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전태일=이주노동자 전태일

 

얼마 전

인간답게 살아 보려고 한국 땅에 들어와서 노력을 한 한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이 사회에는 자신 같은 약자에게는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생명을 걸어 보여 줬다.

사회 약자가 요구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인데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로 향하고 있는가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을 하라고 그는 온몸을 투신해서 물었다.

솔직히 우리는 지금 그의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 아직 없고 대답할 자신도 아직 없다.

입을 가진 누구나 말로는 답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의 질문을 행동으로 보여 줘야하기 때문에 답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이런 상황과 다르게 없는 질문을 우리에게 온 몸을 밭쳐서 던져 가신지 40년이 되는 해다.

어제 서울 광장에서 전태일 열사의 질문을 답하기 위해서 전태일 열사의 동료들이 모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동지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면서 연대사를 했다.

하지만 그런 전태일 열사의 질문을 답하는 소중한 자리에 한국인이 아닌 또 하나의 전태일 같은 이주노동자들의 자리가 없었다. 몰론 한국노동자, 이주노동자 하나라는 발언을 열심히 나름대로 하신 분들과 작은 활동들은 있었지만.

그런데 과연 그런 발언이 정말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깨달음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현재 이주민들의 수가 120만 명이 되니 어쩔 수 없어서 다문화사회를 강요하는 요즘 사회 분위기와 별 다름이 없는 발언인지 이주민 당사자로서는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소의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는 근로 기준법의 소중함을 온 몸을 불에다 태워서 보여 줬던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한국인 노동자 열사들처럼 한국에서 최소 하루 평균15,16시간 고된 노동을 하면서 저임금, 사업장 폭행뿐만 아니라 인종적 문화적 차별까지 추가로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20년 역사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행사장 어디서도 볼 수 없었고 이들의 이야기를 대신해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도 전국 노동자들이 모인 이런 큰 자리에도 없었다.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 평등, 평화의 중요성을 이야기 해왔다면 이제는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하면서 보다 더 넓은 자유, 평등과 평화의 소중함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던 전태일 열사의 요구는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죽음도 헛되지 않기를 바랐던 요구다.

 

오늘2010.11월 8일.

강제 단속으로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아이와 아내가 눈물을 닦으면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가족의 희망을 접고 묵묵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아버지의 꿈이 재가 되어가는 이 현실, 이 잔인한 사회를 4개월 된 아이는 모를 것이다.

 

아마 아이는

얼마 전 자신의 100일 돌잔치 때 함께 웃었던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아직도 들리면서.

일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자신을 먼저 안아주면서 자신의 얼굴 전체에다가 뽀뽀를 해주는 아버지의 땀이 묻힌 입술의 향기.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서로 못 만났던 시간들을 아까워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던 부모님들의 희망찬 대화의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아이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런 아름다운 삶을 잃게 됐고 외로운 삶에 살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앞으로 3년.

아이는 자신이 말을 할 줄 알자마자 그 동안 울음으로만 던져 왔던 자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있냐는 질문을 말로 물어보기 시작 할 것이다. 애타게 찾을 것이다.

이 때 아이의 질문을 대답을 해 줄 사람은 단 아이의 어머니뿐 아니다.

우리도 함께 답을 해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어떤 답을 해줄까요?아이의 어머니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 해줄까요?

시간문제뿐이다.

우리는 아이의 질문에 무조건 답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오늘부터 앞으로 한3년 후 우리에게 던져 올 아이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 날에 우리는 아이에게 아이가 그냥 맘 편히 지낼 수 있게 하는 정도의 대답으로 ?

아니면더 이상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아이가 없는 세상더 이상 이런 끔찍한 질문을 하는 아이가 없는 세상

이런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할까요?

 

우리에게 앞으로 주어진 시간 그러니까 아이의 그 끔찍하고 슬픈 질문이 우리에게 다가 올 시간이 딱 3년 이다.딱 3년 입니다.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겁니까??

 

그 아이의 질문이 나오는 날에

우리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다면

그 대답은

단지 아이의 질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던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열사들의 질문에게도

정답을 했다는 의미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貧富)의 법칙입니까?”

전태일의 1970년 초 작품 초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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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6:47 2010/11/08 16:47

(저와 함께 다문화 인식 개선 교육을 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서온 고려인 이발레리아씨의 글 입니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발레리아라고 하고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부에 있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1993년에 독립했습니다.

소련은 15나라가 구선되고 그 중에서 우즈베키스탄은 하나였습니다.

저는 2000년에 가족들을 생각하며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한국인 남편과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고 하면 우즈베키스탄이 어디 있는지 대부분 몰랐습니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괜찮은데 “너희 나라에 TV 있어? 냉장고 있어?”라고 하면 정말 자존심 상하고 당황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한국 사람들이 저한테 말하기로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혼자서 잘살려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으니까 이제는 여기서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돈 벌면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억울했습니다.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저를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를 우즈벸 사람들은 왜 “고려인”이라고 부를까요?

저희 증조할아버지는 100년 전에 조선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때는 남한 북한도 없었고, 그냥 <조선사람>이었어요.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괴나리봇짐 하나 매고 시베리아 땅을 건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적응하기 힘들었고 많이 굶었고 힘든 농사와 막노동을 했습니다.

1917년 소련이 공산화 되면서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살기가 나아졌지만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정책 때문에 고려인들을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주를 반대하던 2500명 고려인 지식인들이 총살을 당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할 때, 화물차를 타고 길게는 한 달 반을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과 음식이 모자라서 길 위에서 죽었습니다. 대부분 묻지도 못하고 그냥 철길 옆에 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1937년에 3개월 동안 17만 명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 이주를 했습니다. 첫 겨울에 노인과 어린이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서 3분의 1이나 죽었습니다.

다문화가족 경우에 부부가 같이 가는 것은 아니고 고려인만 가고, 만약에 자녀들이 있으면 엄마를 따라갔습니다. 부부가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이주하게 되더라도 화물차에 함께 타지 못하면 도착하는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가족을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최초의 고려인들은 “일본의 스파이”라고 하는 편견과 차별 때문에 기업이나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생이 더 심했습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자기가 고려인이라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살았어요. 처음에 자유롭게 이동 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허가를 받아야만 어디 갈 수 있었어요. 그러서 이주 할 때 헤어진 가족을 찾아서도 같이 살지 못했습니다. 국가시설에서 허가를 주지 않기 때문 에였습니다. 살기 위해, 차별을 없어하기 위해서 고려인들 그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고려인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으로 이제는 우즈베키스탄을 2세들의 고향으로 얻을 수 있었고 모범시민이 됐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에 갈 수 없지만 편견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많은 봉사와 기부를 했습니다. 어떤 분에 기부하던 금액으로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주 후에 소련에서는 학교 수업은 러시아어를 쓰라고 시켰습니다. 그 시간부터 고려인들은 자기 언어를 잃어버리게 됐어요. 그것 때문에 저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를 몰랐어요. 가끔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갔을 때 한국어를 들었어요. 그래서 제 나이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대부분 모릅니다. 소련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자기나라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려인들은 조상들의 고향이 한반도라고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고려인들은 어디로 가야할 지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1994년부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공식적으로 우즈벡어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소수민족들도 불편을 겪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다른 나라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저는 제 조상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평생 고려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그냥 외국인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고려인들만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인생에서 내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제의 남동생이 한국에서 3년이 일했는데 그때 남동생 저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었습니다. ‘차라리 난 러시아사람으로 태어났을걸’ 라며 ‘어차피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외국인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차라리 나는 외국인이었지’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 고향 자랑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서운한지 안했죠‘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려인 라는 것은 어떤 대접 받기 위해서 하고 아니고 다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했는데 고려인이라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자기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 바람뿐이에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제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즈베크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면, 왜 러시아 친구들이 우리를 <고려인>이라고 부를까요? 러시아 친구들은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외모 차이가 없어서 차별을 받지 않아 좋겠다며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 외모차이는 없어.......”라고만 해요.

왜 같은 조상의뿌리를 가진 우리를 외국인이라고만 여기는지

솔직하게 좀 서운한 생각이 들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도 모국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요.

세계가 한 가족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우리 고려인들의 지나온 인생들도 한 번 의미 있게 생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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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3:26 2010/11/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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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방송MWTV가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을 받았습니다.ㅋ ㅋㅋ

요즘 자꾸 좋은 일들만 생겨서 좋아 미치겠습니다.ㅎㅎㅎㅎ

소수자가 살기 좋고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쟁취할 때 까지~투쟁!!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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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18:58 2010/11/0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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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오늘11월 5일.

미누형이 정든 한국에서 추방당한지 일 년이 되는 날.

1년이란 정말 금방 간 것 같아.
내가 어디로 가든 만난 분들이 아직도 미누형이 잘 지내시나, 뭘 하고 계시나 등 등 형의 소식을 궁금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주민들도 자신들에게 노래로 힘을 줬고 미디어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 해줬던 미누형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주민들은 처음에 형이 한국인이줄 알았는데 추방을 당했다고 하니까

“외국인 이였어?”

“미등록체류자였어?”

“그런데 그 불안전한 신분으로 당당하게 활동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어떻게 있는 건가?”

라고 신기하면서 놀라워하면서 내게 물어본다.

그렇다.

우리는 무식하게도 용감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에 좀 그렇지만 형이자 동지를 잃게 된 나는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다. 형도 나도 우리 밴드 맴버들 다 무식 하게 용감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 이주민들의 삶을 알리고자 전국 어디든지 꺼림 없이 다녀서 “스톱크랙다운!!” 탄압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축제, 집회 모든 곳에 가서 이 세상 아무에게도 누군가를 탄압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15000명이 모인 거대한 무대부터 작은 앰프 하나 밖에 없는 아주 작은 무대 까지 시설이 상관없이 우리의 노래로 이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이곳 땅에 들어왔는데 손, 팔을 잃어 고국으로 들어간 이주민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살아 있는 몸으로 다시 고향으로 못 들어갔던 이주민들,

매일 과도한 일을 하면서도 그 대가를 못 받은 이주민들,

그렇게 우리는 나나 너나 누구나 살기 싫은 삶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사회에 알리면서 보다 더 나온 삶이 쟁취할 수 있게 음악으로 활동 했었다. 심지어 노대통령 앞, 문화부 장관 앞에서 박수를 얻으면서 까지.

하지만 그 불안한 신분으로 당당하게 활동했다는 말은 과도한 칭찬이다.

미등록 신분으로 늘 마음이 불안하면서 활동했으니까.

지하철 탈 때, 고속버스터미널 갈 때 늘 주변을 확인하고 다녔다. 강제 추방 단속이 심해도 그 곳을 피하는 것 보다 그 곳에 가서 노래를 했다. 촬영을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책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 하는 일이 책임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그런 삶을 가지기위해 스스로 책임을 느껴 활동을 하게 됐다. 사실 우리밴드 맴버들의 한국 생활은 다른 이주민들처럼 열악하지는 않았다.

모든 맴버들이 높은 월급을 받고 기술자로서 인정받고 당당하게 직장을 다녔다. 우리 중에 미누형은 한 달에 월급2,3백 받으면서 좋은 기술을 배우면서 안전한 삶, 안전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을 버리고 월80만원 활동비 받고 이주노동자의 방송에서 미디어 활동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은 거대한 월급을 외면하고 활동을 하게 된 미누형의 선택을 이해 못하고 놀라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인데도 이래저래 하면서 안 하는 사람이 참 못 된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정말로 필요하는 이주민들의 기복적 인권 보장을 위해 이주민으로서 오랫동안 생활 하고 그 상활을 잘 아는 미누형으로서 이 길을 선택해야만 하고 책임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을 아셨음 한다.

음악인으로서

미디어 활동가로서

다문화강사로서

좋은 친구로서

좋은 삼촌으로서

이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이주민으로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18년 동안 지냈던

미누형이

자신을 추방한 한국이 사랑을 못 받을까봐는

걱정을 하면서 먼 곳 네팔에서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광고를 보면서 글 작성 하게 됨)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7890397&q=%B0%F8%C0%CD%B1%A4%B0%ED
> 진정함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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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12:21 2010/11/0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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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10:50 2010/11/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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