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뚜, 안녕하세요!
 
 몇 주 전,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에 오셨었잖아요.
둥그런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학생들 중 한명인 고담이라고 해요.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소모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어요.
  
 한 달동안의 네팔 여행을 앞두고, 소모뚜를 처음 만난 어느 상쾌한 아침.
 
낯선 사람 소모뚜는 시선을 확 사로잡았어요.
낯설어서가 아니라, 소모뚜만의 매력으로요.
소모뚜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요.
 
그날 제가 만난 소모뚜는,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어요.
소모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쉬운 것들은 결코 아닐텐데,
소모뚜는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워보였어요.
  

 이전에도 이미 들어보았던 이주노동자의 '불행한 이야기'들.
만약 그 뿐이었다면 제 맘이 그렇게 울렁거리진 않았을 거에요.
 
 그러한 불행한 이야기가 어떠한 '결말'이 아닌, '시작점'에 놓여졌다는 것,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고, 그러기 위해 소모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온 몸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들이 제 맘을 다 후끈거리게 했어요. 정말 뜨거웠어요.
 
 제 머릿속,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수동적인 이주노동자의 그림을 뒤엎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목소리를 외치는 능동적인 그들의 모습들이
너무나 좋았어요. 전에는 전혀 몰랐던 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음이 아팠어요.
특히 우리나라가 버마가 아닌 '미얀마'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
인간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대한민국과 '미얀마'의 두 정부.
 
 앞으로 기회가 되면 버마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어요.
 
 우리나라와 흡사한 버마의 역사를 들으니,
옛날 우리나라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외국에 나가 여기저기 다니며 운동했던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모습이 현재 내 앞에 있는 소모뚜에게 겹쳐지는 게 재미있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국사 교과서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과거의 그 사람들이,현재의 소모뚜인 거에요.후에 버마의 아이들이 역사 교과서에서 만날 인물을 내가 지금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정말 네팔에 가기 싫었어요.
따뜻한 물로 세수를 못 한다든지, 난방도 되지 않는 곳에서 옷을 껴 입고 자야한다든지 하는 사소한 불편함들과'저개발국가'하면 막연히 연상되는 치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요.
 그런데 소모뚜를 만나고 나서,
네팔에 가면 만날 미누, 씨티 버럴, 어르준은 어떤 사람일까가 궁금해지고, 어서 만나보고 싶어지는 거에요.
그렇게 네팔여행에 처음으로 맘을 열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드디어 네팔 여행을 떠나요.
가기 싫다고 칭얼대었던 게 다 거짓말처럼,
이제는 네팔에 빨리 가보고 싶어요. 정말, 너무너무 설레요. 여행이 기대되요.
 다행이지요!
 그 날, 후끈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정말 정말 멋있었던 소모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소모뚜를 알게 되어 기뻐요.
 
 소모뚜.
 언제나 건강하세요.
 
고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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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01:26 2010/10/07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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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추운 겨울.
서울시 성공회 성당 앞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와 전면 합법화 요구 농성장.
버마, 네팔,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중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이주민지원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래된 친구들을 내쫓지 말라고
소리 높였다.

나도 공장에서 나와 농성장에 참여했다.
우리의 주장은 우리는 한국경제의 필요한 밑바탕 역할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해 왔고
97년도 외환위기 때도 한국을 떠나가지 않았고 한국 경제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왔고
2002년도 월드컵 때도 한국 축구팀을 무조건 힘찬 응원했다.
슬플 때나 기쁠 때 함께 했었던 진정한 친구 역할을 했었는데
이렇게 정을 끊고 눈을 감아 무조건 내쫓는 것보다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현대판 노예제도인 산업연수제도를 폐쇄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허가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농성이 시작하자 우리들이 외친 구호들은
“스톱크랙다운(강제 추방 증단)
노동권리 보장.
우리는 노동자
노동자는 하나다.”
이었다.

우리는 농성장 내에서도 밖에서도 그 구호들을 수십 번 외쳤다.
나는 그러다가 지루하겠다고 생각이 들어 구호들을 노래로 만들어 줬다.
노래의 제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였다.
노래가 신나고 쉽기 때문에 농성 동안 우리는 여러 번 즐겁게 부르면서 우리의 요구를 외쳤다.
요즘도 서울지역을 포함해 지방 이주민 인권 쟁취 요구 집회 때도 이 노래를 꾸준히 틀러 부르고 있다.
얼마 전 아시아 지역 NGO활동가들이 한국에 왔을 때도 이 노래를 좋아해서 열심히 외워 공연도 해 주셨다.
노래가 신나다는 것 보다 노랫말이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노동자의 권리요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농성을 함께 하는 음악인 이주민들과 함께 “스톱크랙다운”밴드를 결성해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들을 계속 만들어서 농성장 내 이주민들에게 희망을 향한 힘을 함께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들을 농성장 주말 문화제 때 시민 단체들의 행사 때 공연을 했었다.

농성 중 어느 날.
농성단 대표가 우리밴드에게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해서 음반을 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음반을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하자는 것이 음악 하는 나에게는 반가운 일은 아니다.
마음에 들 때 까지 녹음을 꼼꼼히 해서 질 좋은 음반을 내고 싶은 게 음악인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음악적 욕심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의 음반을 통해 우리들의 세련 된 문화적 이주운동에서 얻은 효율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료로 녹음해줄 스튜디오는 아주 바빠 꽉 찬 일정 속에서 하루를 비워 주겠다고 하는데
그 날이 지금부터 8일째 날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7일 동안 음반에 들어 갈 노래들을 작곡, 작사와 연습까지 다 완성해서
8일째 날에 녹음을 하루 안에 다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현실주의자인 우리는 우리가 해낼 수 있을지를 확인해 봤다.

모든 멤버들이 가능하다. 해보자고 자신 있게 답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이주민지원센터 지하 쉼터에 있는 작은 방에 드럼과 각종 음향들을 이동해 7일 동안 아침부터 새벽까지 작곡, 작사와 연습을 미친 듯이 했었다. 나는 대부분 노래들을 작곡을 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과 불안, 책임을 아주 무겁게 들어 노력했었다. 몰론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미누형(보컬)이 작사를 해주고 맴버들의 적극적 의견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8일째 날.
우리는 녹음실로 가는 길에서도 계속 노래가사를 수정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10시부터 새벽1시 까지 점심과 저녁 밥 먹는 시간 외에 쉬지 않고 녹음을 했었다.
녹음이 끝난 새벽1시.
원래 기타 주자인 내가 드럼을 하루 종일 치게 되어 허리가 심하게 아팠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이 녹음이 잘 끝내게 되어 아주 기뻤다.
하루 종인 쉬지도 않고 녹음을 해서 힘이 들어도 힘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밴드 멤버들이 그리 당당할 수 있었다는 이유는 우리들의 희망이 담긴 노래들에서 얻은 힘 이였다.
녹음이 끝나자마자 스튜디오 내 모든 엔지니어분들이 모여서 믹싱을 급히 했었다.
새벽 3시에 드디어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긴 첫 음반이 탄생했다.
그 음반의 이름은 “친구여 잘 가시오”이였다.
강제추방 공포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게 된 이주민들에게 잘 가시라는 뜻이었고
세월이 흘러가도 그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헌신한 것을 잊지 말라는 이유로 음반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여기서 더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바로 녹음실 주인의 이야기다.
그날이 아내 생일 이였는데 우리의 음반을 위해 아내와 함께 보낼 시간을 포기하셨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남들과 다른 아주 소중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이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담긴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희망하는 음반을 함께 만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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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8:04 2010/10/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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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에겐 ‘어깨동무’ 절실해요

[미디어 현장]소모뚜 MWTV 대표

2010년 09월 29일 (수)

 

안녕하세요.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대표 소모뚜입니다. 저는 버마사람입니다. 저는 1995년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들어왔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이주노동자 농성을 통해 2005년 만들어진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MWTV는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이 만들어 가는 방송입니다. MWTV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 이주민(이주노동자, 결혼 이주민가족, 이주아동, 난민)들의 삶과 목소리를 영상과 텍스트 기사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람이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요구합니다. 차이로 인해 차별 받지 않는 한국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농성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정말 절실히 필요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카메라 한 대 없이, 더구나 촬영방법도 모른 채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였습니다. 다행히 시민방송 RTV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장비와 기술, 장소,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주민들의 모든 모습을 담아내려 전국 방방곡곡 이주노동자, 이주민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 어떤 내용 불문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시민방송 RTV를 통해서 무려 11개 나라말로 ‘이주민 뉴스’를 만들어 방송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이주노동자 자신이 카메라에 담고, 방송하고, 들었습니다. 이 땅의 방송국과 신문사의 펜과 카메라에서 사라지던 우리들의 비명, 외침, 웃음을 이제 우리 스스로 만든 방송을 통해 알린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시련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이 미등록 체류자라는 이유로 하나 둘 강제단속, 표적단속으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도 안 되면 회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미디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알리려는 이주민 미디어 활동가들을 키우는 것이지요. 떠난 사람들의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요. 이주민 미디어 교육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슴속 꽉 찬 할 말들이 그들을 그리도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지원했던 미디액트가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국 미디어 교육은 4기로 끝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의 동반자 시민방송 RTV도 정부지원이 끊겨 재정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들의 미디어 활동도 위기 상황에 빠졌습니다.

아시듯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르는 법이죠. 아직도 우리는 할 말이 많아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정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우리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기꺼이 지지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자신들의 생활비를 쪼개어 후원금을 내주셨기에 우리는 다시 살아났고 우리들의 목소리는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어 우리는 한 발 더 내딛기로 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인원과 재정이지만 영화제라는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이주민, 이주노동자가 만드는 영화를 이주민, 이주노동자들이 여는 영화제를 통해 외쳐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보이는 우리들의 모습. 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우리들의 소리.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치러낸 그 감격스러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영화제를 벌써 5회째 열고 있습니다. 영화제에 참여한 이주민 한분이 “이런 활동들이 있어서 더 이상 우리들의 삶이 외롭지 않고, 우리들의 목소리도 헛되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느낌”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들이 요구하는 인간다운 삶, 평등한 삶을 한국 사회가 외면하지 않고 꿈이 현실이 되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간절히 빕니다.
 

지금까지의 발걸음은 한국사회, 한국 사람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이후로의 발걸음에도 바로 한국 사람들의 어깨동무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밍굴라바(축복받으세요라는 미얀마 인사말)’ 축복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준 한국 사회와 한국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밍굴라바.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기사링크......>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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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7:48 2010/10/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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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from 분류없음 2010/09/18 14:59

어머니.
옛날 제국주의자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노예로 살기 위해, 스스로 나갑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꿈꾸는 천국을 지옥에서
찾고 있는 처지입니다.


죽으면 무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살아남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은 했으나 성공하진 못했고,
되러 노예만 됐습니다.

 

겁이 많으면 실패하고,
용감하면 왕이 된다는 속담이 있어서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용감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예만 됐습니다.

저의 용감함이 헛된 것이었을까요?

한 친구는 자기의 나이도 모릅니다.
어떤 친구들은 어머님이 주신 제 이름조차 없고,
사장이라는 사람이 주는 이름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우리의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일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요구만 받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같은 인간이 아닌
그저 착취할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나 봅니다.

 

어머님.
처음에 저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닦아줄 수 있는
수건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의 발을 닦는 걸레 같은
존재가 됐고, 있던 작은 자존심마저 뭉개졌습니다.

지금.
제 마음은, 노예들 조차도 반기지 않는
단물이 빠진 망고씨와도 같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노예라고 표현하는 것에
울지 마세요. 어머니.
그들이 화가 나면,
우리는 그들에게 작은 파리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우리의 목숨은
그들의 애완 고양이보다도 하찮은 존재죠.
이런 상황에서 제가 제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억지를 쓸 수는 없으니까요.
병이 있다고 인정해야 치료할 수 있잖아요.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었어요. 어머니.
링컨이라는 사람이 노예제도를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니에요. 어머니.
여기 와서 우리를 좀 보세요.
링컨은 그들의 나라만 바꿨어요.
그를 존경하지만, 우리들의 처치를 본다면,
그가 한 일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아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죠.
차라리 어려운 것이 좋겠어요.
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새들만 바라보고 있어요.
새들은 종이 다르다고 서로를 배척하지는 않지요.
새들에게는 내전이 없습니다.
새들에게는 종교 갈등도 없습니다.
새들에게는 강제 이동도 없습니다.
만약에 운이 나빠 인간의 손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그들은 사랑을 받지요.
하지만 우리는 갇히더라도 미움과 증오 속에 갇힙니다.
사랑이 너무나 고픕니다. 어머니.

 

세계의 정상들 역시 국익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울음소리를 모른 체 합니다.

인권이라는 꽃은,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피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라는 꽃은 우리 곁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소모뚜

 (이 편지는 한국에서 고용허가제 하에서 일하고 있는 한 버마노동자가 보낸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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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14:59 2010/09/1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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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모뚜씨.
저는 양산남부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3학년 이은형 이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일주일에 한 번씩 양산에 있는 '이주노동자의 집' 이라는 단체에서 이주노동자분들께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꽤 오랜 기간 이 봉사활동을 해 오면서 이주노동자 분들의 진심과 정을 배워가고 있는데요, 그러던 중 소모뚜씨의 다큐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분들 중 가장 아끼는(?) 학생이신 '티하엉'씨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그분과 오랜 기간 수업을 하다가 알게 된 미얀마의 문화를 안 상태에서 미얀마 출신이신 소모뚜씨의 다큐를 보니 뭔가 친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큐를 보고 여러 가지 호기심이 생겨서 소모뚜씨의 기사들도 찾아서 읽곤 했는데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적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글을 읽고서 한국 사람으로써의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소위 편견이라는 것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제가 얼마나 철없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는가. 하고 후회가 되요.
마냥 양지에서 밝은 햇빛만 쬐며 살아온 제가 이주노동자 분들의 눈을 통해 간접적으로 본 한국의 사회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처음엔 한국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회라 힘들었어요"라고 소모뚜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의 잿빛사회가 보였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정(情)'의 나라] 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는데 그것은 양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허황된 인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슬프죠? 미국으로 이민 간 우리나라사람들은 돌아와서는 대부분 인종차별과 편견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아픔을 아는 사회일수록 당신들을 좀 더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똑같은, 또는 더한 눈으로 이주노동자분들을 바라보는 한국사회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꿋꿋이 당신들의 속마음을 자유로이 노래에 담아 연주하는 스탑크랙다운이 아주 멋있었습니다.
허위스럽거나 그냥 그럴듯한 사랑타령이나 하는 그 어떠한 가수들보다도 '진심'을, '희망'을 노래하는 당신들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하다고 생각합니다.
본국으로 강제추방 당하신 미누씨를 위한 연주는 저를 울컥하게 만들었던 것 같네요.
저는 이제 이주노동자분들을, 아니 모두를 친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데, 사실은 손 내밀기 전에 경계부터 하는 분들이 아직 많이 계십니다. 경계의 벽을 차츰 없애기 위해 스탑크랙다운과 함께 우리들의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소모뚜씨 께서는 기타를 연주하며, 지금 당장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법한 외국인들의 희망을 노래하시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앞으로 기타를 잡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부른다.'라는 생각과 함께 연주를 시작하시면 어떨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주노동자분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 더 나아가 세계를 말하고 싶네요.
이주노동자분들께서 바라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바라야 할 세상이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탑크랙다운의 '월급날' 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요.^^ 3집...기다리고 있겠습니다.(미누씨와 함께하는 3집이라면 더없이 행복할텐데요..)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너무나 감사해요. 저의 어린생각이지만 진심을 담은 글이기에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혹시나, 답장을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cmr6224@hanmail.net
(하하) 부끄럽네요. 그럼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스탑크랙다운! = 강제추방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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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6 14:15 2010/08/2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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