름다운 고통

얼마 전에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용은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해야 해서 남자들처럼 밖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중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을 들을 때 마다 왠지 슬픕니다.
가족을 위한 노력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문제까지 취급되어 강의까지 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되는 저에게는 슬픔만 남았습니다.

 

강의 내용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듣고 있는 여성들과 죄인이 되는 기분으로 어두운 표현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남성분들을 보면서 이주민 입장에서 보는 저는 한숨만 나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자하는 말은 남녀 간에 평등, 가부장제, 페미니즘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가 더 고통 받고 누가 더 편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내용들은 워낙 민감한 이야기들이라서 저는 그저 이런 것에 대해 저 같은 이주민들의 생각을 전하고 싶은 뿐입니다.

 

한국인들 포함해 전 세계에 이주하면서 살고 있는 분들 중 대부분이 자기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남자, 여자 모두가 다른 나라로 들어가서 고된 일,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일, 작은 공간에 반복된 일을 하면서 새로운 것이 뭔지 몰라도 매일 매일 그런 고통을 기쁘게 받아주며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형제들의 미래를 위해 오빠로서, 언니로서 ,또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등 1인 다역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그래서 내 자신이 힘들어도 그 아름다운 고통을 내가 먼저 받겠다는 것이 이주민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혹은 아내가 다른 나라로 이주노동자로서 가는 날. 공항에서 서로를 미안하고 서로를 위해 열심히 하겠다며 눈물을 흐리면서 약속을 하는 그 마음. 자신이 그토록 다니고 싶고 꿈꿔왔던 대학을 포기하고 동생들 학비를 위해 해외 나가서 일하겠다는 오빠를 보면서 미안해하는 동생들과 가족을 위해 헌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오빠의 마음. 이런 마음은 “나보다 가족이 먼저” 라는 사랑 또는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 받는 다라고 생각을 하지 않다는 거죠.

 

내가 힘들게 일해서 버는 돈을 가족에게 보내주고 가족이 그 돈으로 예쁜 옷을 사 입고 나에게 보내준 사진을 자꾸 꺼내어 보면서 기뻐하는 마음이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주민에게는 아주 효과 만점 보약입니다.

버마독립영운 아웅산장군 가족, 오른쪽부터 아웅산 장근, 어머니, 아내와 아이들 (맨앞에는 아웅산수지여사)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온 국민이 가족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에 기뻐하셨던 아웅산장군과 아웅산수지여사의 사랑과 책임을 존경함으로서 이사진을 배치합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있는 벼를 먹으러 오는 앵무새들을 잡으러 농장으로 나왔습니다. 농장에 있는 벼들을 맘껏 먹고 있는 수많은 앵무새들 중 아주 크고 통통한 한 앵무새는 맘껏 먹고 난후에도 많은 벼들을 또 가져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는 농부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통통한 앵무새를 잡으러 결심했습니다. 농부는 손에 집힌 앵무새에게 “너는 다른 새들처럼 배부르게 먹었으면 됐지 왜 또 가져가려고 하냐?” 라고 물어보자 앵무새가 “저는 새로운 빚과 헌 빚을 갚아야 해서 그랬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농부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앵무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헌 빚이란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갚아야하는 빚을 말하고 새로운 빚은 내가 낳는 자식들에게 해야 할 임무를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먹고난후에도 그들을 위해 벼들을 또 가져가는 겁니다.”라고 답하자 농부는 부모님의 은혜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통통한 앵무새를 평생 자신의 농장에서 맘껏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책임들을 가지게 됩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누군가가 시켜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책임 있다고 생각해서 갖게 된 것입니다. 가족과 멀리 떨러져 살고 있더라도 이를 눈물이 가득한 미소로 받아 주고 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는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 대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것에 의미, 또한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전화 할 때마다 아버지가 저에게 늘 하시는 말씀은 “고맙다. 네가 나의 역할을 다하고 있어서 정말 고맙다.” 라는 것과 “오빠는 우리에게는 제2의 아버지입니다.”라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제 삶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책임을 알고 가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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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5 2010/06/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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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문화 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버마의 문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버마에서는 얼굴 닦는 수건과 허리아래부분 닦는 수건을 구분하여 씁니다. 한국처럼 큰절은 흔히 하지 않습니다. 또한 큰절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것에서부터 상대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는 것에까지 존경의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은혜 베푼 사람이나 부모님, 선생님, 스님들에게 존경의 표시로 발을 닦아드리기도 합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나의 꿈과 학교를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한국에 왔습니다. 어렵고 위험하면서 더럽다고 하는 일자리에서 임금은 턱없이 낮았지만-사실 이것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래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때문에 동생들은 나를 제2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우리더러 돈 벌려고 한국에 온 것 아니냐며 핀잔하지만 가족들은 압니다. 돈 벌러 온 이유를요.

 

얼마 전 동생이 나를 만나러 한국에 왔습니다. 15년 만에 보는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영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며 난민지위를 얻었습니다. 난민인정을 받은 동생이 저를 만나러 한국에 오려 했지만 올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한국에 들어와 돌아가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남아 있을까 염려해주시는 분 덕분이었답니다. 영국 시민권을 받고서야 한국에 온 동생은 꼭 하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나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마를 내 발에 대어 큰 절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오랫동안 일한 오빠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 성공회성당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시청광장에 들렀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도 불어 몸에 한기가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큰 화면에 보여주는 영상은 일 년 전에 본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걱정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이미 들은 이야기 또 들으면서도 1년 전 그날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렇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버마사람들이 아웅산장군을 기억하듯이 말입니다. 버마사람들이 그토록 아웅산장군을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그가 버마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고, 행동한 대로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좋지 않은 나무를 심어놓고 어찌 좋은 열매를 바라겠습니까?

 

다음 달부터 정부가 G20정상회의를 빌미로 대대적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을 벌인다고 합니다. 나의 꿈을 접고 우리의 꿈을 만들려고 낯선 땅에 일하러 온 이들의 이름이 이주노동자입니다. 이들은 일하고 싶고 희망을 갖고 싶고 함께 살고 싶습니다. 이들에게 일할 자유를 허락한다면,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신다면, 이들에게 생존의 권리를 누릴 기회를 주신다면 이들의 마음에 한국은 발을 닦아드리고 싶은, 발에 이마를 대고 큰절 올리고픈 곳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면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 이게 축복입니다.

밍글라바 코리아~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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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4 2010/06/1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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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이주노동자로 간 한국인들이 미국 이주 1세대를 형성했다고 들었다. 이들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왜 하와이에 사탕수수밭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왜 머나먼 하와이까지 갔는지는 잘 알 것 같다. 한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먹고 살기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어라 일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싸웠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받은 임금이 얼마나 됐을까? 다행히 지금 한국에는 최저임금이라는 참 좋은 제도(?^^)가 있다. 덕분에 우리 이주민들이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하면 이 최저임금을 받는다. 한국에 최저임금 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4백 5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며칠 전 최저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에 노래하러 갔다. 그 집회에 참석한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라고 했다. 그런데 노래하러 무대에 올라가는 저에게 한 분이 부탁의 말을 하셨다. 전에 몇 번 들어 본 내용이었다.

 

무대에 선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공장을 차릴 때 내 공장의 일자리는 돈을 많이 주는 한이 있어도 꼭 우리 국민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힘들어도, 위험해도, 오래 일 시켜도, 군말 없이 일 잘하고, 돈은 조금 받아가는 사람을 원할까요?”

 

지금 한국에는 120만 명의 이주민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두가 4백 50만 명 중 일부입니다. 이주민들을 붙들고 물어 보십시오. ‘고향과 집을 떠나 올 때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 왔느냐?’ ‘임금은 제대로 받고 있느냐?’고. 우리의 대답은 100년 전 하와이에 간 한국 사람들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국적이나 피부색이나 언어를 떠나, 일하고도 먹고 살 만큼 받지 못하는 우리 서로는 마음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일 시키는 사람은 자기나라 사람이냐? 이주노동자냐? 하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다만 자기가 원하는 노동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렵고 한국 노동자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오해하지 않고 뭉쳐야만 합니다. 그래야 최저임금을 올리고 생활임금을 받는 데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일하러 가면, 100년 전 하와이로 간 사람들이나 50년 전 독일로 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처지가 됩니다. 한국의 여러 상황이 나아 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주민들도 우리 살던 나라의 상황이 좋다면 이 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이주노동자가 많아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주노동자들의 나라 정치상황이 좋아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그 나라에서 일할 뿐 아니라 도와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한국의 5.18은 버마인들을 깨우쳐 88민주항쟁 가능케 하였습니다. 5.18에서 6월로, 오늘의 한국이 이주노동자들의 나라에도 지금의 한국이 될 수 있게 도운다면 얼마나 감사를 받겠습니까? 한국 사람은 축복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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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1 2010/06/1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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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글라바는 “축복입니다” 라는 버마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축복이고 살아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 것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도 거대한 축복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밍글라바”라는 인사말을 드립니다. 저는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을 주고받고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면서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듭니다. 저의 글과 노래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 소수자들에게 사랑받는 한국 축복을 받는 한국을 만들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경험을 통해 나오는 내용으로 담은 글 과 노래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마음으로 제 글을 읽으시고 노래를 들으시면서 동시에 머리로 생각을 함께 해주셨음 합니다.

이제 제가 한국에서 거주한지 15년이 됐습니다. 한국이 외국인 이주역사가 한 20년 정도 된다는데 저의 이주민 생활이 이주민 역사라고 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동안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던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눈물 없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기쁨을 준 일도 있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은 꿈과 희망을 위해 좋든 싫든 돈을 벌어야 먹고 삽니다. 돈을 많아 모아야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님들을 도울 수 있고 나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주민들은 꿈을 안고 한국으로 들어와 일을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돈을 버는 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때문에 외국에서 들어 온 이주민들에게는 훨씬 힘든 일에 부딪힙니다. 하루 12시간의 노동과 산업재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주민에 대한 정부의 정책미흡으로 자기 뜻과는 달리 미등록노동자가 되어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민의 현실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기서 잠시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 볼까 합니다. 한국은 이미 최소한 700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을 이주노동자로 보낸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이런 어려움은 한국에서 미국이나 일본 등으로 이주해간 한국인 이주노동자들도 겪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도 꿈과 희망을 위해 한국을 떠나 낯선 외국 땅으로 떠난 것이지 않습니까? 현재 미국에 한국인 미등록노동자가 20 만 정도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한국에 있는 미등록외국인 숫자와 비슷합니다. 미국에 사는 미등록 한국인이 위에 말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한국의 언론, 정부와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주민 문제는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이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한국 사람들의 문제라는 면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치 이주민이 한국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는 인상을 줍니다. 이주민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포용의지가 부족합니다. 요즘 들어 무슨 유행처럼 다문화라는 말이 번지고는 있지만 정책변화는 없습니다. 정책을 만드는 정부나 집행하는 기관이나 심지어 시민들의 의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느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찬찬히 따져 생각해 봅시다.

 

만약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산다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이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국제사회가 부러워할 만한 이주민 정책을 가지게 된다면 한국교포들도 그 나라에서 자랑하겠죠. 자랑만 하겠습니까? 그와 같은 좋은 정책을 요구 할 수 있지요. 이들만 좋아질까요?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이 됩니다.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행복하게 살게 하고 한국국민은 힘들게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 18년 동안 거주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고 열심히 일하고 싶은 데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던 미누( 미노드 목탄)라는 분이 있었죠? 한국은 참 좋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한국이 법이 아니라 관용을 선택해서 그의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줬다면 어땠을까요? 외국에 이른바 불법체류하고 있는 한국교포들의 지위에 대해 정부는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인권과 관용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도 당연히 존중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이주민들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 먼 곳에 와 있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 때문입니다. 내가 가족에게 준 사랑, 가족이 나에게 준 사랑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는 희망을 노래하며 살고자합니다. 우리의 노래는 한국교포들의 노래로 또 이 땅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노래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가 노래할 수 있게 당신의 손을 피아노 위에 놓지 않겠습니까?

“밍글라바 코리아~”

이글은 수유너머R의 weekly 웹진에서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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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00:18 2010/05/03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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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뚜/ 이주 노동자의 방송 ‘MWTV’ 대표

  

2010년 3월 5일은 내가 한국에 온 지 15년째 되는 날이고 3월 7일은 내가 이주 노동자가 된 지 15년째 되는 날이다. 열아홉 살 때부터 한국에 와 있었기 때문에 몇 년만 더 있으면 내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15년이라는 세월은 참 오랜 시간이고 그동안 내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 온 지 15년 됐다는 내 얘기를 듣는 분들은 나보다 더 놀라워한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나 내가 활동하는 이야기를 인터뷰하러 오시는 분들이 한결같이 내게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부모님 안 보고 싶으세요?”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울해진다.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부모님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고, 고향도 그립지… ….

하지만 “‘살고 싶은 곳’보다 ‘살아야 하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배워 왔다. 내 꿈과 희망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움 또는 다른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면, 누구나 나처럼 ‘살고 싶은 곳’보다 ‘살아야 하는 곳’을 선택할 것이다. 나에게는 한국이 내가 선택한 곳,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다. 한국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인연 때문이다. 여기서 살면서 내게는 친구들이 생겼고 스승들도 여기 계신다. 그리고 한국에 오랫동안 살다 보니 여기가 바로 내 집, 내 나라가 됐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는 내가 사는 이곳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받아먹은 적이 있다면 그 은혜를 꼭 갚아야 한다”고 어렸을 때 배운 적이 있었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인 이주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대가나 기분 좋은 대우를 못 받더라도, 지난 15년 동안 내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대해 주고 나를 성장하게 해 주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나는 1998년부터 한국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는 일들을 해 왔다. 내 노래로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나의 경험으로 한국 사람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벽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다.

이주민들에게는 ‘세상 어디를 가든 좋은 사람,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안 좋은 한국 사람들만 보고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나쁘다고 판단하지 마’ 하고 강조했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든, 잘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든,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고 알리고 있다.

나는 “너희 나라에도 해가 있냐? 달이 있냐?” 하고 어처구니없는 물음을 하는 한국 사람도 만나 봤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친절히 가르쳐 주는 한국 사람도 만났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다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지만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좋은 벗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만났다.

공장 기숙사 내 방에 있는 불단에 자기 양말을 벗어 올려놓는 한국 사람도 만난 반면에 자신이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나와 함께 절에 다니며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만났다. 손으로 밥을 먹는 나라라고 더럽다고 무시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고, 내 나라의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존중하며 배우려 하는 사람도 만났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며 처음 보자마자 반말을 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고,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만났다.

나한테 월급을 주는 게 얼마나 아깝고 싫었으면 오백 원짜리,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만 원짜리… … 등을 주머니 속에서 하나하나씩 꺼내서 월급을 주는 한국 사장님도 만났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정직하게 월급을 주는 사장님도 만났다. 한국 땅에서 이주민과 함께 사는 것을 거부하는 한국 사람도 만났고 함께 사는 것이 좋다는 사람도 만났다.

물론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나처럼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을 반반씩 겪은 사람의 생각과 늘 안 좋은 일만 겪어 온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좋은 일만 생길 수도 없고 늘 나쁜 일만 있을 수도 없다.

내가 15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인과 이주민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같은 땅에 함께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서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주민들도 한국이 뭘 해줄까 하는 것만 기대하기보다 한국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한국어도 배우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함께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꿈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꿈도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며 손으로 실천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서 한국에 보답하고 싶다.
 

이 글은 작은책4월호 "우리 밖의 우리"코너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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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00:12 2010/05/0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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