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WTV 이주노동자방송국 소모뚜 대표

고단한 이주노동자의 삶을 통해 사람의 향기를 느끼다

 윤보중 기자    bj7804@nate.com

이주노동자의방송 MWTV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방송국이다.

2004년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한국 정부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추방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에 많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명동성당과 성공회성당을 거점으로 농성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여기에 참여했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방송국이 MWTV이다.

당시에는 시민방송 RTV 제작진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함께 활동할 것을 권유했고, 촬영이나 취재 경험이 부족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며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는데 주력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로 실력도 향상되고,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전문방송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은 이주노동자 목소리를 전달하고 한국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전문방송국 설립에까지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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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WTV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한국 사회의 이질감을 허물고, 소수자의 인권 향상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 소모뚜는 버마 출신의 소띠하와 네팔 출신 강라이, 미누 등과 함께 ‘스톱 크랙 다운’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는 한편, 버마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조직된 사회단체 버마행동에서도 활동했다. 그의 활동 영역은 문화 운동에서 인권 운동까지 외연을 넓혀갔고, 지난 2009년에는 MWTV의 대표직을 맡아 방송국 운영도 하게 되었다.

과정에서 그의 친구, 동료들이 표적 단속 등으로 강제 추방되는 일이 빈번했고 그 때문에 초창기에 함께 활동했던 이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됐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톱 크랙 다운의 리드 보컬이었던 미누도 강제추방 되었다. 소모뚜는 그동안 마웅저, 아웅틴 툰과 같은 유명한 버마 출신 활동가들과 함께 난민지위 획득을 위한 법적 투쟁을 전개했고 2심까지 승소한 상태지만, 여전히 정부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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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버마 출신의 아웅틴 툰의 소모뚜의 생일을 맞아 자신의 요리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닭뼈를 제거하고 마늘과 양파, 찹쌀을 이용해 튀긴 통닭은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민중의소리

소모뚜는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 62주년을 맞아 국가인권위로부터 인권상을 수여 받을 예정이었다. 그가 한국사회의 인권 향상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그는 주류 방송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와 비인간적인 현실을 노래와 방송 등으로 고발하고 폭로하는데 앞장서 왔다. 이는 대외적으로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여러 민족, 인종과 어울려 살아가려는 한국 사회의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존재로 남기 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데 주력해왔다. 그는 인권위와 함께 이주노동자 순회상담에 참여하며 실무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현장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소통 법은 인권위 직원들이 이주노동자를 상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이런 활동이 인정됐기 때문에 국가인권위 또한 그에게 상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국가인권위와 협력하며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활동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동안에도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만 갔다.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지원했던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어느 날은 그들에게 한국 사회에 너무 간섭하지 말라는 투의 상식 밖의 발언을 하고 나섰다. 사실상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사회활동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 셈이었다.

그를 인권상 대상자로 추천했던 인권위 관계자는 더 이상 인권위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권위 상임위원과 전문위원들이 대거 사퇴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마저 발생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현직 국가인권위위원장의 태도를 비판하는 인권운동가들의 요구는 정치권과 전 사회로 확대돼 국가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압도적인 여론으로 형성됐다.

결국, 소모뚜는12월 10일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열리는 인권위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인권상이었다. 더욱이 12월 9일은 소모뚜의 생일이기도 했다. 수유너머 건물에서 같은 층 식구들과 모여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었던 소모뚜는 생일 케이크를 나눠먹던 중에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와 지인들에게 말했다.

“제가 내일 인권위에서 수여하는 인권상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 인권위가 있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 왜냐면 나의 조국 버마에는 그런 기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정치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버마의 인권 상황은 정말 열악하죠. 저도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인권위를 만들고 우리 국민의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국가인권위의 상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인권위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원하는 것, 그리고 인권위가 주는 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의 인권을 증진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권상을 거부하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우리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고, 우리는 상을 받기 위해 인권운동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와 통하고 싶었던 지난 15년의 세월이 소모뚜의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즐겁고 유쾌하던 생일 파티에서 잠시나마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상을 거부하는 행위가 인권을 증진시킬 거라는 그의 확신만큼, 다시 즐거운 시간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는 생일파티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일 꼭 참석해달라는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12월 10일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열린 인권시상식에는 많은 수상자들이 상을 거부하고 불참했다. 심지어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상을 수여하려 하자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현수막을 펼쳐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서는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졌고, 국내의 저명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그의 사퇴와 인권위 정상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리에서 소모뚜는 인권상 수상 거부자로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국가인권위 위원장의 양심에 호소하면서 “한국민의 요구가 무엇이고 인권 향상을 위해 애써온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거기에 귀 기울이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여전히 국가인권위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피력했다. 그는 상을 거부하는 그 순간이야 말로 국가인권위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국가인권위 인권상 거부한 이주노동자방송국 소모뚜 대표

이주노동자방송국 대표인 소모뚜가 국가인권위의 인권상 수상을 거부한 사연을 전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62주년에 맞추어 진행된 국가인권위 인권상 시상식은 많은 수상자들이 상을 거부하며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국내의 많은 인권운동가들은 물론, 정치권까지도 국가인권위 현병철 위원장의 부적절한 언행과 행동때문에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민중의소리


MWTV는 방글라데시, 네팔, 버마,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온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한국인과 함께 운영하는 방송국이다. MWTV는 2011년에는 고발과 폭로만이 아니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송도 늘려나갈 예정이다. 이외에도 그 동안 꾸준히 벌여온 이주노동자 미디어 교육, 이주노동자 영화제와 같은 문화 활동도 확대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지원금이 대폭 줄었고, 이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MWTV도 영향을 받았다. 겨우 후원금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사무실 임대료나 방송 제작 비용에 들어가고 나면 활동가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자원활동가들의 참여가 점차로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지만, 내실 있는 방송국의 운영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관심이 절실한 실정이다.

소모뚜는 올 한 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손이 잘려나갔지만 농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산재 인정이 되지 않는 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의 이야기와 고용허가제의 폐단으로 인해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비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모뚜의 15년. 한국 사회는 참 많이 변했다. 농촌에는 이주결혼여성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그들이 나은 자녀들이 성장해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북에서 온 주민들도 점차로 그 수가 증대하고 있고, 외국에서 온 동포들도 꾸준히 그 수가 늘고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색은 다르지만 엄연히 한국인으로 자란 외국인 이주노동자 2세대도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 꿈과 사랑을 간직한 이들이 단지 피부색이 다르거나 언어나 문화적인 이질감 때문에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제 진중한 답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 여기 그들과의 벽을 허물려는 소모뚜의 작은 노력을 남겨본다.

“우리는 자신이 보낸 돈을 쓰며 잘 지내고 있다는 행복한 모습이 담긴 가족의 사진을 보고 불법체류자로서 타국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고통을 견딥니다. 가족들도 서로 못 보지만 가족을 위해서 고생하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에게 늘 감사하며 늘 건강하기를 매일 기도해주며 삽니다. 서로를 위해서 서로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서로를 감사하며 서로를 더 그리워하며 서로를 더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과 책임지려는 의지를 배울 수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려는 인간다운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윤보중 기자 bj7804@nate.com>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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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4 14:11 2010/12/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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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종이 만난 사람]버마출신 이주민 인권운동가 소모뚜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이자 이주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인 소모뚜는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말한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ㆍ“이주자가 평화로워야 한국도 성숙… 상이 아닌 인권을 달라”

“너무 너무 창피합니다.” 버마 청년 소모뚜(35)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자가 “버마 독재자 탄슈웨가 영국의 축구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인수하려고 했던데…”라고 말을 꺼냈던 것이다.

소모뚜는 40년 넘게 군사독재와 정치적 탄압이 이어지고 있는 ‘최악의 인권국가’ 버마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그런 그가 2010년 말 대한민국 정부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표적인 민간 인권단체인 한국인권재단에서 동시에 인권상 수상자로 뽑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대한민국인권상 ‘인권표창장’은 거부해버렸다. 한국인권재단이 주는 ‘인권홀씨상’만 받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일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게 신문사에 나타났다. 그가 순박하게 웃으며 내민 명함에는 여러 개의 직함이 적혀 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겸 PD,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 한국 총무,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보컬·작곡·기타리스트), 이주민 인권강사….

‘바쁘다’는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스타’다. 부르는 곳이 너무 많다. 다문화 행사장, 축제현장, 시민단체의 공연행사, 다문화교육현장 등에서는 기타, 마이크, 카메라를 든 소모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날도 그는 두 곳의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고,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제작회의까지 참석하느라 서울과 인천을 두 번이나 오갔다. 올해 들어 처음 서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한국 사회와 이주자 사이의 벽을 없애 보자는 거죠. 피부색과 문화가 달라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발음과 종결어미가 약간 부정확하긴 해도 말뜻을 조리 있게 전달할 줄 아는 데다 어휘력도 상당했다. 

-‘인권홀씨상’ 수상을 축하한다. 상금은 어떻게 쓸 계획인가.

“이 상을 개인적으로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옆과 뒤에, 많은 동지들과 단체, 조직이 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 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쁜 마음으로 상금 전액을 소수자 인권운동에 쓰려고 한다.”

-인권위의 상까지 받았으면 더 많은 상금을 좋은 일에 쓸 수 있지 않나.

“상은 누가 주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인권위원장(현병철 위원장)이 주는 상은 인권상다운 인권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받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의 활동을 인권상으로 평가받은 소감이 어떤가.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난민 지위가 인정될 텐데 왜 한국정부 미움을 받느냐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보고 외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있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임금체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일은 나를 위해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내 양심이고 사상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고, 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소모뚜는 15년 전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스무 살 때였다. 김포의 박스공장에서 8년 동안 일했다. 열심히 한국어를 익혔다. 5개월 만에 웬만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 15시간의 고된 노동을 묵묵히 견디며 주임까지 승진했다. 늦게 입사했지만 먼저 계장이 된 한국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도로 숙련된 일꾼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로 어떤 고통을 받았나.

“나는 운이 좋았다. 한 번도 단속반에 붙잡힌 적이 없다. 심지어 단속반원들이 다른 친구들을 잡아가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쳤다. 내가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전생이 한국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그런데 왜 활동가로 나서게 됐나. 

“우리가 한국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아무도 하지 않는 밑바닥 일을 하고 있다. 1997년 외한위기 때는 우리도 월급을 반만 받아가며 일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대한민국~’을 목 터져라 외쳤다. 그런데 2003년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를 강제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이 시작되면서 목숨을 끊는 친구들이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차별당하지 않고, 크게 다친 적 없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서울 태평로 성공회대성당 농성장으로 갔다.”

소모뚜는 당시 인천지역의 버마 동료들과 함께 최초의 ‘이주노동자 밴드’인 ‘유레카’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멤버 가운데 몇 명은 단속에 걸려 추방당했고, 몇 명은 직장으로 숨어버렸다. 그는 혼자 남았다. 쫓겨나더라도 싸우다가 쫓겨나자는 결심을 했다. 농성장에서 유레카의 게스트로 자주 노래를 불렀던 ‘미누형’을 다시 만났다. 지난해 10월 강제 추방당한 네팔인 이주노동자 미누, 바로 그 미노드 목탄이다.

농성이 1년 동안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밴드를 만들었다. 멤버는 미누(보컬)와 소모뚜(기타), 소띠하(버마·베이스), 해리(인도네시아·키보드), 그리고 한국인 송명훈(드럼)이었다. 농성장에서 목 터져라 외쳤던 구호, ‘스톱 크랙다운(Stop Crackdown·단속을 멈춰라)’은 그대로 밴드 이름이 됐다. 그 후 미누와 해리는 강제출국됐다.

-언제부터 기타를 치고 음악을 했나.

“버마 젊은이들은 누구나 기타를 칠 줄 알고 노래를 잘 부른다. 한국에 와서도 휴일이면 버마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어울렸다. 어느해 부천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 이주민을 위한 크리스마스 잔치를 열었다. 버마, 네팔,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해 인기를 끌었다. 센터 사무국장이 권해서 만든 밴드가 유레카다. 스톱 크랙다운은 지금까지 2집 앨범을 냈다. 1집 앨범의 ‘와’와 2집에 실린 ‘월급날’이 꽤 알려졌다. 음악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방송을 하고 있나.

“2003년 농성 당시 시민방송 RTV에서 ‘무한자유지대’라는 제목으로 이주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 후 시민방송에서 이주민들이 직접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는 방송을 제안했다. 시민방송 사무실 안에 책상을 내줬다. 방송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실과 노동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지금까지 이주민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이주민 뉴스 등을 제작, 방송하고 있다.”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현 정부 들어 시민방송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끊겨 상황이 어렵다. 그래도 시민방송이 제작비 일부를 지원해준다. 사무실은 후암동 수유너머 연구소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지원과 정기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지만 항상 적자다. 언제까지 방송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등록 이주자인데 어떻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나.

“버마 민주화운동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다. 아직 난민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인도적 지위 체류허가’ 비자를 받은 상태여서 당장 추방당할 염려는 없다. 지난달 3일에는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뭔가.

“보통 2심에서 승소하면 난민 지위가 인정된다. 그런데 법무부에서 대법원까지 가겠다고 한다. 3년 전 여수외국인보호소에 화재 사망사고 때 다른 인권단체들과 함께 성명서를 냈다. 법무부 인권 담당자와 난민실 관계자가 ‘버마 민주화운동에 전념하지 않고 한국정부를 반대하고 한국 사회를 흔드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난민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주민이 인권침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할 수는 없다. 난민 자격보다 인권이 먼저다. 앞으로도 일이 생기면 항상 앞장설 거다.” 

그는 “얼굴에 오물이 묻어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에게, 그것을 닦지는 않고 말해준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의 단체들과 함께 ‘프리버마’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매월 마지막주 화요일 한남동 버마대사관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한다. 버마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과도 연결돼 있다. 2007년 샤프론 민주항쟁 때는 한국의 도움으로 우리가 재정적 지원을 많이 했다.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존경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배우고 있다.”

소모뚜는 15년 동안 한 번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돈을 버는 대로 모두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아들의 송금 덕분에 양곤 시내 셰다곤 사원 근처에 살고 싶은 평생 소원을 이뤘다. 두 여동생도 모두 대학을 마쳤다. 지금은 영국과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다.

-가족들을 한 번도 못 만났나.

“항상 부모님이 보고 싶다. 마음이 약해질까봐 사진도 잘 보지 않는다. 영국에 사는 동생이 지난 4월 한국에 다녀갔다. 동생을 경복궁에 데려가 한복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동생은 시민권까지 받았고, 영국 생활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부러웠다. 그날 나는 한국에서 소수자가 행복하게 사는 날을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동생에게 약속했다.” 

-네팔로 떠난 미누와 연락은 하고 지내나.

“페이스북, 전화,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나다. 미누형은 네팔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고 농담을 한다. 한국에서 18년을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네팔 생활이 낯설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국을 그리워한다. 요즘은 네팔코리아닷컴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서 한국과 네팔 사이에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잘됐으면 좋겠다.”

소모뚜는 농성 후 서울 가리봉동 소화기 부품 공장에서 6년을 일했다. 지난해 미누가 추방될 때 해고됐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의 방송 상근자로 월급 90만원을 받는다. 집은 가리봉동의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1만원짜리 ‘쪽방’이다. 다행히 강연이나 공연으로 조금씩 돈을 받기 때문에 버마에 계속 송금도 하고 있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노래방에 가면 진짜 잘 논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가사가 너무 좋으니까. 나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며 산다.”

-한국 생활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기쁘다. 부당하게 월급을 못 받는 친구, 사업장에서 폭행당하는 친구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그런 문제를 해결했을 때 행복하다. 강연이나 노래를 듣고 한국분들까지 호응해줄 때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다. 지금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행복하지 못했을 거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권이다.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문화’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동남아 이주여성들이 한국 농촌의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단순히 출산하기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서구인은 동경하고, 동남아인은 무시하거나 범죄자 취급하면서 무슨 다문화사회인가. 관청이 주도하는 축제나 행사도 필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꿈을 감싸줄 때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주자의 삶이 평화로워야 한국 사회도 성숙해질 거라고 믿는다.”

-언제 버마로 돌아갈 것인가.

“버마가 변했을 때.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조국에서 실천하고 싶다. 버마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돌아가면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못 돌아간다.”

-당신이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 내 활동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면 어떤 시련에도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버마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돌아가서 복지와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다.”

“밍글라바!” 그가 ‘축복받으세요’라는 뜻의 버마어 인사말을 남기고 함박눈을 맞으며 돌아갔다. 

(소모뚜는 인터뷰 이틀 뒤인 10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 시상식장에서 당당하게 인권표창장 ‘수상거부 소감’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들이 원한 것은 상이 아니라 인권입니다”라고.)


▲ 소모뚜는 누구

버마의 엘리트 학생… 다문화 인권 활동가로 변신


소모뚜는 버마 수도 양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영제지회사 공무원, 어머니는 학원의 교사였다.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소모뚜는 7세 때부터 해마다 3개월씩 일곱 차례나 삭발하고 출가했다. 그는 “출가해서 불교 경전 공부를 했는데, 인간답게 사는 길과 선행의 가르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며 “한국에 오지 않았으면 스님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8월8일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13세이던 그도 부모님을 따라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갔다.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선거를 치렀다.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겼지만 정권은 이양되지 않았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학생들은 검거되고 학살됐다. 그의 아버지는 해직됐고, 가족은 삼엄한 감시를 당했다.

그는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버마는 성적 순으로 의대, 공대생을 선발한다. 그는 “내가 그만큼 공부를 잘했다”며 웃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밥값도 못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과 두 여동생을 위해 이번 생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결심하고 학교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당시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스님이 있었다. 1995년 3월 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오게 된 스님을 따라왔다. 그도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버마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법체류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농성을 벌인 이후 ‘활동가’가 됐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인권 강사로 각종 집회, 행사의 강단에 서고 있다. 경인방송에서 매주 금요일 방송되는 <다문화 톡톡>을 진행한다. EBS 라디오에서는 버마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위클리수유너머에 칼럼 ‘밍글라바코리아’를 연재한다. 매주 월요일에는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이기도 하다.


<김석종 문화에디터 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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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4 13:08 2010/12/1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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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에서 4개월 동안 인권의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을 때 반갑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이주자의 이야기를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에 반갑지만 인권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한 학자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닌 나에게 인권이야기를 써달라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인간인 나의 이야기가 바로 인권이라고 여기고 편하게 쓰기로 결정했다. 다른 것이 차이뿐이라고 여기고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올해 초부터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어 내가 살아 온 경험을 통해 이주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는 한국에 15년 동안 이주민으로서 생활 해 왔다. 때문에 한국인들과 다른 인생의 경험을 갖고 있다. 이주민 120만 명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관심도 없고 모르면서도 이상한 소문을 내어 이주민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주자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말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주민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의 시각에서 쓴 글이 별로 없었다. 함께 살면서 서로 잘 모르면 다문화, 다인종 사회는 형식적인 다문화 축제일뿐, 한복을 입혀 김치 담는 이주민의 장면으로만 반복되는 사회가 될 갈 것 같다. 서로 제대로 알고 제대로 된 함께 사는 사회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진정성이 담긴 이주민의 실제 이야기와 생각을 전달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기록이 역사다. 유명한 한 버마역사학자가 자신이 늙은 나이까지 역사를 꾸준히 배워온 이유는 무식하기 싫어서라고 했다. 그렇다 역사를 모르면 무식하기 쉽다.
 

서로 다른 환경에 살다보면 서로 생각도 달라진다. 어떤 때는 서로 같은 환경에 살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눈에 보이는 것, 남이 하는 말에만 빠져 든다. 이주노동자 관련 큰 이슈는 불법체류자(*)다. 불법체류자라면 ‘범죄자, 위험한 존재, 성범죄자, 테라리스트’ 등 안 좋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불법체류가 뭔지 불법체류자의 삶이 뭔지를 불법체류자 였던 내가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내가 불법체류자가 되었던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에 대해 몇까지만 알고 있었다. 민주화 지도자 김대중 선생님, 전태일 열사의 위대한 헌신, 5.18민주항쟁 등에 대한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한국에 대한 존경스러운 마음과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나라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국은 민주화가 됐고, 한국에 가면 버마에서 배우지 못하는 인권에 대한 공부도 할 수 있으며,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당시 1990대 초중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으로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제도는 ‘산업연수생’ 이었다. 하지만 버마 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소문은 그 제도를 통해 일하러 들어온 사람들을 북한과 가까운 국경근처 도로 공사, 철도 공사장으로 보내서 일을 시킨다, 그곳이 전쟁 지역이라서 위험하다, 날씨도 너무 춥다는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나서 우리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소문 때문에 대부분이 산업연수생으로 가기 싫었고 관광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가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 때 당시에 많은 버마젊은이들이 관광비자로 해외에 나가 일했다. 대부분 관광 비자기간은 3개월이며, 기간이 완료되는데 계속 거주 하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 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 방법으로 해외 나가 일하고 가족의 생계를 해결 하고 있었다.

사진설명[그림] 윤필

해외 불법체류를 한 이주노동자가 보낸 돈으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이 먹고 살고 공부할 수 있다. 자신이 보낸 돈을 쓰며 잘 지내고 있다는 행복한 모습이 담긴 가족들의 사진을 보고 불법체류자로서 타국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고통을 견딘다. 가족들도 서로 못 보지만 가족을 위해서 고생하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에게 늘 감사하며 늘 건강하기를 매일 기도해주면서 산다. 서로를 위해 서로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다. 서로를 감사하며 서로를 더 그리워하며 서로를 더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해외 불법체류자는 가족의 삶을 책임지고 가족을 위해서 아름다운 고통을 후회 없이 받아서 사는 가족의 영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서 불법체류 하는 것이며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조건 참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본인의 불안전한 신분을 악용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당해도 참는다. 가족을 위해서 험한 길을 택했고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쳐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불법 체류자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하는 방법, 책임지는 의지를 배울 수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인간다운 사람의 향기도 느낄 수 있다.
 

 
* 불법체류 노동자: '미등록 이주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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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22:53 2010/12/0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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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와 우리단체가 인권위가 주최한 이주민 인권관련 순회 상담에 같이 결합해서 활동 한 것이 많았다.

여러 지역에 있는 이주노동자, 난민, 결혼이주여성 등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순화 상담을 해서 해결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자는 이유로 인권위에서 내 도움을 요청 했다.

 

그래서 나는 인권위와 함께 다양한 이주민들의 다양한 어려움들을 뉴스 취재도 하고 방송으로도 내보내고 다큐도 만들고 노래 공연까지 해줬다. 그 동안 인권위가 이주민 당사자와 함께 활동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한적 없는데 올해부터 인권위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활동하겠다는 것에 나는 아주 기뻤고 힘도 났다.

 

인권위에 있는 분들과 함께 활동을 하면서 함께 식사도 하면서 우리는 많이 친해졌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노동자, 난민 등 여러 이주민들의 다양한 어려움들을 얘기 해주며 인권위를 통해서 그 어려움들이 해결 되 나갈 것 같아는 믿음이 생겨 개인 적으로 굉장히 좋았던 활동 이였다.

 

인권위란 국민들이 자신들의 인권에 대해 호소와 보호를 인권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희망찬 기관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권위에 대한 평가도 높았고 기대도 컸다.

 

인권이라는 단어자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인권탄압국가 버마에서 온 나에게는 인권위가 존재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시청에 있는 인권위 건물 앞에서 지나갈 때마다 항상 여기 인권위가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부러워서 늘 바라보면서 지나갔다.

 

그래서 인권위직원들과 함께 활동들을 하게 되어 매우 기뻤고 여러 곳으로 인권 순회 상담을 함께 하면서 이주민들의 어려운 상황들을 얘기 해줄 때마다 관심 있게 들어줬던 인권위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힘도 나고 우리들의 인권개선에 대한 기대도 많이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인권위에서 주는 기금을 받고 올해 중순에 제5회 이주노동자영화제도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었고 출입국 단속반에 연행된 난민 신청자 버마행동회원의 석방을 위해도 인권위의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인권위에게 나는 깊은 감사의 마음과 애정도 갖고 있었다. 내가 믿을 수 있고 내가 기대할 수 있는 함께 할 동지가 생겼다고 느껴 참 좋았고 앞으로도 함께 할 활동들에 대해도 인권위 직원들과 열정적으로 논의 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주노동자영화제를 주최 중.

인권위가 우리에게 준 영화제 기금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높은 분들이 우리단체와 영화제 활동에 대한 설명 들으러 사무실로 방문 오셨다. 우리 방송이 이주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영상물을 보여주고 설명도 해주면서 영상에서 나온 미누형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게 됐다. 미누형이 이주자의 인권운동을 하면서 18년 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한국국민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진정한 친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미디어와 노래로 함께 참여 했던 것이 외국인이 한국에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땅에서 하루아침 만에 쫓겨났다고 얘기해줬다.

 

그런데 그분들이 나에게 굳은 표정을 하면서 말하는 것에 나는 엄청 실망했다.

이주자의 인권운동 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한국 내 문제들에 대한 끼어들어 오지마라는 것 이였다. 인권에 대한 학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나도 미누형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인권이란 국경이 없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북쪽에 있어도 남쪽에 있어도 다이아몬드”라는 말처럼 인권이라는 것도 한국인에게도 이주민에게도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인권을 지켜주고자 보호하고자 하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앞에서 힘들어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하고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모두 인간이 가져야 할 인식과 행동이고 그게 바로 인권에 대한 넓은 시각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인간다운 사람이며 사랑이기도 한다.

 

 

그분들이 사무실을 떠난 후 나는 한참 멍하고 있었다. 사실 내 성격상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인권, 정치 관련 생각을 얘기해서 한판 붙을 수 있었는데 우리의 영화제를 기부하는 것이 있어서 억지로 성질을 죽기고 참았던 것이 참 힘들었다. 이럴 때 나는 단체의 대표역할이 싫다. 정의를 외면하고 자본의 얼굴을 보고 인내심을 억지로 가지고 사는 것이 내게는 참 힘든 일인 것 같아.

 

올해 10월 쯤.

나와 몇 달 동안 함께 순회 상담 활동을 했던 인권위 직원분이 나에게 우리단체가 인권위 인권 상 추천서를 써서 신청하라고 요청을 해서 바쁜데도 인권위가 주는 인권 상을 받고 싶어서 추천서를 밤새 섰고 보냈다.

 

경인 방송 라디오 녹음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왔던 날.

우리단체가 인권 상을 받게 됐다는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내게 희망을 주는 인권위에서 우리를 인권 상을 준다는 것이 정말 두말 할 필 없이 좋았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으로 아는 분들에게 상 받았다는 소식을 알려드리면서 상을 받는 날을 기뻐하면서 기다려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인권 상을 받아서 아는 분들의 해주는 축하 말을 다 받지도 못 하는데 인권위원장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안 해서 많은 시민사회 단체들이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행동이 생겼다. 인권위 건물 안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매일 보내 준 인권위 상황에 대한 메일들을 읽어 보면서 나는 마음이 참 아팠다. 그분들이 보내 준 내용들 속에 인권위가 잘 됐음 하는 진정한 애정과 사랑이 들어 있는 것이 보여서 마음이 더 아팠다.

 

한국 사회에 좋은 활동들을 많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단체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인권위원장의 입장, 내가 존경하는 인권위 대표들의 사표, 심지어 나와 함께 순회 활동을 했었던 나의 아픔의 소리를 따뜻하게 들어 주셨던 인권위직원들의 사표 등이 내가 기대했던 나와 이주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인권위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 나는 인권위가 주는 내가 그토록 받고 싶었던 인권 상을 받을 때가 아님으로 상을 거부하기를 결정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인권위에 대해 많이 배우고 언젠가 민주화가 되는 버마로 들어갈 때 인권위 같은 기관부터 먼저 만들겠다는 나의 희망이 다시 살아 들어오는 그날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인권위가 주는 그 인권 상을 뿌듯한 마음으로 받고 싶다.

 

소모뚜-대표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아래는 우리단체가 인권위 인권상을 거부한 성명서다.]

 

 

- 성 명 서 -

 

MWTV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상 수여를 거부한다

 

MWTV (이주노동자의 방송)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11월 본 단체에 수여한 '인권상'을 반납하며, 수상 거부의 이유를 밝히고, 현재 인권위가 직면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확고한 입장을 밝힌다.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 (이하 인권위)는, 출범 후 근 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다소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명실상부한 독립 기관으로서 초기의 가치를 지켜내 왔다.

 

하지만 최근 현 인권위원장의 취임을 시작으로, 비민주적인 운영으로 말해지는 여러 행보로부터, 우리는 인권위가 본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 인권위는 위원장의 독단적인 조직운영으로, 독립성마저 지켜지지 못한 채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내부 인사들의 연이은 사퇴는 최근 인권위가 그 사명과 근거 의식을 뒤로 한 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의 방증이다.

 

가장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인권위가, 정부의 하위 기관으로 전락해,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것은 '국가인권기구'로서의 입지를 사실상 포기했음을 말한다.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를 어떻게 민주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인권에 반하도록 운영되는 기관이 어떻게 국가를 대표하는 인권 기구일 수 있는가.

 

본 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투명한 선출 과정을 거친 구성원들이 이끄는, 진정성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길 요구한다. 또한 그 운영에 있어 정부의 테두리를 벗어나 공정하고 평등한 공적 기관이 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와 연대 단체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한다.

 

본 단체의 수상 거부가, 현재의 인권위원회가 당면한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임과 동시에 불가침의 영역인 인권을 말하는 국가의 유일한 기구인 인권위에 보내는 애정 어린 권고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2010. 12. 07

 

MWTV 이주노동자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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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1:38 2010/12/08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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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삶이 나아지는만큼 한국인 삶도 나아질 거예요”
버마 출신 소모뚜 ‘인권홀씨상’
 
 
한겨레  김민경 기자기자블로그
 
 
 
» 소모뚜
 
 
 
1995년 스무살 때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여행비자로 버마(미얀마)에서 한국에 왔다. 하지만 ‘코리안드림’은 꿈일 뿐이었다. 눈앞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다치고, 하루 15시간 넘게 일해도 월급을 떼이기 일쑤였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맞서려면 ‘입’이 필요했다. 그래서 5개월 만에 한국어를 배워 친구들의 입이 됐다.

15년간 버마 민주화와 이주노동자 인권을 대변해온 소모뚜(35·사진)씨가 3일 한국인권재단이 주는 ‘2010 인권홀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그는 2003년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성공회대성당에서농성을 벌인 이후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그는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의 한국 총무,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탑크랙다운 보컬, 이주민 인권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1월3일에는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여전히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일하는데도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한다. “어느 정부도 자국민 우선이잖아요. 이주노동자의 삶이 나아지는 만큼 한국 사람들의 삶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우리 활동을 따뜻한 눈으로 봐줬으면 합니다.”

그는 늘 자신을 ‘버마 인권활동가’가 아닌 ‘인권활동가’라고 소개한다. “내 나라만 민주화되고 인권 신장되면 끝이 아니잖아요. 내가 살고 있는 이 한국도 똑같이 따뜻한 세상이 돼야죠.”

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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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3 22:20 2010/12/0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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