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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란 (3) 2010/11/04
  3. 난민소송 이겼습니다. (5) 2010/11/03
  4. 내고향, 내김포 - 2부 2010/10/28
  5. 8일 만에 만든 음반 2010/10/06

(저와 함께 다문화 인식 개선 교육을 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서온 고려인 이발레리아씨의 글 입니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발레리아라고 하고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부에 있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1993년에 독립했습니다.

소련은 15나라가 구선되고 그 중에서 우즈베키스탄은 하나였습니다.

저는 2000년에 가족들을 생각하며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한국인 남편과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고 하면 우즈베키스탄이 어디 있는지 대부분 몰랐습니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괜찮은데 “너희 나라에 TV 있어? 냉장고 있어?”라고 하면 정말 자존심 상하고 당황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한국 사람들이 저한테 말하기로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혼자서 잘살려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으니까 이제는 여기서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돈 벌면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억울했습니다.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저를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를 우즈벸 사람들은 왜 “고려인”이라고 부를까요?

저희 증조할아버지는 100년 전에 조선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때는 남한 북한도 없었고, 그냥 <조선사람>이었어요.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괴나리봇짐 하나 매고 시베리아 땅을 건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적응하기 힘들었고 많이 굶었고 힘든 농사와 막노동을 했습니다.

1917년 소련이 공산화 되면서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살기가 나아졌지만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정책 때문에 고려인들을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주를 반대하던 2500명 고려인 지식인들이 총살을 당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할 때, 화물차를 타고 길게는 한 달 반을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과 음식이 모자라서 길 위에서 죽었습니다. 대부분 묻지도 못하고 그냥 철길 옆에 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1937년에 3개월 동안 17만 명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 이주를 했습니다. 첫 겨울에 노인과 어린이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서 3분의 1이나 죽었습니다.

다문화가족 경우에 부부가 같이 가는 것은 아니고 고려인만 가고, 만약에 자녀들이 있으면 엄마를 따라갔습니다. 부부가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이주하게 되더라도 화물차에 함께 타지 못하면 도착하는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가족을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최초의 고려인들은 “일본의 스파이”라고 하는 편견과 차별 때문에 기업이나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생이 더 심했습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자기가 고려인이라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살았어요. 처음에 자유롭게 이동 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허가를 받아야만 어디 갈 수 있었어요. 그러서 이주 할 때 헤어진 가족을 찾아서도 같이 살지 못했습니다. 국가시설에서 허가를 주지 않기 때문 에였습니다. 살기 위해, 차별을 없어하기 위해서 고려인들 그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고려인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으로 이제는 우즈베키스탄을 2세들의 고향으로 얻을 수 있었고 모범시민이 됐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에 갈 수 없지만 편견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많은 봉사와 기부를 했습니다. 어떤 분에 기부하던 금액으로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주 후에 소련에서는 학교 수업은 러시아어를 쓰라고 시켰습니다. 그 시간부터 고려인들은 자기 언어를 잃어버리게 됐어요. 그것 때문에 저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를 몰랐어요. 가끔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갔을 때 한국어를 들었어요. 그래서 제 나이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대부분 모릅니다. 소련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자기나라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려인들은 조상들의 고향이 한반도라고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고려인들은 어디로 가야할 지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1994년부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공식적으로 우즈벡어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소수민족들도 불편을 겪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다른 나라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저는 제 조상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평생 고려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그냥 외국인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고려인들만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인생에서 내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제의 남동생이 한국에서 3년이 일했는데 그때 남동생 저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었습니다. ‘차라리 난 러시아사람으로 태어났을걸’ 라며 ‘어차피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외국인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차라리 나는 외국인이었지’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 고향 자랑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서운한지 안했죠‘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려인 라는 것은 어떤 대접 받기 위해서 하고 아니고 다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했는데 고려인이라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자기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 바람뿐이에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제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즈베크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면, 왜 러시아 친구들이 우리를 <고려인>이라고 부를까요? 러시아 친구들은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외모 차이가 없어서 차별을 받지 않아 좋겠다며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 외모차이는 없어.......”라고만 해요.

왜 같은 조상의뿌리를 가진 우리를 외국인이라고만 여기는지

솔직하게 좀 서운한 생각이 들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도 모국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요.

세계가 한 가족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우리 고려인들의 지나온 인생들도 한 번 의미 있게 생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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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3:26 2010/11/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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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오늘11월 5일.

미누형이 정든 한국에서 추방당한지 일 년이 되는 날.

1년이란 정말 금방 간 것 같아.
내가 어디로 가든 만난 분들이 아직도 미누형이 잘 지내시나, 뭘 하고 계시나 등 등 형의 소식을 궁금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주민들도 자신들에게 노래로 힘을 줬고 미디어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 해줬던 미누형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주민들은 처음에 형이 한국인이줄 알았는데 추방을 당했다고 하니까

“외국인 이였어?”

“미등록체류자였어?”

“그런데 그 불안전한 신분으로 당당하게 활동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어떻게 있는 건가?”

라고 신기하면서 놀라워하면서 내게 물어본다.

그렇다.

우리는 무식하게도 용감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에 좀 그렇지만 형이자 동지를 잃게 된 나는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다. 형도 나도 우리 밴드 맴버들 다 무식 하게 용감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 이주민들의 삶을 알리고자 전국 어디든지 꺼림 없이 다녀서 “스톱크랙다운!!” 탄압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축제, 집회 모든 곳에 가서 이 세상 아무에게도 누군가를 탄압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15000명이 모인 거대한 무대부터 작은 앰프 하나 밖에 없는 아주 작은 무대 까지 시설이 상관없이 우리의 노래로 이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이곳 땅에 들어왔는데 손, 팔을 잃어 고국으로 들어간 이주민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살아 있는 몸으로 다시 고향으로 못 들어갔던 이주민들,

매일 과도한 일을 하면서도 그 대가를 못 받은 이주민들,

그렇게 우리는 나나 너나 누구나 살기 싫은 삶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사회에 알리면서 보다 더 나온 삶이 쟁취할 수 있게 음악으로 활동 했었다. 심지어 노대통령 앞, 문화부 장관 앞에서 박수를 얻으면서 까지.

하지만 그 불안한 신분으로 당당하게 활동했다는 말은 과도한 칭찬이다.

미등록 신분으로 늘 마음이 불안하면서 활동했으니까.

지하철 탈 때, 고속버스터미널 갈 때 늘 주변을 확인하고 다녔다. 강제 추방 단속이 심해도 그 곳을 피하는 것 보다 그 곳에 가서 노래를 했다. 촬영을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책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 하는 일이 책임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그런 삶을 가지기위해 스스로 책임을 느껴 활동을 하게 됐다. 사실 우리밴드 맴버들의 한국 생활은 다른 이주민들처럼 열악하지는 않았다.

모든 맴버들이 높은 월급을 받고 기술자로서 인정받고 당당하게 직장을 다녔다. 우리 중에 미누형은 한 달에 월급2,3백 받으면서 좋은 기술을 배우면서 안전한 삶, 안전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을 버리고 월80만원 활동비 받고 이주노동자의 방송에서 미디어 활동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은 거대한 월급을 외면하고 활동을 하게 된 미누형의 선택을 이해 못하고 놀라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인데도 이래저래 하면서 안 하는 사람이 참 못 된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정말로 필요하는 이주민들의 기복적 인권 보장을 위해 이주민으로서 오랫동안 생활 하고 그 상활을 잘 아는 미누형으로서 이 길을 선택해야만 하고 책임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을 아셨음 한다.

음악인으로서

미디어 활동가로서

다문화강사로서

좋은 친구로서

좋은 삼촌으로서

이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이주민으로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18년 동안 지냈던

미누형이

자신을 추방한 한국이 사랑을 못 받을까봐는

걱정을 하면서 먼 곳 네팔에서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광고를 보면서 글 작성 하게 됨)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7890397&q=%B0%F8%C0%CD%B1%A4%B0%ED
> 진정함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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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12:21 2010/11/0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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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내서 제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여러분~

추카해주세요~

어제 고등법원이 법무부한테 저와 버마민주화 활동가7명에게 난민인정불허를 취소하고 난민인정하라고 판결냈습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좋은소식도 있다니 참 다행이 입니다.

여러분들도 힘내세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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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14:44 2010/11/0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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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2003년 8월

정부의 고용허가제도가 국회를 통과했다.

제도 실행을 앞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강제 추방 하겠다는 뉴스가 신문에서도 나오고

심지어 라디오 에서도 경고음과 함께 방송했다.

길거리 가로등에 미등록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관련 현수막도 거기 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90년도 초에 산업연수제도로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을 기술을 배우러 온 연수생이라고 불러주면서 밤 낮 갈리지 않고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 저임금을 주고 때로 그 저임금마저 받지 못 하고 욕설과 폭행에 지친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이탈을 했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증가 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보고 노동력만 보니 문제가 발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미등록이 많다는 이유만 해결하려고 하고 왜 이들이 뭐 때문에 이 꼴로 당했는지에 대한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과정에 대한 관심이 없고 결과에만 집증한다면 참 위험한 사고다. 처음부터 투명하게 노동자라고 불러주고 노동 권리를 보장해 주면서 국가에 필요한 노동력을 떳떳하게 받았다면 모두에게 기쁜 일만 있을 것이다.

 

좋다. 허약한 제도로 사람을 착취했었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창피한 모습을 그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도를 만들겠다면 그 동안 고생했던 이주노동자들은 이런 변함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 줄 수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은

그 힘들었던 외환위기 때 함께 극복해 줬고

그 기뻤던 월드컵 때 함께 응원을 해 줬고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있어줬던 진정한 친구들인데. 무슨 죄가 있나?

 

나는 우리는 죄가 없다는 것을 생각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이에 대해 행동을 보여주고자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나처럼 행동으로 보여주자 하는 이주민들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농성장에 참여하는 것 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11월 15일 저녁에 농성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사장님에게 지금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농성하겠다고 말했다.

돈을 벌고 싶든 꿈을 꾸고 싶든 이루어지고 싶은 것이 있는 사회약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바른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다고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됐다고 얘기 했지만

사모님이 나에게 이런 사회운동을 해서 나중에 너에게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사회운동 하는 것이 개인을 위해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이 세상에 늘 있는 아픈 것들을 함께 고치고 올바른 길을 안전하게 든든하게 함께 갈 수 있도록 바르게 노력하는 행동이자 또 하나의 나눔이다.

 

하지만 우리 사장님과 사모님은 나의 말을 이해 못 했다.

그들의 생각은 본인들의 일을 평생 해 주기 위해 내 어머니가 나를 낳아 줬다는 것뿐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 두기를 결정 했고 내가 8년 동안 일했던 것에 대한 받아야할 권리에 대해 사장님에게 물어보자 사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

너는 불법체류자인데 왜 내가 퇴직금을 줘야 되냐?

 

나는 이런 말을 듣자 너무나도 놀랬다.

내가 불법체류자라서 사장님에게 못 해 준적도 없고

그 어느 불법체류자도 일하러 오지 않은 지옥 같은 이 공장이 천상으로 올라 갈 수 있게 함께 노력해 줬고

중고 소나타2를 타는 사장이 새차 소나타3을 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일해 줬던 것뿐인데.

 

나는 사장님의 배신 때문에 서운하고 화도 많이 났다.

그래서 회사에서 나오는 날에 편지를 써서 경리에게 주고 나왔다.

 

그편지에는 나는 사장님이 그 동안 나에게 한 약속을 믿고 성실하게 일을 해 왔지만 결국 사장님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에게고 배신하고 한국인의 이미지까지 망쳤다. 나에게 사장님과 사모님이 늘 하는 말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같이 있을 때는 그것을 잘 표현 못 하지만 마지막에 떠날 때는 엄청 잘 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라고 하는 우리 사장부부는 정이 많은 약속을 잘 지키는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나는 8년 동안 일을 열심히 일 했던 것. 함께 있었던 것에 정말 후회 했다고 편지에 썼다. 나는 내가 가는 마지막 시간에 만약 이렇게 배신하지 않고 2, 3달 워치 월급만 줘도 퇴직금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살 어린 시절 때부터 함께 있었던 것에 하나도 감사하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장님에게는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나의 권리를 당당하게 받기 위해 노동부에 진정서 내겠다고 편지에 썼었다.

며칠 후 노동부에서 나와 사장님을 노동부로 오라고 했다.

나는 나를 배신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부천 노동부로 갔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노동부로 안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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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10:02 2010/10/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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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추운 겨울.
서울시 성공회 성당 앞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와 전면 합법화 요구 농성장.
버마, 네팔,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중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이주민지원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래된 친구들을 내쫓지 말라고
소리 높였다.

나도 공장에서 나와 농성장에 참여했다.
우리의 주장은 우리는 한국경제의 필요한 밑바탕 역할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해 왔고
97년도 외환위기 때도 한국을 떠나가지 않았고 한국 경제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왔고
2002년도 월드컵 때도 한국 축구팀을 무조건 힘찬 응원했다.
슬플 때나 기쁠 때 함께 했었던 진정한 친구 역할을 했었는데
이렇게 정을 끊고 눈을 감아 무조건 내쫓는 것보다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현대판 노예제도인 산업연수제도를 폐쇄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허가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농성이 시작하자 우리들이 외친 구호들은
“스톱크랙다운(강제 추방 증단)
노동권리 보장.
우리는 노동자
노동자는 하나다.”
이었다.

우리는 농성장 내에서도 밖에서도 그 구호들을 수십 번 외쳤다.
나는 그러다가 지루하겠다고 생각이 들어 구호들을 노래로 만들어 줬다.
노래의 제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였다.
노래가 신나고 쉽기 때문에 농성 동안 우리는 여러 번 즐겁게 부르면서 우리의 요구를 외쳤다.
요즘도 서울지역을 포함해 지방 이주민 인권 쟁취 요구 집회 때도 이 노래를 꾸준히 틀러 부르고 있다.
얼마 전 아시아 지역 NGO활동가들이 한국에 왔을 때도 이 노래를 좋아해서 열심히 외워 공연도 해 주셨다.
노래가 신나다는 것 보다 노랫말이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노동자의 권리요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농성을 함께 하는 음악인 이주민들과 함께 “스톱크랙다운”밴드를 결성해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들을 계속 만들어서 농성장 내 이주민들에게 희망을 향한 힘을 함께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들을 농성장 주말 문화제 때 시민 단체들의 행사 때 공연을 했었다.

농성 중 어느 날.
농성단 대표가 우리밴드에게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해서 음반을 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음반을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하자는 것이 음악 하는 나에게는 반가운 일은 아니다.
마음에 들 때 까지 녹음을 꼼꼼히 해서 질 좋은 음반을 내고 싶은 게 음악인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음악적 욕심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의 음반을 통해 우리들의 세련 된 문화적 이주운동에서 얻은 효율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료로 녹음해줄 스튜디오는 아주 바빠 꽉 찬 일정 속에서 하루를 비워 주겠다고 하는데
그 날이 지금부터 8일째 날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7일 동안 음반에 들어 갈 노래들을 작곡, 작사와 연습까지 다 완성해서
8일째 날에 녹음을 하루 안에 다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현실주의자인 우리는 우리가 해낼 수 있을지를 확인해 봤다.

모든 멤버들이 가능하다. 해보자고 자신 있게 답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이주민지원센터 지하 쉼터에 있는 작은 방에 드럼과 각종 음향들을 이동해 7일 동안 아침부터 새벽까지 작곡, 작사와 연습을 미친 듯이 했었다. 나는 대부분 노래들을 작곡을 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과 불안, 책임을 아주 무겁게 들어 노력했었다. 몰론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미누형(보컬)이 작사를 해주고 맴버들의 적극적 의견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8일째 날.
우리는 녹음실로 가는 길에서도 계속 노래가사를 수정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10시부터 새벽1시 까지 점심과 저녁 밥 먹는 시간 외에 쉬지 않고 녹음을 했었다.
녹음이 끝난 새벽1시.
원래 기타 주자인 내가 드럼을 하루 종일 치게 되어 허리가 심하게 아팠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이 녹음이 잘 끝내게 되어 아주 기뻤다.
하루 종인 쉬지도 않고 녹음을 해서 힘이 들어도 힘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밴드 멤버들이 그리 당당할 수 있었다는 이유는 우리들의 희망이 담긴 노래들에서 얻은 힘 이였다.
녹음이 끝나자마자 스튜디오 내 모든 엔지니어분들이 모여서 믹싱을 급히 했었다.
새벽 3시에 드디어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긴 첫 음반이 탄생했다.
그 음반의 이름은 “친구여 잘 가시오”이였다.
강제추방 공포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게 된 이주민들에게 잘 가시라는 뜻이었고
세월이 흘러가도 그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헌신한 것을 잊지 말라는 이유로 음반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여기서 더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바로 녹음실 주인의 이야기다.
그날이 아내 생일 이였는데 우리의 음반을 위해 아내와 함께 보낼 시간을 포기하셨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남들과 다른 아주 소중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이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담긴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희망하는 음반을 함께 만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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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8:04 2010/10/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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