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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4년도부터 현재까지 초등·중학생들 대상으로 다문화 강사활동을 해 왔다.

 

버마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버마 내에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다는 것, 버마와 한국 두 나라간의 다른 점들 등등을 ppt와 영상으로 설명해주는 식으로 강연을 했었다.

 

아이들은 내가 버마가 남한 보다 7배가 크다고 할 때, 버마에 여러 가지의 보석들이 나온다고 할 때, 버마에 있는 우리 집의 앞뒤에 바나나 나무가 4개 있다는 것을 얘기 해줄 때마다 우와, 우와 하며 귀엽게 반응하면서 유심히 들어준다.

 

대나무로 만든 버마정통 공 (칭롱)을 보여주고 관련 영상을 보여줄 때는 영상에서 나온 버마 어린 소녀가 발, 무릎, 머리 등으로 다양한 자세로 공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치는 것을 아이들은 입을 쫙 벌리고 신기하게 본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영상에 봤던 대나무공을 가져서 열심히 따라 쳐본다. 처음에 공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치는 버마정통 칭롱 공놀이를 직접 해보던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렵자 나중에는 칭롱 공을 가지고 축구나 배구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버마정통 웃을 입혀주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버마 웃을 입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점점 자기도 한번 입어보겠다고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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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져온 통기타로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를 불러주면서 다 같이 부르게 한다. 역시 이번에도 아이들은 아주 귀엽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아이들과 나의 사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가까워진다. 내가 버마어 인사말, 감사 말을 가르쳐줄 때도 아이들이 열심히 따라 외친다. 나에게는 아이들이 외치는 버마 말이 왜 이리 귀엽고 아름답게 들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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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는 기부 문화가 강해서 사람들이 매일 매일 기부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의 집 앞에서 시원한 물이 담긴 항아리를 갖다 놓고 길가다가 목이 마른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물 기부를 한다. ‘기부는 남아야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적더라도 기부를 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기부문화에 대한 설명을 했을 때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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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님 앞에서 팔짱끼고 있는 버마 어린이 사진을 보여 주면서 왜 이 아이가 팔짱을 끼고 있는 걸까 물어보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선생님한테 혼나서라고 답했다. 버마에서는 선생님이나 어른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이야기해야 예의 바른거라고 설명 해주자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한국에서는 그게 건방진 모습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를 교류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 어렵지 않았다. 왜냐면 아이들과 나는 이미 하나가 되어 가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버마에서 보내준 버마간식을 맛보라고 준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답게 버마간식을 맛있게 먹어 준다. 그리고 나는 준비해온 카드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림들이 들어 있는 카드들과 그림을 뜻하는 버마어가 적혀진 카드들을 맞춰보는 놀이다. 신기하게도 아이들 대부분이 엄마, 아빠, 선생님 그림이 있는 카드들과 그 뜻을 의미하는 버마어가 있는 카드들을 잘 맞춘다. 나는 여러 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카드놀이를 시킬 때마다 같은 경우를 보게 되어 늘 놀라워했다.

아이들과 나는 문화로 노래로 놀이로 음식으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서로 친해지고 정도 들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사이에 편견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자,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버마의 문화, 음식, 놀이 등을 많이 설명 해줬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궁금한 것이 있다면 손들어서 물어보세요.”라고 얘기를 한다. 아무도 손을 안 든 적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 대한 많이 궁금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이 틀려버렸기 때문에 좀 당황했다. 그래서 내가

“좋다, 그럼 선생님에 대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손들어 봐요.” 라고 얘기하자 아이들 거의 손을 들어

“선생님! 몇 살이에요? 애인 있어요? 첫사랑 이야기 해 주세요” 등등 나에 대한 질문들을 하나둘씩 던져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면 아이들에게는 다른 나라의 문화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해줘도 아이들에게 진짜 궁금한 것은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한국어를 하는 자신들과 친하게 노래하고 노는 아저씨가 누군지에 대해만 궁금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보다 다르게 생긴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울림을 통해 서로 간에 벽을 없앨 수 있다. 이미 아이들이 나에게 이것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 머릿속 기억 속에 남을 것은 버마가 어떻게 생겼고 문화가 어쩌고 하는 것 보다 소모뚜라는 다르게 생긴 버마아저씨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문화보다 먼저 사람에게 집중 합시다”

아이들에게 얻은 교훈이다.

 

소모뚜

[이글은 한국장애인 재단 “세상을 여는 틈”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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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23:10 2011/06/21 23:10

농성장에서 결성 된 Stop Crack Down Band
 

농성시작 이틀 째 우리의 농성장으로 미누와 강라이를 포함해 네팔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왔다. 네팔공동체가 결합해서 우리의 농성장이 더욱 강해졌다. 사람이 많아져서 더 재밌는 것 같아. 우리는 오전과 저녁마다 한 번씩 농성장 밖으로 나가 집회하고 나머지 시간은 농성장안 에서 지냈다. 이때 나, 미누와 강라이는 농성장 내 작은 음악회를 가진다. 미누가 노래하고 내가 기타 치면서 농성장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나는 유레카밴드 때 10만원으로 샀던 드럼, 기타들과 앰프들을 이란주 선생(아시아 인권문화연대-대표)이 내준 5만원으로 차 빌려서 농성장으로 가져와 농성장 한자리를 아예 음악실로 만들었다. 내가 드럼을 치며 강라이가 기타를 치고 소띠하의베이스 소리에 맞춰 미누가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농성장 내 음악활동이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농성하느라 힘든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들의 노래가 피로 회복제가 됐다. 함께 노래들을 부르며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순간에는 지금 우리가 이 한국 땅에서 쫓겨날 대상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토요일마다 농성장 내 문화제가 열러 명동성당 앞 농성장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여러 곳 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부를수록 재밌는 ‘우리가 원하는 건’노래가 가장 인기 많았고 그 노래 때문에 농성장 내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밴드를 Stop Crack Down 밴드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우리도 소중한 우리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해서 그 이름 ‘Stop Crack Down’ (강제추방 중단!!)를 밴드 이름으로 했다. 농성하면서 우리는 각종 단체들의 후원행사 때 나가서 공연하게 됐다. 우리 밴드는 농성하느라 밖에 나가 공연하느라 정말 기쁘게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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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탑크랙다운밴드의 농성장내 공연 중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 ‘친구여~ 잘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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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추방 공포 때문에 자살한 이주노동자들

정부의 단속 추방이 강화가 될수록 매일 들은 소식들은 좋지 않았다. 강제 추방 공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은 자살하기 시작했다. 전동차 앞에서 뛰어내리는 이주노동자, 배 타고 고향으로 들어가면서 바다로 뛰어내린 이주노동자, 빚지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일자리가 없어서 밧줄에 목을 매어목숨과 희망을 버린 이주노동자. 이렇게 꿈과 희망을 안고 한국에 들어온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하나씩 안타깝게 죽어가는 이 강제 추방은 정말 싫다. 고향에 계신 이분들의 가족과 부모님들이 이 슬픈 소식을 알면 어떻게 될까? 정말 가슴이 아프다. 이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와 미누가
‘친구여~ 잘 가시오’라는 곡을 함께 만들었다. 역사가 이들을 잊지 않기를 위해서다.

 

친구여 잘 가시오 

우리의 친구여 동지여

편안하게 가시오.
 

저 세상 끝에서 보아라.
 

너를 위해 우리 기도해
 

오~오 오~ 잘 가~
 

오~오 오~ 너를 위해 우리 기도해~
 

우리 친구여 동지여
 

얼마나 힘들었나.
 

더 이상 이런 죽음 없게
 

널 위해 기도하네
 

우리 함께 기도하네
 

(작곡/사- 소모뚜, 미누)

>>>계속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다문화의 현장"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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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20:55 2011/05/21 20:55

 

지난주 금요일. 김포 어린이집 아이들 대상 다문화 교육을 하는 두 번째 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소모뚜 선생님이다! 소모뚜 선생님이다!” 라고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난주 금요일. 아이들에게 교육했던 첫째 날에는 아이들은 나를 “아저씨 누구세요? 뭘 하러 여기 왔어요?” 등등 낯선 질문들을 내에게 던졌다. 다르게 생긴 나를 보고 질문들이 많았다. 나는 아이들의 질문 하나, 하나를 친절하게 답해줬다. 우리들은 만난지 10분만에 서로 친해졌다. 나의 질문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더 이상 낯설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주는 버마어를 상큼한 목소리로 따라하면서, 나도 아이들의 궁금한 것들을 따뜻하게 대답해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어떤 이익을 받을까 라는 이윤이 우선이라는 논리도, 마음도 전혀 없다. 서로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지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이는 순수하고 참 편했다. 사랑이란 무엇을 얻을까를 바라서 한다하면 그것이 없어질 때 사랑도 없어진다. 하지만 무엇을 해 줄까라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아이들과 나의 사랑이다.

 

어린이들과 재밌는 시간을 지낸 후 나는 연합뉴스 기자랑 만나러 종각역으로 갔다.

나에게 “다문화 뉴코리안”이라는 인터뷰를 해 달라 해서 가는 것이다. “다문화 뉴코리안”이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거주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한국인이 되어 가는 이주민 1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는 기획기사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내가 이제 사회 구성원이 되어가면서 어느새 내가 새로운 한국인으로 변했나가 핵심인 인터뷰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할 것이 없다. 솔직히 내가 언제부터 한국인이 됐냐는 것에 고민한 적이 없었다. 김치 없이 밥 먹을 때 김치를 찾는 것이 한국인이 됐다하면 그럼 나는 이제 한국인이 된 것 같다. 버마 말을 할 때보다 한국말 할 때가 더 편하다는 것. 뭐 이런 것이라면 내가 한국인이 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나는 16년 동안 한국인을 포함해 수많은 외국인들과 만나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모양은 달라도 모두 다 똑같이 슬플줄, 기쁠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경험을 통해 한국인, 버마인, 네팔인 등 명칭만 다르지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명확하게 알게 됐다. 그래서 나에게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왜 차별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올 때마다 사람은 사람에게 차별하면 안 된다고 답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한국인도, 버마인도, 외국인도 없어져서 그렇다.

 

나의 뉴코리안 인터뷰기사가 지난 일요일에 인터넷 세상으로 노출됐다. 앞서 말했던 대로 뉴코리안 인터뷰대상은 독일인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탈리아인 미수다의 크리스티나, 소련인 축구 골키퍼 코치 신의손, 몽골 출신 아리옹씨, 중국동포 이림빈 한마음협회장, 베트남댁 이유정씨, 스리랑카인 이주노동자 상담원 프레마랄씨, 중국동포 강광문 서울대 교수, 여성 가족부 공무원 정수림씨와 나를 포함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이주자 총 10명인데 내가 마지막 인터뷰 대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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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차별 없애야 한다는 뉴코리안 기사와 압플들.


 

 

 

 

그런데 이들과 인터뷰한 기사들에는 답글도 없고 압플도 없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서양인이나, 교수의 기사에는 압플이 없고 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겸 난민인 나에게는 압플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개선 활동하는 나에게는 압플이 풍부하다. 대부분 압플은 이주노동자가 위험한 존재, 살인자, 범죄자 뭐 이런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인권수준에 대한 당사자 내가 직접 겪었던 이야기를 말한 것에 대한 반감의 압플이 많다.

 


 

사람은 사람에게 차별하면 안 된다고 말한 내게도 압플이 많지만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동남아 여성들이 노인이랑 결혼해서라도 한국에 시집오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이런 여성들도 탐탁지는 않지만 인종이 다른 동남아에서 원숭이를 데려오는 것보다는 낫다”며 동남아 출신 이주결혼여성을 원숭이에 빗댄 글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0월 한 달 동안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 인터넷상에

▷혼혈인 증가를 막기 위해 국제결혼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등 뿌리 깊은 순혈주의

▷특정국가 출신 외국인을 테러리즘과 연결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경향

▷특정 국가나 피부색에 대한 편견 등 인종차별적 표현이 난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G20 회의장 인근에 무슬림 사람 접근을 금지시켜야 한다. 테러 대비를 위해 접근 시 전원 사살해야 한다.” “우리 기숙사에 수단에서 온 흑인 두 명이 있는데 흑인 냄새가 아주 지독하다”는 등 외국인을 위협적 존재로 표현하거나 비하하는 표현 등이 적지 않았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도 피부색이 까맣거나 행색이 남루한 연예인을 두고 ‘동남아 스타일’ ‘동남아마약판매상’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내 차별의 원인이 어릴 때부터 단일민족이 자랑스럽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등등할 수 없다는 교육을 받아 온 것의 결과라고 본다. 음악, 예술, 스포츠 등 물질적인 면에서 국가 간, 사람 간에 우리는 남보다 잘한다는 것의 표현들을 강조하다보면 국가와 인종주의 애국심과 함께 다른이들은 우리보다 못한다는 방향으로 빠져 차별과 무시가 생긴다. 자제할 필요 있고 겸손할 필요 있어서 참 중요한 부분이다. 태양의 밝은 빛이란 쳐다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꽃의 향기로움도 향을 맡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때 힘들었던 한국의 아픔기억을 잊으려 하는 자세를 충분히 이해해도 그것으로 또다시 아픔을 만들면 안 된다.

 

한집에 사는 가족들끼리도 소통이 잘 안되면 이해와 배려도 그만큼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이 소통을 해야 할 대상이 더 이상 늘 동경의 대상으로 빛내온 서양인만 아니라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덜 발전한 아시아 국가사람들이다. 강자에게 잘 보이고 약자에게는 무시해도 된다는 차별의 원론을 이제 없애야한다. 이제 한국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이 아니고 그동안 숨겨져 왔던 약자이면 차별하는 인식이다. 그것이 이주민들과 함께 사는 것에도 필요하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도 바꿔야 할 시급한 문제다.

 

요즘 결혼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쳐 주고 있는 활동들이 많다. 환영한다. 하지만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잘 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본인들의 언어 본인들의 문화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사람은 다양한 문화를 겪게 되면 생각도 넓어지고 사람에 대한 편견도 달라진다. 생각이 넓어진 이주여성들이 이주아동들을 키운다면 미래세계에는 요즘 같은 한심한 상황들이 줄여들 것이다.

 

다르게 생긴 아이들하고 지내게 될 한국아이들에게도 신경 쓸 필요하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가르치는 부모들 때문에 한국아이들과 이주 아이들 사이에 벽이 생기고 있다. 지혜로운 부모에서 착한 아이들이 나오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하는 교육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거주 이주민들이 이사회의 뉴코리안으로 탄생해서 살아가는 것에 관심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존중하며 인종차별 하지 않은 새로운 한국인들, 뉴코리안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함께 사는 다문사회, 국격을 올리는 것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소모뚜
2011-05-10

@ <다문화 뉴코리안> ⑩미얀마 난민 소모뚜씨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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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3:50 2011/05/10 13:50

한국!! 희망이 땅인가, 죽음의 땅인가

2003년도 정부의 고용허가제 도입과 미등록노동자 강제 추방이 결정되었다.

강제추방 공포에 지쳐 전동차 앞으로 뛰어내려서 세상을 떠난한 이주노동자의 소식, 경고음과 함께 라디오에서 나온 불법체류 외국인을 신고하라는 방송 등이 강제추방 공포에 빠진 이주노동자들에게 큰 충격이 됐다.

 당시 40만 이주노동자들 중 80%가 미등록노동자이며 이들에게 이제 희망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되어가는 한국. 단속에 걸려서 잡힐 때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을까, 열심히 일하는 것이 죄가 되어 쫓겨나야만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까.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함께 걸어온 역사를 생각해본다.

 1997년도 외환위기 때 한국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는 월급을 반만 받고 사장님과 라면 함께 먹으면서 노력했다. 어떤 이주노동자들은 본인들이 가진 금품을 기부하여 한국경제 되살리기에 적극 참여했다.

 2002년도 월드컵 경기 때 우리도 빨간 티를 입고 빨간 머리띠를 메며‘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며 한국 팀을 응원하러 광화문 거리에 나갔다. 우리의 힘찬 박수와 목소리 그리고 한국 국민들의 박수와 목소리 모두 다 하나가 되어 한국을 지배했다. 이를 보면 우리는 기쁠 때도 함께 힘들 때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는 한국 국민들에게 진정한 친구라는 뜻이다.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법제도를 도입한다면 당연히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제도가 되어야 하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는 제도를 만드는 건가? 제도에 따르면 체류 4년 미만자는 합법화, 4년 이상 체류자 13만 명 에게는 강제추방이다.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한 번 닦고 버린 휴지 조각이 되는 건가? 오랜 친구를 쫓아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정부의 비인간적 강제추방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했다. 어떤 이주노동자들은 몇 달 동안 숨어 있기 위해 친구들이랑 방을 얻어 지내기를 했다.

어떤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낮에 하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일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와 버마공동체 회원들은 부천외국인 노동자센터와 함께 우리의 권리를 위해 농성투쟁하기로 했다.

 

우리는 2003년 11월 15일 저녁에 명동성당 앞으로 버스를 빌려서 갔다. 농성투쟁을 할 이주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모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알고 지냈던 소띠하와 내가 얘기하게 됐다. 우리 둘은 그때서야 서로 제대로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소띠하가 내게 자기가 유레카밴드에 대해 관심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본인도 대학교 때 밴드 활동했고 베이스기타 쳤다고 했다. 나도 소띠하가 베이스 친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래서 내가 우리 농성하면서 같이 노래하자고 말했다.

 

11월 15일 저녁에 명동성당 앞 계단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이 모였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도 모였고. 우리는 우리의 권리 그러니까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구호들을 외쳤다. 밤이 깊어갈수록 날씨도 추워진다. 우리 모두가 명동성당 앞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줄줄이 앉아 도시락으로 저녁 먹고 침낭으로 온몸을 덮어 밤을 새웠다. 날씨가 너무 춥기 때문에 추운 것 너무 싫어하는 내게는 지옥 같은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성공회 성당 쪽으로 옮기게 됐다. 어떤 이주노동자들과 단체들은 명동성당 앞에서 남아 농성했다. 왜 따로 하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밤새 구호 함께 외치며 친해진 이주노동자들, 한국인들과 다 같이 농성을 하고 싶었다. 
 


                           ▲2003년 강제추방저지 농성중
 

 농성 첫날에 만든 노래 ‘우리가 원하는 건’

 농성 시작하는 그날 저녁 나는 똑같은 구호들만 외치고 있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외칠 수 있게 모두구호들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 노래는 지금까지 여러 곳곳에서 열린 수많은 이주노동자 집회 때 사용하게 된 ‘우리가 원하는 건’이라는 곡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STOP! STOP! STOP! CRACK DOWN
 

WE ARE LABOR
 

WE WANT LABOR’S RIGHTS
 

투쟁 투쟁 투쟁
 

 


강제 추방 반대 한다
 

우리는 노동자
 

우리는 노동자 권리 보장해
 

투쟁 투쟁 투쟁
 

(작곡/사- 소모뚜)


 


노래 들어 보기

 

 


>>>계속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다문화의 현장"에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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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12:20 2011/05/05 12:20

7년만에 난민인정 받은 버마민주화 활동가 뚜라 씨,
주기 싫은 걸 받게 되니 기쁨 보다 씁쓸한 마음뿐.

                    

  "난민인정은 한국정부가 나에게 주기 싫은 것을 받는 것이라서
받은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난민신청자들을 존중해주고 인정판단도
국제난민협약 기준에 따라서 했으면 좋겠어요.”
(난민신청한지 7년만에 난민인정을 받게 된 버마민주화 운동 단체 버마행동한국의 대표 뚜라 씨의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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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민주화 운동가 뚜라씨


 

지난 2004년, 뚜라 씨는 한국정부를 상대로 난민신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내에서 이뤄진 버마 반정부 활동 때문에, 귀국 시 인권 침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10년 5월, 신청한지 7년이 지나서야 법무부는 대답했다. 불허. 그의 활동이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귀국 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7년 동안 그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버마행동한국>의 대표로서 살아왔다. 7년간의 반정부 활동을 근거로 다시 이의 신청을 했다. 또다시 1년을 기다렸다. 올해 4월, 대법원은 버마행동한국 회원들이 제기한 난민 인정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정했다. 그 후 4월 26일, 뚜라씨도 법적으로 난민이 됐다.

그러나 그는 기쁘지 않다는 첫 소감을 밝혔다. 한국 내 이주민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자신을 한국정부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94년 한국으로비인간적인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를 깨닫고

 

뚜라 씨는 1994년 한국에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해서 경기도 일대 제조업체에서 프레스 기계가공분야에서 일했다. 처음 한 달은 18만원을 받았고 100시간 이상 야간에 일을 해도 수당은 5만원이었다. 업주는 산업연수생인 그의 처지를 악용해 그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강요당한 뚜라 씨는 서서히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적 횡포에 눈떴고 저항했다. 2003년 버마행동을 발족시키고 2004년부터 이주노동자방송MWTV 공동대표로 나섰다.

지난 2010년 5월. 법무부는 그의 반정부활동이 소극적이라며 난민신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뚜라 씨가 생각하는 이유는 다르다. 법무부를 비롯한 한국 정부는 한국 내 이주민활동에도 적극적이기 뚜라씨를 눈엣가시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마 활동가들 중에 민주화운동 하려고 한국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저 역시 처음에는 버마인 인권탄압에 문제를 느끼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산업연수생 제도 철폐 시위, 여수 참사 집회, 단속 사망 사건 항의 등에 다 참여했죠. 이런 활동을 법무부 쪽에서는 한국에 대한 반정부 활동으로 판단해요. 싫어하죠. 버마민주화를 위한 활동이랑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는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권과 인권 상황을 한국사회에 알렸다. 이주민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 반정부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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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행동 한국 회원들


한국에 버마인은 3-4천명
그들의 환경에 관심을 갖고, 민주주의를 함께 얘기하기 위해


 

“한국에 버마인이 3~4천 명입니다. 더 많이 버마 민주화 운동에 관심 갖고 참여하면 좋잖아요. 그래서 노동 상담이나 인권 문제로 다가가서 돕고 관계 맺고 버마의 현실을 알리는 거예요. 한국 반정부 활동이 아니고 버마인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얘기하는 건데 정부에서 들어주지 않으니까 길거리로 나와서 전달하는 거죠. 그런데도 아직까지 저를 미워하고 있어요.”

긴 세월동안 아쉬움도 많았다. 불안한 신분 때문에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란 어려웠다.

“그동안 많은 활동들을 해야 하는데 신분이 불안함으로 활동의 영역이 한계가 있었습니다. 난민인정을 받을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고, 버마민주화를 위해 쓸 여력이 줄었습니다.”며 한국의 난민인정 기준에 아쉬움을 표했다.

또한 그는 한국이 국제난민협약에 가입한 나라로써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난민 신청을 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존중해주고 협약의 내용에 근거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신청자가 국내에서 한 활동을 평가하는 것은 협약의 기준에 벗어난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군사 정권의 독재를 피해 외국에서 살거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할 일은 더욱 많다. 버마 내 주민들의 의식개선과 한국 내 외의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그동안 버마의 민주화를 지지해온 한국인 동료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지속적 관심을 부탁했다.

 

1992년 ‘난민의정서’에 가입,
한국의 난민 보호 수준은 OECD 중 최하위


 

한국은 1992년 12월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했다. 난민인권센터(NANCEN)에 최근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난민 보호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이 순위는 2008년 이후 지속되고 있다.

NANCEN은 "법원이 난민으로 판결했던 많은 사례들이 그동안 법무부에 의해서는 인정되지 않았다“며 "법무부가 난민의 인권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편향된 정치논리가 심사에 개입되고, 정확한 정보를 조사하는 전문적인 담당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난민으로 인정 받는 자는 체류자격 거주(F-2), 3년간 체류자격과 취업할 권리, 의료보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생계 지원, 직업 교육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소모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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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14:04 2011/05/04 1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