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가 지났지 벌서 4월달인데 왜 새해 복을 주고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셨죠?

 

버마사람들에게는 이제 새해 입니다.

버마 달력에 따라 새해는 4월 달 중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버마달을 숫자로 1월, 2월 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버마에서는 다쿠, 까송, 나용, 와소, 와컹, 떠다링, 따딩쭛, 다성몽, 낫떠, 뺘또, 다뽀되, 다뻥 라는 12개 이름을 가진 12개월이 있습니다.

건기, 우기, 가을 삼 계절을 가진 버마에서는 가장 무더운 4월, 온도 40도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에서 땀이 줄줄 나옵니다. 이런 엄청 더운 날씨와 함께 버마의 희망찬 새해도 시작 됩니다. 새해 첫날 3,4일전부터 지난해의 잘못과 더러움을 물로 씻어낸다는 뜻으로 서로에게 물 뿌려 주는 물축제(띤잔)를 합니다.

 

가장 큰 축제이고 가장 흥분과 긴장,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물축제 날이 되면 버마인 모든 일상생활 탐포를 멈춰 남녀노소 길거리로 나옵니다. 버마인, 외국인,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건 불문하고 서로 마구 물을 쏟아 붓습니다. 뿌리는 사람은 뿌리는 대로 물 맞는 사람도 맞는 대로 불만 없이 모두 다 즐겁습니다. 물을 맞아서 화를 낸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고 만약 화를 내는 사람은 주변인들이 자기를 외계인처럼 쳐다볼 것이다. 특히 축제 기간 동안 절대로 화를 내고 욕을 한다면 정신이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겁니다. 소리를 더 크게 지르면서 자기에게 물을 더 많이 부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만약 축제동안 물 안 맞고 새해를 맞이한다면 버마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서운한 것이 없을 겁니다.


 






버마인들은 희망이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가장 준비되어야할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축제 동안 떠자민이라는 신들의 왕이 천국에서 내려와 인간의 선악을 점검하고 기록한다고 믿는 버마인들은 그날동안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으로 살려고 합니다. 축제 때 신이 두 권의 명부를 들고 오는데 선행을 하는 사람들을 금으로 엮은 명부에,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견피로 된 명부에 기록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금으로 엮은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기 위해 버마인들은 화를 내야 할 때도 꼭 참고 선행을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버마인들에게는 묵은해는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해는 물로 정결히 씻고 좋은 행동으로 맞이해야한다는 의자가 아주 강합니다.

 


















@ 지난17일 부천에서 열린 버마물축제

 

철저한 불교신도들은 신년축제가 열리는 3일 동안 금식하며 승려에게 보시를 행합니다. 이 기간 동안 팔정도(八正道)의 원리를 특히 엄격하게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 
바른 생각 
바른 말 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관찰
바른 선정
바른 노력 입니다.


어떻게 보면 새해는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하는 긴장한 마음의 준비를 주는 소중한 날입니다.

혹시 올해 1월달에 새해를 위한 준비한 계획들이 현재 잘 진행 되어 가고 있나요?

잘 안 되고 있다해도 포기하지마세요. 새해는 꼭 1월달부터 아닙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이라는 것은 꼭 1월달부터 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4개월이 지났고 늦었다고 생각하지마세요. 버마인들은 4월달부터 새해를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설레는 마음으로 만들고 있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는 날이 여러분의 새해 첫날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한번 크게 소리칩시다.

오늘이 나의 새로운 날이라고...

밍글라 닛띳바!! (축복받는 새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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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9 20:34 2011/04/1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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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밴드 첫 무대 1999년 미얀마공동체 행사. 


 나의 첫 음악생활 ‘유레카’

나는 1995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김포에 있는 한 박스공장에서 일했다.  

매일 14~15시간 긴 노동을 하면서 지내게 된 나의 첫 한국생활은 정말 힘들다.

나는 기계 사이에서 내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기 어려운 삶을 멋지게 한번 살아보려고 한국에 왔다.

 

그래서 나는 이런 힘든 생활 속에서도 항상 즐거움을 찾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나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음악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도 일 끝나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 한 곡을 부르면 피로가 풀렸다. 주말이 되면 내 주변에 일 하고 있는 버마친구들과 우리 공장 에서 모여 통기타 라이브 쇼를 했다. 우리공장은 주택가가 없는 산 위에 있어서 주말이면 맘껏 노래를 소리 질러 불러도 된다.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2003년도 농성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8년 동안 그 공장에서만 일했었다. 주말이 되면 우리 공장은 항상 음악 스튜디오로 변신하고 우리도 노동자에서 음악인으로 변신했다. 이렇게 우리는 음악으로 온몸과 마음을 충전시켜 힘겨운 노동생활을 가동해왔다.

 

1998년 12월 부천외국인노동자센터에 있는 미얀마공동체에서 활동하는 내 친구가 나에게 찾아왔다. 성탄절 기념으로 이주노동자들이 교회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노래 불러주는 잔치가 있는데 기타 치는 이주노동자가 필요하니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반갑게 응하고 잔치전날 센터 가서 함께 노래할 네팔, 스리랑카, 버마친구들과 연습을 했다. 잔치 때 부를 노래를 연습한 후에도 우리는 팝송, 한국 노래, 미얀마노래를 새벽까지 신나게 불렀다. 나의 기타 연주 소리, 이주노동자들과 센터 실무자들의 노랫소리가 성탄 전날을 아름답게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음악의 힘을 확실히 알게 됐다.

 

예상대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래에 어린이들이 즐겁고 어린이들의 즐거움에 성탄절이 완벽했다. 잔치가 끝나자 센터 실무자분이 나에게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하며 노래도 부를 줄 안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로 밴드를 결성

하자고 했다. 기다렸던 기회다. 나는 그 의견에 기쁘게 응하고 버마, 네팔, 스리랑카, 한국 등 여러 나라 사람과 구성된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 결성 후 한 달 안에 일이 힘들어서 절반의 팀원들이 밴드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대로 거대한 음악의 힘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주말마다 나와 노래를 불렀던 친구들과 같이 밴드 활동을 계속했다. 내 친구들도 일이 힘들어서 연습하러 꾸준히 나오기가 무리였다.

 

그런데 추석 때 미얀마공동체가 하는 행사 때 전체 프로그램을 노래공연으로 해주기를 나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미얀마공동체의 도움으로 밴드 연주자를 빨리 모집하고 노래 부를 친구들도 초대했다. 3개월 동안 매일 새벽까지 일하면서 점심시간에 10분 안에 밥을 빨리 먹고 나머지 50분을 친구들이 부를 노래 곡들의 악보를 땄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센터에서 마련해준 풍물실 에서 하루 종일 합주를 하며 ‘유레카’라는 밴드 이름으로 1999년 9월 추석 때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뜨거운 햇빛을 버티며 낮 12시부터 저녁 5시반 까지 노래 45곡을 연주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리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무리한 결과로 그 공연

으로 인해 6년 동안 ‘유레카’밴드와 함께할 맴버들을 얻었고, 2003년 해체될 때 까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음반을 낼 때까지 이주민 역사 속 문화운동의 한 부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레카밴드 첫음반"인생이 무엇인가?" 기념공연

 

 

미누와 나의 인연

나는 ‘유레카’밴드 결성 당시 첫 공연부터 여러 이주민행사 공연을 할 때 마다 ‘강라이, 미누’라는 네팔 노래패와 무대에 자주 만났다. 이주노동자로서 한국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며 힘찬 박수를 받고 즐겁게 살고 있는 우리 서로 만날 때 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누라는 친구가 정말 노래도 잘 부르고 인사도 잘 하고, 성격도 좋은 것 같고, 무대 매너도 좋고 해서 함께 음악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미얀마공동체가 주최하는 행사 때 미누를 공연 초대한 적이 있었다. 2000년도 KBS 노래자랑 때도 나와 함께 무대에 함께한 적 있다. 백인들과 전문음악인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미누는 대상을 받았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 대신 대상을 받는 것이고 3D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대상을 받는 역사를 미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미누와 나의 인연은 항상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유레카밴드 음반 기념 공연 때도 초대 가수로 우리의 공연을 빛내줬다. 나는 유레카밴드와 미얀마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 상황, 노동환경, 노동권리에 대해 알게 됐고 정당한 권리를 얻기 위해 여러 이주노동자 권리 투쟁 집회 에 참여했었다. 그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고 있었던 미누와 만났고 서로 인사하며 함께 집회를 했다.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는 것도 같았고 자기의 권리를 위해 나서 싸우는 것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지내 왔던 우리는 하나가 되는 날이 왔다.

>>>계속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다문화의 현장"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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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3 16:40 2011/04/13 16:40

"건강하다는 것이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거대한 권력, 명예, 황금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도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버마에 아주 유명한 여성 부자가 있었습니다.

고급 주택에서 살고 고급차를 타고 다녔던 그녀는 어느 날 병이 들어서 병원에서 오랫동안 누워야 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라서 병문하는 손님들이 참 많았죠. 하지만 그녀는 병 때문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부드러운 좋은 쌀로 만든 밥도 못 먹게 됐습니다. 늘 누워 있어야하며 거친 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는 한 때 고급스럽게 살았던 시간들이 꿈만 같았습니다.

 

매일 병실에서 혼자 지내게 된 그녀에게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 병실에 있는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장면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매일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며 건강하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살게 됐습니다.

 

어느 날 병원 옆에 있는 건물을 다시 재공사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사장에 들어와서 일하게 됐습니다. 공사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버마 여름날씨 온도 40도하에 무거운 벽돌, 모래 등을 들면서 아주 힘들게 일하고 있는 모습들을 그녀는 매일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땀이 이마에서 자신들의 발가락으로 뚝 뚝 떨어지는 것도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사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노동의 힘든 것을 무시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즐겁게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서 준비해온 참기름 바른 삶은 콩과 거친 밥이 들어있는 도시락을 꺼내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그녀는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고급스러운 주택, 차를 못 가져도 좋고

고급스러운 음식을 못 먹어도 좋아.

가난해도 좋아.

하지만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싶다.

건강한 몸만 가질 수 있다면 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특히 여러 목적으로 타국에 와있는 이주민들이 가장 약해질 때 가장 서운한 때는 몸이 아플 때입니다. 아픈 것도 서운한데 옆에 돌볼 주는 가족이 없다면 몸도 정신도 아프게 되어 참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에 다가 큰 병이 걸려 거대한 치료비를 부담하게 되면 정말 살기 싫은 정도 힘듭니다.

이주민들에게는 할 수 없이 병들게 되면 병처럼 심한 또 하나의 고통은 치료비입니다. 미등록이라서 건강 보험 가입이 안 되는 이주민이 감기 한번 걸리면 약2만원 치료비를 부담하게 됩니다.

한국 내 이주민들의 건강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면

다양한 인종, 문화를 가진 이주민 120만 명과 함께 다문화사회로 향하고 있는 한국에서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의 노동 사업장에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수는 70만 명입니다. 이들 중 약 2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계 하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등록노동자 상태로 한국 경제 밑바닥 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의 뒷면에서는 그들이 흘린 땀과 노동의 기여가 인정받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여전히 제도적 차원의 변화를 뒤로하고 보여주기 식의 정책을 펼치며 그들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무시와 차별을 개선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이주노동자에게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산인 의료 지원에 대한 국가의 외면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들은 미등록 신분이라는 족쇄로 인하여 기본적 권리인 건강보험 가입을 하지 못해 작은 아픔에도 큰 치료비를 부담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식에게 까지 무시되고 있는 기본 권리가 되 물림 되고 있어 심각한 인권 침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땅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같은 인간으로서 이주노동자 역시 건강을 유지할 권리는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경제를 위해 이바지 하고 있는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건강한 노동으로 건강한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한국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부터의 고통스럽고 외로운 목소리의 전달과 인권이 소중하게 지켜지는 성숙한 민주주의 한국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무도 어떤 이유로써 라도 사회적으로 소외당하지 않게 외면당하지 않게 따뜻하게 안아주는 달콤한 다문화 사회를 위해 제도적 인도적인 차원에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 건강한 사회가 가능합니다.

 

(이주민 건강 권리에 대한 참고자료는 아래 링크에 따라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보기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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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18:53 2011/04/05 18:53

사장의 위임이라는 노무사가 나에게 다가와 "소모뚜씨, 우리 회사가 일거리가 없어서 여러 가지로 어려워하고 있는데 그걸 이해해줘야죠. 소모뚜씨도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 했었는데 사장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요."등으로 나에게 회사가 어려워서 봐 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노무사의 말을 들으면서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이 없는 우리들 보다 부족함에 대한 겁이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나를 통해 거대한 수익을 챙겼던 자본가 사장이 지금 나에게 기본적 노동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굉장히 아까워하고 있다. 8년간 그가 나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하고 비교하면 내가 받아야 할 권리는 쥐꼬리만 한 것인데.

 

법을 배운 노무사가 법을 통해서 이야기 해주지 않고 무조건 사장을 봐 달라만 이야기 하고 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내가 많은 것을 가진 사장을 어떻게 봐줘야 할지 몰라서 노무사에게 "노무사님, 제가 법도 못 배워서 하나만 물어 볼께요. 노무사님이 법은 배우신 것이 사회에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최소한 법의 보호로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법을 배우신 것 맞나요?"라고 물어 봤다.

노무사가 가슴을 쫙 펴서 그렇다고 답했다.

 

내가 "저는 이 회사를 위해 8년 동안 하루 평균 15시간 일을 해왔고 지금 회사 그만두게 돼서 대한민국의 근로 기준법에서 정한 퇴직한 노동자가 받을 수 있다는 권리인 퇴직금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게 이렇게 노동부까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서 요구해야 하고, 사장과 노동자가 서로 감정적으로 적처럼 되어가고 있고, 심지어 노무사님까지 퇴직금을 받으려 하는 내가 사장한테 미안해 해줘야 하는 식으로 말씀을 하고 있네요."

" 그럼. 노무사님의 판단에는 제가 퇴직금을 받을 권리가 없나요? 있나요?"라고 물었다.

노무사가 "받을 권리 있죠."라고 답했다.

 

내가 "그럼, 권리를 받으러 온 저는 제 역할을 다했으니까 그 권리마저 주기 싫은 사장님에게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에 노무사님이 우선 노력하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내 말이 끝난 후 노무사는 노동부앞 주차장에 있는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모님을 연락해서 불렸다. 찡그린 얼굴로 나타난 사모님에게 나는 인사를 했다. 사모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녕 못해!" 라고 거칠게 말 했다. 밤이든 낮이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일을 해줬을 때 나에게 고맙다고 얘기 했던 얼굴하고 360도 달랐다. 우리가 최소한 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이렇게 미움 받고 힘들어야 하는 것인가?

 

노무사는 사모님한테 나에게 퇴직금을 줘야 한다 하며 어떤 식으로 줄 건지는 서로 협상하라고 말 했다. 나와 사모님은 노동부 건물의 한구석으로 협상하러 갔다.

 

사모님은 나에게 정도 없이 이렇게 노동부까지 신고해서 퇴직금을 받으려 하냐 하며 나무랐다.내가 당신들이 만약 내가 퇴사할 때 나에게 따뜻한 한마디와 아쉬움의 표현을 했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나도 안 했을 텐데 나는 지금 내 권리를 받고 싶은 마음보다 나를 배신한 당신들의 행동에 실망한 마음의 상처가 더 커서 이렇게 까지 하게 됐다고 답했다.

 

처음에는 화가 난 사모님과 배신당해서 억울한 나는 서로를 탓하는 분위기로 이야기가 되어갔지만 나중에는 8년 동안 함께 지냈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분위기가 점점 따뜻해졌다.

 

이야기 중 회사가 힘들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사장님이 넓은 새 아파트, 소나타3 새 차 등을 구입하는 것과 일본에서 제작한 새로운 여러 기계들이 회사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사장님의 회사가 힘들다는 말을 8년 동안 들어 봤었기 때문에 사모님의 말이 별로 새롭지 않았지만 자기네들을 자꾸 봐달라는 도와달라고 말하는 사모님을 보고 마음이 힘들었다. 내가 이들에게 무슨 큰 죄를 지고 있는 것인가? 퇴직금 800만원을 받으려하는 내가 한 회사를 끝장내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나는 당신들의 돈을 받고 난 후에 그 돈들을 어딘가에 갖다 버리고 싶다"고 말하자 사모님이 나에게 "정말? 그럼 다른데 버리지 말고 나한테 줘" 라고 말 했다.

 

듣다가 한심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사모님이 내가 퇴직금을 안 받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에게 미안해 하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하는 사모님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건 안 되고 다른 것 요구하라고 하니 퇴직금의 절반을 깍아 달라고 했다. 결곡 나는 나의 권리를 깍아 주고 싶은 사모님에게 150만원을 깍가줬다. 그리고 내가 받아야할 나머진 액수도 3개월 나눠서 받기로 했다.

 

650만원의 퇴직금을 3개월동안 나눠받은 후 나는 버마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보냈다. 버마수도 양곤에 있는 유명한 쉬다곤 사원이 보이는 근처에 살고 싶다는 어머니의 평생소원을 이루어지게 해줬다.

 

이렇게 해서 나는 배신당해서 얻은 서운함을 해결했다.

이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 퇴직금을 받는 것보다 소중했다. 가진 자들의 끝없는 욕심과 욕망. 욕심을 위해서라면 힘없는 사람들에게 한 약속, 정, 배려를 져버려도 된다는 그들의 인식 등을 배웠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 법에서 정한 기본적인 권리마저 보장하기 싫은 사업주들의 비양심적 행동에 대한 감시, 단속, 처벌을 하고자 하는 사회적 관심, 노력과 행동들은 안 보이고 살기 힘든 약자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법과 규칙들이 정해져 있다. 가진 자들이 만들어 낸 법을 지키기 어려운 약자들은 어쩔 수 없이 법을 위반할 경우 받게 된 처벌은 목숨까지 잃어야할 정도다.

 

한국은 한국을 사랑한다는 미누 같은 이주민들을 쫓아냈고, 한국에서 거주한지 100년 넘는 교민들,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아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생각해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반면에는 자신의 다양한 목표로 한국을 아예 떠났던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유명해져 세계적으로 알려지면 그 유명한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처럼 한국을 내 고향처럼 생각하고 정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보여주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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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5 10:11 2011/03/15 10:11

밥 먹기 힘든 날들
 

 

미얀마 새로운 독재자 서마웅 정권은 다시 선거에서 이기려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써서 선거를 치뤘다. 그러나 버마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에 투표했다. 선거에 민족민주동맹이 압도적으로 이기자 미얀마군 정부 안에 불안함이 일어났다. 결국 이들은 국민들이 목숨 걸고 뽑은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감옥에 넣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또한 그들은 국민들을 예전보다 더 감시하고, 어떤 정치나 복지 활동도 허용하지 않는 여러 탄압을 시작했다. 88민중항쟁 때 참여한 국민들한테도 다양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무원인 우리 아버지가 해고당했다. 당시 버마에서는 한 가족에 한 명이 직장을 다니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도 가족 생계비가 충분했다.
 

 

사진설명[그림: 윤필]


하지만 아버지가 해고당한 후 가족의 생계비 문제가 심각해졌다. 부모님은 대학 1학년인 나와 고등학생인 여동생 두 명에게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너네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고 위로해주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이 고마울수록 가족의 생계문제를 공부 집중으로만 덮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밥을 먹으려고 밥통을 열었다. 밥통 속 밥을 보니 내 힘으로 만든 게 아니라 부모님들이 힘들게 일하셔서 생긴 밥이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미안해졌다. 맘 놓고 밥 먹기가 힘들어졌고 밥 먹을 때마다 괴로움이 나타나 더 이상 창피해서 못 살게 되었다. 나도 가족들을 위해 돈 벌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쉽고 들어올 때는 어려운 것이 돈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일자리 찾기도 어려운 데다 힘든 일은 대학생인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쓸데없는 내 자존심 때문에 나는 일자리를 잘 구하지 못했다. 양심과 자존심 속에 헤매던 내게 어느날 한국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했으면 월급을 줘야지
 

 

내가 한국에 들어온 1995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인권상황은 참 열악했다. 뭐 지금도 똑같지만. 하지만 당시엔 이주민 지원센터들이 요즘같이 많지 않아서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친구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그때 이주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 사업장 폭행, 산재 무보상 등이 기본 어려움이었다. 우리는 공장마다 일일이 들어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일자리가 있다고 무조건 아무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공장 사장이 월급을 정말로 줄지 안 줄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공장에 아는 친구나 이주노동자가 일한 적이 있다면 월급을 주는지 안 주는지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달 일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한 달이 되고 월급을 받게 돼야 맘 놓고 그 공장에서 계속 일하기를 결정 내릴 수 있었다. 만약 한 달이 돼도 월급을 안 준다면 봉사해줬다 치고 정리해 나와야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이 힘드냐 안 힘드냐보다, 월급을 주냐 안 주냐가 우선이었다. 물론 월급을 한 달 밀려 주는 것이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일해주기도 했다. 가끔 월급을 안 주는 공장에만 들어가서 일하게 되어 6개월 동안 월급 한 푼도 못 받고 봉사만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월 평균 70만 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주노동자 두 명에게 월급 50만 원을 반씩 나눠 주겠다는 사업주도 있었다.
 

 

사진설명[그림: 윤필]


근로 조건이나 사업장 내 한국인들과의 관계도 한국말을 잘 하냐 못 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말을 잘하는 이주민들이 사업주 맘에 들지만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빨리빨리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일자리를 찾거나 알아볼 때, 사장에게 근로조건에 대한 요구를 할 때,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이 나중에 문제가 덜 생긴다.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한국말을 잘 하는 이주민을 많이 부러워하고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을 한다. 나는 공장에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바보 취급당하기 싫어서 한국말을 5개월 만에 잘 할 수 있게 노력했었다. 내가 한국말을 잘 하게 되니 내 친구들과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다양한 어려움들까지 해결 해 줄 수 있었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한국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한국사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버마 안에서 하기 힘든, 인권과 자유를 위한 활동들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이지만 법적으로 싸워서 자신의 노동권을 얻는 것을(물론 쉽지 않지만) 보게 되어, 그런 것이 가능한 민주주의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버마에서 ‘노동권’, ‘인권’이란 위험한 단어들이다.
 

 

나를 인권활동가로 만든 한국
 

 

내게는 도와 달라는 이주민들의 상담전화가 많이 온다. 대부분 임금체불, 사업장내 문제, 산재 무보상, 일자리 알아보기, 사장과의 근로계약, 어떻게 아픈지 말을 할 줄 몰라서 약국이나 병원 갈 때 통역을 도와 달라는 것 등이었다. 나는 이들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다가 한국 내 이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많이 알게 됐고 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안타까워했다. 이미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왜 그들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는 건가.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따뜻해지는 것인데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은 왜 그런 것을 느끼지 못 하고 있는 건가.
 

 

사진설명[그림: 윤필]


나는 이주민들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웃을 수 있게 하는 일에 빠졌다. 그들이 눈물 대신 웃음을 짓게 되는 걸 보면 나도 행복해진다. 이것이 바로 행복인 것 같다. 몰론 매달 부모님에게 월급을 보내 줄 때, 내가 보낸 돈으로 예쁜 옷을 사 입은 가족들의 사진을 볼 때 기쁨, 그것도 행복이지만. 나는 그렇게 이주민들의 어려움을 남 일 같지 않게 풀어가면서 분노, 안타까움, 슬픔과 기쁨 속에서 활동가로 점점 변한 것 같다. 만약 그때 이주민들이 기본적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었더라도 내가 오늘날처럼 활동가가 되었을까.
 

 

내 나라 버마의 상황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미 한국에 와있는 버마 학생활동가들 덕분에 버마에서 구하기 힘든 버마 정치, 인권 상황을 알리는 소식지, 책 등을 읽게 되어 미얀마 정부의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 행동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놀랐고 슬프며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생겼다. 이들은 자기나라 국민에게 왜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여기 타국에 와 있는 우리도 기본적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데. 그래서 나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게 됐다. 물론 나무도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점점 활동가로 변해가는 것도 인식 개선에 따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규모로 시위해도 아무도 잡혀가지 않는 것으로 나를 부러워하게 했던 민주주의 한국, 이주민들의 인권을 존중해주지 않는 것으로 나를 마음 아프게 했던 한국이 나를 오늘날 버마와 한국을 위한 인권활동가로 만들었다. 여기서 나를 적극적인 활동가로 변하게 했던 것은 2003년 강제추방 반대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농성장이었다. 한국 경제 밑바닥 일을 책임지는 이주민들의 꿈을 망치고 목숨을 빼앗는 강제 추방이라는 비인간적 제도를 반대하는 농성에 참여하던 중이었다. 자진 출국하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겠다는 한국 정부의 불확실한 배려를 기회라 생각하고 자진 출국하기로 결정한 버마 노동자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미얀마 대사관에서 자국민들에게 요구한 거대한 세금, 거대한 비용이 드는 여권 재발급 요청이었다.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린 나
 

 

자국민들이 다른 나라에서 탄압당하는 것을 도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탄압의 기회로 잡은 미얀마 정부의 부하 미얀마 대사관의 행동을 참을 수 없어 나와 친구들(현 버마행동 한국 회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의 정부와 타국 정부, 두 정부의 탄압을 동시에 받게 되는 이주민들, 참 힘들었다. 미얀마 대사관은 미얀마 정부에 우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했다. 대우 인터내셔널 가스 공사장을 폭파할 조직이라고. 참 이상하다. 3천 명의 국민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미얀마 정부, 이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외국 기업들과 나라들. 멈출 수 없는 욕심을 가진 이들이 이 세상에 당당하게 존재해서 우리가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해결하고자 나왔던 나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이제 본국으로 들어가기 어려워져 위험에 빠졌다. 위험할 것을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정의를 위해서 함께 싸울 동료들이 주변에 함께 있고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의 두려움을 이겨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끝나지 않은 싸움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많은 활동들을 해야만 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국제 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에 와 있는 우리는 한국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본인들이 체류한 나라의 관심과 지지를 만들고 있는 다른 나라의 버마 활동가들처럼.
 

 

나와 동료들은 그런 목적으로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됐다. 난민 신청 후 우리는 집회, 기자회견, 세미나, 간담회, 행사, 공연, 음반 등을 통해 한국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게 노력했다. 활동 운영비를 위해 회원 모두가 매달 15만 원씩 내고 하루에 평균 15시간 공장일 하면서 남는 시간에 버마의 민주화 활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제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활동하는 단체들과 동료들 그리고 이주민들과 버마인들도 많이 생기고 버마내부에도 활동가들을 양성해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하지만 법무부는 우리들의 활동을 소극적 활동이라며 난민 인정을 거부했다. 독재정권 하에 고생해온 한국이 소극적 활동은 위험하지 않다고 하는 게 참 이해가 안 됐다. 독재자들이 소극적 활동은 용납한다는 것인가. 민주화가 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이 이 점을 잘 알 텐데. 외국에 단체 만들면 불법단체로 징역 35년, 블로그에 정부 풍자한 만화 한 장을 올려서 징역 12년, 국제노동기구(ILO) 관계자 명함을 가지고 있어서 징역 15년형을 시원하게 내리는 미얀마정부를, 법무부는 잘 모르는 것인가. 국제사회를 잘 알아야 하는 외교부에서 난민에 대한 일을 처리한다면 한국에서 난민 신청하는 이주민들이 이런 헛고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는 법원에 법무부를 상대로 난민 인정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 2004년 난민신청한지 7년 후 행정, 고등, 대법원을 거쳐 2011년 우리는 승소했다. 7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해야만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민족민주동맹 회원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물론 초기에는 이들도 법원에 소송하며 몇 년 후에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만 내가 활동하는 버마행동 한국 회원들은 난민 인정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심지어 버마행동 대표는 자기보다 늦게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이 인정받는데도 아직 결과를 못 받고 있다. 왜 그럴까? 법무부는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사건’ 항의 성명서에 버마행동이 왜 참여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조직해서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당신들을 어떻게 난민으로 받아 주냐? 난민이라는 것은 우리랑 같이 살아도 된다는 뜻인데.”라고 말했다. 이런 법무부의 인식을 보면 우리가 난민 인정을 받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나라 사람의 인권만 인권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의 인권도 인권이기 때문에 우리는 국경이 없는 인권을 위한 활동을 했을 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같은 생명들인데 너 나를 분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 대법원에서 난민 인정을 받게 된 후 나에게 “국내법을 잘 지키면서 한국에서 지내라”라는 메일이 들어왔다. 참 어려운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지키고 지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것이다. 그런 행동으로 다가올 모든 상황을 당당하게 기다리며 살아갈 것이다. “사회 약자를 안아줄 줄 모르면 인권이 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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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01:03 2011/03/10 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