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기 힘든 날들
 

 

미얀마 새로운 독재자 서마웅 정권은 다시 선거에서 이기려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써서 선거를 치뤘다. 그러나 버마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에 투표했다. 선거에 민족민주동맹이 압도적으로 이기자 미얀마군 정부 안에 불안함이 일어났다. 결국 이들은 국민들이 목숨 걸고 뽑은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감옥에 넣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또한 그들은 국민들을 예전보다 더 감시하고, 어떤 정치나 복지 활동도 허용하지 않는 여러 탄압을 시작했다. 88민중항쟁 때 참여한 국민들한테도 다양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무원인 우리 아버지가 해고당했다. 당시 버마에서는 한 가족에 한 명이 직장을 다니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도 가족 생계비가 충분했다.
 

 

사진설명[그림: 윤필]


하지만 아버지가 해고당한 후 가족의 생계비 문제가 심각해졌다. 부모님은 대학 1학년인 나와 고등학생인 여동생 두 명에게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너네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고 위로해주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이 고마울수록 가족의 생계문제를 공부 집중으로만 덮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밥을 먹으려고 밥통을 열었다. 밥통 속 밥을 보니 내 힘으로 만든 게 아니라 부모님들이 힘들게 일하셔서 생긴 밥이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미안해졌다. 맘 놓고 밥 먹기가 힘들어졌고 밥 먹을 때마다 괴로움이 나타나 더 이상 창피해서 못 살게 되었다. 나도 가족들을 위해 돈 벌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쉽고 들어올 때는 어려운 것이 돈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일자리 찾기도 어려운 데다 힘든 일은 대학생인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쓸데없는 내 자존심 때문에 나는 일자리를 잘 구하지 못했다. 양심과 자존심 속에 헤매던 내게 어느날 한국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했으면 월급을 줘야지
 

 

내가 한국에 들어온 1995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인권상황은 참 열악했다. 뭐 지금도 똑같지만. 하지만 당시엔 이주민 지원센터들이 요즘같이 많지 않아서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친구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그때 이주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 사업장 폭행, 산재 무보상 등이 기본 어려움이었다. 우리는 공장마다 일일이 들어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일자리가 있다고 무조건 아무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공장 사장이 월급을 정말로 줄지 안 줄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공장에 아는 친구나 이주노동자가 일한 적이 있다면 월급을 주는지 안 주는지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달 일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한 달이 되고 월급을 받게 돼야 맘 놓고 그 공장에서 계속 일하기를 결정 내릴 수 있었다. 만약 한 달이 돼도 월급을 안 준다면 봉사해줬다 치고 정리해 나와야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이 힘드냐 안 힘드냐보다, 월급을 주냐 안 주냐가 우선이었다. 물론 월급을 한 달 밀려 주는 것이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일해주기도 했다. 가끔 월급을 안 주는 공장에만 들어가서 일하게 되어 6개월 동안 월급 한 푼도 못 받고 봉사만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월 평균 70만 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주노동자 두 명에게 월급 50만 원을 반씩 나눠 주겠다는 사업주도 있었다.
 

 

사진설명[그림: 윤필]


근로 조건이나 사업장 내 한국인들과의 관계도 한국말을 잘 하냐 못 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말을 잘하는 이주민들이 사업주 맘에 들지만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빨리빨리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일자리를 찾거나 알아볼 때, 사장에게 근로조건에 대한 요구를 할 때,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이 나중에 문제가 덜 생긴다.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한국말을 잘 하는 이주민을 많이 부러워하고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을 한다. 나는 공장에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바보 취급당하기 싫어서 한국말을 5개월 만에 잘 할 수 있게 노력했었다. 내가 한국말을 잘 하게 되니 내 친구들과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다양한 어려움들까지 해결 해 줄 수 있었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한국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한국사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버마 안에서 하기 힘든, 인권과 자유를 위한 활동들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이지만 법적으로 싸워서 자신의 노동권을 얻는 것을(물론 쉽지 않지만) 보게 되어, 그런 것이 가능한 민주주의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버마에서 ‘노동권’, ‘인권’이란 위험한 단어들이다.
 

 

나를 인권활동가로 만든 한국
 

 

내게는 도와 달라는 이주민들의 상담전화가 많이 온다. 대부분 임금체불, 사업장내 문제, 산재 무보상, 일자리 알아보기, 사장과의 근로계약, 어떻게 아픈지 말을 할 줄 몰라서 약국이나 병원 갈 때 통역을 도와 달라는 것 등이었다. 나는 이들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다가 한국 내 이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많이 알게 됐고 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안타까워했다. 이미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왜 그들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는 건가.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따뜻해지는 것인데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은 왜 그런 것을 느끼지 못 하고 있는 건가.
 

 

사진설명[그림: 윤필]


나는 이주민들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웃을 수 있게 하는 일에 빠졌다. 그들이 눈물 대신 웃음을 짓게 되는 걸 보면 나도 행복해진다. 이것이 바로 행복인 것 같다. 몰론 매달 부모님에게 월급을 보내 줄 때, 내가 보낸 돈으로 예쁜 옷을 사 입은 가족들의 사진을 볼 때 기쁨, 그것도 행복이지만. 나는 그렇게 이주민들의 어려움을 남 일 같지 않게 풀어가면서 분노, 안타까움, 슬픔과 기쁨 속에서 활동가로 점점 변한 것 같다. 만약 그때 이주민들이 기본적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었더라도 내가 오늘날처럼 활동가가 되었을까.
 

 

내 나라 버마의 상황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미 한국에 와있는 버마 학생활동가들 덕분에 버마에서 구하기 힘든 버마 정치, 인권 상황을 알리는 소식지, 책 등을 읽게 되어 미얀마 정부의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 행동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놀랐고 슬프며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생겼다. 이들은 자기나라 국민에게 왜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여기 타국에 와 있는 우리도 기본적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데. 그래서 나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게 됐다. 물론 나무도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점점 활동가로 변해가는 것도 인식 개선에 따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규모로 시위해도 아무도 잡혀가지 않는 것으로 나를 부러워하게 했던 민주주의 한국, 이주민들의 인권을 존중해주지 않는 것으로 나를 마음 아프게 했던 한국이 나를 오늘날 버마와 한국을 위한 인권활동가로 만들었다. 여기서 나를 적극적인 활동가로 변하게 했던 것은 2003년 강제추방 반대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농성장이었다. 한국 경제 밑바닥 일을 책임지는 이주민들의 꿈을 망치고 목숨을 빼앗는 강제 추방이라는 비인간적 제도를 반대하는 농성에 참여하던 중이었다. 자진 출국하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겠다는 한국 정부의 불확실한 배려를 기회라 생각하고 자진 출국하기로 결정한 버마 노동자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미얀마 대사관에서 자국민들에게 요구한 거대한 세금, 거대한 비용이 드는 여권 재발급 요청이었다.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린 나
 

 

자국민들이 다른 나라에서 탄압당하는 것을 도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탄압의 기회로 잡은 미얀마 정부의 부하 미얀마 대사관의 행동을 참을 수 없어 나와 친구들(현 버마행동 한국 회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의 정부와 타국 정부, 두 정부의 탄압을 동시에 받게 되는 이주민들, 참 힘들었다. 미얀마 대사관은 미얀마 정부에 우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했다. 대우 인터내셔널 가스 공사장을 폭파할 조직이라고. 참 이상하다. 3천 명의 국민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미얀마 정부, 이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외국 기업들과 나라들. 멈출 수 없는 욕심을 가진 이들이 이 세상에 당당하게 존재해서 우리가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해결하고자 나왔던 나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이제 본국으로 들어가기 어려워져 위험에 빠졌다. 위험할 것을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정의를 위해서 함께 싸울 동료들이 주변에 함께 있고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의 두려움을 이겨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끝나지 않은 싸움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많은 활동들을 해야만 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국제 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에 와 있는 우리는 한국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본인들이 체류한 나라의 관심과 지지를 만들고 있는 다른 나라의 버마 활동가들처럼.
 

 

나와 동료들은 그런 목적으로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됐다. 난민 신청 후 우리는 집회, 기자회견, 세미나, 간담회, 행사, 공연, 음반 등을 통해 한국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게 노력했다. 활동 운영비를 위해 회원 모두가 매달 15만 원씩 내고 하루에 평균 15시간 공장일 하면서 남는 시간에 버마의 민주화 활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제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활동하는 단체들과 동료들 그리고 이주민들과 버마인들도 많이 생기고 버마내부에도 활동가들을 양성해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하지만 법무부는 우리들의 활동을 소극적 활동이라며 난민 인정을 거부했다. 독재정권 하에 고생해온 한국이 소극적 활동은 위험하지 않다고 하는 게 참 이해가 안 됐다. 독재자들이 소극적 활동은 용납한다는 것인가. 민주화가 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이 이 점을 잘 알 텐데. 외국에 단체 만들면 불법단체로 징역 35년, 블로그에 정부 풍자한 만화 한 장을 올려서 징역 12년, 국제노동기구(ILO) 관계자 명함을 가지고 있어서 징역 15년형을 시원하게 내리는 미얀마정부를, 법무부는 잘 모르는 것인가. 국제사회를 잘 알아야 하는 외교부에서 난민에 대한 일을 처리한다면 한국에서 난민 신청하는 이주민들이 이런 헛고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는 법원에 법무부를 상대로 난민 인정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 2004년 난민신청한지 7년 후 행정, 고등, 대법원을 거쳐 2011년 우리는 승소했다. 7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해야만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민족민주동맹 회원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물론 초기에는 이들도 법원에 소송하며 몇 년 후에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만 내가 활동하는 버마행동 한국 회원들은 난민 인정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심지어 버마행동 대표는 자기보다 늦게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이 인정받는데도 아직 결과를 못 받고 있다. 왜 그럴까? 법무부는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사건’ 항의 성명서에 버마행동이 왜 참여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조직해서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당신들을 어떻게 난민으로 받아 주냐? 난민이라는 것은 우리랑 같이 살아도 된다는 뜻인데.”라고 말했다. 이런 법무부의 인식을 보면 우리가 난민 인정을 받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나라 사람의 인권만 인권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의 인권도 인권이기 때문에 우리는 국경이 없는 인권을 위한 활동을 했을 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같은 생명들인데 너 나를 분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 대법원에서 난민 인정을 받게 된 후 나에게 “국내법을 잘 지키면서 한국에서 지내라”라는 메일이 들어왔다. 참 어려운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지키고 지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것이다. 그런 행동으로 다가올 모든 상황을 당당하게 기다리며 살아갈 것이다. “사회 약자를 안아줄 줄 모르면 인권이 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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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01:03 2011/03/10 01:03

 

 

안녕하세요~

120만 이주민들의 삶을 노래하는

다국적 이주민밴드 스탑크랙다운 입니다.

 

저희가 설암걸린 이주노동자 활동가 겸 버마 민주화 운동가 아웅나이윙씨의

병원치료비를 위한 노브레인, 허클베리핀 등 한국 대중가수들과 함께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암이라는 큰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뿐만 아니라

2000만원이라는 큰 치료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 그는

12년동안 땀흘린 노동으로 한국경제 뒤밭임을 해주고있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라서 의료보험 가입이 안된다는

제도적 외면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더이상 한국땅에서 존재하면 안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저희밴드가 3월 27일 일요일 오후4시 홍대 근처

서운드홀릭 공연장에 인권콘서트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면하는 한국사회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한국사회로 만드고자하는

저희의 노력에 함께 연대와 후원을 했음하는 마음으로

도움의 손을 요청합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함께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스탑크랙다운

공연문의:

소모뚜 (010-7155-6581)

 

인권콘서트 후원 계좌:

국민은행 648401 01 399272 예금주:우유민

 

 ## 참고로 보내 드린 포스터는 1차용 홍보용 포스터 입니다.

 

현제 후원협찬단체 리스트

1) 서울 외국인노동자센터

2) 인권연대

3) 난민인권센터

4) 아시아 인권문화연대

5) 이주노동자건강연구회

6) 외국인노동자운동협의회

7) 연구공간 수유+너머

8) 재한 네팔공동체

9) 한국이주민건강협회

10) 인권운동사랑방

11) 아산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12) 외국인이주노동자를 위한 인권모임

13) 공익변호사그룹(공감)

14) 향린교회

15) 새사회 연대

16) 버마행동한국

17) 이주민 방송MWTV

18) 한국이주인권센터

19) 한국드럼서클연구회

20)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21)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2) 개척자들

23) 인천여성의전화

24) 아시아이주여성다문화공동체

25) ODA WATCH

 

티켓 예매: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9150

 

공연장 찾아 오시는 길...

 

주소 : 서울시 서교동 344-6  칼리오페빌딩 지하1층

대관문의 : 02)3142-4203

위치 문의전화 : 02)3142-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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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9 11:16 2011/03/09 11:16

 

버마민주화 운동가 아웅나이윈씨가 설암 걸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15시간 동안 수술받고

 

여러분들의 따뜻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 함께 돕는 세상으로 ~

 

함께 활동하실 일은

 

(1)  아웅나윙씨 후원금 관련 다음 희망모금에 모금청원에 올렸습니다. 

 

모금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500명의 네티즌 서명이 필요합니다.

 

아래 링크를 방문하셔서 네티즌 서명에 동참해주시고 주위 분들께도 동참 적극 권유해주세요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donation/view.html?id=103795

 

(2) 그가 큰병의 고통뿐만 아니라 거액의 치료비도 해결해야하는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서로 힘을 모아서 치료비를 후원해요~

 

소모뚜 - 버마이주민 활동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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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20:32 2011/03/01 20:3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장님이 약속한 시간에 안 나와서 근로감독관이 회사로 전화했다.

사장님이 전화를 받았다. 근로감독관이 왜 오늘 안 나왔냐고 하니

사장님이

“내가 일이 바쁜데 거기 갈 시간이 어디 있냐, 그리고 당신들이 왜 외국인 편이냐고, 내가 나라 세금도 잘 내고 있는데 왜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등등

근로감독관한테 소리를 질러서 답했다.

몰론 매일 늘 밥 먹는 듯이 사용해 온 쌍시옷 관련 단어들을 섞어서 하면서.

그 때 사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아주 신 레몬 10개를 한꺼번에 씹어 먹게 되는 것처럼 얼굴이 찌그러진 근로감독관에게 나는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생각만하면 너무 미안했다.

그분이 목소리를 아주 부드럽게 해서 사장님에게

노동부는 누구의 편이 아니라 고용주와 근로자 간에 문제를 같이 해결해주려고 노력하는 기관이라서 여기 오셔서 근로자와 함께 이야기하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만 확인 해보자고 한다 등 등 설명을 해줬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설명이

불법체류자한테 퇴직금을 줄 수 없다, 주기 아깝다는,

나라에 세금을 잘 내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인 자기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 노동부에게 불만이 많은 사장님의 화를 풀러주지 못 했다.

쌍시옷의 주인공 사장님에게 말하다가 지친 근로감독관이 이제 마지막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가 사장님에게 공무원을 욕하면 근무방해로 처벌 할 수 있다. 노동부에 오지 않으면 이문제가 검찰까지 올라가 더 악화 될 것이고 회사도 블랙리스트가 될 거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이제야 겁이 난 사장님이 다음번에 가겠다고 답했다.

근로감독관이 한숨을 크게 쉬면서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면서 사장님이 원래 욕이 많은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내가 그게 우리 사장님의 인사말입니다 라고 답하자 그분이 아주 미안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리고 나에게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것부터 그만둘 때까지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처음에 월70만원만 주고 매날 밤11시,12시까지 어떤 때는 새벽2, 3시 까지 야근 수당 없이 일을 시켰다.

3개월 후에 내가 야근수당을 달라고 했을 때야 사장님이 나를 보면서 너도 이제 알 것을 알게 되네 라고 말 하면서 할 수 없이 나에게 야근 수당을 주게 됐는데 그 야근 수당이 평균수당보다 작았다. 매날 일이 끝나야 할 시간보다 30분 늦게 일을 끝내줘서 그 30분을 야근시간으로 적었는데 동전이 없어서 그30분 더한 것을 야근 시간으로 적지 말라고 했었다.

그리고 공장에 아무도 일하러 오지도 않고 오래있지도 않아서 내 친구들을 불러 같이 일하게 하고 일이 아주 힘들어서 친구들이 일하러 안 나올 때마다 사장님이 나를 친구들을 데고 오라고 늘 부탁했다.

같이 밴드활동을 하면서 나랑 가까이 지내면서 음악을 배우고자 내 공장으로 들어 온 내 친구들은 노동 강도가 아주 센 내 공장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해도 우리가 안 해주면 이 공장이 문닫아야한다. 나도 안 죽고 일하고 있는데 너네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라는 내말에 한숨을 쉰 내 친구들은 그 공장에서 또 다시 일하러 나왔다.

새벽에 일 끝난 후 사장님이 나에게 “소모뚜야 고맙다 , 고맙다, 우리 정을 끊지 말자고 얘기 했고 언젠가 내가 고향에 들어갈 때 사장님이 나한테 뭘 해줄 테니까 다른데 가지 말고 여기 끝까지 있어라 라고 여러 번 약속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일을 그만 둬야 할 상황이 생길 때 사장님이 나를

내가 불법체류자라서 퇴직금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얘기하고 그동안 정을 끊지 말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이 정도 없이 나를 이렇게 배신 한 것을 나는 퇴직금을 못 받는 것 보다 더 화가 나서 이렇게 노동부에 신고하게 됐다고 답해 주면서 사장님을 못 믿기 때문에 8년 동안 꼬박 모인 나의 월급봉투들을 근로감독관에게 보여 줬다.

나의 긴 얘기를 눈물 굴성 하면서 듣고 있는 근로감독관이 8년 동안 모인 내 월급봉투들을 하나하나씩 보면서 한숨을 쉬고 내가 받아야 할 퇴직금을 계산 해주면서 2주후에 또 오라고 얘기 했다.

2주 후.

나는 다시 노동부에 약속 시간 전 30분에 도착했다.

늦어서 내 잘못으로 나에게 탓하고 문제제기 할까 봐 걱정 돼서.

왠지 이제 세상이 좀 두렵고 아무도 안 믿겨지는 내가 되 벌렸나봐.

약속한 시간에 사장님은 안 나타나고 처음 본 노무사라는 분이 내게 다가와서 사장님의 위임자로서 왔다고 인사 했다.

법을 배운 노무사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나는 그 노무사라는 분을 보면서 한숨을 크게 쉬면서 내 스스로에게 말 했다.

“소모뚜야 힘내라! 정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아직도 있을 것이라고…”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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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00:11 2011/02/15 00:11

어떠한 “도카”도 없다고 하는 법무부

소모뚜
1951년 유엔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를 의미한다.

난민을 버마어로 “도카대”라고 한다. “도카”는 “운이 나빠서 여러 고통, 위험, 열악한 상황 등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고, “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난민을 버마어로 “운이 나빠서 여러 고통, 위험, 열악한 상황 등을 겪고 있는 사람”을 뜻하니 “도카대”란 단어는 버마인들에게는 아주 듣기 싫은 단어임에 틀림없다.

위 사진:<삽화: 윤필>

난민 인정에 인색한 한국

나도 역시 그 단어 자체를 싫어하고 내가 언젠가 “도카대”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우리를 “도카대”라고 인정해달라고 대법원까지 호소하고 있는 상황과 너네는 “도카대”가 아닐뿐 아니라, 어떠한 “도카”도 없다고 하는 법무부의 태도는 참 재미있다.

난민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노력도 없는 한국사회에 사는 일반 한국인들에게는 난민이란 단어는 아주 생경한 것이다. 그저 전쟁을 피해 도망쳐서 파란 천막에 노란 옥수수를 먹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번 글에는 나를 포함해 한국에 있는 난민들의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다. 한국에 있는 난민들의 상황을 다 담아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겠지만 이 글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라도 한국 내 난민들의 인권이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버마.
내가 난민이 된 이야기를 하기 전, 나의 나라 버마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하겠다.
100년 가까이 영국식민지로 강국의 노예로서 살아 왔다 1945년도에 아웅산 장군(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과 독립투사들이 “우리는 노예가 아닌 주인”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고 다양한 활동으로 벌여 버마는 독립했다. 독립 후 10년 동안 민주주의 국가로서 경제적, 교육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버마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이 있는 등 세계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인의 목표는 권력”이라는 말대로 버마정치인들 서로 밥그릇을 챙기려는 싸움 때문에 내전이 생겼고, 결국 버마의 아름다움은 군사독재 네이윈(Ney Win) 장군에 손안으로 빠져 1987년도 유엔에서 세계 최빈국으로 발표할 정도로 추락했다.

독재 정권 장악 한지 26년 후 1988년.

내가 13살 때, 우리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88민중항쟁으로 네이윈 정권을 쫓아냈다. 일어서지 못 하는 아이들을 빼고는 온 국민이 일어나서 시위에 참여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호소한 결과다. 그 때 군부는 인권과 자유를 애타게 호소한 국민들을 총으로 쏘고 진압을 해서 초․중․고․대학생, 승려들과 일반 국민 3,000명을 희생시켰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도 학교 선배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었다. 매일 시위에 나가니까 다리도 아프고 구호를 열심히 외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도 했지만 그때 깃발을 들고 자유를 요구하는 수십만 명의 시위참가자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80년도 한국에서 일어났던 5․18민중항쟁의 영향이 88민중항쟁의 뿌리라는 것을 5․18민주화 운동하신 한국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88항쟁으로 네이윈(Nay Win), 세인루잉(Sein Lwin), 마웅마웅(Mg Mg) 등 세 정권을 연속 쫓아낸 후, 서마웅(Saw Mg) 정권이 치른 1990년 대 선거를 통해 국민을 대표하는 민족민주 동맹당(NLD)이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약속을 지킬 줄 모르는 비양심적인 야만인 서마웅(Saw Mg) 군사정부 때문에 버마 민주화의 봄날이 아직도 멀기만 하다.

버마의 인권 상황은 탄압, 학대, 질병

“마약 판매는 용서할 수 있어도 정치활동은 용납 안 해” 라는 군부의 외침대로 정치 활동가들에게 최소 15년형부터 200년형까지 중형을 내리는 과도한 정치탄압, 4살짜리 여자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집단으로 강간을 해서 소수민족 여성단체에서 “강간의 허가”(License to Rape)라는 소수민족 여성들의 피와 눈물이 묻은 보고서까지 나올 정도로 아주 잔인한 군인들이 장악한 나라이다. 그들의 집단 학대와 그들이 지른 불 때문에 마을에 살지 못하고, 아주 깊은 숲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수만 명의 소수민족들이 있다.

매일 언론에서 장관들이 사원, 절에 가서 기부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아주 신앙심이 깊은 지도자들이라는 이미지가 넘친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들의 어려움을 평화적으로 해결 해주고자 평화 행진을 한 승려들을 죽이고 강에다 갖다 던져 벌인 종교탄압을 일삼았다.

한 가족 당 한 명이 도로공사에 봉사하러 참여해야 하고 안 나오면 벌금을 내리는 강제 노동, 미얀마 반정부 해외 사이트에 있는 정부를 풍자하는 만화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서 12년 형을 받는 21살 한 청년. 4월에 하는 버마 새해 물 축제 때 터진 폭파 사고 현장을 사진 찍었던 기자에게 13년 형을 내린 언론탄압,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에 군인들에게 끌려 가 군인이 된 아동군인 7만 명, 국민건강을 위한 국가 예산을 쓰지 않아서 현재 10만 명이 넘는 에이즈환자들. 버마-태국 국경지대에 생활한 100만 명이 넘는 버마난민들.

위 사진:<삽화: 윤필>

한국 정부에게 바라는 것

그런데도 한국을 포함한 중국, 인도, 태국 등 이웃 나라들은 자유와 평화를 잃어 어렵고 힘들게 생활한 버마국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 채, “국익이 우선”라고 하면서 미얀마군정부와의 다정한 인연을 맺고 있는 비양심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5․18민중항쟁으로 버마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멋진 선배의 모습을 보여줬던 한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 군사 정부를 위한 무기 공장을 만들어 준 대우인터내셔널의 비양심적 행동이 버마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2007년 승려들의 혁명 “샤프론 민중 항쟁” 때 승려들과 국민들에게 군인들이 쏜 총알이 대우인터내셔널이 만들어준 무기 공장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총알들이라는 최악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버마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우리들에 대한 한국의 제도와 태도가 일관되지 않다는 점을 짚고 싶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버마민주화를 위한 한국정부의 이미지도 다양하다. 한국 내 버마민주화 활동가들을 대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는 한국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얼마나 넓게 관심을 보이고 인권의 가치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버마민주화와 한국의 민주화는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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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17:59 2011/02/10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